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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식의 날 — 못다 부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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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식의 날 — 못다 부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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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 ‘질식자의 편지’에서 〈영화를 보는 이유에 대하여〉, 〈리스트에 대하여〉 대목을 작성한 H이다. 편지에 대한 일부 호응은 감사했지만, 대체로 스스로를 시네필로 지칭하는 이들의 냉소 또는 우리를 ‘젖비린내 나는 젊은이 취급’을 하는 이들의 시네마스터 같은 태도는 당혹스러웠다. 우리는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시도하고자 했는데, 일부 시네필 커뮤니티나 영화산업 종사자들의 반응은 마치 어떤 경지에 이른 마스터가 쉰내 나는 멘트로 훈수를 두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부치지 못했던 편지의 일부를 다시 꺼내 보려고 한다.



– 독립/아트하우스/대안의 가치에 대하여
2020년은 한국의 영화제도가 마주한 특별한 해이다. 한국의 관객 문화는 1990년대에 ‘문화학교 서울’을 필두로 한 시네필리아 문화가 발아하고, 2000년대 부산국제영화제를 앞세워 영화제가 제도화되며 제 모습을 갖추었다. 이렇게 꾸준히 제도를 형성하고 동시대와 접촉하던 영화 제도가 한순간에 멈춰버렸다. 여러 영화 수입은 중단되고, 페스티벌 서킷에서만 제공되는 영화는 종적을 감췄다. 하지만 이 와중에 청년세대와 영화제도는 무기력하게 이 상황을 관조하거나, 지원과 후원 등 기생적 지원에만 기대고 있다.

여기에 대해 우리가 질문할 거리가 하나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가 속한 제도가 진정 상식적인 운영이 가능한 시스템인지 말이다. 영화제든 관련 기관이든, 시네마테크든 그것들의 가치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자의적이고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짧은 지면에서 말할 수 없다고 치고, 일단은 수치를 통해 평가해 보자.

한 예시를 들어보자. 지금 서울에서 독립/예술영화를 상영하고 있는 한 극장은 지난 8월 2일 하루 관객 수입으로 170만 원을 기록했다. 이는 주말 프라임 타임을 끼고 있는 수입이지만, 매우 보수적으로 계산하여 150만 원씩 영업일 25일을 계산하면 3,750만 원의 입장 수입이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실제 극장 수입은 이보다 훨씬 적다.) 이외에 여타 후원금 등을 계산해도 매월 4,500만 원 이상의 수입을 올린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기서 하나씩 계산을 해보자. 먼저 대부분의 영화단체는 5인 정도의 인건비가 발생하고 있으므로(프로그램/회계/홍보/매표/영사기사) 최저임금으로 계산해도 대략 1,000만 원이 넘는 인건비가 발생한다. 이는 매우 보수적인 계산으로 실제로 퇴직금을 비롯한 각종 사회보험료 등을 포함한다면 비용은 훨씬 늘어날 것이다. 각종 수당과 식비, 기타 관리비를 더하면 더 많은 지출이 발생한다. 그리고 극장 대관 사업은 매월 임대료가 2~3,000만 원이 발생하고, 각종 부가세 및 관리비를 포함하여 3,000만 원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기본적인 운영비만 매월 4,000만 원 이상이 든다는 계산이 나온다. (실제 대부분의 극장의 7일 대관료는 부가세 포함 2,000만 원이 넘는다.) 이렇게 매우 보수적으로 계산한 수치로도 수지상 적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로 프로그램 상영 비용 및 자막 비용이다. 기본적으로 아무리 적게 잡아도 독립/예술영화 극장에서 상영되는 외화는 편당 200~300만 원의 비용이 발생한다. 특별전이 20개의 영화로 구성된 경우 프로그램 및 번역 비용만 최소 4,000만 원가량 발생한다. 폐쇄적인 소비층을 지닌 지금의 매출 구조로는 인건비 쥐어짜기를 제외하면 사실상 매월 4,000~5,000만 원의 적자를 막아낼 수단은 오직 지원금뿐이다. 이는 국내 독립영화의 개봉으로 가면 더 비참한 상황이 된다. 그 경우 위에 언급한 상영료 수입을 최소 절반 가까이 지출해야 한다. 여기에 따른 부가적 세금 및 카드단말 수수료 등은 아직 계산조차 하지 않았다.

이는 그나마 사업자 신분으로 극장을 운영하고 있는 극장의 경우에나 해당하는 이야기고, 대부분의 영화제는 대형 영화제 3곳을 제외하고, 멀티플렉스의 후원이나 티켓 수익을 해당 극장에 제공하는 방식으로는 거의 자체 수익을 올리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굿즈 수익을 억대로 올리는 경우도 역시 없다. 내가 일했던 곳조차 한해 근 5년간 500만 원 이상 수익을 올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시네필리아/독립/대안 문화 등의 가치에 대해 묻고 싶다. 앞서 말했듯 이것은 정량 평가로 환원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이러한 수치들을 보고 있노라면, 예술/독립/대안/실험 등 다양한 상징자본으로 포장된 이 문화적 토대가 존재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이 상황에서 영화제 스태프 노조가 만들어지고, 영화 관련 집단에게 최저임금 또는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과연 현실적으로 효용이 있는 일인지에 대한 생각까지 든다.

또한 ‘폐쇄적인 인력 구조’가 문제라고 비판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매월 수천만 원의 적자가 발생하거나 한 행사로 얻는 수익이 적자 1억이 넘는 행사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존립해야 하는지 말이다. 그리고 과연 우리 모두가 자본이 요구하는 노동 생산성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는지 말이다. 사실 이런 구조로 그동안 끼리끼리 문화/동인 문화식의 폐쇄적 구조가 자행될 수밖에 없는 건 너무 자명한 사실이다.

상황이 이러니, 이 업계 종사자들은 “Save our cinema”를 외치며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통한 영화관 건립 또는 쿠폰이나 지원금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는 비참한 현실에 놓여 있다. 더 비참한 사실은 중국처럼 공산주의를 모태로 한 국가에서도 독립 예술은 기업 후원과 해당 가치를 대변하는 기업이 투자한다는 것이다. 상해의 ‘민생미술관’, 광저우의 ‘비타민 크리에이티브 스페이스’, 홍콩의 ‘홍콩아트센터’는 모두 민영 기업의 형태 또는 자생적인 회계 시스템을 갖추고 운영된다. 이런 토대 위에 일부 지원이 간헐적으로 존재한다. 사회주의 공산권 국가인 중국도 이러할진대, 자본주의의 한복판인 한국에서 대놓고 공공지원을 통한 영화관이나 문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산국가에서도 어불성설로 보일 수밖에 없는 논리라는 것이다.

이 상황에 젊은 영화계 종사자들이 분노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리고 상식적으로는 이 필드를 떠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다. 실망스러운 건 부도수표를 양산했으면서도 여전히 마치 어떤 상징자본이 있는 것처럼 고상한 척을 하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을 목도했다면, 상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다음 세대에게 미안함을 표하거나, 침묵하는 게 일반적이다. 성현 같은 말투로 지긋하게 후배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일부의 반응이나 공적으로 대응할 정도는 아니지만 한번 코멘트는 하겠다는 식의 시혜적 태도에 역겨움이 느껴졌다. 이렇게 질식한 이들의 편지에 대한 생산적인 반응을 쉽사리 찾기 어렵고, 되레 몰상식한 반응을 하는 이들이 공공연히 보이는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이 문화가 굳이 존립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이 상황에서 내가 의문을 제기했던 영화적 경전은 당연히 갱신될 수 없다. 새로운 프로그래밍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해외 여러 기관과 페스티벌을 참고하여 인프라 구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빔 벤더스의 영화가 아니라 울리히 쾰러나 에미 시겔의 작품이 보고 싶다면 그에 대한 투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펼쳐진 광경은 매월 적자 구조에 지원금을 걱정하며, 마치 죄지은 시민운동가처럼 자금 운용의 불법성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만 남아 있는 그런 모습이다.

이제 앞으로의 미래는 간단하다. 매월 최소 수천만 원의 적자를 메울 만큼 시네필리아 또는 독립영화/대안문화 등을 즐긴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구매력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여태까지 대체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두 번째는 국가 지원에 의존한 관변문화로 기생하며 점차 소멸되는 자장을 바라보는 것이다. 아마 많은 이들이 자신은 관변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세 번째는 지금처럼 자본주의적인 노동 주체로서 대우를 요구하는 이들과 폐쇄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이들의 노력-봉사가 합산되어 운영되는 아수라장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이미 노동법을 준수하지 않는다는 수많은 비난과 적자, 탈법적 지원금 운영의 경계에 있는 자괴감이 겹쳐져 이미 후자의 사람들은 대부분 이 필드를 벗어났다. 마지막으로 구매력도 없고, 인프라도 소멸되고, 국가의 지원도 점차 사라져간다면 흔쾌히 우리사회에서 시네필리아니 독립문화니 대안문화니 각종 이름의 활동이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소멸하는 길도 있다.

영화제도의 작동을 멈추는 예외상태는 어쩌면 코로나라는 거대한 질병 이전부터 이미 우리가 마주하고 있던 현실일 수도 있다. 되레 한국 영화가 제도화되고 산업화될수록 청년세대-독립영화라는 짝패는 작동하길 멈췄고, 독립이라는 말은 이제 상업적 진출을 하지 못한 이들에 대한 폄훼를 위한 단어, 혹은 제도적 지원을 위한 단어로 변모해갔다. 이런 상황을 외면해왔던 ‘카드깡’식의 땜질용 처방들이 이제야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폐허 속에서 자신이 시네필이나 독립/대안 문화에 대해 소속되어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 같은 부도수표를 물려준 스스로에 대해 부끄러워함이 옳다. 같은 리스트여도 추천의 이유가 다르다느니, 언제나 씬이 좋았던 적이 없다느니, 나는 이런 문제에 공감하지 않는다느니 하기 전에, 위의 상황에 대해 다른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런 부도수표를 문화랍시고 떠받들고 있는 자신의 위치와 궤적에 대해 되돌아보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