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개서한의 1번, 2번 질문을 작성한 gkd다. 내가 이번 글에서 다룰 내용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공개서한을 기획한 이유를 간략히 설명하고 싶다. 공개서한의 목적은 ‘비평적’으로 근사하거나 창조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것들 모두를 성취하면 행복하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애초에 영화를 둘러싼 공동체에 오래토록 남아있던 문제들을 수면 위로 올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을 뿐이다. 그 탓에 질문이 진부해 보인다면, 우리로썬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기상천외한 질문들을 세상에 던짐으로써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일은 공개서한에선 부차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공개서한은 영화와 관련되어 있는 공동체(시네필 커뮤니티, 영화기관, 지원금 제도, 대학교육, 관객문화, 취향)에 누차 제기되어 온 질문들을 엮고, 이를 공개적으로 쟁점화한 것이다. 이 서한은 영화 공동체 전반을 대상으로 하는만큼 광범위하고, 수신 범위가 넓은 만큼 대담한 꿈을 꾸고 있지만, 그 대담함을 견디기 위해서 소박한 스타일을 선택했다. 공개서한은 영화를 보는 관객이자 영화비평을 읽는 독자로서 이 문화 전반에 던지는 정직한 물음이다.
공개서한을 읽는 어떤 이는 이 서한에는 “왜 영화 이야기는 없죠?”라고 질문할 수 있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가 영화=영화라는 동어반복을 선택하는 대신에 영화를 작동시키는 제도적 실천을 겨냥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작동시키는 제도적 실천 가운데서 비평은 영화의 위기 혹은 제도의 위기에 대한 징후로서 끊임없이 불려나오는 손쉬운 샌드백이다. 비평을 향해 주먹 한 번 날리지 않는 이는 없을 텐데, 주먹질이 넘치고 넘친 나머지 어느 순간 이후부턴 비평의 위기에 관한 담론은 인플레이션에 이르렀다. 이 같은 상황을 주기적으로 목격했을 유운성 평론가는 비평의 위기에 대해 기각하며, “’평론가’가 흥한 적은 있지만 평론이 흥한 적은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나아가 비평이 위기라기보다 비평이 잘못한 게 없다고 본다.[1]”고 일갈한 바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물론 90년대를 소실점으로서 삼고 있는 영화평론가들이 전성기를 구사하던 시기의 구미의 시네필리아와 한국의 낙후된 상황을 비교하며 위기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을 일축하기 위해서 위기 자체가 부재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그 ‘위기’를 직접 경험하고 있는 당사자들에게는 음모론자들이 부풀린 위기 상황만큼이나 기이하게 느껴질 것이다. 가정해보자. 불황이 장기적으로 지속된다고 해서, 그같은 불황이 ‘경제위기’가 아니라고 말하는 경제학자 앞에서, 경제위기를 실감하고 있는 실업자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실존하는 위기를 겪는다. 우리가 겪는 위기는 차등적으로 발생한다고 말해야 옳다. 누군가 위기를 부정하는 사이, 다른 이들은 위기상황을 정면으로 맞닥트리기 때문이다.
상품으로서 비평? 비평의 ‘이동진화’!
나는 오큘로 1호부터 5호까지 기획과 편집에 참여했다. 2015년부터 기획에 참여했으니 근 2년간 잡지를 기획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잡지를 편집하며 느낀 점은 ‘(꽤나 많은) 시네필들은 거대한 권위가 소개하는 책과 영화가 아니면 도대체 흥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유운성이라는 독점적인 정보 제공자의 명성을 짊어지고 잡지를 기획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 대부분 전통적인 시네필과는 괴리가 있었다. 이런 간극은 나로 하여금 시네필이 과연 유의미한 소비자인지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었다. 아울러 비평이 제기한 토픽은 어디에서 어디로 확산되고 있을까? 지금 나는 독자를 찾지 못하고 길을 잃고 있는 비평에 대한 참회록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내가 이 자리에서 말하는 바는 비평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무엇이어야 했는지에 대한 냉혹한 자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내가 했던 고민은 실상 비평의 전환을 알아차리지 못한 데서 왔다. 비평의 전환? 수많은 목소리가 10년대 초반부터 네이버 별점과 네티즌 댓글로 인해 비평의 위상이 변했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J.호버만 같은 평론가가 빌리지 보이스에서 지면을 잃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영화저널리즘의 토양을 굳건하다고 여겨지던 영미권 역시 한국과 별반 다를 것없는 상황에 처해있다는 위기감이 만연해졌다. 그 탓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선 영화평론가를 모아 비평의 위기를 진단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도 했다. 당시나 현재나 비평의 위기를 진단함에 있어 꾸준히 소환되는 이름은 이동진이었다. 모두 비평의 위기에 대해 말하는 글에서 별점과 GV, 각종 주례사로 전환된 비평을 단골멘트처럼 언급하곤 했다. 그때 그런 말을 뱉은 이들이 (굳이 입 밖으로 ‘그의’ 이름을 꺼내지 않는다 해도) 은연중에 떠올리는 이름은 이동진임이 틀림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생각보다 이동진은 대단한 인물이다. 어쩌면 그를 00년대부터 10년대까지 비평이 작동하는 생태계를 건축한 설계자로 볼 수도 있을 터다. 회고해보면 이동진은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영화평론’의 형식을 새로이 주물했다. 이동진은 조선일보 기자로 90년대 고도성장과 맞물려 문화와 여행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자 이 둘을 엮어냈다. 포털사이트로 언론권력이 넘어가자 포털과 합작한 사이트를 냈으며, 감독의 제작후기를 듣는 용도에 그쳤던 GV를 아트토크로 상품으로 만들었다. 팟캐스트를 진행하며 자신의 취향을 세공해서 일종의 경험재로 만들었다. 즉 이동진은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부합하는 평론의 형식을 꾸준히 주물했다. 각 시기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변신은 영화 소비 문화의 변화를 이끌었다. 위에서 언급한 요소들이 대한민국의 영화 문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으니, 결국 이동진이 비평의 미래였던 셈이다. 동시에 이동진은 평론가의 생계 방식도 바꿨는데 평론가 중 강의나 아트토크가 아니라 저술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이동진은 상품으로서 비평이 유통되는 생태계를 바꿨고, 여타 평론가들은 이동진이 만든 게임 안에 있는 플레이어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상품으로서 비평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물음이 들리면, 답은 언제나 ‘이동진’이 제시했다.
시장을 자연화하기 : 두 가지 독점 모델
상황이 이럴진데, 대체로 평론가들은 이동진을 부인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부정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간다. 글과 말로 그를 부정해봤자, 다른 평론가 역시 이동진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동진이 주조한 비평-상품은 대중들 사이에서 흥미로운 정보나 중산층 라이프스타일을 위한 교양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럼에도 비평가나 시네필들은 이를 격렬히 거부하므로, 비평-상품의 내부엔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일어나고 만다. 찢어진 비평의 내부에선 두 가지 독점 모델이 발생한다. 하나는 이미 상품화된 비평이고, 또 하나는 이른바 거물 혹은 선생님이라 불리는 기성 평론가들이 지속하고 유지해온 비평이다. 기성 평론가들은 이동진 모델을 따르는 한편 영화비평이 갖고 있는 힘(주로 영화감독의 발전에 기여하는, 또 블라블라하는…)을 웅변하는 역설에 놓인다. 그들의 글에선 비평이 놓인 상황과 비평의 전환은 반영되지 못하고, 비평에 대한 메타비평을 수행할 때조차 제도와 비평은 따로 분리된다(이를테면 영화제를 분석하는 비평과 영화적 토픽에 대한 글은 분리된 장으로만 인식된다).
이중화된 모델에서 보통 선생님적 비평은 이동진적 비평으로 입문하기 위한 초입이 된다.
이 분열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타임라인
1) 거물의 어휘와 문체를 흉내낸 비평을 통해 등단하기
2) 등단 이후 이동진적 비평으로 생계 유지하기
제도공간
a) 대중의 선호를 받기 위한 상품으로서 비평
b) 시네필과 업계 내부자를 위한 상품으로서 비평
시네필이나 독자들 또한 이런 분열 속에서 두리번거린다. 이동진이 맞는걸까? 정성일이 맞는걸까? 아니면 짬짜처럼 둘다? 어떤 평론가라도 이동진이 만든 생태계 자체가 일종의 디폴트가 됐다는 점을 피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이동진이 생산한 모델을 존중하는 걸 넘어, 이를 자연화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새로운 시장에 대해 경멸하는 것을 넘어서, 시장을 분석해 그것과 개선하려면, 먼저 시장을 자연처럼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시장을 탈자연화하는 과정을 역전시켜서, 상품으로서 비평이 순환되고 유통되는 시장을 자연처럼 받아들여 보자. 시장이 자연화된 것을 인정한 후, 이를 요리조리 뜯어보며 다시 해체하거나 분석하자는 것이다. 시장 바깥에서 시장을 재귀적으로 분석하기란 어불성설이다(재귀나 성찰의 뜻을 생각해보자). 시장에 먼저 몸을 담궈야 한다. 여기서 비평은 출발한다.
상품으로서 비평 내부에 찢어진 분열을 봉합시킬 수 있는 건 네임밸류를 지닌 거물 평론가 그 자체의 존재일 뿐인데, 그 밖에 있는 이들은 기성 평론가들의 봉합을 옆에서, 또 아래에서 물심양면으로 돕는 비평적 하청업자로 전락하게 된다. 즉 여태껏 기성 평론가들이 수행한 기능, 그들이 보는 그들과 남들이 보는 그들 사이의 분열을 종식(혹은 가속)시켜야 한다. 선생님적 비평이라는 독점 모델을 분쇄하고, 시장을 재귀적으로 바라본다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와 전략, 문체가 필요한 건 이 때문이다.
0->1 혹은 성장의 문화
기성 평론가들이 독점하는 평론 시장은, 규모가 작다 하더라도 엄연히 하나의 시장이다.. 피터 틸의 <제로 투 원>은 현재 한국 영화 평론계를 독점하고 있는 언어에 대한 명확한 분석을 들려준다. 간단히 요약하면 스타트업이 성공하려면, 시장의 질서가 성립시킨 경쟁을 따르기보다는, 비교적 소규모 시장이라 할지라도 이를 독점하는 형태로 출발해야 한다. 틸은 선두주자를 모방하는 후속 기업들의 모방경쟁은 시장의 무덤으로 직행하는 지름길이라 말한다. 나는 지금 비평가의 생존 전략에 대해 말함과 동시에 비평가들이 놓인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영화평론을 지배하고 있는 이름들의 영향력은 시장에 독점 효과를 발휘한다. 그들이 특정한 기능으로서 여타 평론가 및 개념, 영화 목록, 문체에 강력한 영향을 준다. 거물 영화평론가가 손사래 치며 자신의 영향력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그 영향력은 분명 실재한다. 이건 내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씨네21의 영화평론 란을 훑어보거나 필로를 읽기만 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영향력으로 지탱하는 시장이 노후화됐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그들의 문화적 상품을 재검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왔다. 상품으로서 비평 내부에 균열이 일어나며, 시장은 이중화된다고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마치 한국 노동 시장의 이중구조처럼 한 번 이중화된 시장은 다시 거물 평론가들과 그들을 모방하는 후속 평론가들로 다시 이중화된다.
이같은 맥락에서 영화평론가를 한명의 문화 사업가로 바라볼 수 있다. 경제사가인 조엘 모키르의 <성장의 문화>는 계몽주의 시대의 사상가들의 문화적 아이디어가 산업혁명을 발생시킨 동력이라는 점을 밝히는데, 모키르는 사상가들을 일종의 문화사업가로 취급한다. 이 두꺼운 책에서 내가 흥미롭게 여긴 대목은 계몽주의자들이 이룬 편지공화국이 경쟁적 네트워크였다는 부분이다. 그들이 제안한 문화적 이념들이 네트워크 안에서 경쟁을 펼쳤다는 대목을 읽고는 지금 현재의 영화평론계를 떠올리게 됐다. 사상가들이 그 게임을 통해 얻으려고 하는 대가는 명예와 평판이었다. 그들은 그 자신의 탁월함을 인정하는 이들이 구성하는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확장시켰다. 영향을 둘러싼 경쟁관계, 탁월한 아이디어로 자신의 평판을 증진하는 것, 이 모든 요소들은 계몽주의 시대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오히려 지금의 영화 평론계는 아이디어가 회전하는 속도는 더할 나위 없이 느리다는 점과 소수에 의해 오랫동안 독점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계몽주의 시대의 편지공화국보다도 훨씬 더 퇴행적이며 노후화된 제도공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독점을 분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셔먼의 반독점법처럼 특정 인물과 그의 아이디어의 독점을 막는 자치적 법안을 제시해야할까?
내가 제안하는 대안은 아래와 같다.
독점을 분쇄할 수 있는 방법은 거물 평론가들의 분열을 파고드는 것이다. 상품으로서 비평을 디폴트로 놓고, 시장을 자연화해, 그들이 놓친 ‘대중’적이고 시장친화적인 비평의 문체를 개발할 필요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어떤 평론가는 비평이라면 비평적 ‘토픽’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토픽이 전파되는 범위와 속도는 영화평론이라는 장르의 특성 상, 한계에 마주친다. 이것이 기존의 비평보다 토픽을 더 빠르고 더 널리 확신시킬 수 있는 비평적 문체를 개발해야 하는 이유다. 내가 <마테리알> 3호에 기고한 “비천함, 나쁜 것, 실패에 관한 정직한 성찰”은 그 옛날의 문화비평이 누렸던 영광을 단순히 그리워하자는 경험해보지 않았던 과거에 대한 회고가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에 분과 사이를 물흐르듯 통과하는 비평적 형식을 발명하자는 제안이었다. 이는 유통과 집필 사이에서 커다란 분열을 겪고 있는 평론가들에게 분열을 견딜 수 있는 강건함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또 다른 대안은 지금의 시장 자체를 포기하고, 지금과 다른 시장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 안은 앞선 대안보다도 훨씬 이상적이고 까다롭다. 새로운 시장은 독자=필자, 사이에 존재하는 등호를 밀어붙여 평판이 한 곳으로 집중되지 않도록, 독점이 창출되는 즉시 경쟁이 일어나도록 부추긴다. 이를 위해선 기존의 영화평론이 작동하는 시스템보다도 더 큰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 이때 우리는 무교회주의와, 아마추어리즘의 자장 아래에 놓인다. 영화평론의 문체와 개념, 윗선의 모든 영향력을 쓰레기 하치장에 내던져야 한다면? 이 시도가 성공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대신에 이 대안은 모두가 쓰는 비평에 소실점으로, 새로운 제도를 상상하는 역량을 산출하는 데 연료처럼 활용되어야 한다.
내가 제안한 두 대안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건 문체다. 비평은 어떤 정보도 내포하지 않고, 작품을 미학적으로 분석해 ‘토픽’을 제안하는 장르다. 그러므로 이것이 상품이라면, 이것의 설계도는 문체에 있다. 문체는 토픽이 가닿아야 하는 범위, 시간, 전파되는 속도를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문체가 운반해야 하는 토픽에 비해 턱없이 연약하다면, 토픽은 산산조각나는 문체를 뒤로 하고, 2차선 도로 위에 나뒹굴고 말 것이다. 비평에서 문체는 아이디어를 전파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장에서 비평의 토픽이 전파되려면, 또 이것이 미래로 뻗어나가기 위해서, 비평은 문체를 탈것 삼아 위험과 장애물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에이드리언 마틴은 <영화의 미스테리들>이라는 저서에서 레이몽 벨루가 세르주 다네의 비평적 역량에 대해 논한 부분을 인용한다. 벨루는 다네가 라디오, 잡지, 행사 같은 각종 저널리즘적 상황에 마주쳐서도 자신의 비평적 토픽을 뚝심있게 밀어붙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벨루는 다네가 저널리즘적 상황이 초래하는 우연성을 망각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통해 자신의 토픽을 생성하고, 유통시킬 수 있었다고 덧붙인다. 어쩌면 그동안 우리는 토픽이 유통되는 시장, 우연, 상황을 의도적으로 망각하고 고귀한 토픽 자체에 대해서만 사유한 것일 수 있다. 문체는 시장에서 발생하는 변덕스러운 우연에 대응하는 수단이다. 문체는 비평이라는 상품이 유통되는 방향성을 결정하고, 토픽을 저 멀리까지 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평가들은 상품과 시장, 문체의 관계를 방기해선 안 된다.
모두가 말하듯 비평은 영화적 삶이 언어를 통해 매개되는 시퀀스다. 그러나 나는 비평을 상품이라 불렀다. 이 사이에 모종의 진실이 숨겨져 있다.
*PS
누구나 비평에 대해 말하는 시대라 한다. 누구나 비평에 대해 말하는 상황에 대해 누군가 “비평?”이라고 반문한다면, 우리는 정말 크게 웃을 수밖에 없다. 물론 웃지 못한 채 입을 씰룩거리는 당신도 나의 친구이긴 하다.
[1] [비평좌담] “냉소주의가 위험하다.”-이용철, 유운성, 김성욱 좌담, https://trafic.tistory.com/entry/비평좌담-냉소주의가-위험하다-장-뤽-고다르의-경멸이용철-유운성-김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