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비평이 서로 존중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던 시절이 있었다면 그건 영화의 역사 이래 찰나에 불과했다. 누벨바그의 비평가들이 아버지의 영화를 부정하며 직접 카메라를 들었던 시절 정도나 될까, 내가 알기로 비평은 언제나 힘이 없었다. 누가 비평 따위에 신경 쓴단 말인가?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러가기 전 포털 사이트에서 영화별점을 확인하거나 입소문에 귀 기울이고 비평을 알은 체 하는 자들의 과시적인 놀음 정도로 생각한다. 영화는 자동차, 집, 가구와 같이 구매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소비자가 심사숙고를 거치는 고관여상품이지만, 관객은 좀체 비평을 참고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에서 1990년대가 영화잡지들에게 있어 전성기였는데, 현재엔 다 사라지고 씨네21만이 살아남았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비평을 읽고 이해하려 했던 이례적인 시기였다는 점 또한 포함될 것이다. 영화가 산업을 기반으로 한 이상, 창작은 비평보다 대중을 더 의식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하는 편이 용이하다. 자본의 논리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영화들은 자신이 원하는 바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관객을 거절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흔히 그런 영화들을 예술영화라고 부르고 그걸 만든 사람들을 작가라고 한다. 영화관이 모두를 향해 열려있고 선택은 우리의 몫이듯이 어떤 영화 혹은 작가가 자기의 관객을 호명하는 것을 나는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소수의 축복받은) 감독, 배우, 장르 등등이 그들을 따르는 무리를 소환하는 것과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때 비평의 사명을 교화라고 말하는 덜 떨어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영화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 그것이 주는 감흥, 전망, 가치, 아름다움 같은 것들을 적확하게 풀어내는 데 (매우) 능숙한 것이 비평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의 섣부름을 감안하고 당신이 거친 표현을 용서한다면, 내 보기에 창작은 비평을 파리나 모기 정도로 성가시고 미미하게 신경 쓰이는 존재라고 여기는 것 같다. 찬사는 기쁘고 때로는 당연하며, 비판은 안 반갑다. 그들을 모욕할 작정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란 게 그런 것 같다. 또한 그들이 견지한 영화세계를 쉽게 바꾸는 것처럼 보인다면, 우리들 중 누군가는 오히려 실망할지도 모를 일이다. 비판의 정당성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몇 마디 비평이 그들의 영화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란 애초에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남의 말을 안 듣는 매력적인 고집쟁이들이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게 주된 이유는 아니다. 왜냐하면 결국 비평이라는 것은 영화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 역(逆)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떤 완전무결한 비평도 영화의 훌륭함을 넘어설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힘이 없을지라도 사랑을 하고, 그 형태는 아이스크림의 종류만큼 다양하다. 때로는 주례를 넘어 조공을 바치는 주책바가지 같을 수도 있고, 새로 배운 이론이 적용된다는 성취감, 과잉된 자의식의 발로, 서툰 표현으로 마구 써내려간, 혹은 정말로 고매해서 평범한 이들이 쉽게 파악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하게 복잡 난해한 사랑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방식에 대해 대부분 동의하지 않고 그로 인한 부작용마저 감싸고 싶지는 않다. 단지 그 마음들의 일부를 이해할 수는 있다는 말이 하고싶을 뿐이다. 오늘날 카메라를 든 비평가들이 생겨나고, 비디오 에세이니 오디오 비주얼 크리틱이니 새로운 형식들을 이용해 비평이 다양한 ‘읊조림’을 계속 시도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일 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비평은 끈질기게 어떻게든 길을 모색해보려 하는 것 같다. 그 여정 위에 당신들이 기대하는 자리가 있을지, 그것이 성립할는지는 계속 지켜볼 일이다. 그 순간을 함께 목격하기를 바란다.
마테리알에 우정과 연대의 마음을 보내며, 김지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