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식이라는 표현으로, 편지를 시작하는 건 다소 무례하게 보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표현을 꼭 고수하고 싶습니다. 그건 단지 기분 때문일까요? 현재 영화문화는 교수대에 목매달려 생명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영화문화 옆에서 우리는 목매달린 채로 버둥거리고 있습니다. 곧 숨이 끊어질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영화문화를 매달고 있는 교수대는 여러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죠. 사회에서 돌출되어, 윤리라는 이름으로 영화문화에 가닿고 있는 적대는 빠뜨릴 수 없습니다. 오직 정전에 의한, 정전을 위한, 정전을 고착시키는 영화비평에 대해 떠올려봅시다. 지원금 제도에 의존함으로써 점점 더 독립과는 멀어지는 독립영화는 또 어떨까요. 물론 이 제언을 읽고 있는 당신은 우리와 전혀 다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논쟁을 제안합니다. 비평 내에서 토픽으로써 적대를 사유할 수 있길 제언합니다. 그러나 단지 거물 영화평론가들에게만 아래의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영화문화는 위대한 이름으로 떠받들여지는 작가와 작가숭배자인 영화평론가들로 과대대표되어 있습니다. 관객, 시네필, 이 모든 공동체에 아래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만약 아래의 질문이 허수아비 치기 같다면, 혹은 그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우리가 제기한 질문을 전부 취소하고 본인만의 질문을 제기하고 답변해도 좋습니다.
결국 무엇보다도 대답을 원합니다. 논쟁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사회적 토픽을 사유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를 매개로 형성된 공동체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논쟁이 영화문화에 속한 수많은 이들이 읊어대던 그 말, 바로 영화에 대한 우정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씨네21의 폴란스키 논쟁은 사실 허무한 논쟁이었습니다. 핵심적인 논점을 전혀 건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근대사회는 사회에서 예술을 분리했습니다. 예술의 역사가 오롯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인과 작품은 공통된 장소에서 다른 위치로 분리되었습니다. 만약 작가의 도덕적 흠결이 작품을 좌지우지한다면, 우리는 비평의 토대와 조건 자체를 다르게 사유해야 할 겁니다. 좋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도덕적으로 끔찍한 작가가 만든 작품을 취소하고 삭제해도 무방합니다. 다만 우리는 아래의 질문에 답해야 할 겁니다.
첫째, 작품은 작가에게 종속되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전기 비평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까요? 우리는 비평의 전제조건 전체를 싹 뒤집어엎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작품과 작가를 분리하고, 작가를 일종의 구조체로 설정했던 분과로서의 영화사를 불태워도 좋습니다. 대안을 갖고 계십니까?
둘째, 혹시 작가를 지우고 비평을 쓸 순 없을까요? 만약 당신이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작가라는 개념을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여전히 작가라는 개념을 유지한다면, 작품이 작가의 의도와 생애에 전적으로 종속된 연구에 머물 겁니다. 여기에 대한 탈출구를 마련했습니까?
︎비평에 대하여
분명 비평은 모험이어야 합니다. 비평가는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충격을 설명할 새로운 언어를 발명해야 합니다. 이는 곧 새로운 관객을 발명하는 일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평은 글 밖에서 작품을 포획하고, 글 내부에선 언어 자체를 오염시켜야 합니다. 지금의 비평은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까? 정전 안에서 곰팡이처럼 썩어가고 있진 않습니까? 패턴화된 문체를 벗어나 새로운 비평의 모험을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일까요?
지금 당신은 영화라는 한계체험을 붙잡을 수 있는 재빠르고 신속한 문체를 떠올리고 있습니까? 혹은 당신은 영화를 사랑하고 해석하려는 열정을 가진 이로서 자신의 경험에 적합한 문체를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영화평론의 패턴화된 문체를 타파할 새로운 언어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비평권력에 대하여
시네필(cinephile)은 cinema(영화)와 phil(사랑하다)의 합성어입니다. 기리시 샴부가 지적했듯 이러한 정의는 실천이면서 동시에 이데올로기입니다. 커뮤니티로 옮겨간 시네필들, 코로나 시대에 산발적인 자리에서 영화가 범람하고 있는 때의 시네필(리아)은 무엇입니까? 폐쇄적이고 정전화된 시네필의 문화에서 phil(사랑하다)은 fils(아들)이 되어버린 건 아닌지요? 알렉시 드 토크빌은 『아메리카의 민주주의』에서 ‘상속법’이 “소수의 손에 재산과, 곧이어 권력을 모아”준다고 지적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재산과 권력을 분배하고 분산”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당대 비평권력의 상속은 거물(Big thing)의 권력을 그가 지정한 후속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상속법의 또다른 기능, 권력을 분배하는 기능은 시네필 문화에서 힘을 잃었습니다. 요컨대, 비평권력은 어디서 발생할까요? 상속법의 효력이 토지를 나눔으로써 발생하는 것처럼, 비평권력은 샤라웃(shout out)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요? 권력을 얻은 주제의식들, 예를 들어 해외 비평의 경로와 선생님 평론가들의 주제의식(우정, 폐허, 비장소)은 비판적으로 검토되어 사용되고 있습니까? 어련히 맞다고 그 언어들을 흡수하지는 않았나요? 시네필 문화의 비평권력 부여, 주제의식의 흡수는 분배와 분산의 기능을 잃어버린 물려주기 자체만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영화를 보는 이유에 대하여
언제부터였을까요, 영화를 보며 정치적 올바름과 윤리를 고민하던 것이. 70년대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국가 권력과 그에 부응하는 관변 지식계층은 마치 인민의 언어가 있는 것처럼 주장하며, 그 이외에는 모두 인민에게 해로운 것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문화적 파괴와 반달리즘이 그것을 뒤따랐습니다. 이러한 논리는 모종의 영화나 특정 감독들의 영화가 해롭다는 주장과 얼마나 차이를 가질 수 있을까요?
영화가 매혹적인 것은 근본적으로 영화 관람이 일종의 관음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아트하우스든 상업영화든 프로파간다 영화든 거기서 매혹을 느끼는 것은 누군가의 욕망과 행위를 다양한 의미로 안전한 은막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마 영화 내 누군가의 침실 이미지와 현실에서 허용되지 않는 폭력에 모두 눈을 가려야 할 겁니다. 이는 영화보기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되새기게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 영화를 보는건가요? 그리고 우리가 어두운 은막에서 볼 수 있다고 허용되는 이미지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요?
︎리스트에 대하여
우리는 90년대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아트하우스 영화 제도와 영화적 고전의 목록을 목도합니다. 에드워드 양이나 빔 벤더스, 로메르, 고다르는 죽어도 죽지 않는 강시처럼 2020년에도 꾸준히 소환됩니다. 2019년의 리스트 역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생충〉,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아이리시 맨〉, 〈결혼 이야기〉. 누가 뽑아도 크게 다르지 않은 이 리스트는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영화의 탄생 이후 어느 때보다 풍족한 데이터베이스와 제도적 장치를 가지고 있는 현대 영화의 자장에서 우리의 정전은 점점 퇴보하고 획일화됩니다. 동시대 영화 리스트도 정전 리스트도 누가 뽑아도 크게 다르지 않는 시대에 프로그래밍과 큐레이션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IMDB의 자동 추천과 비평가의 추천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고전을 갱신하지 못하고 동시대에 맞는 영화적 미덕을 찾지 못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지역 영화제에 대하여
영화제가 지역의 지원금과 정부 예산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혹은 영화제가 지역의 축제가 되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지역 영화제는 ‘지역’의 정체성을 가진 채 존속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때의 질문은 어떠한 제도적인 절차를 겨냥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 대중에게 선보여지지 못한 영화, 새로운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제가 지역이라는 국지적 틀에 맞추어 지역 영화인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는 것이 영화문화에 어떠한 이점을 가져다줍니까? 단순한 다양성, 혹은 영화의 존속이라는 명목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온라인으로 자리를 옮긴 영화제, 포스트 코로나의 시대에 지역 기반 영화제는 존속 가능합니까?
︎비평적 몸사림에 대하여
우리는 독립영화에 대해 충분할 만큼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독립영화의 ‘독립’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제작 여건과 투자 과정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양해하면서, 그것을 핑계로 영화 자체가 가진 형식적 의의나 문제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 “조심하는 것”은 독립영화를 상업영화와 같은 선상에 두고 논의함으로써 구성될 수 있는 생산적 담론의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유사한 맥락에서, 우리는 윤리적(이라고 여겨지는) 영화에 있어서는 그 만듦새나 형식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지나치게 조심하고 있습니다. 퀴어 의제나 페미니즘 의제, 정치적 탄압을 다루는 영화를 다른 영화와 동등한 조건에서 검토하지 않는 것이 과연 해당 이슈들에 대한 지지 및 연대와 진정으로 상통합니까? 오히려 이 영화들을 액티비즘의 일환으로만 해석하고 방관하면서 영화사의 맥락에 온전히 기입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대학 영화교육에 대하여
대학 영화교육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졸업작품들은 하나같이 매끈하거나, 매끈할 만큼만 거칩니다. 웰메이드 따위를 학생들에게 가르칩니까? 이력에 한 줄 추가할 수 있는 영화를 가르칩니까? 아니면 무엇을 가르칩니까? 영화연구는 어떻습니까? 이론과 영화의 관계를 생각합니까? 지금 ‘영화이론’이란 것이 존재합니까? 의미 없는 논문의 꾸준한 양산은 고등교육직에의 열망 이상의 것을 지향합니까?
문화의 시대로 불리던 90년대 이후 영화과는 우후죽순 양산됐습니다. 영화과가 양산되는 속도는 영화산업이 커지는 속도보다도 빨랐습니다. 155개 이상의 학제는 문화콘텐츠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대학이 신설되는 수만큼 영화과도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신설되는 영화과에서 쏟아져나온 학생들은 적당한 일자리를 얻지 못했습니다. CJ나 롯데를 제외한 기업들은 저임금의 일자리를, 영화제는 임시직만을 양산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물어봐야 합니다. 영화과를 유지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대학 통폐합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방어할 최소한의 변명이나마 마련할 수 있습니까? 무능과 무력의 영화교육을 언제까지 유지할 셈입니까?
︎창작과 비평의 관계에 대하여
당신의 영화와 비평은 어디로 송신되고 있습니까? 혹여 “타겟층”이나 “허구” 또는 “자기 자신”만을 향해있는 건 아닌지요? 수취인불명이 찍힌 반송우편처럼 말입니다. 창작과 비평은 오랜시간 서로의 존재론적 당위를 존중해왔고, 또 필요로 해왔습니다.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전혀 와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과하게 존중하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종국엔 서로가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 이른 듯합니다. 창작을 위한 창작, 비평을 위한 비평. 둘은 그저 인접해 있을 뿐 어떠한 화학작용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가령 주례를 넘어 심지어는 조공이 된 비평을 떠올려 봅니다. 또 한편엔 일부러 창작자를 따돌리려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만큼 복잡하고도 난해한 비평이 완강히 버티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대화하지 않는 창작과 비평은 쏟아지는 동영상 파일, 읊조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화하지 않은 채 어떻게 우정과 연대가 성립할 수 있겠습니까?
︎실천에 대하여
당신은 당신이 쓴 글과 만든 영화를 실천하며 살고 있습니까? 정녕 그것들이 담지한 바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윤리를 말하고, 정치를 논하며, 인류애와 정의를 외치던 그 마음을 아직도 고수하고 있습니까? 이건 생산물을 생산자에 귀속시키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바른 생활”과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 질문이 가닿아야 할 곳은 차라리 “염치”에 가깝습니다. 만약 우리의 생산물이 언제나 우리를 초과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의 글과 영화를 우리의 비루한 현재에 대한 “변명”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단히도 낯설게 혹은 낯뜨겁게 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존중해야 합니다. 최소한의 “염치”가 있다면, 그에 위배되는 선택은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에서 돌출한 윤리가 영화문화로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것에 반해 영화에서 돌출한 윤리는 그저 하룻밤 일깃감에 지나지 않아 보입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우리가 점점 더 비루해져가는 건 그때문이 아닐까요?
︎창(작)+(산)업에 대하여
오늘날의 창작은 과연 ‘창작’이라는 이름에 걸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창작자라는 명예는 결코 서비스나 단체 가입 시 딸려오는 사은품이 아닙니다. 질문을 살짝 바꿔보겠습니다. 당신은 창작자입니까, 가입자입니까? 혹은 그냥 ‘업자’는 아닌지요? 상업 진출의 등용문으로서 독립영화마저 ‘학생영화’로 전락해버린 작금에 창작과 산업이 별개라고 주장하는 건 퍽이나 우스운 일일 겁니다. 하지만 창작이 산업이 원했던 것 이상으로 과한 산업화를 이루고 있다면, 또 관성에 젖은 산업이 심지어 시장과 자본의 갱신 논리마저 거스른 채 이 사태를 묵인 혹은 종용한다면, 그리하여 창작이 대기업의 공채시험이나 대기업의 투자를 받은 벤처창업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면, 더 극단적으로 창작자가 대기업의 외주용역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정말로 웃음기를 거둘 때를 맞이한 걸지도 모릅니다. 작법을 준수하는 건, 진부함을 고수하는 것과 다릅니다. 시장 진출이 곧장 장사치로의 변모는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창작과 산업, 그리고 그 불균형한 공모에 대해 다시금 되물어야 합니다.
︎지원금과 다큐멘터리에 대하여
지난 10년은 다큐멘터리의 시대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온갖 지원금이 다큐멘터리로 향했습니다. DMZ, 인천다큐포트, EIDF 등. 지원금을 위한 다큐멘터리 피칭은 다큐멘터리스트들에게 영화를 만들 기회를 주었습니다. 국가 제도가 지원금과 영화제라는 제도적 수단으로 문을 열어주자, 다큐멘터리는 이 문으로부터 쏟아져 나왔습니다. 다큐멘터리는 모든 이를 대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모든 이들의 대리인을 자임했습니다. 소수자의 고통을 전달한다는 명목으로 ‘재현할 수 있는 권리’를 독점했습니다. 이렇게 제작된 다큐멘터리가 우리 시대에 도대체 무엇을 남겼습니까? 미적 성취? 사회적 정의의 실현? 오히려 소수자를 대변할 수 있다는 다큐멘터리는 대리인 문제를 다시금 제기합니다. 어떤 이들이 약자를 대변한다고 했을 때, 그 위계에서 발생하는 차익이 존재합니다. 2010년대의 다큐멘터리는 과연 이 차익거래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차익거래에서 국가 제도와 다큐멘터리스트들은 일종의 공모자들이 아니었을까요? 이 질문에 다큐멘터리스트들이 답변할 수 있길 바랍니다.
︎형제애 문화에 대하여
시네필 문화, 영화산업, 영화학 내부에서 형제애 문화는 특정한 서클을 형성하고, 그 밖에 있는 이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하지 않습니까? 이 문화의 형상은 마치 피라미드처럼 생겼습니다. 형제애 문화는 단지 여성을 배척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초적 표준에 해당하지 않는 남성들조차 배척합니다. 즉 선망받는 중년의 선생님 남성들은 프로그래머나 비평가의자리를 독점하고, 그 서클 밖에 있는 이들은 그들을 선망하도록 프로그래밍됩니다. 이러한 권력은 폭력의 형태로 발현되곤 합니다. 어떤 남성들이 권력을 가진 서로와 너나들이를 하는 동안, 서클 밖에 있는 이들은 체계적으로 착취당하고, 폭력에 의해 상처받고, 불쾌한 모욕감을 경험합니다.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이 문화의 중심부를 어떤 방식으로 분권화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평등한 동료가 될 수 있습니까?
2020년 8월
gkd. H. 김혜림. 다함께 박차차. 정경담. 함연선.
어떤 식의 답변이든 환영합니다. 보내주신 답변은 최소한의 검토를 거쳐 마테리알 온라인 홈페이지에 게재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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