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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연선

데굴데굴 패스연습 ᕕ( ᐛ )ᕗᕕ( ᐕ )ᕗ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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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굴데굴 패스연습 ᕕ( ᐛ )ᕗᕕ( ᐕ )ᕗ (12)

금정연이 자신의 작업일지데이비드 린치가 1시간 동안 빗소리를 듣고 담배 피우고 예술에 대해 성찰한다 – 클릭하면 링크로 이동에서 데굴데굴 패스연습 (이모티콘 생략)을 언급하며 ‘확장-일기’라는 단어를 썼고, 그게 굉장히 맘에 들었다. 시우 씨한테 『문학의 기쁨』을 빌린 지 보름은 지난 것 같은데 아직 한 장도 읽지를 못했다. 어차피 자기는 금정연의 책은 다 읽었으니 빌려준 책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물론 술자리에서, 그래서 편한 마음으로 작업실 책상 위에 계속 두고만 있다. 이번 여름에는 굵직한 일들이 여럿 생겼다. 아니면 한 가지 일이라고 해야할까? 결론적으로 나는 없었던 것을 얻게 되었다: 수전증.

8월의 마지막 수요일이었다. 『퀴어 시간성』을 사러 광화문으로 길을 나섰다. 광화문에는 교보문고가 있으니깐. 교보문고에서 한창 잡지들을 뒤적거리던 중에 갑자기 이태원에서 약속이 생겨버렸고, 두 세 시간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할 것 같아서 이왕 이렇게 된 거 프리즈 필름을 보러 마더 오프라인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프리즈 필름은 마더 오프라인 외에도 아마도예술공간, 보안여관, 인사미술공간에서도 진행되었고 지금은 끝났다.) 프리즈 필름에 대한 보그 코리아의 기사에서 마더 오프라인은 “현재 서브컬처의 중심에 있는 확장된 개념의 커뮤니티 독립 공간”으로 소개되었다.‘프리즈 서울’을 미리 즐기는 법, 프리즈 필름 – 클릭하면 링크로 이동

마더 오프라인에는 그 전에 딱 한 번 간 적이 있었다. 누군가의 영화를 상영하는 스크리닝 행사 때문이었다. 그때는 그를 잘 몰랐다. ‘마더 온라인도 있다는 것일까?’ 마더 오프라인에 들어서며 나는 그런 궁금증을 품었고 온라인 상으로만 알고 있던 감독의 얼굴을 마주하고 어색하고 정다운 마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공간이, 그리고 그 공간에 모인 사람들이 전부 너무 힙스터 같아서—나는 지금도 힙스터가 되고 싶음—처음 신생공간에 발을 내딛었을 때의 어려움과 곤란함을 느끼며 최대한 마음의 안정을 줄 것 같은 자리에 착석하여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영화를 보는 중간중간에 지각한 관객들의 발소리와 머리통의 방해를 받으며 아 여기는 스크리닝을 하기에는 조금 어수선한 곳이네, 라는 생각을 거두지 못했다. 그게 마더 오프라인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이번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건물 앞에 도착해서 담배를 한 대 태웠다. 비가 오는 날은 담배를 피우기가 무척 까다롭다. 왜냐면 한 손으론 우산을 들고 남은 한 손으로 담배도 꺼내고 불도 붙이고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재도 털어야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종종 입에 담배를 물고 잠깐 자유로워진 한 손으로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트위터와 인스타 앱을 켜서 빠르게 훑는 일을 하다보면 멀리 가지 못한 담배 연기를 들이켜서 기침을 하거나 매캐한 맛을 느끼게 되곤 한다. 우산 안으로 연기도 조금씩 고여서 담배를 피는 주제에 담배 냄새를 썩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신경 쓰이거나 번거로운 게 한 둘이 아니다. 그렇다고 담배를 끊을 수도 없고.

담배를 다 태우고 건물 한 층 정도 되는 계단을 걸어올라 전시 공간에 들어서니 영상 작업이 네 다섯 개 정도 보였다. 크레딧이 오르고 있는 작품을 먼저 보기로 했다. 크레딧 화면이 뜬다는 것은 이제 곧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뜻이므로. 그리고 나는 이왕 볼거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영화-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꼼꼼히 본 작업은 남화연의 ‹코레앙 109›(2014, 싱글 채널 비디오, 10분 15초)와 백현주의 ‹사건의 지평선›(2019, 4K 5채널 비디오, 4분 28초), ‹친절한 영자씨›(2013, 단채널 필름, 12분 45초)였다. 비가 와서 그랬는지 전시장에 머무르는 내내 나 혼자였다가 막판에 어떤 관객 한 명이 들어왔을 뿐이었다.

작업들을 본 직후에 근처 카페에서 끄적인 나의 메모.

1. 남화연, ‹코레앙 109›
영상 속에 쓰였던 푸티지들이 후반부에 빠른 속도로 편집되어 나타난다는 것에서 일종의 ‘픽션됨’을 감지. 처음에는 내레이션의 삽화 혹은 이미지적 설명으로 쓰였던 푸티지들이 다시 ‘재생’되면서 자신들만의 리듬을 만들고, 그 리듬이 픽션으로 느껴짐.

2. 백현주, ‹사건의 지평선›
각 채널 속 인물들이 연쇄적으로 액션을 취함으로써 채널들의 간의 연결을 먼저 제시하고, 그것을 토대로 다시 채널들 간의 어긋남도 제시함. 대사의 중첩. 처음엔 한 사람씩 연이어 대사를 읊는다. 비슷한 대사들의 변주가 지속된다. 그러다가 여러 채널에서 한 번에 대사들을 뱉어냄. 대사들은 다섯 번째 채널에서 오직 글자로서 적혀 오르고. 거의 마지막 쯤에 인물들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제자리로 돌린다. 짧고 재밌는 작업.

3. 백현주, ‹친절한 영자씨›
제일 재밌는 작업이었음. ‹친절한 금자씨›의 특정 장면 하나를 패러디 하는 것 같았는데,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번 같은 장면을 ‘반복’한다. 그러나 반복할 때마다 배우도, 의상이나 구체적인 행위와 주변환경도 조금씩 바뀌면서……. 제일 웃겼던 건 금자씨를 연기하는 영자씨 역의 배우가 ‘장금이’를 떠올리게 하는 의복을 입고 총구를 겨누며 골목을 걸어나갈 때. 더불어 ‘디제시스’영화에서, 스토리가 전개되는 영화 속 시공간 또는 가상의 인물들이 살고 있는 허구화된 세계를 이르는 말. 등장인물이 보거나 들을 수 없는, 자막이나 배경 음악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규범 표기는 미확정이다. (네이버 국어사전)를 둘러싼 외부환경, 활영현장을 일부러 과장하여 보여주고 있다. 여성 노인들과 여학생들이 무리지어 촬영현장을 둘러싸고 배우를 지나쳐가거나 배우에게 소금을 뿌리는 행위를 즐긴다. (소금을 뿌린다는 것은 디제시스 상의 세계에 눈이 내리게끔 하는 것이기도 하다.) 백현주 작가의 작업은 영화에 대한 것처럼 느껴져서 더 재밌음.

며칠 뒤에 K에게 백현주 작가의 작업을 너무 재밌게 봤다며 신나게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감자 반죽으로 만든 음식을 먹는 중이었다. 그의 반응은 내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근데 거기서 어떤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을까요?” 엄청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러니깐 그는 백현주의 영상 작업이 재밌는 이유가 픽션-영화를 해체한다는 제스처 혹은 더 진지하게는 그 방법론 때문이라면 그 이상으로 무엇을 얘기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나는 숟가락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곰곰히 생각해봤고, 백현주의 작업이 ‘재밌는 이유’가 기존의 영화를, 특히 극영화를 해체하거나 분석하려는 바로 그 시도 때문만은 아니란 결론을 빠르게 내렸다. 왜냐면 그보다 몇 주 전에 우리는 합정에서 비슷한 시도—전통적인 영화 문법의 해체와 그에 대한 탐구—를 하는 전시를 하나 봤었고, 둘 다 그 전시의 작업들에는 재미를 거의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려 우리는 근처 벤치에 잠깐 앉아 전시가 너무 세련되어서 아쉬웠다는 감상을 나누었다. 심지어 나는 세련된 미감에 대한 강한 적개심까지 내보였다. 8월 초였다. 한 달 후에 그는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분명 그 작업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를 보는 관습적 방식을 재조정하고 영화가 아닌 영화를 본다는 행위를 의문스럽게 응시하게 만들면서 능동적인 지각 경험을 가능케 하는 작업들이죠. 그런데 이 경험을 유의미하고 동시대적인 감각으로 소명할만한 비평적 언어와 담론이 부재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비평적 언어의 빈곤과 작품 자체가 가진 과도하거나 부족한 제스처의 문제를 혼동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날 제가 여기까지 생각의 흐름이 닿아서 잘 얘기했다면 좋았으련만, 저는 항상 늦는 사람이네요.” 나도 신중하게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할텐데.

감자 반죽 요리를 앞두고 나눈 대화의 말미에 나는 재밌는 것과 좋은 것은 연결된다고 말했다. 재미가 그 작업을 더 보게 하고 그 작업에 대해 더 생각하게 하고 결국엔 그 작업에 대해 쓰게 만들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작업에 대해선 좋다고 밖에 나는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때는 작업이 나를 선택한다는 생각마저 든다. 한편, 재미를 매력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미든, 매력이든 그것은 영화관 보다는 미술관에서 더 중요해진다. 영화관에서 우리는 영화를 외면할 수 없지만 (잔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 영화 앞에서, 그 영화의 품 속에서 자는 일이고 그건 생각보다 꽤 즐거운 경험이다) 미술관에서 우리는 언제든 작품을 내버려두고 떠날 수 있다. 어쩌면 세련됨도 매력을 취하기 위한 방편일지도. 하여튼 그날 나는 매력에 대해서도 재미에 대해서도 작업의 좋음에 대해서도 아무 설명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중에 K는 마더 오프라인에 갔고 거기서 ‹친절한 영자씨›를 재밌고 들뜨는 마음으로 봤다고 한다. 나는 그런 데에서 우정을 발견하고, 우리가 이야기를 더 나눌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기쁘고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