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디오 릴레이 탄산의 홈페이지 주소는 http://taansan.net 이고 현재는 연결이 되지 않는다. 페이스북 페이지도 이용이 불가하다고 나온다. 그러므로 비디오 릴레이 탄산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려면 운영자였던 강정석의 여러 인터뷰를 전전해야 한다. 비디오 릴레이 탄산은 몇 가지 신기한 형식을 가지고 있는 상영회인데, 직전 해에 참가했던 작가들의 추천과 소개를 받아 다음 해의 참여 작가를 정하고, 단순히 작가들의 작품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작가들 각각이 작업을 하면서 레퍼런스 삼거나 즐겨 본 영상들의 편집본도 함께 상영한다.
강정석은 어느 인터뷰에서 10년을 버텨보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허황된 목표지만. 비디오 릴레이 탄산은 5회차에서 마지막을 맞이했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내 친구 류한솔이 비디오 릴레이 탄산의 마지막회에 참여했다. 2016년 여름이었고, 나는 비디오 릴레이 탄산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때 우리는 친구도 아니었다. 아트바바에서 제5회 비디오 릴레이 탄산 게시물에 들어가보면 류한솔의 상영 리스트에 “주의: 다소 잔인한 장면 묘사. Warning: This video contain disturbing images”라는 문구가 덧붙여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류한솔의 작업은 다 봤었던터라 내가 이제 와서 궁금한 건 상영회에서 공유되었던 레퍼런스 영상이었다. 마침 류한솔에게서 본인이 5회 탄산 당시에 관객들에게 보여줬던 레퍼런스 영상을 구할 수 있었다.
주의: 다소 잔인한 장면 묘사.(총 길이 16:27)
비디오 릴레이 탄산의 5년은 어땠을지 궁금하다. 5회 째를 맞이하면서 그게 마지막인 줄 알고 있었을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5회를 맞이했을지, 5회를 맞이하고 6회로 가거나 가지 않는 도중에 그게 마지막이었구나, 생각하게 된 것이었을지? 강정석은 상영회를 릴레이 형식으로 하게 된 이유에 대해 한 번 만 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라고 대답했다. 한 번 하는 것만큼이나 계속하는 건 중요하다. 어쩌면 계속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강정석은 공식적으로 미술계에서 은퇴했고(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비디오 릴레이 탄산 사이트에는 접속할 수 없어졌지만 탄산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고 탄산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과 탄산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도 있다.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2.
최근에 ‘계속하는 것’에 대해서 자꾸만 생각해보게 된다. 서울 연희동의 스페이스애프터에서 진행되었던 ‘2023 ‹Critical Insight – 비평의 생성, 비평의 체현›’의 발표를 들으러 간 날 이후 더욱 그렇게 되었다. 참고로 이건 무빙이미지에 대한 얘기는 아니다. 나는 일정상 발표가 진행되었던 삼일 중 마지막 날 순서였던 문혜진의 「Postscript: 비평의 여전한 부재에 관한 소고」 만 들으러 갈 수 있었다.
문혜진은 미술비평을 시작하게 된 개인적인 계기들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면서 발표를 시작했다. 학부시절 동시대 미술과 현장에 대한 과목이 없었기에 대학원을 다니며 공부의 일환으로 전시를 보고 비평을 쓰는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미술사’가 멀리서 뼈를 추리는 것이라면 ‘비평’은 가까이서 살결을 느끼는 것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비평이 본인의 적성에도 맞았다고 덧붙였다. 멋진 표현이었다. 살결을 느끼는 것이라니… 그 표현을 듣고 메모하면서 어쩐지 내가 앞으로 비평에 더욱 애착을 갖게 될 것만 같았다.
2015년에 문혜진은 제1회 세마하나평론상 기념 집담회에서 동시대 한국미술에서 비평의 부재를 분석하는 발표를 했었다. 이번에 기회가 되어 그 당시 발표문을 다시 읽을 수 있었는데, 문혜진은 고료 지급(다시 한번, 고료의 ‘수준’이 아니라 고료 지급 자체)에 문제를 보이고 있는 미술잡지의 행태와 리뷰 선정이 광고주와 무관하지 않은 방식, 크게 이 두 가지가 동시대 한국미술에서 비평(가)의 부재를 초래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 그가 대안으로 꼽은 동시에 그 지속성에 대해 의심하기도 했던 대상은 웹진들이었다. 미팅룸, 크리틱-칼, 집단오찬, 두쪽 등. 그 당시의 웹진들은 지금 활동을 멈췄다. (비디오 릴레이 탄산처럼) 웹에서 흔적을 찾는 것조차 어려운 경우도 있다.
다시 2023년으로 돌아와서 8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물었을 때 문혜진은 고료 지급의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원고 청탁 방식에 있어서는 상황이 크게 변한 것이 없고 거의 모든 글의 보도자료화가 진행되었다고 진단했다. 웹진들도 여전히 있지만(YPC, 퐁, 마테리알을 언급했다) 구조적인 대안,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지는 의구심이 든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동시대 한국미술계에 비평이 여전히 부재한 이유에 대해 말했다. 그는 비평 부재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로 나누었다. (세부 항목들은 PPT의 내용 및 내가 발표를 들으며 받아적은 것들을 덧붙인 것이다.)
1. 담론권력의 이동
– 미술잡지에서 기관으로(주요 레지던시, 미술관 등)
– 관 주도형-성장형 정책의 강화
– 성과 중심주의
– 속도의 가속화와 창작 주체의 하청화
– 민간의 부재와 행정 중심주의
2. 소셜 미디어의 부상(악순환을 만드는 계기로서…)
0) 기점: 2014~2015년도
1) 성과 중심주의와 미술의 패션화(인플루언서, 이미지메이킹, 계의 속도의 가속화)
2) 작가 수의 증가(기금이 많아지면서 작가가 늘어남 → 전시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짐 → 소셜미디어에서의 홍보가 중요해짐)
3) 장을 움직이는 작인과 작동 방식의 변화
aura : scarcity = buzz : saturation (david joselit)
“가장 좋은 것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제일 많이 회자된 것이 제도의 선택을 받는 검색엔진의 논리”
(기존 미술계의 가치평가 기준은 질(quality)이었지만 이제는 양의 논리가 새로 도입됨. 양의 논리와 질의 논리가 대등해짐. 많은 사람이 보고 많이 회자되는 게 그만큼 중요해짐.)
4) 단순화, 획일화, 계량화
3. 글 분량의 축소
–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맞게 1-2장 분량의 표준화(리뷰, 서문, 작가론 다 다른 건데 분량이 짧아지면서 구분이 거의 없어짐)
– 모든 글의 보도자료화
– 작가론만이 유존
=› 젊은 필자들이 긴 글을 쓸 훈련을 못하는 상황
4. 담론 가치 및 글 이해도의 하락
0) 선도록
1) 비평 지원 사업의 축소
– 서울문화재단 예술전문서적 사업 → 없어짐
– 예술경영지원센터 시각예술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사업(2019-21) → 역시 없어짐
– 아르코 “작가조사-연구-비평”(2022~) → 작가 중심주의로 가게 된 이유는 실적 우선주의 때문
2) 이름 컬렉팅(글의 내용엔 관심이 없고 도록 등에 실릴 ‘이름들’만 중요하게 여겨짐)
3) 저작권 개념의 실종(글을 보도자료로 생각하고 마구 가져다 쓰고, 잘라서 쓰고…)
4) 텍스트 이해도의 부족
=› 이런 경향이 글 이해도와 담론가치를 하락시키며, 장기적으로는 비평가의 의욕을 꺾는다.
발표가 끝나고 쉬는 시간없이 토론이 이어졌다. 기억에 남는 것은 내 바로 앞에 앉아있던 안소연의 말이었다. “2023년에 비평가는 ‘유령’이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쓰는 것. [글을] 낳자마자 화석화 된다. 글의 독자는 쓰는 사람 혼자 뿐.” “가장 큰 문제는 기금이며 [그 속에서] 비평가는 최하-하청업자.” 왠지 무척 슬퍼보였고 나 또한 조금 서글퍼졌다. 레지던시의 비평가 매칭 프로그램에서 비평 글에 대한 고료는 정당히 책정되어 있기보다는 강연 자료 및 보고서에 해당하는 원고료로 지급되는 것이 관행이라는 사실은 내게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다른 명목으로 부족한 원고료를 메울 게 아니라, 적어도 공기관에서는 정당한 원고료 책정의 매뉴얼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의 요지였다. 웃겼던 순간 하나. 내가 질문을 하려고 입을 떼며 “바깥에서 봤을 때 미술계는 영화계보다 비평계의 상황이 훨씬 좋다고 생각했었는데…”라고 하니, 발표자가 수긍하며 “영화계보단 낫다. 문학 제외하고는 동시대 미술의 비평계 상황은 상징적 위상이나 실질적 역할의 측면에서 다른 장르들보다 비교적 나은 편이다”라고 말하던 순간. 내 입에선 역시 그렇죠, 라는 말이 나왔고. 하려던 질문은 이런 거였다. “비평가의 자기효능감은 열렬한 독자를 만날 때 발생하기도 하는데, 그런 독자들을 찾거나 개발할 수는 없을지?” 발표자는 플랫폼을 만드는 등 구조적이고 집단적으로 접근할 일이지 비평가 개인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구조적 개선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안소연은 비평가 뿐만 아니라 이 구조에 연루되어 있는 이들, 특히 작가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문제에 한해서는 더욱 그래야 될 것 같았다. 미술계에 0.3, 영화계에 0.7 정도 발을 걸치고 있는 나로서도 고민하게 되는 문제였기에 토론에 더 참여하여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3시에 시작한 발표가 5시 넘어서까지 이어졌고 5시 반에 충정로에서 약속이 있었기에 서둘러 택시를 타러 나올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요란하지 않게 몸짓을 줄여가며 조용히 발표장을 나오면서, ‘유령이 되는 방식’이 서로 조금 다를 뿐 각 예술 장르에서 비평 혹은 비평가가 유령이라는 사실 자체는 비슷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특히나 그 어떤 장르보다도 ‘더 나을 수 없는’ 상황의 영화 비평계에서는 더더욱… 최근에 큐레이터이자 미술비평가인 J씨로부터 영화계는 비평이 어떻게 작동하냐는 질문을 받았었는데 나는 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국의 씨네필이 비평을 읽나? 동료 비평가들이 비평을 읽나? 누가 읽는지는 알 수가 없고, 다만 마테리알 독자층의 큰 부분을 미술사람과 문학사람들이 차지하며 영화사람들은 세 번째라는 사실이 있다. 한편으론 비평을 누가 읽는지, 읽고 있기는 한지를 떠나서, 비평이 꼭 작동해야 하는지?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또한 J씨의 질문은 내게 굉장히 생경하게 다가왔는데 영화계에서 비평이 ‘작동’한다는 감각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작동’보다는 피드백과 화답과 반응들 정도가 있었던 것 같다. 활자중독자들, 블로거들, 동료들, 다른 장르의 비평가들, 누벨바그 갤러리의 유저들의……. 그리고 그 중에서도 마테리알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화이팅!’이다. 화이팅! 내가 가장 최근에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동료 의식과 ‘저 사람의 글을 읽고 싶다/읽어야겠다’는 욕망은 꽤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마테리알의 독자들도 마테리알에 동료 의식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닐지.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개선을 도모하기 위해 “개별적 존재자로서 비평가가 구조를 함께 만들어” 가는 데에 동료 의식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이때 동료 의식이란 읽는 사람들과 쓰는 사람들이 맺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