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연선
0.
권시우 씨와 나는 원래 연락을 하던 사이는 아니다. 일면식도 없었던 우리가 처음 만나서 통성명을 한 것은 작년 이맘 때였고, 그때 우리—권시우 씨와 나 그리고 당시 마테리알의 편집동인이었던 이하윤 씨—를 모이게 한 것은 ‘다이어튜브’라는 기획이었다. 왜 ‘다이어튜브’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 기획은 국내외 무빙이미지와 관련한 스크리닝 행사와 포럼을 포함하고 있었다. 권시우 씨는 ‘다이어튜브’를 마테리알과 공동으로 기획하고 진행해보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메일로 몇 차례의 의견을 주고받은 뒤 하윤 씨와 나는 마테리알의 대표로 시우 씨가 초대한 서울 성북구 소재의 한 공간에 모였다. 그날 우리는 얘기도 나누고 계획도 세웠지만 ‘다이어튜브’는 왠일인지 자연스럽고 조용하게 불발되었다. 그 누구도 더 묻지 않았고, 관련하여 더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그 해 겨울 성북구 소재의 WESS에서 진행되었던 “킬타임트래시” 오프닝 행사에서 시우 씨를 마주쳤지만 쭈뼜거리며 인사를 했을 뿐이었다.
2023년 상반기가 끝날 무렵 함께 하게 될 연재에 대해 자세히 의논하기 위해 시우 씨와 한성대입구역—역시나 성북구다—근처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건 우리가 두 번째로 얼굴을 마주하고 길게 얘기하게 된 자리였다. 연재는 시우 씨의 제안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갑작스레 보낸 메일에 대한 회신에서였다. 그 메일에서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을 하다가, 일단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동료들을 찾고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닿았습니다. 가장 먼저 그리고 거의 유일하 게 시우님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현재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실지 저로서는 알 수 없지만, 지난 해에 마테리알에게 해주셨던 제안으로 짐작컨대, 시우님도 저희에게 ‘다이어튜브’와 관련한 제안을 하실 때 지금의 저와 비슷한 마음이시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작년부터 나는 아주 동력을 상실한 상태가 되어버렸고, 어찌해야 할 지 갈피를 못 잡겠는 나날이 이어졌다. 외롭기도 하고 또 답답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다정한 걱정이 섞인 전화를 한 통 받고서는 동료를 찾아야겠다 마음을 먹게 되었다. 동료, 동료. 너무 어려운 이름이다. 예전에는 나와 함께 ‘고잉 메리 호’를 탈 사람을 동료로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쉬운 거라면… 더 많아야 하는데? 여튼, 우리는 둘 다 차가운 드립 커피를 시켰고, ‹바벨›에 대해서 잠깐 얘기를 했다. 왜냐면 메일에서 ‹바벨›에 대해, 아니 ‹바벨›을 경험한 각자의 사적인 순간들에 대해 언급했었기 때문이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났고 우리는 얘기도 나누고 계획도 세웠다. 무엇보다 반가웠던 건 우리가 섣부른 의욕과 조급함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권시우 씨는 만난지 이틀만에 연재 첫 글을 보내왔다.
1.
‹바벨›을 처음 보았던 날을 기억한다. 그때 나는 사회학과 편입을 준비하며 20대 중반에 들어서는 중이었고, 스멀 스멀 올라오는 이유 모를 불안을 못 본 채 하려 애쓰고 있었다. 무슨 바람에서였는지 같은 대학 친구였던 K와 역시 같은 대학 사람이면서 친구가 될 뻔했던 또다른 K와 함께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을 읽는 모임을 꾸렸는데, 그날 우리는 방학을 맞이해서 처음으로 학교 밖에서 모임을 가지기로 했고 광화문의 큰 빌딩들 중 하나에 있는 스터디룸을 빌렸다. 뭔소리인지도 모르고 읽고 듣고 뱉다가 모임이 끝났고, 두 K 중 한 사람이 근처의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는데 보러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 길로 나는 ‹바벨›을 보았다.
물론 거기에 ‹바벨›만 있지는 않았다. 김희천의 다른 작업도 있었고, 박민하와 강정석의 영상작업도 기억난다. 친구와 “여어~”하며 지하철 역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장면들과 총소리. 그리고 또 영상이 아닌 작업들도 있었다 분명히……. 하지만 나는 ‹바벨›에 사로잡혀서는, 그날 이후에도 두 번 더 그걸 보러 광화문에 갔다. 어두운 전시장에 놓여있는 계단 모양의 벤치에 앉아, 마치 동시상영관의 관객처럼 몇 번이나 영상이 끝나고 시작되는 걸 보았다. 스페인어로 끝없이 반복되는 나레이션, 근데 어쩌면 혼잣말일지도 모르는. 그 즈음이었나, 누군가 왜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외국말 음성과 한국어 자막으로 된 나레이션을 쓰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표한 걸 본 적이 있었는데, ‹바벨›의 나레이션이 한국말로 흘러나오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럼 나의 마음은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떠오르는 다른 생각. 너가 그래서 좋은 게 아니라 너가 너라서 좋다는 말. 작품에도 해당되는 말 아닐까? 저는 ‹바벨›이 ‹바벨›이어서 좋습니다. 물론 평론의 역할이 왜 좋은지 설명하는 데에서만 시작하거나 혹은 끝나는 건 아니겠지만… 그런데 이 글이 평론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권시우 씨에게 말려든 기분이다. 그의 첫 글을 읽고 나의 문체는 완전히 영향을 받아버림. 여튼 ‘좋다’는 건 내게 굉장히 중요한 감각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바벨› 이후로 영상작업 앞에서 그만큼 ‘좋다’는 느낌을 받았던 적은 아직까지 없다. 첫사랑 같은 거라고 생각해 본다. 아니 근데 다시 한 번. 정말로 ‘너가 그래서 좋은’ 게 아예 없다고 말할 수 있나? 우린 간혹 ‘세상사’의 기준을 사랑하는 이의 얼굴과 몸짓에서 발견하기도 하지 않나. 나는 너가 여자건 남자건 외계인이건 상관없이 너를 좋아한다. 동시에 나는 ‘너무나도 여자’인 너를 좋아한다…… 역시 나는 또 아무것도 확정짓지 못한 채 다음 작품을 보고 다음 글을 쓸 것이다.
2.
퀴어프렌들리한 술집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의 손님이 레즈비언인 어떤 바에서 함께 얘기를 나누었던 누군가가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바벨›을 보았던 순간이 내게 미친 영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바벨›이 왜 그렇게 좋아요?” 나는 지금처럼 말을 빙빙 돌리며 뭐가, 어떻게 좋은지에 대해서는 절대 얘기하지 못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일은 즐겁지만, 왜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항상 거짓말을 동반한다. ‹바벨›이 좋은 이유는 나레이션이 멋져서, 이미지가 멋져서, 여튼 간에 이상하고 새로운 감각과 함께 내가 멋진 것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그 당시의 내게 ‹바벨›은 심지어 아주 완전히 새로운 영화처럼 보였다. 게다가 멋지기까지 한.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영화가 이렇게나 멋질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때만해도 내게 영화는 고전적이건 독립적이건 상업적이건 간에 구구절절한 서사에 묶여있는 고리타분한 매체였고 어떤 측면에서도 멋있어 보이지 않았기에. 물론 그건 초심자의 무지에서 비롯된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 길이 나기 시작하면 길은 잘 없어지지 않는다.
‘데굴데굴’을 ‹바벨›로부터 시작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바벨›이 내게 미친 영향이 컸다고 권시우 씨에게 보내는 메일에 썼고, 권시우 씨가 그렇다면 우리 연재를 ‹바벨›로부터 시작해보자고 했기 때문이다. 본인에게도 ‹바벨›을 경험한 순간은 각별했다면서. (근데 이걸 누가 궁금해할까? 모른다. 그래도 쓴다. 쓴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나는 잘 모른다. 아주 옛날에는 시를 쓰고 싶었던 적도 있지만, 그런 시절은 그냥 훌쩍 지나가버렸다. 한때 일기를 열심히 썼었는데 그 때를 기억하며 이 글을 써본다. 한창 좋은 글을 쓰고 싶어서 아무 것도 쓰지 못했던 적이 있다. 작년이다. 바쁘기도 했고 다행히도 청탁이 들어오는 일도 거의 없었다. ‘마스터피스는 없다.’ 같이 작업실을 쓰는 동료가 본인 은사님의 말을 인용해 들려주었고 끄덕일 수밖에.) 그런데 누가 이걸 궁금해할까? 아니다, 그보다는 ‹바벨›을 기억하고 ‹바벨›을 본 사람은 몇 이나 될까? 혹은 ‹바벨›을 소문으로라도 듣고 기억하는 사람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는? ‹바벨› 정도라면 그래도 만 명은 되려나? 홍상수의 ‹물안에서›를 지금까지 3800명이 봤다. 권시우 씨의 첫 연재글은 이틀 동안 350회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마테리알은 새로운 호를 내면 ???부 팔린다. 더 많을 필요가 있다. 더 많을 필요가 있을까?
윤원화의 글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김희천의 작업을 영화로 만든 것은 관객이었다.” 잠깐 얘기하자면 이 구절이 실린 글은 『Rigging』에 있다. 내가 본 김희천에 관한 글 중 최고다. 주로 ‹멈블›을 다루지만, ‹멈블› 이전의 작업들도 언급하고 있다. 그 글을 다시 읽고, 내가 굳이 ‹바벨›에 대해서 더 써야할까, 라는 의문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쓴다. 쓰기로 했으니까.) 김희천의 작업을 영화로 만든 관객에 나도 포함되는 것 같다. 심지어 그의 작업을 계기로 나는 영화를 공부하게까지 되었다. 영화를 만드는 일 말고 영화를 보고 연구하고 그것에 관해 글을 쓰는 것에 대해 배웠다. 김희천 비슷한 것은 4년 내내 하나도 못배우고. 그건 나의 잘못이다. ‘무빙이미지’가 ‘영상’이니까 ‘영상이론과’에 가면 무빙이미지에 대한 것을 배울 줄 알았던 것이다. 무빙이미지는 아무 말도 아니다. 나는 영화에서도 미술에서도 아주 좁은 영역만을 탐한다. 그 사실을 굉장히 최근에서야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