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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연선, 권시우

데굴데굴 패스연습 ᕕ( ᐛ )ᕗᕕ( ᐕ )ᕗ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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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연선, 권시우

데굴데굴 패스연습 ᕕ( ᐛ )ᕗᕕ( ᐕ )ᕗ (2)

함연선



0.

권시우 씨와 나는 원래 연락을 하던 사이는 아니다. 일면식도 없었던 우리가 처음 만나서 통성명을 한 것은 작년 이맘 때였고, 그때 우리—권시우 씨와 나 그리고 당시 마테리알의 편집동인이었던 이하윤 씨—를 모이게 한 것은 ‘다이어튜브’라는 기획이었다. 왜 ‘다이어튜브’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 기획은 국내외 무빙이미지와 관련한 스크리닝 행사와 포럼을 포함하고 있었다. 권시우 씨는 ‘다이어튜브’를 마테리알과 공동으로 기획하고 진행해보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메일로 몇 차례의 의견을 주고받은 뒤 하윤 씨와 나는 마테리알의 대표로 시우 씨가 초대한 서울 성북구 소재의 한 공간에 모였다. 그날 우리는 얘기도 나누고 계획도 세웠지만 ‘다이어튜브’는 왠일인지 자연스럽고 조용하게 불발되었다. 그 누구도 더 묻지 않았고, 관련하여 더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그 해 겨울 성북구 소재의 WESS에서 진행되었던 “킬타임트래시” 오프닝 행사에서 시우 씨를 마주쳤지만 쭈뼜거리며 인사를 했을 뿐이었다.

2023년 상반기가 끝날 무렵 함께 하게 될 연재에 대해 자세히 의논하기 위해 시우 씨와 한성대입구역—역시나 성북구다—근처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건 우리가 두 번째로 얼굴을 마주하고 길게 얘기하게 된 자리였다. 연재는 시우 씨의 제안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갑작스레 보낸 메일에 대한 회신에서였다. 그 메일에서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을 하다가, 일단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동료들을 찾고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닿았습니다. 가장 먼저 그리고 거의 유일하 게 시우님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현재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실지 저로서는 알 수 없지만, 지난 해에 마테리알에게 해주셨던 제안으로 짐작컨대, 시우님도 저희에게 ‘다이어튜브’와 관련한 제안을 하실 때 지금의 저와 비슷한 마음이시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작년부터 나는 아주 동력을 상실한 상태가 되어버렸고, 어찌해야 할 지 갈피를 못 잡겠는 나날이 이어졌다. 외롭기도 하고 또 답답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다정한 걱정이 섞인 전화를 한 통 받고서는 동료를 찾아야겠다 마음을 먹게 되었다. 동료, 동료. 너무 어려운 이름이다. 예전에는 나와 함께 ‘고잉 메리 호’를 탈 사람을 동료로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쉬운 거라면… 더 많아야 하는데? 여튼, 우리는 둘 다 차가운 드립 커피를 시켰고, ‹바벨›에 대해서 잠깐 얘기를 했다. 왜냐면 메일에서 ‹바벨›에 대해, 아니 ‹바벨›을 경험한 각자의 사적인 순간들에 대해 언급했었기 때문이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났고 우리는 얘기도 나누고 계획도 세웠다. 무엇보다 반가웠던 건 우리가 섣부른 의욕과 조급함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권시우 씨는 만난지 이틀만에 연재 첫 글을 보내왔다.



1.

‹바벨›을 처음 보았던 날을 기억한다. 그때 나는 사회학과 편입을 준비하며 20대 중반에 들어서는 중이었고, 스멀 스멀 올라오는 이유 모를 불안을 못 본 채 하려 애쓰고 있었다. 무슨 바람에서였는지 같은 대학 친구였던 K와 역시 같은 대학 사람이면서 친구가 될 뻔했던 또다른 K와 함께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을 읽는 모임을 꾸렸는데, 그날 우리는 방학을 맞이해서 처음으로 학교 밖에서 모임을 가지기로 했고 광화문의 큰 빌딩들 중 하나에 있는 스터디룸을 빌렸다. 뭔소리인지도 모르고 읽고 듣고 뱉다가 모임이 끝났고, 두 K 중 한 사람이 근처의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는데 보러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 길로 나는 ‹바벨›을 보았다.

물론 거기에 ‹바벨›만 있지는 않았다. 김희천의 다른 작업도 있었고, 박민하와 강정석의 영상작업도 기억난다. 친구와 “여어~”하며 지하철 역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장면들과 총소리. 그리고 또 영상이 아닌 작업들도 있었다 분명히……. 하지만 나는 ‹바벨›에 사로잡혀서는, 그날 이후에도 두 번 더 그걸 보러 광화문에 갔다. 어두운 전시장에 놓여있는 계단 모양의 벤치에 앉아, 마치 동시상영관의 관객처럼 몇 번이나 영상이 끝나고 시작되는 걸 보았다. 스페인어로 끝없이 반복되는 나레이션, 근데 어쩌면 혼잣말일지도 모르는. 그 즈음이었나, 누군가 왜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외국말 음성과 한국어 자막으로 된 나레이션을 쓰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표한 걸 본 적이 있었는데, ‹바벨›의 나레이션이 한국말로 흘러나오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럼 나의 마음은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떠오르는 다른 생각. 너가 그래서 좋은 게 아니라 너가 너라서 좋다는 말. 작품에도 해당되는 말 아닐까? 저는 ‹바벨›이 ‹바벨›이어서 좋습니다. 물론 평론의 역할이 왜 좋은지 설명하는 데에서만 시작하거나 혹은 끝나는 건 아니겠지만… 그런데 이 글이 평론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권시우 씨에게 말려든 기분이다. 그의 첫 글을 읽고 나의 문체는 완전히 영향을 받아버림. 여튼 ‘좋다’는 건 내게 굉장히 중요한 감각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바벨› 이후로 영상작업 앞에서 그만큼 ‘좋다’는 느낌을 받았던 적은 아직까지 없다. 첫사랑 같은 거라고 생각해 본다. 아니 근데 다시 한 번. 정말로 ‘너가 그래서 좋은’ 게 아예 없다고 말할 수 있나? 우린 간혹 ‘세상사’의 기준을 사랑하는 이의 얼굴과 몸짓에서 발견하기도 하지 않나. 나는 너가 여자건 남자건 외계인이건 상관없이 너를 좋아한다. 동시에 나는 ‘너무나도 여자’인 너를 좋아한다…… 역시 나는 또 아무것도 확정짓지 못한 채 다음 작품을 보고 다음 글을 쓸 것이다.



2.

퀴어프렌들리한 술집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의 손님이 레즈비언인 어떤 바에서 함께 얘기를 나누었던 누군가가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바벨›을 보았던 순간이 내게 미친 영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바벨›이 왜 그렇게 좋아요?” 나는 지금처럼 말을 빙빙 돌리며 뭐가, 어떻게 좋은지에 대해서는 절대 얘기하지 못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일은 즐겁지만, 왜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항상 거짓말을 동반한다. ‹바벨›이 좋은 이유는 나레이션이 멋져서, 이미지가 멋져서, 여튼 간에 이상하고 새로운 감각과 함께 내가 멋진 것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그 당시의 내게 ‹바벨›은 심지어 아주 완전히 새로운 영화처럼 보였다. 게다가 멋지기까지 한.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영화가 이렇게나 멋질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때만해도 내게 영화는 고전적이건 독립적이건 상업적이건 간에 구구절절한 서사에 묶여있는 고리타분한 매체였고 어떤 측면에서도 멋있어 보이지 않았기에. 물론 그건 초심자의 무지에서 비롯된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 길이 나기 시작하면 길은 잘 없어지지 않는다.

‘데굴데굴’을 ‹바벨›로부터 시작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바벨›이 내게 미친 영향이 컸다고 권시우 씨에게 보내는 메일에 썼고, 권시우 씨가 그렇다면 우리 연재를 ‹바벨›로부터 시작해보자고 했기 때문이다. 본인에게도 ‹바벨›을 경험한 순간은 각별했다면서. (근데 이걸 누가 궁금해할까? 모른다. 그래도 쓴다. 쓴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나는 잘 모른다. 아주 옛날에는 시를 쓰고 싶었던 적도 있지만, 그런 시절은 그냥 훌쩍 지나가버렸다. 한때 일기를 열심히 썼었는데 그 때를 기억하며 이 글을 써본다. 한창 좋은 글을 쓰고 싶어서 아무 것도 쓰지 못했던 적이 있다. 작년이다. 바쁘기도 했고 다행히도 청탁이 들어오는 일도 거의 없었다. ‘마스터피스는 없다.’ 같이 작업실을 쓰는 동료가 본인 은사님의 말을 인용해 들려주었고 끄덕일 수밖에.) 그런데 누가 이걸 궁금해할까? 아니다, 그보다는 ‹바벨›을 기억하고 ‹바벨›을 본 사람은 몇 이나 될까? 혹은 ‹바벨›을 소문으로라도 듣고 기억하는 사람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는? ‹바벨› 정도라면 그래도 만 명은 되려나? 홍상수의 ‹물안에서›를 지금까지 3800명이 봤다. 권시우 씨의 첫 연재글은 이틀 동안 350회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마테리알은 새로운 호를 내면 ???부 팔린다. 더 많을 필요가 있다. 더 많을 필요가 있을까?

윤원화의 글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김희천의 작업을 영화로 만든 것은 관객이었다.” 잠깐 얘기하자면 이 구절이 실린 글은 『Rigging』에 있다. 내가 본 김희천에 관한 글 중 최고다. 주로 ‹멈블›을 다루지만, ‹멈블› 이전의 작업들도 언급하고 있다. 그 글을 다시 읽고, 내가 굳이 ‹바벨›에 대해서 더 써야할까, 라는 의문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쓴다. 쓰기로 했으니까.) 김희천의 작업을 영화로 만든 관객에 나도 포함되는 것 같다. 심지어 그의 작업을 계기로 나는 영화를 공부하게까지 되었다. 영화를 만드는 일 말고 영화를 보고 연구하고 그것에 관해 글을 쓰는 것에 대해 배웠다. 김희천 비슷한 것은 4년 내내 하나도 못배우고. 그건 나의 잘못이다. ‘무빙이미지’가 ‘영상’이니까 ‘영상이론과’에 가면 무빙이미지에 대한 것을 배울 줄 알았던 것이다. 무빙이미지는 아무 말도 아니다. 나는 영화에서도 미술에서도 아주 좁은 영역만을 탐한다. 그 사실을 굉장히 최근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권시우



누군가에게 말했듯 나는 원심 분리기가 된 심정으로 글을 쓰고 있다. 혹은 원심 분리기에 나의 심정을 처넣고 회전시키면… 원심 분리기는 이미 원심 분리기가 아니다. 구글 검색 결과 실제 원심 분리기가 회전하는 이유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준수한 채 질량에 포함된 레이어들을 세분화하기 위해서라고. 레이어라는 단어로부터 연상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object이 포토샵인 나로서는 원심 분리기가 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 그 대상조차 나에게 유효하지 않다. 내가 포토샵을 다뤘던 경험은 학부 때 교양으로 들었던 디자인 수업으로 수렴되는데 정말 말 그대로 수렴되면서 결국 영점에 도달한다. 그러니까 포토샵 사용할 줄 모름. 여차저차 원심 분리기는 내가 아님. 모든 비유는 수포로 돌아간다. 왜 그렇게 멋 부리면서 대답했을까? 실존적 위기에 빠짐.

지금 이 지경에 다다른 이유는 방금 전에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를 읽다 말았기 때문이다. 최소한 내가 읽은 대목까지 롤랑 바르트는 하이쿠에 거의 도취돼 있다. 모든 (서구적) 비유는 수포로 돌아간다. 하이쿠를 제외하고. 사전에 비유를 취소해라. 너는 원심 분리기일 수 없다.

원심 분리기
돌아가고 나의 심정
개박살나네
(권시우)


하이쿠적으로 말도 안 되는 작법이다.

다만 지금 시점에서 무빙 이미지의 원심을 유지하고 있는 대상은 명백하다. 그것은 바로 시네마다. 시네마는 ‘진짜 영화’를 위한 절대적인 수사다.

2023년 6월 23일 권희수의 라이브 퍼포먼스 보러 닻올림에 갔다. 작업 관련해서 메모한 내용 일부를 인용하자면 “라이브 퍼포먼스는 좋았다. 그런데 그걸 라이브 퍼포먼스라고 불러야 될지, 구조주의 영화의 리믹스 버전이라고 불러야 될지, 언제나 언어는 곤궁하다.” 이제와서 깨달은 사실이지만 구조주의 영화는 드라마의 차원에서 관객 심리를 교란하는 영화적 작법에 가깝고 그러므로 당시의 내가 상기했던 것은 확장 영화Expanded Cinema로 추정된다. 익스펜디드 시네마. 그렇다면 권희수의 라이브 퍼포먼스는 익스펜디드 시네마 remix ver.인가? 익스펜디드 시네마는 이미 라이브 퍼포먼스 형식의 영상을 포괄하는 개념이므로 만약 권희수가 제165회 닻올림 연주회에서 익스펜디드 시네마를 리믹스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자신의 작업마저 리믹스해야되는 무아지경 상태에 이르렀을 텐데 정작 내가 경험한 것은 어두운 밀실에서 가속하는 “빛의 박동”이었다.

빛의 박동이라니. 언어는 왜 언제나 이토록 곤궁하기 짝이 없을까?

그보다 시간을 거슬러 월간미술 461호에 수록된 무빙 이미지 특집을 읽으면서 다소 의문스러웠다. 필자 불문 대다수가 현재의 무빙 이미지를 진단하기 위한 자리에서 시네마를 회고하거나 그런 회고를 경유해 시네마 너머를 상상하고 있었다. 유운성이 쓴 글의 도입부. “2010년 말 아니면 2011년 초의 어느 겨울날이었다.” 병렬 구조로 삽입된 이한범 글의 마지막 문장. “글쎄… 하지만 바로 이러한 경험들 덕분에, 나 또한 여전히 말하기 곤란하고 막막한 회색 영역을 배회하는 것일 테다.” 물론 둘은 상이한 시네마 경험의 사례를 든다. 이를테면 전자는 당시 리움에서 상영됐던 크리스찬 마클레이의 ‹시계›(2010)를 후자는 류한길 개인전 «③»(2021)을 발단 삼아 회고로 다이빙… 물론 회고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대상object이 시네마인지 그래야만 하는지.

물론 나는 두 사례를 실제로 경험한 적이 없지만 (그 사실이 가장 결정적일 수도) 하여튼 시네마의 관점에서 양자는 익스펜디드 시네마에 속하거나 최소한 그것의 하위 호환일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익스펜디드 시네마를 원심 분리기에 넣고 돌리고 싶은 심정이다.



2023년 6월 30일

어느새 또 다른 오늘이다. 유튜브 떠돌다 “빛의 박동”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것은 권희수의 작업에 절대적으로 관여하지 않지만 혹은 그래야만 한다는 전제 하에 남발된 또 다른 수사에 불과하다. 물론 실제로 공연장은 (공황 장애의 여파로) 나에게 밀실처럼 조여왔고 그 와중에 스크린의 빛은 갈수록 밀실 자체와 조응하듯 스크린 너머로 두근거렸다… 라고 쓰면 나는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을 이율 배반하게 된다. 많은 각색을 보태자면 롤랑 바르트는 하이쿠나 하이쿠에 근접하기 위한 시적 언어가 수사적으로 매개될 필요 없는 순간을 재연한다고 말했다. 재현이 아니라 재연. 즉 하이쿠의 주체는 시적 언어 속에서 이미 과거로 스친 순간을 회고하는 동시에 바로 그 회고적 모먼트를 현전하게 만든다. 현전의 감각은 장황하지 않다. 그러나 “빛의 박동”은 장황하게 나의 의표를 찔렀다. 나에게 아직 의표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동하며 아이폰으로 메모했다.

나의 메모는 “중립적”이지 않다. 그래서 하이쿠로선 부적격이다.

익스펜디드 시네마는 어떤가? 더 이상 말 장난하고 싶지 않다. 문제는 익스펜디드 시네마라고 발설할 수록 익스펜디드 시네마가 말 장난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내가 익스펜디드 시네마를 이론적인 차원에서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 절망할 필요는 없다. 숙지할 의도가 있다면 디비피아에서 익스펜디드 시네마 대신 확장 영화라고 검색한 결과를 언젠가 주행하면 그만이다. 확장 영화에 완전 통달한 나는 인공지능처럼 권희수의 작업을 확장 영화의 맥락 속에 얽는다. 사실 이 모든 일은 그냥 인공지능에게 맡기는 편이 낫다. 지성은 갈수록 인공지능의 편에서 확장하므로.

마이클 스노우의 ‹파장›(1967)을 기억해둘 것. 벌써 새벽 3시. 오늘은 이만 퇴근.



2023년 6월 30일(2)

담배 피우다 역류성 식도염으로 인한 헛구역질 몇 번 하고 버스를 제시간에 탔다. 어차피 작업실로 향하는 여정이지만 나는 어디로든 이동하는 와중에 시간이 붕 뜨면 짜증이 식도를 통해 역류하는 기분이 든다. 모빌리티의 저주에 시달리고 있는지도. 작업실까지는 대략 20분 컷이다.

불과 몇 시간 전에 퇴근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기보다 뭔가 허탈하다. 작업실과 집, 집과 작업실, 그 사이에는 고작 173번 버스가 있고 차창 밖의 풍경 같은 건 보지 않는다. 물론 어제는 늦은 새벽이었기 때문에 카카오 택시를 탔지만. 그 전에 담배 사러 편의점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주변의 골목에 이끌렸지만 언제나 그렇듯 거기로 가지 않았다. 그곳은 풍경이고 이미지다. 풍경이고 이미지인 골목이 나로 인해 길로 연장된다면 모빌리티의 저주가 비로소 현전할 것이다. 애초에 산책을 싫어한다. 러닝도 싫어한다. 내 기준으로 너무 먼 거리를 소화해야하는 대중교통은 공황의 주범이다. 지하철 객차 내부가 밀실처럼 조여든다. 밀실이 이미지에 불과했으면 정말 좋겠네.

참고로 닻올림은 사운드 아트를 위주로 상연하는 지하 공연장이다. 권희수의 작업에도 물론 사운드가 있었지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사운드 아트에 하위 호환되지 않으리라 믿는다. 다만 나의 관점에서 결정적인 도입부가 존재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벽면에 프로젝션된 스크린은 거의 실시간으로 현장을 송출하고 있고 그 이미지 내부에는 다시 스크린이 있고 스크린 속에 다시 현장이 보이고… 그런 식으로 구현된 유사 폐쇄 회로는 감시 자본주의의 역학을 절대 비유하고 있지 않으며 다만 실시간이 점차 지연되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나 내 옆에 앉은 익명의 관객이 그런 지연을 토로하는 얘기를 건너 듣는 순간 나의 분명한 사실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마이클 스노우의 ‹파장›은 40분 남짓한 러닝타임 동안 그저 방 안의 풍경을 느린 속도로 줌인한다. 유튜브에서 축약본을 볼 수 있으나 여기에 굳이 링크를 걸지 않는 이유는 스스로 검색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 과정조차 수고롭다면 그냥 나처럼 안 보면 된다. 이 작업을 확장 영화의 맥락 속에 얽는 비평은 이미 포화돼 있으리라 짐작하며 (영화 비평가를 겨냥한 모독 아님 주의) 구글링하다 발견한 ‹파장›에 대한 모 블로거의 TMI를 언급하고 싶다. 때는 94년 8월 17일 정성일은 정은임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FM영화음악에 출연해 ‹영화사상 7대 미스터리›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언제나 그렇듯 사변적 영화 토크를 저 혼자서 늘어 놓았다. 문제는 7대 미스터리에 ‹파장›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 무엇보다 그가 ‹파장›의 내용을 완전히 곡해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얘기를 따르자면 줌인은 점차 가속도가 붙으면서 방과 방과 방을 지나고 야외로 나간다. 그러다 결국 실제의 바닷가에 다다른다. 반면 실제 영화는 벽면에 붙은 바다 사진으로 종결될 뿐이다.

그에 따라 모 블로거는 반발한다. 정성일은 이 영화를 본 적도 없다고.

정확한 사실 관계를 알 도리는 나에게 없다. 다만 영화(시네마)에 대한 기억 오류에 대해 잠깐이나마 숙고하게 된다. 시네필 정체성을 내면화한 시네필들은 기억 오류를 무릅쓴 채 기어코 영화를 회고한다. 이를테면 “2010년 말 아니면 2011년 초의 어느 겨울날이었다.” 그 이후로 간혹 열거되는 영화들을 유운성이 전부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다.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오픈소스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다. 인공지능도 아니다. 모든 기억은 각색된다. 심지어 영화마저도.

지금 나는 권희수의 작업 제목이 무엇인지도 기억이 안 난다. 태초에 스크린으로 구현된 폐쇄 회로가 있었고 공연장 암전한 뒤 “빛의 박동”이 스크린 안팎을 넘나들며 스크린의 경계를 허물거나 점차 망각한다. 내가 감히 ‹파장›을 바다 사진으로 대변되는 가짜 소실점으로 향하는 영화적 여정이라고 토로할 수 있다면 권희수의 작업은 빛이 가짜 소실점으로부터 탈주하기 위한 여정 그 자체다. 빛은 반드시 시네필이 아닌 그러나 멀티플렉스 극장 주변부를 배회하는 사뭇 진지한 관객들이 공유하는 시네마 경험에 대한 원초적인 순간이다. 어두운 극장의 스크린이 일순 빛으로 동요한다. 문제는 나의 기억 속에 그런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시네마로의 환대를 극장에서 체감한 적이 전무한 모 관객은 끝내 절망한다.

어디선가 원심 분리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결과적으로 무빙 이미지가 본의 아니게 시네마 경험으로 수렴되는 상황은 그 자체로 시네마적인 허구다. 최소한 나는 거기서 탈주한 채 무빙 이미지를 여기서 논의하고 싶다. 2023년 중반기 어느 여름날이었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보게 될까? 무엇이 이미지로서 무빙하는가?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세간의 오해와 달리 들뢰즈는 그런 식으로 서술한 적이 없다. 다만 영화 이후 갈수록 새롭게 구조화되는 시간의 형식 속에서 우리의 세계관이 변천했다는 역사적인 견해를 짚을 뿐이다. 정성일은 앞서 인용한 문장을 주문처럼 외우면서 이번엔 영화 자체를 주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씨네필들 사이의 기억 오류는 때로 자발적이다. 빛을 둘러싼 의미심장한 구설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도처에서 스크린 없이 빛이 발광하므로. 우리는 그 빛에 도취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