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7
ARCHIVE
박진희

한국고전영화 상대하기 – 나의 경우

뒤로가기
ISSUE 7
ARCHIVE
박진희

한국고전영화 상대하기 – 나의 경우

<일요일 밤과 월요일 아침> 포스터, 이미지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1.〈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GV

마테리알 편집진으로부터 한국고전영화를 프로그래밍하면서 생각해온 것들에 대해 써달라는 원고 청탁이 왔던 날 저녁이었다. 19시를 넘긴 그 시각, 낮에 받은 마테리알의 이메일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아직 회사(한국영상자료원)의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원고 청탁을 받아들일지 고사할지 망설이면서. ‘난 원고를 쓸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글을 써서 지면을 통해 발표할 만큼 그 소재에 대해 할 말이 있는가?’를 생각해보고 있었고, 나의 생각은 어느덧 내가 한국고전영화에 대해 가진 첫인상이 무엇이었는가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질문은 곧 ‘내가 한국고전영화를 처음 의식한 게 언제였는지’로 바뀌었고, 그건 명백히 내가 20대 중반 나이에 입학한 모 대학원에서 ‘한국영화사I’이라는 수업을 들어야 하는지 마는지에 대해 고민하던 그때였다고 대답할 수 있겠다 싶었다.

생각도 잠시, 직장동료 P와 함께 진행하는 영화 상영 기획전인 ‘위대한 유산: 태흥영화 1984-2004’의 관객과의 대화 행사를 준비하러 갔다.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이규형, 1987, 이하〈‘ 미미와 철수〉’)의 상영이 끝나고, 금정연, 정지돈 작가가 관객과의 대화의 게스트로 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현재 KMDb에 연재하고 있는 한국영화 관련 에세이「(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는 자신들이 영화를 주변문화로서 향유하던 2000년대 이후 영화에 관한 것이라서 1980년대 영화에 대한 GV 참석을 요청받았을 때 의아했다며 ‘우리가 과연 과거의 영화를 즐길 수 있을까’의 문제를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꼭 봐야 하는 클래식’이라는 말을 듣고 그 영화를 접해도 당혹감을 느낄 때가 있는데, 걸작으로 칭송된 영화도 아닌〈미미와 철수〉같은 영화를 보면서 도대체 이 영화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고민했다면서 말이다. 정지돈 작가는 과거의 영화를 보는 행위와 그 행위가 가질 법한 의미를 네 가지로 아래와 같이 정리해서 말했다.

1 아카이브 자료로서의 영화 보기. (아카이브된 그 시대 상황을 보는 것)

2 명작을 재발견하는 보기로서의 영화 보기. (정전에 오른 영화를 보는 것)

3 그냥 괴작을 보는 것으로서의 영화 보기. (‘왜 저렇게 후지지?’ 하면서 보는 것)

4 잊힌 예술적 가능성을 발굴하거나, 시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묻혀버린 어떤 것들에 대해 찾아내는 방식으로서의 영화 보기. (보통 영화연구자들의 작업이 이 범주에 포함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 다음 그들은 GV를 위해 준비해온 이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신문 기사를 통해 이 영화가 제작된 계기와 개봉 당시 사회 및 방화산업의 분위기, 이 영화의 흥행 성적 등을 파악했고, 이 영화와 관련된 인물들 즉 이규형 감독, 박중훈 배우, 이태원 태흥영화사 사장, 『스포츠서울』편집국장 이상우 등의 회고담을 찾아봤다고 했다. ‘청춘물’이라는 장르의 계보를 통해 이 영화에 접근하기도 했다. 당시 〈미미와 철수〉와 자주 비교되었던〈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부터〈고래사냥〉(배창호, 1984),〈비트〉(김성수, 1997),〈엽기적인 그녀〉(곽재용, 2001),〈건축학개론〉(이용주, 2011), 〈스물〉(이병헌, 2014),〈엑시트〉(이상근, 2018)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화가 언급되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과거의 청춘물이 가졌던 대항문화적인 성격이 오늘날에는 어떤 식으로 바뀌었는가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고찰로 이어졌다.

「한국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사람들」이라는 에세이를 연재하며 “한국영화로 시네마를 수행”하고자 하는 이들이어서 그런지 그날의 GV는 ‘GV 퍼포먼스’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재미있었다. 내게 있어 가장 하이라이트는 GV 말미에 나온 금정연 작가의 마무리 멘트였다. 기억에 의존해 대충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과거의 영화를 볼 때, 특히 영화사적 걸작이라는 후광이 없는 이런 영화를 볼 때는 아무 맥락 없이 그냥 보게 되는데, 이 자리를 준비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보면서 어떤 맥락을 만들게 되었고, 그렇게 사후적으로 맥락이 형성되니까 솔직히 오늘 영화를 보면서 영화가 더 재미있게 느껴졌다.”

GV를 굳이 좋은 분위기로 마무리하기 위한 뻔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저 멘트를 듣고 약간 감동을 받았다. 무엇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기승전결이었다. 내가 전혀 향유하지 않은 과거에서 온, 정전이 아닌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난감함’이 ‘솔직히 재미있었다’로 바뀌어가는 스토리는 내가 한국고전영화 큐레이션이라는 과업을 해결하기 위해 최근 수개월간 줄곧 고민한 바로 그 내러티브였다. 금정연 작가의 마지막 멘트는 한국고전영화 기획전을 큐레이팅하고 한 명의 관객이라도 더 보러 오도록 유혹해서(?) 심지어 재미를 느끼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과업 수행에서 내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관객의 반응 같은 거였다. 아니, 관객까지 갈 것도 없이, 내 자신이 가장 많이 조우하고 싶은 그런 순간에 대한 설명이었다. 한국고전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아니 즐기고 향유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성의 있는 준비가 필요하고, 그다음에 마침내 그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에 대한 이해는 물론 그 이상의 매력적인 것들을 발견하는 일, 물론 매력은커녕 그 반대인 경우도 많이 있지만, 어쨌든 어딘가 숨어있는 매력적인 것들을 발견하고 그것에 매혹되는 일을 나는 항상 기대하고 있다. 그것이 프로그래밍이라는 행위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면 좋고, 전달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하는, 그런 일의 반복이 내가 생각하는 내 업무의 핵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GV를 들으며 나는 급격하게 초조함을 느끼기도 했다. 마테리알 원고를 쓴다면 내가 그 원고에 쓰려던 말을 금정연, 정지돈 작가가 더 세련되고 재미진 말로 해버리는 것을 고스란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마치 이 GV를 듣기 위해 여기에 앉아있는 관객 중에 (아직 쓰지도 않은) 나의 마테리알 원고가 발표됐을 때 금정연, 정지돈 작가가 오늘 한 이야기를 그대로 베꼈다는 비난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까지 했다. 여하간에 만약 원고 청탁을 받아들인다면 금정연, 정지돈 작가의 GV에 대한 이야기로 원고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다음날 마테리알 편집진에게 메일을 보내 원고를 쓰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사실상 원고를 쓰기로 결정한 이유는 금정연, 정지돈 작가의 GV 때문은 아니었다.


2. 취향으로서의 한국고전영화

앞서 밝혔듯이 나는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 영화이론 전공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한국고전영화를 의식하기 시작했다.〈오발탄〉이니 뭐니 알게 된 것도, 한국영화사를 공부한 것도 그때였다(물론 대학원 입학 전에 서초동에 있었던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이만희 감독의 전작전에서 영화들을 정말 재미있게 즐겁게 즐긴 적은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한국고전영화’라는 범주를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굳이 따지면 과거의 영화들보다는 동시대 영화들에 대해서, 한국영화보다는 아시아를 포함한 외국영화들에 대해 관심이 있었고, 영화보다는 영화에 대한 글의 매력에 이끌려 대학원에 입학한 사례였다. 멋진 글을 쓰려면 많은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에 영화를 열심히 보러 다니긴 했지만 그렇게 열광적인 시네필이 되지도 못했다. 여하간 핵심은 내게 있어서 한국고전영화가 매력의 대상이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이다. 한국고전영화는 늘 억지로 봐야 하고 공부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더구나 취향의 대상이 된다는 일은 솔직히 상상해보지도 못했다. 이건 사실 나만의 사정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한국의 영화문화에서 ‘자국의 옛날영화’가 문화적 취향의 대상으로서 떠올랐다고 할 만한 일은 불과 몇 차례 발생하지 않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일단 19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 회고전의 첫 주인공으로 초청된 김기영 감독의 사례가 떠오른다. 이미 PC통신상의 영화팬들 사이에서 컬트감독으로 추앙되고 있기는 했지만 저화질의 VHS로 말고는 보기가 어려웠던 그의 영화들을 영화진흥공사와 한국영상자료원이 새로 만든 프린트로 영화제에서 상영하자 회고전은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이는 이듬해 베를린 국제영화제 상영(4편)과 2006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상영(18편), 2008년〈하녀〉(1960)의 복원 및 칸 클래식 상영으로 이어지며 김기영 감독을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그다음으로 겨우 떠오르는 것은 2005~2006년 즈음의 이만희 감독의 사례이다. 2005년 한국영상자료원의 수장고에서 미개봉 상태의〈휴일〉(1968)이 발굴되었고, 이는 곧 한국영상자료원과 그해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을 통해 공개되었다. 당시 평론가들이 이 영화를 2005년 올해의 영화로 꼽음으로써 2006년 한국영상자료원 이만희 전작전의 성황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이런 몇 번의 계기들 외에는 한국고전영화가 대중적 화제의 중심에 섰던 일은, 내가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많이 목격하지 못한 것 같다. 영화제나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에서 복원된 버전으로 한국고전영화를 상영하거나 블루레이를 출시할 때 영화팬들의 주목을 받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마니아적 취향의 영역에서 소비되는 정도로 보인다.

여기서 다시 개인적인 얘기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취향으로서의 한국고전영화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사실 비디오에세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후였다. 2010년대 중반 미디액트 같은 미디어 교육기관을 통해 ‘오디오비주얼필름크리틱’ 혹은 ‘비디오에세이’라는 방법론을 처음 접한 이후 줄곧 외국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비디오에세이를 접했지만, 애초에 영화를 만든 이들의 창작 의도나 당시 영화가 소비되었던 맥락과 무관하게 다수의 이미지를 평등하게 위치시킨 후에 감상자가 자신만의 레퍼런스를 동원해 새로이 수행하는 이미지의 재배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비디오에세이의 방법론이야말로 한국고전영화를 새롭게 보게 만드는 적합한 방식으로 여겨진 것이다. 예를 들어 비디오에세이 수업을 들으면서 내가 상상한 나의 고전영화 비디오에세이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홍보하기 위해 제작된 문화영화 중 새로운 농법을 소개하고 있는 농사 관련 문화영화들을 재편집해 1970년대 한국의 농촌을 재구성해보는 것이었다(하지만 만들진 못했다). 지금의 직장에 들어와 한국고전영화 프로그래밍을 하는 업무를 몇 차례 맡게 되었을 때, 앞서 정지돈 작가의 언급을 인용한 네 가지 분류 중 2번과 3번으로 한국고전영화를 접하는 관객이었던 것이 분명한 내가 1번과 4번으로 그 목적을 단번에 옮기게 된 것은 이 업무를 하게 되어서라기보다는, 사실 그전에 비디오에세이 작업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3. 한국고전영화 큐레이션

한국고전영화를 대상으로 큐레이팅을 하고자 했을 때 내가 이를 수행한 방식은 기획을 하고, 기획과 동시에 관련 영화를 리서치하고, 그 영화들을 다시(혹은 처음) 보고, 그 영화들과 관련한 레퍼런스 자료(당대의 신문 기사나 기존의 연구 자료, SNS의 게시글)들을 살펴본 다음 최종 셀렉션된 영화들을 보는 것이 동시대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프로그램 노트로 정리해 관객들에게 제시하고, 관객들이 그 영화를 보러 와서 저마다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이는 사실 해외영화나 동시대 영화를 큐레이팅할 때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금정연, 정지돈 작가가〈미미와 철수〉에 대해 말하기 위해 수행한 여타의 작업들과도 방법론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을 것 같다. 그들은 그날〈미미와 철수〉라는 영화 자체와 그 영화가 놓인 맥락,〈미미와 철수〉스러운 계보로 묶일 수 있는 한국영화들에 대해 말하면서 이를테면 ‘한국영화 청춘물에 등장하는 남자 인물은 왜 항상 의사에게 여자친구를 뺏기는가?’라는 제목의 큐레이션을 수행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국고전영화의 큐레이션에는 좀 더 극복해야 하는 숙제들이 있었다. 수행해야 할 퀘스트가 하나 더 있다고 해야 할까…. 그건 내 역할이 일종의 게이트키퍼이면서도 동시에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불러모으는 책무를 가진 ‘업자’에 준하기 때문인데, 특히 업자로서의 나의 임무는 내가 판매(소개)하는 상품이 어떤지 면밀하게 체크해서 고객에게 선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따지면 한국고전영화는 일종의 골동품이나 문화재에 비견할 수 있을 텐데,물론 영화의 ‘제작 연도’라는 것은 그 영화에 대한 하나의 참고사항에 그칠 뿐일 정도로 영화는 그 영화의 연식으로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한국고전영화를 골동품에 비견하는 것은 그릇된 견해이지만 큐레이션을 위해 생각한 하나의 가설로서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이때 업자가 할 일은 고객의 입장에서 골동품을 바라보면서 어디 한 군데가 찌그러졌으면 찌그러진 대로, 나사 하나가 빠져있으면 빠져있는 대로 그 특징을 파악해 고객에게 그에 대한 적절한 정보나 주석을 제공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팔려는(소개하려는) 상품을 최대한 자세히 보고 파악해야 한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나의 경우 한국고전영화를 보는 데 종종 방해가 되었던 것은 더빙의 퀄리티였다. 감상에 별로 방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영화를 구체적으로 보다 보니 감상에 방해를 줄 정도로 발음이 잘 들리지 않거나, 입 모양과 음성이 달라서 보기가 불편한 경우도 많았다. 또한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더빙한 최은희, 황정순, 김승호 등의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김진규나 신성일, 김지미, 엄앵란, 남정임, 윤정희 같은 대표 배우들의 목소리가 대부분 성우의 목소리라는 걸 (원래 알기는 했지만) 적극적으로 의식한 후로는 몰입감이 좀 더 떨어지기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배우를 두고 굳이 성우를 기용하여 더빙했던 이유가 배우의 목소리가 충분히 멋지지 않아서인 경우도 있었지만, 연기력이 부족해서인 경우도 있었다는 것은《무릎팍도사》의 박상민 편2011년 3월 방송.을 보고 알았다. 배우 박상민은〈장군의 아들〉(임권택, 1990) 촬영을 마치고 함께 캐스팅된 다른 신인배우들과는 달리 자신의 목소리만 성우가 더빙을 하게 되자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더빙만은 자기가 하게 해달라며 술을 잔뜩 마시고 호기롭게 녹음실에 돌진했는데 임권택 감독의 “끌어내”라는 한 마디에 녹음실에서 쫓겨나야 했다는 일화를 털어놓으며 결국〈장군의 아들〉(1990~1992) 시리즈 내내 성우가 자신의 목소리를 더빙하는 굴욕을 겪었다고 말했다. 엄앵란의 목소리로 유명한 성우 고은정 선생이나〈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에서 트위스트 김의 목소리를 더빙한 성우 오승룡 선생 등의 구술을 봐도, 당시 인기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과 최대한 빨리 찍어서 바로 개봉해야 했던 열악한 제작환경에서 배우들은 대사를 외워오지도 않고 현장에서 프롬프터를 보며 대충 대사를 할 뿐이었기 때문에 배우들의 연기가 그다지 좋지 않아도 상관없는 분위기였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배수경,『2009년도 원로영화인 구술채록사업 <생애사> 고은정』(한국영상자료원, 2009); 김승경,『2011년도 원로영화인 구술채록사업 <생애사> 오승룡』(한국영상자료원, 2011); 김승경,『2012년도 원로영화인 구술채록사업 <생애사> 양택조』(한국영상자료원, 2012); 한나리, 박일아,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최수민』(한국영상자료원, 2021) 등 참고.

이쯤 되니 아예 성우들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기도 했다. 이들은 한국고전영화의 전면에서 활약하며 영화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기능을 했고, 사후적으로도 나 같은 무지렁이 관객에게 한국고전영화의 인상을 결정짓는 존재감을 뽐내고 있지만 영화 크레디트에는 등장조차 하지 않는 유령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1950~60년대 라디오극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큰 인기를 끌다가 영화 더빙을 하게 된 성우들은 김진규를 박영민이, 엄앵란을 고은정이, 김지미를 정은숙과 옥경희가, 신성일을 이창환이 도맡아 하는 식으로 나름 체계화되어 있으면서 그 배우의 주요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주로 낮에는 라디오드라마를 하고 밤에 영화 더빙을 하는 바쁜 생활을 했다고 하며, 성우들의 더빙 연기 연출은 주로 조감독이 담당했다고 한다. 배우의 연기가 엉망인 경우나, 배우가 대사를 얼버무리는 경우나, 편집이 이상하게 튀는 장면에서도 연결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건 성우의 몫이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성우들은 그런 식으로 연기자들의 특성까지 속속들이 알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는데도 정작 배우들과는 가깝게 교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우들이 거리를 둔 건지, 배우들이 거리를 둔 건지는 모르겠다. 여하간 같은 역할을 공유하는 성우와 배우는 서로를 경계했다고 하는 후일담이 있는데, 결국 나에게 일종의 불편함으로 다가왔던 ‘한국고전영화의 더빙 퀄리티’라는 것 이면에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는 더이상 문제적이지 않은, 심지어 흥미로운 지점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다양한 차원에서 한국고전영화가 달리 보일 수 있는 포인트가 꽤 많다는 점이 내가 한국고전영화 큐레이션이라는 세계를 접하면서 느끼는 것이었다. 물론 한국고전영화는 이런저런 맥락을 동반해서 봐야만 재미있으니 그렇게 하라거나, 그렇기 때문에 한국영화사나 한국근현대사에 대해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런 노력 하나 없이도 한국고전영화는 재미있게 볼 수 있다고 큰소리칠 생각도 없다. 다만 한국고전영화라는 매력적인 상품에 대한 여러가지 것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솔직히 재미를 느꼈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리저리 살펴보는 일’이 다분히 역사가의 연구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4. 역사가로서의 강력한 감상자

18세기 파리의 형사사건을 기록한 아카이브를 통해 ‘18세기 식품 절도죄에 대한 연구’나 ‘18세기 객사자에 대한 연구’ 등을 발표한 18세기 전문 역사가 아를레트 파르주아를레트 파르주,『아카이브 취향』, 김정아 옮김(문학과지성사, 2020).는 “아카이브가 하는 말은 진실이 아닐지 몰라도 아카이브에서 진실을 듣는 것은 가능하다”같은 책, 40. 고 말했다. 이 책의 한 부분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자료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자료를 작성한 사람의 생각을 벗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해 자료는 자료 작성자가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는지, 무슨일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거기까지밖에 말해줄 수 없다. 좀 더 야박하게 말하자면, 자료는 자료 작성자가 자기 생각이라고 생각했던 것,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자기 생각이라고 생각해주기를 바랐던 것까지밖에 말해줄 수 없다. 역사가가 아카이브 작업에 착수해 의미를 읽어내기까지 아카이브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이다. (중략) 역사가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설명하고 주장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역사가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반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그래서 자기 이야기가 왜 진실한지 그 이유를
길게 늘어놓는 사람이다. (중략) 역사가는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우화 작가가 아니다. 역사가가 미셸 푸코처럼 “내가 써온 모든 글은 픽션이고, 나도 그 사실을 십분 의식하고 있다”고 말한 뒤에 “하지만 픽션이 진실의 기능을 하게 하는 것은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일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같은 책, 117~118.
아를레트 파르주는 아래와 같이 쓰기도 한다.

“아카이브는 어떤 모양으로 세워질지 좀처럼 예측할 수 없는 역사의 공사 현장이다. 역사가가 이런 아카이브를 제대로 읽어내려면 사건이 다 끝난 뒤에 어느 쪽이 근대적이고 어느 쪽이 전근대적인지를 조목조목 설명하는 지배층 지식의 길에서 벗어나, 사건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행동 방식을 직접 개척해가는 사건 당사자들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중략) 아카이브는 역동하는 인물들, 작용과 반작용, 변신과 충돌 사이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능동적 인물들을 엿보게 해준다. 아카이브에서 역사가가 할 일은 바로 그 역동을 포착하는 것,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들 안으로 파고 들어가 사회관계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것, 추상적 범주에 집착하는 대신 그렇게 움직이고 시작되고 종결되면서 바뀌어가는 것들을 규명해내는 것이다”같은 책, 139~140.

파르주는 아카이브와 역사가의 관계, 또는 자료 작성자와 역사가의 관계를 위와 같이 설명하고 있는데, 위 글에서 ‘아카이브’를 ‘영화’로, ‘자료 작성자’를 ‘감독/제작자/배우 등 모든 영화창작자’로, ‘역사가’를 ‘관람자/감상자’로 바꿔보면 영화에 대한 보다 ‘직접’적이고 ‘개척해가’는 방식으로 ‘영화를 읽어나가는’ 감상자로서의 수행이 영화의 역동을 포착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운성 영화평론가의 최근 저서『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에 나오는 한 구절을 아래와 같이 옮겨본다.

“영화를 감상하는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화를 만든 이들의 의도나 바람과 무관하게 자신만의 상상적 영화관 속에서 온갖 영화들을 마음껏 비교하고 재배치할 수 있는 권리다. (중략) 창작자들은 저마다 고유의 세계를 구축하려 하는 반면, 강력한 감상자는 그 모든 세계를 다시 쪼개고 잇대어 평등하게 아카이브화한다. 무차별적인 평등의 감각이 없는 감상자는 그저 작가들의 나라를 옮겨다니는 백성(이나 최악의 경우 노예)에 지나지 않으며 기껏해야 다중국적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무국적자의 불손함과 경박함이야말로 영화와 대면하는 관객이 갖추어야 할 제일의 덕목이다. 이런 점에서〈영화의 역사(들)〉의 고다르는 단지 영화감독이 아니라 이상적인 영화 관객의 모델이 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유운성,『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 세기의 아이들을 위한 반영화입문』(보스토크프레스, 2021), 95~96.

이 둘의 이야기를 (제멋대로) 종합해보면, 읽기 전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아카이브를 적극적으로 읽어나가며 포착함으로써 역사가는 우화가 아닌 픽션을 쓸 수 있게 되며, 무국적자의 불손함과 경박함을 지닌 강력한 감상자는 모든 세계를 다시 쪼개고 잇대어 자신만의 상상적 영화관 속에서 재배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역사가로서의 감상자가 가진 권한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더욱 더 강력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가보려 한다. 이 원고를 쓰게 된 이유는, 내가 자격이 있어서라기보다,내가 영상자료원에서 한국고전영화 프로그래밍을 하는 상황은 인력의 랜덤 배정의 결과에 가깝다. 영상자료원에는 프로그래밍을 했다 하면 나보다 훨씬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할 사람이 딱 봐도 100명 정도는 된다. 한국고전영화에 대한 비디오에세이를 만든다 해도 나보다 훨씬 재미있는 비디오에세이를 만들 만한 사람이 100명 정도는 된다. 둘 모두 감상자의 영역에서 수행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너무 당연하게도, 감상자가 아닌 사람은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국고전영화 프로그래밍 업무를 경험하면서 큐레이터나 프로그래머로서가 아니라 감상자로서의 위치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얼마 전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제공하는 KMDb VOD 기획전으로 ‘여행지에서 생긴 일’이라는 조그만 프로그래밍을 한 적이 있다. 이 기획을
하게 된 것은 최인현 감독의〈일요일 밤과 월요일 아침〉(1970)이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였다. 사실 이 영화는 볼 때마다 매번 5분을 넘기지 못하고 꺼버린 영화였다. 그 이유는 5분 이상 지속되는 남녀 주인공의 밑도 끝도 없는 러브신이 이 영화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보다 끄기’를 여러 번 반복한 끝에 어느 날 8분 30초 정도를 버텨보았을 때, 영화의 러브신은 마침내 끝이 나고 완전히 새로운 얼굴의 영화가 나타났다(이 영화를 소개하는 문구를 작성할 때 하마터면 “8분만 참으면 정말 재미있어지는 영화”라고 쓸 뻔했다). 어딘지 모르게 후진 것 같으면서도 다분히 매력적인 이 영화를 단숨에 즐길 수가 있었던 이유는, 처음엔 ‘물건을 팔기 위해서 물건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업자적 강박 때문이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러한 강박을 넘어서 영화가 담고 있는 (아직 불타 없어지지 않은 상태의 종로3가 동궁다방의 모습이 남아있는) 1970년 4월이라는 특정 시기를 보내고 있는, 허접하지만 조금은 사랑스러운 한 연인이 보내는 이 말도 안 되게 일상적인 하루가 정지돈 작가가 설명한 1번과 4번을 충족시키면서 프로그래머로서의 정제된 프로그램 노트가 아닌 아닌 감상자의 너주레한 수다를 늘어놓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나는 이 영화에 대한 한 명의 적극적인 감상자가 되는 경험을 통해 앞으로도 조금 더 한국고전영화를 상대하는 적극적인 감상자의 위치에 있고 싶어졌다. 이는 과거로의 퇴행과는 구별되는, 현재의 미디어 환경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사람의 유희적인 여행 방식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요일 밤과 월요일 아침> 스틸컷, 이미지 출처: 한국영상자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