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6
REVIEW
권시우

‘나’의 세계로부터: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하루하루 탈출한다》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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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시우

‘나’의 세계로부터: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하루하루 탈출한다》리뷰

“너랑 나랑은 지금 안 되지.”

-아이유, ‹너랑 나›(2011)



나의 세계는 계속해서 망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상황의 발단을 종잡을 수가 없다. 심지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들이 망하고 있는지조차 섣불리 해명할 수가 없다. 다만 망하는 과정을 체감할 뿐이다. 만성적인 피로와 우울감, 무기력증과 같은 증상들은, 그에 대한 일종의 징후다. 앞서 굳이 ‘세계’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어찌됐든 이 모든 상황이 단순히 나라는 개인으로부터 유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막연한 예감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를 파괴할 의사가 없다. 그러므로 무언가가, 이를테면 제도와 같은 ‘외부’의 환경이 나를 둘러싼 채 망하고 있는 것 같고, 나는 그 과정에 거의 실시간으로 휩쓸리는 중인 것 같다. 



그러나 이때의 제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이 좌파 지식인이라면, 즉각 자본주의 체제를 떠올리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후기 자본주의의 역학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내가 체계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납득하지 못하겠다. 나를 설득하려는 시도는 소용이 없다. 설득은 대개 논리의 문제이고, 내가 체감하는 파국은 분명 논리의 문제에서 벗어나 있다. 이를테면 망하는 과정은 나의 불확실한 경험에 국한돼있고, 단순히 논리로 그것을 재단할 수는 없다. 모든 게 추상적이다. 제도 또한 추상적이다. 뒤늦게나마 단언하자면, 나는 그것에 계속해서 휩쓸릴 뿐이다. 그러한 단언은 그저 패배주의에 절어있는 나의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수단인가? 잘 모르겠다. 나는 철저히 고립돼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세카이계(セカイ系)가 아니다.



세카이계는 ‘나’와 ‘너’의 관계성이 세계의 문제로 비약하는 순간 발생한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너’는 성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세계는 ‘너’라는 타인을 미처 수용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즉 그것이 망하는 과정은 오로지 나만이 감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계성을 형성할 수 있는) 연대의 여지가 없다. 다만 우리는 계속해서 무수한 ‘나’들로 부서진다. 세계는 계속해서 ‘나’에게로 함몰된다. 이를 에세이 영화의 맥락에서 재고했을 때, 아마도 함몰의 순간들은 세계와의 지속적인 부딪힘을 유발할 것이다.이때의 ‘나’는 심지어 작업을 전개하는 작가 본인일 수도 있다. “에세이 영화가 본질적으로 작가의 사유와 성찰을 심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장르라면, 그것은 언제나 당대적인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얼핏 사적인 차원에서 구성된 내러티브를 배제하는 언사로 들리지만, 오히려 에세이 영화의 특정성은 개인을 발단으로 삼았을 때, 비로소 명확해진다. 이를테면 에세이 영화는 오프닝 크레딧이 오르기도 전에, 작가에 의해 미리 규정된 해답지를 풀이하는 대신, 아직 온전히 주체화되기 이전의 개인이 특정한 세계와 대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유의 파편들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사유의 파편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그러한 사실은 은연중에 에세이 영화의 자율성을 보증한다.” 권시우, 「사용자 안내서: 에세이 영화를 통해 (새로운) 개인을 사유하기」, 2021. 이때의 부딪힘은 유의미한 사건이다. 혹은 에세이 영화는 부딪힘이라는 사건을 다양한 방식으로 성찰함으로써, 그것을 종내 유의미하게 만든다. 반면 지금의 파국은 부딪힘을 거듭 추상화하면서, 그것이 (일종의 자기 성찰과 조응하는) 사건으로 귀결될 여지를 무마한다. 그 과정은 충분히 영화적이지 않다.



영화적이라는 표현이 다소 모호하게 들린다면, 차라리 프레임이라는 (비)물리적인 단위가, 앞서 언급한 추상화의 과정을 미처 수용할 수 없다고 해두자. 이제 세계와의 부딪힘은 프레임의 나열들로 온전히 재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었다. 분명 그것에는 나름의 운동성이 존재하지만, 결코 영화적인 의미에서는 아니다. 영화는 무엇보다 시청각적인 매체다. 즉 관객은 영화를 어떤 식으로든 보거나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파국은, 오로지 ‘나’에게만 귀속돼있기 때문에, ‘너’와 공유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은 ‘나’의 감각을 (불확실하게) 자극하고, 그럼으로써 순전히 주관적인 차원에서 현존하고, 그 과정에서 결국 ‘나’는 철저히 고립되고 만다.



물론 그러한 상황은 새로운 에세이 영화를 구성하기 위한 또 다른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영화라는 매체의 자기 성찰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 그러나 최소한 ‘11회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에서 공개된 작업들 대다수는, 포스트-매체적인 차원에서 영화를 숙고하려는 일종의 내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들은 대개 영화에 무관심하다. 심지어 무빙 이미지로 구현된 작업들마저 그러하다. 중요한 것은 영화의 미래 따위가 아니라, 지금 ‘나’에게 당면한 파국을 어떻게든 증언할 수 있는 수단을 모색하는 일이다. 나는 전시장의 면면에서 그러한 조난 신호를 발견했다. 그렇다면 이때의 조난 신호는 ‘나’의 구조를 어떤 식으로 요청하고 있는가? 

지금의 파국은 굳이 표현하자면, 사적인 재난에 가깝다. ‘나’는 순전히 ‘나’의 세계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제도가 추상적인 이유는, 주지하듯 그것이 ‘나’의 관점에서 도저히 해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전지구화된 자본주의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재고할 수는 있어도, 이는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한 길잡이가 아니다. 그것은 ‘나’라는 개인에 비해, 너무 거대하고, 광범위하고, 그래서 추상적이다. 폴린 부드리/레나테 로렌츠의 ‹(No) Time›은 다양한 장르의 춤들을 소환해, 그것들을 임의적으로 리믹스함으로써, 소위 “소수자적인 시간 또는 퀴어한 시간의 가능성”을 발생시키려 하지만, 작업을 돌아 나오는 순간, 그러한 시도는 일시에 무마된다. 작업의 출입구 근처에 비치된 텍스트는 관객에게 말한다. “이 문은 당신을 부르는, 또 동시에 속박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문입니다.” 그럴싸한 문구지만, 그와 별개로 이를 통해 앞서 거론했던 소수자성의 문제, 그것에 잠재된 다양한 스펙트럼은 고작 자본주의로 일축된다.



‹(No) Time›의 무대는 “퀴어한 시간”의 혼재적인 상태를 수용하기 위해 선뜻 개방돼있지만, 관객은 해당 무대에 진입하거나, 그곳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반드시 “후기 자본주의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물론 양자는 충분히 상관적일 수 있다. 문제는 해당 작업에서 그러한 관계의 매듭이 모호한 것을 넘어서, 거의 부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결국 우리는 소수자성의 문제를 매개로 자본주의를 사유하거나, 그 역의 상황을 도모할 때, 매번 실패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는 지금의 파국에 대한 ‘잘못된 증언’이다. 본 전시에는 그와 유사한 맥락의 작업들이 산개해있다. DIS의 ‹공익 광고› 시리즈는 그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다. 해당 작업에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사회경제적 문제는, 작중의 주인공이 속사포처럼 내뱉는 랩으로 발화되는데, 그것은 결국 (스크립트의 절망적인 내용과 별개로) 유희의 방식에 가깝다. 달리 말해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논리적인 비판이 아니라, 자본주의로 표상되는 제도가 망하는 과정에 휩쓸린 ‘나’라는 개인이 지금의 파국을, 무려 낙관하는 과정인 것이다.

폴린 부드리/레나테 로렌츠, ‹(No) Time›, 2020, 복합매체설치, HD 비디오, 컬러/사운드, 20분

이처럼 해당 작업은 제도를 객관화할 수 있는 비판적 거리를 무마시킴으로써, 제도의 병폐를 고스란히 체화하고 있는 ‘나’를 부각한다. 이는 가속주의의 징후라기보다, 그것에 대한 의도적인 오독이다. 즉 문제의 쟁점은 후기 자본주의의 역학을 가속화함으로써, 그로부터 탈출하려는 신좌파적인 시나리오가 아니라, ‘나’의 세계가 망하거나 말거나 딱히 상관없다는 것이다. 만약 망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랩의 가사로 삼을 만한 흥미로운 사건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파국을 충분히 낙관할 수 있다.) 이때의 랩은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전개되는데, 그 이유는 어차피 망함의 상태는 ‘나’를 빌어 현전하고, 그 역의 상황 또한 참이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는 우리를, 즉 무수한 ‘나’들을 제도와 직접적으로 매개한다. 이는 (사유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 너무나 과도한 비약으로 귀결되면서, 매개의 과정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내몬다. 그러므로 ‘나’와 제도 사이에는 어떠한 “부딪힘”도 발생할 수 없다.



이로써 에세이적 태도는 손쉽게 철회된다. ‘나’를 둘러싼 더이상의 유의미한 사건은 없을 것이다. 앞서 ‹(No) Time›이 암시했듯, 소수자성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오로지 제도의 반향으로 귀결될 때, ‘나’는 자연스레 모든 것들을 제도로 추상화해버린다. 이는 나와 당신의 정치적 성향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내가 좌파든, 중도주의자든, 우파든 간에, 나는 추상적인 제도에 지금의 파국을 투사하는 무수한 당신들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 이는 다양성이 결여된 기성의 집단을 산출한다. 이를테면 ‘대중’과 같은 다소 불가사의한 이름으로. 본 전시는 얼핏 사회정치적인 담론으로 무성한 것 같지만, 그것들은 종내 ‘대중’의 맥락으로 희석된다. 즉 대다수의 작업들은 급진적인 제스처만을 취한 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중’이 되기를 자처한다.



바로 그러한 상황이 지금 전개되고 있는 파국의 정체다. 우리에겐 고유한 이름도, 정체성도 없다. 그저 ‘대중’이라는 집단에 불과하다. 전시장 면면에서 들려오는 조난 신호는, 언제나 작업들의 의도와 무관한, 단지 그것들이 취하고 있는 공허한 제스처에서 연원한다. 그리고 공허한 제스처는 급진적이기 위한 온갖 화려한 미사여구로, 무엇보다 (무빙) 이미지로 스스로를 포장한다. 그런 식으로 보이고 들리는 것은, 결국 영화로 귀결되는가? 오히려 그것은 미처 ‘대중’으로 수렴되지 못한 이들을 선동하기 위해 개설된 1인 유튜브 채널에 가깝다. (나는 이 대목에서 문득 연상호의 ‹지옥›에 등장하는 ‘화살촉’의 스트리밍 방송을 떠올린다.) 물론 1인 유튜브 채널도 충분히 영화로 귀결되거나, 의도적으로 이를 회피할 수 있다. 다만 본 전시의 무빙 이미지 작업들은 ‘이미지의 가능성’을 기만하고 있다. 그것들은 대개 ‘나’의 세계가 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당히 판촉될 만한 정치적 스캔들로 가시화하기 위해, 이미지를 도용한다. 



영화가 무엇보다 시청각적인 매체라고 했을 때, 결국 방점은 매체에 찍힐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당신은 영화라는 매체를 사유하기 위해, 그것의 시청각적인 요소를 해제할 것인가? 지금의 파국을 맞이한 시점에서, 그러한 시도는 어쩌면 다소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혹은 매체를 복원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겐 지금의 파국을 ‘너’와 공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점이지대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곳은 (매체를 포함한) 논의의 거점이 돼야만 한다. 주지하듯 미디어는 일단 상호작용을 원칙으로 삼는다. 설사 그것이 영화적이지 않거나, 그것을 굳이 지향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세계는 기꺼이 종말을 표명해야 한다. 서두에 언급한 나의 세계 또한 마찬가지다. 그로부터 하루하루 탈출하는 것은, 탈출을 가장하는 반복적인 제스처에 불과하며, 결국 지금의 파국을 지속시키는 데 기여할 뿐이다. 



물론 매체로 세계를 구원할 수는 없다. 나는 그저 무수한 스크린에 투사된, 오로지 ‘나’의 세계에서 비롯한 정치적 스캔들을 외면하고 싶을 뿐이다. 언제까지 그것을 가시화하기 위한 미사여구만을 보고 들을 것인가? 본 전시는 (지금의 파국을 발단 삼아) 추상화된 세계를 시청각적으로 재현하는 데 실패했다. 만약 그러한 시도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기꺼이 추상성이라는 전제를 포기해야한다. 우리의 탈출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재개된다.



물론 누군가는 그러한 (새로운) 탈출마저, 종내 또 다른 파국으로 치닫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이를테면 류한솔의 ‹버진 로드›류한솔, ‹버진 로드›, 2021.(클릭하면 영상 링크로 이동합니다.)는, B급 고어 영화에서 착안해, 작중에 등장하는 인간-괴수가 스스로를 훼손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노출한다. 이때 발생하는 ‘고어함’은 분명 처음에는 농담이었지만, 그것이 반복될수록 농담은 진부해지고, 관객은 종내 사지 절단된 가짜-신체(들)로부터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이는 해당 작업을 둘러싼 유난히 정치적인 작업들이 구현하는 일종의 우화를 직설적으로 비튼다. 즉 농담조의 정치적 스캔들은, 그것이 반복될수록 진부해지는 한편, 그럼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배후를 드러내면서, 불시에 우리를 압도한다. 이때의 배후란 무려 후기 자본주의 체제다. 그것은 더이상 우리에 의해 손쉽게 추상화된 버전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괴수로 등장해 우리를 잔인하게 먹어치운다.



이로써 “하루하루 탈출한다.”라는 가설은 일단락된다. 



그간 (불확실한) 파국의 형태로 위장했던 후기 자본주의 체제는, ‘나’의 도피주의와 무관하게, 언제나 ‘나’를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 결과로서 마침내 현실에서 유혈이 낭자한다. 고어-자본주의는 더이상 무엇과도 매개되지 않은 채, 우리, 즉 ‘대중’을 향해 (더이상 우화로 얼버무릴 수 없는) 실질적인 폭력을 휘두른다. 우리는 그러한 혐오스런 상황을 말 그대로 체감하면서, 현실에 대한 일종의 원근법을 잃어버린다. 왜냐하면 ‘나’의 신체는 자본주의적 폭력에 의해, 처절하게 망가지고, 왜곡됐기 때문이다. (…) 그러나 아직 고어-자본주의는 도래하지 않았다. 적어도 나의 사지는 이 순간 멀쩡하다. 이처럼 ‹버진 로드›는 우리에게 곧 다가올 폭력을 대리 체험시킴으로써, 그에 대해 어떻게든 예비할 것을 종용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버진 로드›를 경유하면서 철저히 와해된 본 전시의 맥락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교훈이다. 추상화된 제도가 갑작스레 괴수로 돌변했을 때, 우리는 과연 그러한 상황을 그저 농담으로 얼버무릴 수 있을까? 농담조의 정치적 스캔들이 만연한 지금의 시기는, 어쩌면 우리에게 곧 다가올 폭력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에 의해 성사된다. 즉 그것은 결국 진정한 파국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를 외면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비록 더이상의 후속편은 없지만, 어찌됐든 우리가 괴수의 존재를 의도치 않게 알아버린 이상, 고어-자본주의의 세계관은 (본 전시의 파국적인 엔딩과 무관하게) 계속해서 확장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