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랑 나랑은 지금 안 되지.”
-아이유, ‹너랑 나›(2011)
나의 세계는 계속해서 망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상황의 발단을 종잡을 수가 없다. 심지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들이 망하고 있는지조차 섣불리 해명할 수가 없다. 다만 망하는 과정을 체감할 뿐이다. 만성적인 피로와 우울감, 무기력증과 같은 증상들은, 그에 대한 일종의 징후다. 앞서 굳이 ‘세계’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어찌됐든 이 모든 상황이 단순히 나라는 개인으로부터 유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막연한 예감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를 파괴할 의사가 없다. 그러므로 무언가가, 이를테면 제도와 같은 ‘외부’의 환경이 나를 둘러싼 채 망하고 있는 것 같고, 나는 그 과정에 거의 실시간으로 휩쓸리는 중인 것 같다.
그러나 이때의 제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이 좌파 지식인이라면, 즉각 자본주의 체제를 떠올리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후기 자본주의의 역학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내가 체계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납득하지 못하겠다. 나를 설득하려는 시도는 소용이 없다. 설득은 대개 논리의 문제이고, 내가 체감하는 파국은 분명 논리의 문제에서 벗어나 있다. 이를테면 망하는 과정은 나의 불확실한 경험에 국한돼있고, 단순히 논리로 그것을 재단할 수는 없다. 모든 게 추상적이다. 제도 또한 추상적이다. 뒤늦게나마 단언하자면, 나는 그것에 계속해서 휩쓸릴 뿐이다. 그러한 단언은 그저 패배주의에 절어있는 나의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수단인가? 잘 모르겠다. 나는 철저히 고립돼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세카이계(セカイ系)가 아니다.
세카이계는 ‘나’와 ‘너’의 관계성이 세계의 문제로 비약하는 순간 발생한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너’는 성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세계는 ‘너’라는 타인을 미처 수용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즉 그것이 망하는 과정은 오로지 나만이 감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계성을 형성할 수 있는) 연대의 여지가 없다. 다만 우리는 계속해서 무수한 ‘나’들로 부서진다. 세계는 계속해서 ‘나’에게로 함몰된다. 이를 에세이 영화의 맥락에서 재고했을 때, 아마도 함몰의 순간들은 세계와의 지속적인 부딪힘을 유발할 것이다.이때의 ‘나’는 심지어 작업을 전개하는 작가 본인일 수도 있다. “에세이 영화가 본질적으로 작가의 사유와 성찰을 심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장르라면, 그것은 언제나 당대적인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얼핏 사적인 차원에서 구성된 내러티브를 배제하는 언사로 들리지만, 오히려 에세이 영화의 특정성은 개인을 발단으로 삼았을 때, 비로소 명확해진다. 이를테면 에세이 영화는 오프닝 크레딧이 오르기도 전에, 작가에 의해 미리 규정된 해답지를 풀이하는 대신, 아직 온전히 주체화되기 이전의 개인이 특정한 세계와 대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유의 파편들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사유의 파편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그러한 사실은 은연중에 에세이 영화의 자율성을 보증한다.” 권시우, 「사용자 안내서: 에세이 영화를 통해 (새로운) 개인을 사유하기」, 2021. 이때의 부딪힘은 유의미한 사건이다. 혹은 에세이 영화는 부딪힘이라는 사건을 다양한 방식으로 성찰함으로써, 그것을 종내 유의미하게 만든다. 반면 지금의 파국은 부딪힘을 거듭 추상화하면서, 그것이 (일종의 자기 성찰과 조응하는) 사건으로 귀결될 여지를 무마한다. 그 과정은 충분히 영화적이지 않다.
영화적이라는 표현이 다소 모호하게 들린다면, 차라리 프레임이라는 (비)물리적인 단위가, 앞서 언급한 추상화의 과정을 미처 수용할 수 없다고 해두자. 이제 세계와의 부딪힘은 프레임의 나열들로 온전히 재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었다. 분명 그것에는 나름의 운동성이 존재하지만, 결코 영화적인 의미에서는 아니다. 영화는 무엇보다 시청각적인 매체다. 즉 관객은 영화를 어떤 식으로든 보거나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파국은, 오로지 ‘나’에게만 귀속돼있기 때문에, ‘너’와 공유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은 ‘나’의 감각을 (불확실하게) 자극하고, 그럼으로써 순전히 주관적인 차원에서 현존하고, 그 과정에서 결국 ‘나’는 철저히 고립되고 만다.
물론 그러한 상황은 새로운 에세이 영화를 구성하기 위한 또 다른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영화라는 매체의 자기 성찰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 그러나 최소한 ‘11회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에서 공개된 작업들 대다수는, 포스트-매체적인 차원에서 영화를 숙고하려는 일종의 내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들은 대개 영화에 무관심하다. 심지어 무빙 이미지로 구현된 작업들마저 그러하다. 중요한 것은 영화의 미래 따위가 아니라, 지금 ‘나’에게 당면한 파국을 어떻게든 증언할 수 있는 수단을 모색하는 일이다. 나는 전시장의 면면에서 그러한 조난 신호를 발견했다. 그렇다면 이때의 조난 신호는 ‘나’의 구조를 어떤 식으로 요청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