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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택

우리 걸어다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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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걸어다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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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단. JUICY PARTS (쥬시파츠) & UwU-digress, 2022, 2채널 2D 애니메이션, 20‘20“, 컬러, 사운드, 작가 제공

* 이희단 작가의 영상 작업 〈JUICY PARTS (쥬시파츠)〉와 〈UwU-digress〉는 1월 24일부터 2월 20일까지 본 페이지에 공개됩니다.


(본 비평의 제목인 “우리 걸어다니게”는 이희단 작가의 작품인 〈UwU-digress〉의 내레이션의 일부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희단 작가의 〈JUICY PARTS〉와 〈UwU-digress〉는 화이트 노이즈에서 열린 전시 《Trajectorial Lungs》를 이루는 영상 설치 작품들이다. 큰 스크린 프로젝터로 투사되는 〈UwU digress〉는 주인공 화이트와 테일러, 두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대화로 시작된다. 화이트는 테일러에게 이 세계가 지긋지긋하다고,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는 이 세계가 전부 가짜라고 말하며, 이 세계로부터 나가고 싶다는 말을 한다. 그 다음으로 잠깐의 실사 영상으로 차들이 도로를 달리는 모습이 나온다. 그 다음 영상은 “LoL”, “T_T”, “WTF” 등의 기표들이 의인화된 것 같은 캐릭터들이 “UwU”의 실종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캐릭터들은 이 일에 대해 상부와 논의를 해야 한다는 식의 결정을 하고 “정신연결”을 통해 이동하는데, 여기서 다른 채널에서 나오고 있던 캐릭터들과 만난다. 상부의 캐릭터들은 UwU를 찾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 다음 이어지는 내레이션은 자주 이용되는 이모티콘이었던 UwU가 언어 이미지의 흔적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그렇지만 LoL이 그 흔적들을 추적하는 여정을 떠났다는 설명을 한다. 이 내레이션이 이어지는 동안에는 UwU와 연관된 여러 디지털 이미지가 드러나고, 그 와중에 전시장을 매핑(mapping)한 이미지도 드러난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LoL이 UwU를 결국 찾게 되는데, 실사 이미지의 인물로 등장하며, UwU는 화이트라고 불린다. 또 LoL은 테일러라고 불린다. 둘은 “무엇이 가짜가 아닌 진짜일 수 있는지”, 또 “선택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철학적 토론이라 요약될 수 있는 대화를 하고 영상은 끝이 난다. 그리고 그 동안 바로 옆의 〈JUICY PARTS〉에서는 블러디 걸, 블론드 걸, 레드 걸, 고져스 걸, 등의 여성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인류와 역사의 절멸에 관한 대화를 하는 영상이 모니터에서 나오고 있다.


나에게 이 영상 작품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지점으로 여겨졌던 것은, 기표가 의인화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는 점, 혹은 작품의 크레디트에서 알 수 있다시피 하나의 기표를 하나의 인물이 담당한다는 점, 그리고 모두 여성으로 보이며 또한 “…girl”이라 이름 붙여진 애니메이션 캐릭터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대화가 (퀴어) 커뮤니티에서 오고 가는 정체성에 대한 대화와 겹쳐져 느껴졌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두 흥미로운 지점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점이다.

별명은 이미지와 연관할 수 있다. 별명은 스스로가 이름 붙여서 다른 사람에게 주장할 수도 있다. 게다가 별명은 여러 개를 가질 수도 있다. 반면 본명은 자기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주어진 것이고, 자기 이미지와의 관계도 미세하다. 대신 본명은 부정할 수가 없고, 존재를 “공식적으로” 표지해준다. 우리의 본명은 동사무소에 우리의 거주지와 함께 등록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사를 갈 때 (사람과 똑같은 방식은 아니겠지만) 함께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본명은 존재를 오롯이 표지해줄 수는 없다. 어떤 점에서 존재의 삭감이 일어나고 그런 다음, 그런 한에서 존재를 표지하게 해준다. 그 어떤 점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되는 공간으로, 그 공간은 실재와 완전히 겹쳐지지 않는다. 아마 그래서 우리에게는 거짓말이라는 것도 있고, 다른 사람의 애절한 한 마디 말을 의심해볼 정신이 들기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불만으로 인해, 본명이 나의 존재를 오롯이 표지할 수 없는데 나는 본명으로만 세계로부터 호명된다는 점으로 인해, 우리는 별명을 짓기도 한다.

그러한 별명은 정체성 정치와도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본명이 아니라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는 사회적 공간에는 기존의 기업 문화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신생 스타트업이라든가, 절친한 친구 사이, 또 수많은 온라인, 오프라인 커뮤니티가 있다. 또한 퀴어 정체성을 표방하는 개인들도 자신의 본명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주어진 것, 주민등록부에 등록된 것, 언어를 통한 억압인 것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시도일 것이다.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져 자기 자신이 자신의 이름을 새로 붙여 고유성을 획득하려는 시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체성 정치라고 하면서 나는 무엇을 가리키려는 걸까? 나는 그것을 특별한 정체성, 특히 소수자의 정체성을 하나 이상의 개인들이 동시에 표방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존재를 가시화하려는 움직임으로 이해한다. 또한 그러한 움직임이 발생하는 이유, 필요한 이유는, 그러한 소수자의 정체성은 상징계-국가-제도 속에서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 정치는, 특정한 사태 속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전제되는 객관적 사실에 입각해 해석하고 반응하는 것을 경계하며, 오히려 오직 주관성 속에서만 진실이 포착될 수 있다고 믿는 태도와 동기화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보편적인 (것으로 전제되는) 시선이야말로 그들의 존재를 부정했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 위치, 즉 자기 자신들의 위치에 (사회의 보편적 가치들이 부정할 수밖에 없었던) 진실이 자리 잡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정체성의 자기 표명 역시 기표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은 흥미롭다. 나는 주어진 성, 주민등록부에 등록된 (두 성 중 하나인) 남성이 아니라, 나는 “시스”+“호모”+“남성”이다. 또는 나는 “논바이너리”다.

그런데 이러한 기획은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사회로부터 지워지는 것을 막고 가시화되기 위해서 기표를 붙이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나, 그 기표가 오래될수록 다시 자기 자신이 그 기표가 가리키는 전형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곤궁을 맞이하게 된다. 그 어떤 새로운 기표의 연쇄로도 내가 온전히 드러난다고, 표현된다고, 기입된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기표가 주는 존재의 삭감은 우리가 본명에서 이미 경험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곤궁은 더 곤란해진다. 그렇다면 기존의 분류 체계도 우리의 존재를 억압하며 삭감했고, 또한 새롭게 만들어낸 기표도 우리의 존재를 삭감한다면 우리는 왜 기존의 분류 체계로부터 멀어지려고 했던 것일까? 다시 말해, 본명도 우리 자신의 존재를 삭감하고, 별명도 삭감한다면 우리는 왜 본명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했던 것일까? 즉 언어가 이미 이러한 존재의 삭감, 결여를 항상 포함할 수밖에 없다면, 왜 여전히 언어의 세계의 일부일 새로운 이름 붙이기가 필요할까? 이에 대한 답을 곧장 찾아보기 전에, 이름을 붙여 동일자와 타자를 구분하는 방식 자체에 있는 곤궁에 집중해보자.

동일자와 타자로 이루어진 집단을 설명하는 두 방식으로서 “동일성 안의 차이” 개념과 “차이 안의 동일성” 개념이 있는 것 같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전자가 “게이”라는 동일한 울타리 안에 서로 다른 차이를 갖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후자는 한 개인은 “게이”라는 정체성에 완전히 부합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며, 그러한 발견이 그러한 개인들 사이에 공통적이라는 점에서 “게이”로서 같다는 것이다. 전자가 다양성을 닫힌 집합을 통해, 보편적인 개념인 언어를 통해 보증함으로써 곤란해진다면, 후자는 보편적인 것을 해체하거나 분산시키지 않고, 오히려 보편적인 것을 존재를 분산시키는 것으로서 재정의한다. 조운 콥젝, 『여자가 없다고 상상해봐』, 도서출판 b, 2015, 16쪽.

전자는 울타리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남성적 정의, 선적 정의에 기댄다는 점에서 그 선을 어기는 내부의 요소는 받아들일 수 없다. 예를 들면,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로서 그 안에 속한 모든 사람의 의견을 존중한다. 다만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적 사유만 빼고.” 하지만 후자는 그러한 선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전자의 그러한 선이 각각의 요소 안에 잘게 분할되어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에 완전히 부합하는 그 어떤 개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킴으로써 민주주의다.” 선적 정의는 배제를 점점 줄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어떤 지점에 가서는, 즉 그것을 출발시킨 지점에서 가서는 멈출 수밖에 없다.

심리적 현실, 또는 잠재적 현실의 정동으로부터 언어의 현실을 더 폭넓게 끌어오기 위해서 새로운 기표의 도입은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새로운, 갱신된 현실의 확보가 “동일성 안의 차이” 개념과 동기화 되어서, 기표의 선적 정의에 기대서 충실히 이루어질 수 있을 거라고 더 이상 생각할 수는 없다. 새로운 기표의 도입은 성적 정체성의 영역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보편적인 개념어를 예외적 요소로 하여 만들어진 동일성 내부에서 차이를 즐기는 방식은 남성적 존재론의 방식으로써, 애초에 억압을 그 원리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로 도입된 기표가 주는 동일성에 안심하고 그 안에서 차이를 즐기기만 할 것이 아니라, 기표 하나가 새로 도입될 때마다 그 기표가 품고 있는 결여도 함께 새로 도입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도입된 새로운 결여야말로 새로운 이름 붙이기가 계속되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이 이미지를 언어로 나타내는 방식은 하나는 아닐 것이다. 우선 가장 전통적인 방식에는 문장을 통한 묘사가 있다. 이 방식으로 위의 이미지를 나타내면,

“흐르는 강 위로 다리가 있고 그 뒤로 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그 밑의 길을 따라 걸으면 작은 집이 하나 나오는데 그 모든 것들 뒤로 눈이 녹지 않은 높은 산이 있다.”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이 있을 텐데, 이런 방식이다.

“구름 구름 구름 하늘 구름 구름 구름
구름 나뭇잎 구름 나뭇잎 구름 눈 덮인 산
나뭇잎 나뭇잎 구름 나뭇잎 구름 눈 덮인 산
나뭇잎 나뭇잎 나뭇가지 나뭇잎 나뭇잎
바위 꽃 나뭇잎 잔디 잔디 바위 작은 집
바위 바위 다리 잔디 잔디 잔디 잔디 잔디
좁은 길 잔디 바위 강 바위 잔디 잔디 잔디
잔디 잔디 주황색 꽃 강 강 잔디 잔디 잔디”

이 방법은 묘사로, 즉, 단어들이 문법에 맞게 배치된 결과인 문장이 만들어내는 의미 작용으로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나타낼 수 있는 단어들의 배치로 전체 이미지를 그린다. 그런데 묘사에는 원근감이 있지만 지금 이 방법에는 원근감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단어의 개수가 많아지고, 단어의 종류도 많아진다면 위의 회화 이미지에서 본 것과 같은, 그리고 묘사의 방법에서 느낀 것 같은, 원근감이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고 읽는 이도 어렴풋하게라도 그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회화에서의 원근감도 선의 기울기와 명암의 대비로 나타나는 것이지 정말 깊이와 두께가 있어서는 아니라는 점에서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미지를 후자의 방식으로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기표들인 “구름”, “눈 덮인 산”, “나뭇잎”, “작은 집”, 등등은 우리에게 그 기표가 불러일으키는 전형적인 이미지를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또한 그렇지 않은 이미지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왜냐하면 “눈 덮인 산”이라는 기표는 아마추어 회화 작가의 눈 덮인 산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지만,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생수 브랜드 에비앙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이상우 소설가의 「스카이트리보다 높은」이상우, 「스카이트리보다 높은」, 《나는너를중세의미래한다1》, 아트선재센터, 2019.9.18.~11.17.에 등장하는 눈 덮인 산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후자의 방식, 기표로 이미지 만들기의 방식은 기억의 차원, 또는 아카이브라고 부는 차원과 관계를 맺는다.

우리가 어떤 이미지를 후자의 방식으로, 기표로 이미지 만들기의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다만 독특한 방식은 아니다. 우리가 길 밖의 풍경을 볼 때 우리는 초록색의 흔들리는 무언가를 다만 초록색의 흔들리는 무언가로 인지하지 않고 “나무”라는 기표를 통해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지를 받아들일 때 어떤 면에서 후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긴 한다. 그것을 후자의 방식으로 글로 써 드러내는 것은 다른 문제이지만 말이다. 우리는 이 방식을 “텍스트 매핑”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그렇게 인식된 기표는, 즉 “나무”는 또 전혀 다른 이미지들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상적 풍경과는 다른, 미술 작품들을 볼 때 시각적 충격이나 혼란을 느끼는 이유는 그러한 구멍이 감추어진 상태가 아니라 드러난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한 구멍 뚫림, 또는 기표의 의미작용의 궤적이 가장 극적으로 이루어지는 순간은, 기표 “A”가 이러저러한 연상을 거쳐 다시 “A”를 가리키게 되었을 때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A가 고유명사화 된 것과 같다. 우리가 창 밖 흔들리는 풍경 속에서 초록색의 움직이는 무엇을 “나무”로 인식한 뒤 기표 “나무”가 불러일으키는 이러저러한 이미지를 떠올리다가 우리에게 기표로서 드러나 있는 “나무”에 생각이 미치는 것이다(지금 이렇게 문장에서 명사로 쓰이고 있어 우리 눈에 들어오는 기표 “나무”말이다).

〈textured_〉원래는 180도 회전되어 있는 이미지이지만, 점점 이미지가 기표로 변화되는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변형하여 인용했다.는 〈JUICY PARTS〉, 〈UwU-digress〉와 함께 전시를 이루는 디지털 프린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이미지 조각들을 (마치 모스부호처럼) 기표로 변환시키는 작품으로서, 기표를 이미지의 작은 조각으로 (마치 하나의 기표가 하나의 픽셀을 이루는 것처럼) 변환시키려는, 위에서 설명한 “텍스트 매핑”의 방식과 대조를 이룬다. 어떤 3차원 공간을 매핑하려 할 때, 작은 2차원의 이미지 조각들을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textured_〉에 사용된 이미지 조각들이 바로 이 전시장을 그렇게 매핑하려 할 때 필요한 조각들로 보인다. 원래 “texture”라는 단어는 “질감”이라는 단어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경우에는 “text”와 “ed”가 결합하여 “텍스트화된”으로도 읽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물론 그렇게 텍스트화된 대상은 이미지, 특히 이 전시장의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의 매체를 다른 매체로 변환하는 신선하지도, 특별하지도, 정교하지도 않은 시도 자체가 아니라 이 작품이 〈UwU-digress〉의 방식과 등 뒤로 맞대고 있음으로써 전해주는 인식이다.

그것은 “화이트 노이즈”라는 이름의 전시공간을 고유명사로서 충실히 다루면서, 그것이 단순히 어떤 주소에 등록되어 있는 말끔한 백색의 공간이 아니라, 잘 포착되지는 않지만 여하한 어떤 것이 덧붙여진 공간임을 시각화하기 위한 시도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을 전시공간이라는 곳은 비교적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방문객의 입장으로 “화이트노이즈”라는 전시공간에 갈 때, 그때마다 “화이트노이즈”에는 여러 사물과 이미지가 위치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방문을 끝낸 다음에는, 어디에 다녀왔다는 친구에 질문에 우리는 “화이트노이즈”에 갖다 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화이트노이즈”가 해당 전시가 이루어졌던 기간 뒤에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띌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한 번도 같은 모습을 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알고, “화이트노이즈”가 그 전시의 사물들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도 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무엇을 아냐면, “화이트노이즈”에서 그 어떤 전시도 열리지 않아 그 공간이 계속 백색의 텅 빈 공간으로 머물러 있다면 우리가 그곳을 방문할 이유가 없어진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그 공간을 “화이트노이즈”라고 다른 사람에게 부를 일이 없어진다는 것도 안다. 그러므로 화이트노이즈는 단순한 주소가 아니라 어떤 것이 덧붙여져 있는 것인데, 그렇다고 어떤 정해진 이미지가 덧붙여져 있는 것은 아니고, 차라리 “특정한 이미지나 대상이 있다가 없어진 것”이 덧붙여져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때 덧붙여진 것이 결여라고 생각한다. 고유명사화한다는 것, “textured” 된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textured_〉는 바로 이러한 과정을 비유적으로 시각화한 것이고, 그러한 방식은 〈UwU-digress〉에서 하나의 기표를 하나의 주체가 맡다가 결여를 마주하게 되는 방식과 같은 주제를 정반대로 보여준 것이다.

본 영상을 보면서 “기표에 나를 맞추기”라는 표현이 떠오른 것은, 영상 속 “LoL”, “T_T”, “ㅋㅋㅋ” 등의 캐릭터들의 표정이 각각의 기표의 의미작용에 부합하게 설정된 채로 변화가 없기 때문이었다. LoL는 의기양양하고, T_T는 우울하고 ㅋㅋㅋ는 비웃고 있다. 그 이미지는 나에게 어떤 정체성의 기표를 명찰처럼 갖고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비유로 보였다. 하지만 기표를 보증해주는 것이 없는 것처럼, 기표가 주체에게로 보증해주는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게 가능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조건은 있다. 이전 시대에는 그것이 소위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불리며 대타자의 대타자 역할을 하는 외적 권위-제도였다. 현시대에는 다른 조건으로 변형되었는데, 그것은 “커뮤니티” 같다. 커뮤니티의 번역어로 “공동체”라는 번역어가 있음에도 “커뮤니티”라고 표현한 것은 내가 커뮤니티로써 바로 “인터넷 커뮤니티”라고 쓰일 때의 커뮤니티에 집중하고 싶기 때문이다. 특정한 하나의 커뮤니티에서 서로가 나눠 갖는 기표는 커뮤니티에 의해 보증된다. 이러한 방식은 언뜻 민주주의적이여 보이는데, 하나의 커뮤니티가 다른 커뮤니티와 충돌하거나 하나의 커뮤니티가 이른바 “외부 세계”와 갈등을 일으킬 때 나타나는 균열은 그러한 기대를 배반한다. 그때 나타나는 균열에 대해 특정한 커뮤니티는 폐쇄성을 보인다. 이것은 외적 권위가 커뮤니티 내부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의 반증이다. 본 영상 작품에서도 LoL, T_T, ㅋㅋㅋ의 캐릭터들에게는 상부, 보스, 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xxgirl들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 바로 다른 채널에서 나오고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유추해보면 그들은 “말단슬랭”인 하부의 존재들을 삭제시켰다가 다시 만들 수도 있고, 이미 여러 번 그렇게 해본 적이 있는 능력자들이다. 역사 전부를 데이터에 보관해두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사라진 UwU로 인해서 어떤 문제가 생긴 것 같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리셋”을 진행하려 하는데 시스템에서 이러한 응답을 반복 송출한다. “오염된 리셋만이 가능합니다”, “시스템에서 온전한 백업 파일을 찾지 못했습니다.”, “부작용 없는 복구를 장담하지 못합니다.”, 등등.

목소리를 가진 존재인 UwU는 그런 세계에 신물을 느낀 것이다. 어떤 정체성의 기표를 표명함으로써 또한 그 기표의 의미작용을 고정된 것으로 여기면서 그 기표에 어울릴법한, 부합하는 말만 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에. 그러면서도 스스로도 그것을 벗어나는 언어의 유혹을 느끼기 때문에 계속 새로운 또 다른 정체성의 기표를 만들어 내는 것에 신물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신물이 나는 세계에 부합하기와, 애초에 한 기표는 그 기표로서 간극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임으로써 그와 함께 자기 자신 안의 분열도 인정하게 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옳다는 의미에서 “틀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다름은 다름이 아니라 “틀림”이라는 의미에서 “틀린” 것이다.이성민, 「정말 “틀리다”가 아니라 “다르다”일까」,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 도서출판 b, 2016, 66쪽 참조. 두 방향이 어떤 시점에 가서 결국 같은 수의 새로운 기표를 도입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전자의 세계는 붕괴의 불안을 회피하며 확장되는 세계일 것이고, 후자의 세계는 각각으로는 더 이상 붕괴가 될 수 없는 불모지들이 서로에게는 토양이 되어 쌓인 세계일 것이다.

영상의 마지막에서 훼손된 이미지로 존재하는 LoL(테일러)은 “SILENCIO”라는 기표를 한 글자씩 발음한다. 실렌시오는 데이빗 린치의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에 나오는 극장의 이름이다. 본 작품은 테마 면에서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유사한 면이 많은데, 우선 여성 캐릭터(의 기억)가 실종된다는 설정, 두 여성 캐릭터가 각각 이명을 갖고 관계를 맺는다는 점, 등장인물이 가발을 쓴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 한 세계와 다른 세계가 충돌하며 왜곡이 발생한다는 점이 그렇다. 본 작품 속에서는 그렇게 충돌하는 두 세계는 “기표가 의인화된 디지털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의 세계”와 “혼자서 존재하는 삭막한 현실의 세계” 같다. 하지만 영상의 마지막 크레디트에서 나오는 “UwU 담당(본명 화이트)”라는 표현이 말해주는 것처럼,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는 주체에서 만난다. 다시 말해, 어느 쪽 세계는 진짜고 다른 쪽 세계는 가짜인 것이 아니라, 두 세계 모두 개인이 주체로서 행위할 때 이른바 “진짜”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개인이 주체로서 행위할 때 두 세계는 만나게, 만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고유명사(Proper Name)는 흔히 사유재산(Property)과 결부된다. 따라서 고유명사에 대한 공격은 반부르주아적으로 보인다. 텍스트는 고유명사를 가진 “작자”에게 소유(appropriate)된다. 또는 저자(Author)의 이름에 의해 권위화된다. 바르트는 그러한 “작자”를 부정하는 것과 텍스트를 간텍스트적인 다양성 안으로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텍스트를 고유명사가 없는 세계, 또는 “일반적”인 구조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텍스트가 “작자”로 환원되지 않으며 소유되지 않는 의미의 과잉성을 가질 때, 우리는 그 단독성을 고유명사로 부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칸트라고 부르는 것은 “작자”를 가리키지 않는다. 또 서양이나 독일에 의해 전유된 철학자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칸트의 텍스트는 “공공적”으로 열려 있다. 나는 그 가능성을 칸트라고 부른다.”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송태욱 옮김, 한길사, 2005, 188쪽. 이성민, 『사랑과 연합』, 도서출판 b, 2011, 239쪽에서 재인용.

“여기서 가라타니는 “칸트”라는 고유명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단독적 주체는 가라타니 자신이다. 그는 단독적 주체로서 “나는 그 가능성을 칸트라고 부른다”라고 하면서 고유명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제스처를 통해서 그는 칸트를 타자의 편에, 권위의 편에 놓지 않고 주체의 편에 놓는다.”이성민, 『사랑과 연합』, 도서출판 b, 2011, 239쪽.

이모티콘은 공공적으로 열려 있다. 모두가 이모티콘을 자유롭게 쓴다. ㅋㅋㅋ가 자기 자신의 우월성에 대해 논평하며 말하듯, 이모티콘은 매초 복제되어 호출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사유재산에서 벗어나 있으며, 또한 원본, 작자가 없고, 간텍스트적인 다양성 안에 위치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상에서 본 것처럼, 그들에게는 “보스”라고 불리는 상부가 있다. 또 우리가 최근에 마주하게 된 대상 중에는 NFT(Non-Fungible Token)라고 불리는 것도 있다. 그 모든 이모티콘 사용의 역사를 경제적인 가치로 환원하여 다시 사유재산으로 갖는 개념이다. 공공적으로 보였던 이모티콘의 존재가 실제로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존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이모티콘의 간텍스트적인 다양성의 세계, 작자 없는 세계와 반대로 역행하게 되는 것일까? 그렇게 볼 수 없다. 오히려 결말이 정해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과정이었다.

바르트가 고유명사 개념과 사유재산 개념을 결합된 것으로 보아 사유재산의 해체를 위해, 즉 작자의 권위의 해체를 위해 고유명사 역시 해체하여 일반명사들의 세계로 환원하려고 했던 것에 반해 (그리고 실제로는 그렇게 될 수 없음을 고유명사 없는 사유재산, 이름 없는 주인의 사유재산인 NFT라는 사유물을 통해 역사적으로 확인하게 된 것에 반해), 가라타니는 고유명사 개념과 사유재산 개념을 분리하여, 고유명사 개념을 유지하면서도 사유재산 개념을 함께 가져가지 않고, 오히려 가라타니 자신이 어떤 명사(텍스트)의 의미의 과잉성을 발견하여 그것을 고유명사로 변환시켜 공공적으로 열어 놓고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의미의 과잉성의 발견이 가라타니라는 주체의 의해서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가라타니의 소유물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있다. 이것은 마치 어떤 도둑이 자기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사물을 훔쳐 다른 사람들의 허기를 해결해주는 일인데,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그 사유물이 아니라 도둑의 눈, 도둑의 주체, 도둑이라는 주체다. 본 작품에서는 LoL, ㅋㅋㅋ, T_T등의 캐릭터의 담당들과 UwU 캐릭터의 담당의 방향이 이런 식으로 갈렸다고 볼 수 있다. UwU를 고유명사로 봄으로써 화이트는 스스로 주체가 된 것이다. UwU는 단순히 실종된 것이 아니라 화이트에 의해 실종의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을 얻었고 또한 실제 인간의 형상으로 영상의 마지막에 드러났던 것이고, 다른 인물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 크레디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은 그들의 이름을 얻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