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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수

해적질의 옹호와 현양 3. 아카이브의 도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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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수

해적질의 옹호와 현양 3. 아카이브의 도둑들

[그림 4], 당신이 무언가를 좋아한다면, 다운로드하세요. 그건 아마 거기에 영원히 있지 않을 겁니다. […] 해적질은 보존입니다. 당신이 무언가를 좋아한다면, 그걸 불법 복제하세요. - UbuWeb

아카이브의 도둑들

‘우부웹(UbuWeb)’은 미국의 작가 케네스 골드스미스가 운영하고 있는 실험영화, 비디오아트, 음악 등을 망라하는 아카이브 사이트이다. 특이한 점은 해당 사이트에 올라오는 자료들 대부분 작가나 저작권자의 허가를 받지 않고 올린 자료들이라는 것이다.이러한 점 때문에 우부웹은 여러 논쟁을 야기하기도 했다. 실험영화 DVD 레이블인 르부아(RE:VOIR)의 대표인 핍 초도로프가 관리하는 메일링 서비스 ‘프레임워크’의 아카이브에는 우부웹에 대한 작가들의 논쟁이 아카이빙되어 있다. 우부웹 사이트는 2010년에 해킹을 당하면서 폐쇄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는데, ‘쌤통이다’(의역)는 말로 시작되는 해당 논쟁 스레드에는 우부웹에 대한 작가들의 여러 옹호와 비판의 의견이 난립하고 있다. 해당 논쟁은 다음 주소에서 살펴볼 수 있다.이 논쟁에 대한 회신으로 케네스 골드스미스가 쓴 공개서한은 본 링크를 참조하라. 또한, 해당 사이트에 아카이빙되는 자료들은 대부분 인터넷에서 떠도는 파일들이라는 점을 추가로 언급해둘 수 있겠다. 카라가르가는 우부웹이 소스를 받아가는 대표적인 장소다. 2022년 6월 12일을 기준으로, 카라가르가의 우부웹 계정은 총 1,417개 토렌트를 받아갔다. 사실 우부웹은 디스코드, 텔레그램, 브콘닥테, 유튜브, 웹하드의 중간 유통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이들은 저작권자나 감독의 요청이 있으면 영화를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보통 감독들이 우부웹에 영화를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침해했다는 상업적인 이유보다는, 자신들의 작품을 적절한 조건에서 관람자들에게 만나게 하려는 미학적인 이유인 경우가 많다.마이클 시신스키는 레터박스 리스트의 한 댓글에서 이와 관련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한 바 있다. “하지만 이상적인 조건을 만족할 수 있을 때까지 작품 감상을 계속 미루다 보면 결국 작품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 우리가 이상적인 조건에서 그들을 볼 수 있을 때까지 그러한 작품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간주하는 것은 일종의 칼뱅주의적인 자기 처벌처럼 보입니다.” 이는 이들이 제공하는 소스들이 빈곤한 이미지라는 점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부웹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 관람자의 입장에서 불편한 점이 적지 않다. 그들이 제공하는 영상은 많은 경우가 VHS의 복사본과 같은, 거의 대상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쓰레기 같은 화질의 영상들이다. 이들은 또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가령, (최근에 수정되었지만) 로버트 비버스의 ‹The Hedge Theatre›라는 작품이 ‹The Stoas›라는 작품(구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작품이다)으로 잘못 표기되어 올라오기도 했다.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고, 열등한 소스들을 분류하고, 좀 더 괜찮은 판본을 찾아 교체하는 일은 당연히 많은 인적 노동이 투입되어야 하므로, 우부웹과 같이 소수의 자원봉사자들로 운영되는 사이트에서는 현실적으로 이를 수행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비공개 트래커들이 수행하고 있다. 여러 비공개 트래커 사이트에는 트럼핑(Trumping)이라는 제도가 있다. 이는 어떤 열등한 소스의 파일이나, 인코딩 시의 여러 문제들이 있는 파일을 더 나은 품질의 파일로 교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결함이 있는 파일들은 ‘트럼핑 가능(Trumpable)’이라는 태그가 붙어 따로 관리된다. 이는 다시 말해, 비공개 트래커들이 어떤 영화를 가능한 최상의 품질로 유지, 보존하는 역할을 하며, 빈곤한 이미지의 유포를 통제하는 쪽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에리카 발솜이 다음 글에서 적절히 지적했듯, 이에 따라 슈타이얼이 말하는 ‘빈곤한 이미지(poor image)’는 거의 역사적인 개념이 되어가고 있다. Erika Balsom, “Artists’ film and video online”, Art-agenda, 2020-06-08. 이런 점에서 카라가르가와 같은 사이트를 하나의 대안적인 아카이브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당장 카라가르가와 같은 사이트가 폐쇄된다면, 영화사의 몇몇 작품들은 당분간 볼 수 없는 채로 웹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국내에서의 안타까운 사례로는 몇 년 전 클럽박스가 사전 통지 없이 갑자기 서비스를 종료해버린 일이 떠오른다. 진정한 디지털 재난.​

어떤 영화가 소실되는 것이 꼭 옛날 이야기만은 아니다. 당장 최근의 사례로, 작년에 있었던 브라질 시네마테크의 화재 사건이나, 하라 마사토 감독의 저택에 난 화재로 인해 감독 본인만이 소장하고 있던 여러 필름들이 소실된 사건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물론 이들은 비물질적인 ‘파일’이 아닌 물질적인 대상인 ‘필름’에 대한 사례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대개 비물질적인 파일을 물질적인 대상(마그네틱 하드 드라이브)에 보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디지털 파일들도 천재지변 하에서는 같은 위치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다음 22번 각주의 자료집에서 유운성이 지적한 대로 마그네틱 하드 드라이브는 장기적인 보존 매체로 적절하지 않고,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하드 드라이브와 별개로 백업 용도로 사용한다는 NAS 또한 본체 자체가 불에 타거나 침수되는 천재지변에 대해서는 대응할 수 없다. (그렇기에 몇몇 NAS 제품들은 클라우드 저장소 서비스와 연동되는 오프사이트 백업을 지원하고 있기는 하다. 다만, 클라우드 저장소 서비스들도 장기적인 보존보다는 임시적인 백업 용도로만 생각하는 것이 적절한데, 무제한의 용량을 제공해준다며 홍보한 아마존 클라우드나, 구글 G Suite(현 워크스페이스) 교육용 계정의 서비스 종료 사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여담으로, 픽션이기는 하나 김은희의 글 「2065년, 어느 필름아키비스트의 기록」에서는 모종의 이유로 김기영의 ‹렌의 애가›의 모든 필름이 소실되는 이야기가 흥미롭게 서술되어 있기도 하다. 유운성 평론가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된 ‹‘수집’: 소유에서 공유로, 유물에서 비트로› 심포지엄에서 디지털 영상작품의 최선의 보존 전략은 산포(dissementation)라고 말한 바 있다.유운성, 「영상 작품의 비물질적 소장에 대하여」,『소유에서 공유로, 유물에서 비트로』(서울시립미술관, 2020), 84~89. 가능한 많은 플랫폼에 영상작품을 퍼뜨리고 각자의 저장장치에 보관하도록 하는 것이 디지털 영상작품에 대한 최선의 보존 전략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산포라는 방식은 유운성이 지적했듯, ‘작가의 입장에서라면, 작품(에디션)과 그 전시(혹은 상영)의 희소성을 조절해 얻을 수 있는 금전적 보상이 사라지게’ 되므로, 작가의 동의가 없는 이상은 현실적으로 실현이 불가능한 이상적이고 급진적인 대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산포의 방식은 코로나 이후 생긴 몇몇 변화와 우연히 맞물리면서 의도치 않게 현실에서 작동하고 있다. 그 변화란…​

첫 번째로는 물론 코로나 이후 여러 상영 행사들이 자신의 거처를 온라인으로 옮겼다는 점이다. 여러 영화제들이 온라인으로 개최되었을 뿐 아니라, 온라인 스크리닝, 온라인 전시와 같은 형태의 행사가 굉장히 범람하게 되었다.이는 코로나 사태가 슬슬 마무리되고 있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이 글이 쓰인 시점에서 8월에 개막이 예정된 멜버른 국제영화제(MIFF)에서는 여러 작품을 온라인으로 상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런 행사들에 작품을 출품하는 감독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무단으로 복제될 것을 우려하며, 그걸 막기 위한 방안을 신중히 검토하며 작품을 출품할 것이다.온라인 영화제의 극초창기에는 이에 관한 애로사항들이 존재했던 듯하다. 가령 라브 디아즈의 ‹중지› 같은 경우, 영화제가 초기에 감상 링크를 링크만 있으면 누구나 접근이 가능한 ‘유튜브 링크‘로 보냈기 때문에 유출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바로 여러 가지가 정비되었고, DRM은 온라인 영화제가 플랫폼을 선정할 때 중요한 고려 요소가 되었다. 국내에서도 퍼플레이나 온피프엔과 같이 영화제들의 온라인 개최를 돕는 각종 업체들이 발 빠르게 생겨나기도 했다. DRM이나 지역 차단(Geoblock) 같은 것들은 온라인 영화제 출품 시 작품이 불법 복제될 것을 방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고려 사항이다.​

두 번째 변화는, 바로 그 DRM을 해제하는 방법이 널리 알려졌다는 점이다. 구글에서 개발한 와이드바인 DRM은 무료라는 이유 때문인지, 넷플릭스나 아마존 같은 대형 OTT뿐만 아니라, 크라이테리언 채널, MUBI, 심지어는 국내의 OTT 서비스들에서도 모두 사용되는 불법 복제 방지 기술이다. DRM을 무력화하는 방법은 기존에는 소수의 해적 그룹 사이에서만 암암리에 전해지는 대외비였지만, 2020년을 전후로 그 방법이 레딧을 비롯한 영미권 사이트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검색해 방법을 찾으면, 개개인이 OTT 서비스의 영상을 추출해 각자의 저장장치에 보관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가장 잘 알려진 도구는 Widevine L3 Decryptor라는 크롬의 확장 프로그램으로, 정말 간단하게 와이드바인 DRM의 해독키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널리 사용되었다. 하지만 2021년 5월부터, 구글에서 크로미움 기반의 브라우저를 업데이트하면서 해당 툴이 더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고, DRM을 해제하는 방법은 다시 소수의 해적들의 전유물로 돌아가게 되었다. Widevine L3 Decryptor가 막힌 이후, Widevine L3 Guesser라는 대체재가 잠시 등장했지만 이도 몇 달 가지 않아 막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2년이라는 시기 동안 폭발적으로 유통된 영화들의 수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터키의 모 영화제에서 온라인으로 처음 공개 상영된 하마구치 류스케의 ‹우연과 상상›은 상영이 끝나고 그 즉시 파일이 유통되었다. 각종 온라인 행사의 상영작들은 그것이 해적들의 눈에 띈 이상, 비공개 트래커들에 즉시 업로드되며, 각종 플랫폼에 유통되고, 각자의 저장장치에 보관된다. (이와 같은 사정은 배급사들도 잘 알고 있는지, 메이저한 배급사를 끼고 유통되는 ‘아트버스터’ 영화들의 경우 아예 온라인 상영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우연과 상상› 같은 작품들을 보존의 측면에서 논의하기는 어불성설일 것이다. 그보다는, 실험영화나 아티스트 필름(artist’s film)해당 용어는 주로 미술계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영상작품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는 표현이다. 이 표현에 대해서 일찍이 유운성이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이 용어는 일부 미술관 큐레이터들과 평론가들을 제외하고는 아직 한국에서 폭넓게 쓰이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이는 영화평론가들에겐 그야말로 괴이한 용어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artist’를 ‘예술가’로 받아들이건 – 그렇다면 ‘비(非)예술가의 영화’라는 더욱 괴상한 용어도 여하간 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미술가’로 받아들이건 – 우리는 굳이 파솔리니의 영화를 ‘문인의 영화’라고 부르거나, 모리스 피알라의 영화를 ‘화가의 영화’라고 부르거나, 테렌스 맬릭이나 (소피 파인즈와 작업한) 슬라보예 지젝의 영화를 ‘철학자의 영화’로 부를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 괴이하게 여겨지긴 마찬가지다.” 유운성, 「예술가의 동영상 – 태시타 딘의 ‹필름›과 르네 도말의『마운트 아날로그』 – 박찬경의 ‹만신›」, 2014-02-27.과 같은 상업적 유통망을 거의 찾을 수 없는 영역에서의 작품으로 논의를 한정하면… 그들 역시 상영 즉시 산포된다. 가령, 2021년 e-flux에서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EXiS)와 연계하여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온라인 상영되었을 때, 이들 또한 어떤 외국인 유저에 의해 즉시 비공개 트래커에 업로드되었다. 허나 이들은 ‹우연과 상상›과는 달리 작가에게 직접적으로 연락하는 것을 제외하면 합법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경로가 없는 작품들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부웹의 해당 트위터는 다소 황당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실제로 소피 롬바리와 같은 몇몇 감독들은 [그림 6]과 같은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좀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서…

“근데 정말로, 이제는 영화 링크만 봐도 넌더리가 나요. 실제 상영도 없고, 영사될 프린트도 없고, 아무도 영화에 대해 대화하지 않는 현 상황이 굳어진다면… 그냥, 시발 어딜 가든 링크밖에 안 보입니다. 시네마테크들이 주최하는 온라인 스크리닝이나 각종 사이트에서 온라인 큐레이팅된 어쩌고저쩌고 영화들이 떠돌아다니기만 하는. 그냥 끔찍합니다.” Enrico Camporesi, “Digital Pandemic; Programming and Accessing Artist’s Film During the Lockdown”, Millennium Film Journal, Vol.71-72(2020), p.113 해당 이미지는 독립 큐레이터이자 평론가인 아림단 센이 퐁피두 센터의 프로그래머인 엔리코 캄포레시에게 보낸 사적인 메세지이다.

[그림 6], “해적질은 보존입니다. 해적질을 당할 만큼 알려졌다는 건 최고의 성취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작품이 불법 복제될 만큼 충분히 좋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결코 가질 수 없는 어느 정도의 성공을 달성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화 평론가 아린담 센이나 에리카 발솜 같은 이들은 넘쳐나는 상영 링크에 대한 스트레스와 과식감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일반적인 온라인 스크리닝은 다른 행사들처럼 짧게는 하루, 길면 한두 달 정도로 상영 기간이 한정되어 있는데, 그런 한시적인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이 해적질-아카이브 충동의 큰 요인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겠다. 어떤 중요해 보이는 작품의 온라인 상영이 발표되었을 때, 해적들의 심정은 ‘정해진 시간 안에 이 영화를 봐야만 한다’라는 강박이 아닌, ‘온라인으로 상영되었으니 추출해서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에 가까울 것이다. 당신이 영미새(영화 미루는…)라면, 공감하실지도…​

아무튼, 이전에는 비공개 트래커에서의 대부분의 공유가 ‘DVD’나 ‘블루레이’ 같은 물리 매체들을 통한 사적인 소유권에 기반했다면, 요즘에는 ‘Web-DL’, 웹 다운로드 방식이 굉장히 많아졌다. 어떤 외화의 “해외 개봉 → 국내 개봉 → 2차 시장(물리 매체, VOD) → 리핑 영상/자막 공유”와 같은 기존의 공급사슬은, OTT 혹은 온라인 영화제로 인하여 작품의 공개와 동시에 영상과 자막이 함께 유포됨에 따라 대폭 단축되었다.이는 씨네스트 운영자의 다음과 같은 고민과도 공명한다.
비공개 트래커 내에서도 온라인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의 DRM을 해제해 업로드하는 것이 선공개(pre-release)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여러 논의들이 있었다. 실제로 나는 어떤 상영 행사로 인해 비메오에 잠깐 올라온 말레나 슬람의 신작을 업로드했다가 감독의 대리인으로부터 ‘해당 작품이 아직 영화제 서킷을 돌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내려줄 수 있느냐’는 (몹시 정중한)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어떤 가이드라인이 마련된 것은 아닌 듯하지만, 결국 영화제 서킷을 돌고 있는 작품들은 업로더들이 알아서 ‘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올리자고 잠정적으로 합의가 된 듯하다. 스크리너나 선공개와 관련된 것들은 배급사들의 법적 행동 가능성도 크기 때문에 비공개 트래커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토렌트프릭(TorrentFreak)’의 한 흥미로운 기사에서는, 이와 같은 변화로 인해 오히려 오스카 스크리너의 유출이 대폭 줄었다고 이야기한다. Ernesto Van der Sar, “Pirated Oscar Screeners Have Become a Rare Breed”, TorrentFreak, 2022-02-12. 2010년대 초반만 해도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된 영화들이 스크리너가 유출되어 토렌트 사이트에 돌아다니는 게 일상이었다면, 이제는 OTT 때문에 스크리너가 아니라 아예 고화질 립이 먼저 돌아다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재편되는 배급 구조에 수입, 배급사들은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내가 고민할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아방가르드 아키비스트로서, 낮은 임금을 받으며 예술가들과의 관계를 쌓고, 원본 마스터 영상을 찾아서 평가하고, 보조금이나 지원금 신청 제안서를 쓰고, 복잡한 보존 활동을 조직하는 일을 하는 데 수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결국 최종적으로는 그것이 ‘슈뢰딩거볼스’라는 유저에 의해 카라가르가에 업로드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20, 30년 전 시작된 미디어 제작의 신자유주의적인 재편은 일련의 비상업적 이미지를 점차 보기 어렵게 만들기 시작했고, 그 결과 오늘날 실험영화나 에세이 영화가 거의 비가시적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히토 슈타이얼,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스크린의 추방자들』, 김실비 옮김, 김지훈 감수(워크룸프레스, 2018), 46.는 히토 슈타이얼의 말은, 지금은 수정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내가 피부로 느낀 가장 급격한 변화 중 하나가, 기존에 아예 볼 수 없었거나 우부웹에서 쓰레기 같은 화질로 봐야만 했던 각종 실험영화들이 복원된 좋은 화질의 파일과 함께 인터넷에 널리 유통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르부아(RE:VOIR), 라이트콘(Lightcone), 콜렉티프 준 시네마(Collectif Jeune Cinéma)와 같은 여러 기관들은 코로나 이후 자신들의 카탈로그 일부를 웹에 무료로 공개했다. 앞서 말한 코로나로 인해 범람하기 시작한 각종 온라인 행사와 DRM의 무력화도 이들의 확산에 어느 정도 기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더 은밀한 비밀이 숨어있다. 바로 아카이브의 도둑들의 존재다.​

트윗의 ‘슈뢰딩거볼스’는 그러한 아카이브의 도둑들 중 한 명이다. 필름메이커 협동조합(Film-makers Co-operative)에서 관리하는 여러 영화들의 복원된 디지털 원본(raw) 파일들은, 아주 취약한 비밀번호로 비메오 쇼케이스 아래에 놓여있었고, 이 비밀번호를 찾아낸 해적들에 의해 유출되었다. 그로 인해 마이클 스노우의 ‹파장›이나 잭 스미스의 ‹황홀한 피조물들›, 바바라 루빈의 ‹크리스마스 온 어스›과 같은 전설적인 작품들의 복원된 영상이 비공개 트래커에서, 디스코드로, 텔레그램으로, 유튜브로, 브콘닥테로, 심지어는 포르노 사이트로 퍼지게 되었다. 필름메이커 협동조합뿐 아니라, 앞서 말한 라이트콘이나 콜렉티프 준 시네마, 아르제날(Arsenal), 럭스(LUX), 캐년 시네마(Canyon Cinema) 등 여러 기관들은 비메오의 쇼케이스나 개별 작품의 비공개 링크를 연구자나 프로그래머들에게 감상 용도로 제공하고 있다. 그런 링크의 비밀번호는 기관들마다 각자의 패턴을 사용하기 마련인데, 그런 비밀번호를 뚫어내는 미친 인간들이 있다. 이들로 인해 정말 많은 영화들이 인터넷으로 유출되었다. 이건 비단 해외의 사례만도 아닌데, 국내에서도 EXiS의 쇼케이스 비밀번호가 잠시나마 SNS에 유출되었으나, 관리자의 발 빠른 대처로 비밀번호가 변경된 적이 있었다. 이들의 대상은 단순히 기관뿐 아니라 기관을 거치지 않고 작품을 1:1로 배급하는 작가들에게도 향하기도 한다. 가령, 브루스 엘더(R. Bruce Elder)의 영화들은 2020년을 전후로 인터넷에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이는 엘더 본인이 비메오에 자신의 작업들을 ‘elder’와 같이 간단한 비밀번호로 올린 것을 누군가가 찾아내 유출시킨 것이었다.​

정말 많은 수의 실험영화들을 깨끗한 화질로 방구석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된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자리한다. 이러한 아카이브의 도둑의 존재는 실험영화의 접근 가능성을 대폭 증대시켰다. 이에 따라 실험영화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여러 커뮤니티가 생기고 새로운 관객 층이 형성되는 것은 내가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는 광경이다. 그런데 이런 아카이브의 도둑들은 어떤 멘탈리티로 이런 일들을 하고 있는 걸까? 그건 다음 장의 글들이 실마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