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평론가 아린담 센이나 에리카 발솜 같은 이들은 넘쳐나는 상영 링크에 대한 스트레스와 과식감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일반적인 온라인 스크리닝은 다른 행사들처럼 짧게는 하루, 길면 한두 달 정도로 상영 기간이 한정되어 있는데, 그런 한시적인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이 해적질-아카이브 충동의 큰 요인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겠다. 어떤 중요해 보이는 작품의 온라인 상영이 발표되었을 때, 해적들의 심정은 ‘정해진 시간 안에 이 영화를 봐야만 한다’라는 강박이 아닌, ‘온라인으로 상영되었으니 추출해서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에 가까울 것이다. 당신이 영미새(영화 미루는…)라면, 공감하실지도…
아무튼, 이전에는 비공개 트래커에서의 대부분의 공유가 ‘DVD’나 ‘블루레이’ 같은 물리 매체들을 통한 사적인 소유권에 기반했다면, 요즘에는 ‘Web-DL’, 웹 다운로드 방식이 굉장히 많아졌다. 어떤 외화의 “해외 개봉 → 국내 개봉 → 2차 시장(물리 매체, VOD) → 리핑 영상/자막 공유”와 같은 기존의 공급사슬은, OTT 혹은 온라인 영화제로 인하여 작품의 공개와 동시에 영상과 자막이 함께 유포됨에 따라 대폭 단축되었다.이는 씨네스트 운영자의 다음과 같은 고민과도 공명한다.
비공개 트래커 내에서도 온라인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의 DRM을 해제해 업로드하는 것이 선공개(pre-release)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여러 논의들이 있었다. 실제로 나는 어떤 상영 행사로 인해 비메오에 잠깐 올라온 말레나 슬람의 신작을 업로드했다가 감독의 대리인으로부터 ‘해당 작품이 아직 영화제 서킷을 돌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내려줄 수 있느냐’는 (몹시 정중한)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어떤 가이드라인이 마련된 것은 아닌 듯하지만, 결국 영화제 서킷을 돌고 있는 작품들은 업로더들이 알아서 ‘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올리자고 잠정적으로 합의가 된 듯하다. 스크리너나 선공개와 관련된 것들은 배급사들의 법적 행동 가능성도 크기 때문에 비공개 트래커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토렌트프릭(TorrentFreak)’의 한 흥미로운 기사에서는, 이와 같은 변화로 인해 오히려 오스카 스크리너의 유출이 대폭 줄었다고 이야기한다. Ernesto Van der Sar, “Pirated Oscar Screeners Have Become a Rare Breed”, TorrentFreak, 2022-02-12. 2010년대 초반만 해도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된 영화들이 스크리너가 유출되어 토렌트 사이트에 돌아다니는 게 일상이었다면, 이제는 OTT 때문에 스크리너가 아니라 아예 고화질 립이 먼저 돌아다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재편되는 배급 구조에 수입, 배급사들은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내가 고민할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아방가르드 아키비스트로서, 낮은 임금을 받으며 예술가들과의 관계를 쌓고, 원본 마스터 영상을 찾아서 평가하고, 보조금이나 지원금 신청 제안서를 쓰고, 복잡한 보존 활동을 조직하는 일을 하는 데 수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결국 최종적으로는 그것이 ‘슈뢰딩거볼스’라는 유저에 의해 카라가르가에 업로드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20, 30년 전 시작된 미디어 제작의 신자유주의적인 재편은 일련의 비상업적 이미지를 점차 보기 어렵게 만들기 시작했고, 그 결과 오늘날 실험영화나 에세이 영화가 거의 비가시적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히토 슈타이얼,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스크린의 추방자들』, 김실비 옮김, 김지훈 감수(워크룸프레스, 2018), 46.는 히토 슈타이얼의 말은, 지금은 수정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내가 피부로 느낀 가장 급격한 변화 중 하나가, 기존에 아예 볼 수 없었거나 우부웹에서 쓰레기 같은 화질로 봐야만 했던 각종 실험영화들이 복원된 좋은 화질의 파일과 함께 인터넷에 널리 유통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르부아(RE:VOIR), 라이트콘(Lightcone), 콜렉티프 준 시네마(Collectif Jeune Cinéma)와 같은 여러 기관들은 코로나 이후 자신들의 카탈로그 일부를 웹에 무료로 공개했다. 앞서 말한 코로나로 인해 범람하기 시작한 각종 온라인 행사와 DRM의 무력화도 이들의 확산에 어느 정도 기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더 은밀한 비밀이 숨어있다. 바로 아카이브의 도둑들의 존재다.
트윗의 ‘슈뢰딩거볼스’는 그러한 아카이브의 도둑들 중 한 명이다. 필름메이커 협동조합(Film-makers Co-operative)에서 관리하는 여러 영화들의 복원된 디지털 원본(raw) 파일들은, 아주 취약한 비밀번호로 비메오 쇼케이스 아래에 놓여있었고, 이 비밀번호를 찾아낸 해적들에 의해 유출되었다. 그로 인해 마이클 스노우의 ‹파장›이나 잭 스미스의 ‹황홀한 피조물들›, 바바라 루빈의 ‹크리스마스 온 어스›과 같은 전설적인 작품들의 복원된 영상이 비공개 트래커에서, 디스코드로, 텔레그램으로, 유튜브로, 브콘닥테로, 심지어는 포르노 사이트로 퍼지게 되었다. 필름메이커 협동조합뿐 아니라, 앞서 말한 라이트콘이나 콜렉티프 준 시네마, 아르제날(Arsenal), 럭스(LUX), 캐년 시네마(Canyon Cinema) 등 여러 기관들은 비메오의 쇼케이스나 개별 작품의 비공개 링크를 연구자나 프로그래머들에게 감상 용도로 제공하고 있다. 그런 링크의 비밀번호는 기관들마다 각자의 패턴을 사용하기 마련인데, 그런 비밀번호를 뚫어내는 미친 인간들이 있다. 이들로 인해 정말 많은 영화들이 인터넷으로 유출되었다. 이건 비단 해외의 사례만도 아닌데, 국내에서도 EXiS의 쇼케이스 비밀번호가 잠시나마 SNS에 유출되었으나, 관리자의 발 빠른 대처로 비밀번호가 변경된 적이 있었다. 이들의 대상은 단순히 기관뿐 아니라 기관을 거치지 않고 작품을 1:1로 배급하는 작가들에게도 향하기도 한다. 가령, 브루스 엘더(R. Bruce Elder)의 영화들은 2020년을 전후로 인터넷에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이는 엘더 본인이 비메오에 자신의 작업들을 ‘elder’와 같이 간단한 비밀번호로 올린 것을 누군가가 찾아내 유출시킨 것이었다.
정말 많은 수의 실험영화들을 깨끗한 화질로 방구석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된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자리한다. 이러한 아카이브의 도둑의 존재는 실험영화의 접근 가능성을 대폭 증대시켰다. 이에 따라 실험영화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여러 커뮤니티가 생기고 새로운 관객 층이 형성되는 것은 내가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는 광경이다. 그런데 이런 아카이브의 도둑들은 어떤 멘탈리티로 이런 일들을 하고 있는 걸까? 그건 다음 장의 글들이 실마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