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들의 도시
내가 본격적으로 영화 해적질 네트워크에 빠지기 시작한 건 2020년이다. 그해 6월, 영화 평점 기록 사이트인 레터박스(Letterboxd)에서 맞팔 관계에 있던 이란 국적의 유저가 홍상수 감독의 ‹도망친 여자›를 보았다고 기록한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때는 코로나가 창궐하기 시작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극장이나 영화제 같은 제도들이 잠깐이나마 작동을 멈춘 시기였는데, 그런 시국에 어떻게 영화를 미리 볼 수 있었던 건지 의문이 들었다. 구글에 검색해봐도 해외에서 이 영화가 개봉했다는 소식이나 영화제에서 상영 중이라는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 유저에게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지 물어보기 위해 SNS를 통해 DM을 보냈고, 그렇게 나는 한 텔레그램 방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내가 초대받은 방에서는 홍상수의 ‹도망친 여자›뿐 아니라, 크리스티안 펫졸트 감독의 ‹운디네›, 차이밍량의 ‹데이즈› 같은 작품들의 스크리너가 유출이 되어 돌아다니고 있었다.이 ‹도망친 여자›의 유출 사례는 영화진흥위원회가 최근에 발행한 “온라인 영화제 불법유통 대응 가이드라인”(https://www.kofic.or.kr/kofic/business/rsch/findPolicyDetail.do?policyNo=5327)에서도 첫 번째 사례로 등장한다. 해당 사례에서는 뉴질랜드의 인크립티드 클라우드(메가 클라우드) 링크를 빠르게 삭제하는 대응으로 추가적인 유출을 막을 수 있었다고 써놓았지만, 내가 들어간 그 방에서는 아직까지도 공유가 잘 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는 사실상 해외 해적 네트워크를 전부 모니터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이 ‹도망친 여자›의 스크리너가 유출되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진 않은 것 같은데,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모니터링을 잘 수행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란은 인터넷 검열이 굉장히 심한 나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때문에 인구의 5천만 명 이상이 텔레그램을 사용한다. 이란은 중국과 함께 국가에서 텔레그램을 차단시키는 몇 안 되는 나라이기도 한데, VPN을 통해 우회 하는 등의 방법으로 다들 잘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란의 시네필 커뮤니티도 많은 경우가 텔레그램을 통해서 형성되어 있다. 그 방의 초대와 함께 여러 군데 다른 방들의 초대를 받으면서 이란 시네필 커뮤니티의 일면을 볼 수 있었다. 그 방들에는 하룬 파로키, 라울 루이즈, 왕빙, 크리스 마커, 필립 가렐, 존 지안비토, 마크 라파포트 같은 감독들의 거의 모든 작품이 보기 좋게 아카이빙되어 있었다. 어떤 방은 그냥 방제가 ‘Farocki’인데, 그 방에는 하룬 파로키의 거의 모든 작품이 보기 좋게 올라와 있다. 이들 방에서는 단순히 영화 파일만 공유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방에서는 페르시아어로 쓴 장문의 비평이나 리뷰가 올라오기도 하고,『사이트 앤 사운드』나『까이에 뒤 시네마』의 PDF 파일, 그리고 여러 영화 도서의 이북(ebook) 파일이 올라오기도 한다. 작년인 2021년 몬티 헬만의 부고 당일에는 몬티 헬만에 대한 단행본 서적이 올라왔다. 이 방들의 링크를 계속 타고 가다 보면, 이러한 음지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한 이란 시네필들의 영화 웹진 같은 것들이 만들어지고 공유되는 것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