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LY-WEB
박동수

활력 찾기 2. VJ와 독립영화감독 사이 – 윤성호의 2000년대

뒤로가기
ONLY-WEB
박동수

활력 찾기 2. VJ와 독립영화감독 사이 – 윤성호의 2000년대

,

윤성호 감독에 관해 대화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영화관에 없는 영화감독” 물론 이는 윤성호가 ‘독립영화’ 씬에서 활동하던 시기를 알지 못하던 사람의 첫인상에 가깝다. <대세는 백합>(2015)나 <게임회사 여직원들>(2016) 등의 웹드라마로 그의 이름을 처음 접했기 때문이다. 커리어 초기의 인터뷰에서 윤성호 감독은 비슷한 말을 했었다. “나는 독립영화감독이기 이전에 영화감독이 아니다. 나는 VJ, 비디오 저널리스트인 것 같다. 영화감독이라고 불리기는 부끄럽다. … 그저 내 영상물을 비디오 저널 또는 비디오 에세이라 생각하고 공감해주면 좋겠다.”이지연, 「후보단일화 대소동-따끈따끈한 불법 비디오 팝니다!」, 『독립영화』, 2003.03, 122p. 그의 말이 보여주듯 윤성호 감독의 초기작은 전형적인 영화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그는 데뷔작인 <삼천포 가는 길>(2001)부터 <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2004)에 이르는 짧은 기간 동안 두 편의 옴니버스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7편의 단편영화를 생산했다. 어떤 작품은 온라인상에서 그 흔적을 찾아보기도 어렵지만,김지윤과 공동연출한 <회화식 아줌마 입문>은 KBS 1TV “열린채널”에서 방영되었지만 다시보기서비스가 중단되었다. <텍사스, 여름, 음행을 피하는 신학생 부부 입술의 모든 말>은 2005년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현 부산국제단편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는 것 외에 온라인 상에서 다른 정보를 찾을 수 없다. 그의 다른 작품들을 보며 어떤 형태의 작품일지 상상해볼 수는 있겠다.

독립영화이지만 독립영화는 아닌

관람할 수 있는 다섯 작품<삼천포 가는 길>, <중산층 가정의 대재앙>, <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은 한국영상자료원 영상도서관에서 관람 가능하다. <산만한 제국>과 <우익청년 윤성호>는 감독의 비메오 채널에서 관람할 수 있다.은 윤성호의 “비디오 저널리스트”적인 면모가 돋보인다. 이들 영화는 극영화도 다큐멘터리도 아니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어떤 이야기는 존재하지만 그것을 중심으로 영화가 진행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위해 수많은 샛길을 경유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삼천포 가는 길>을 살펴보자. 20대 중반이 되도록 성 경험이 없는 초등학교 동창 ‘구보’와 ‘시목’이 첫 경험을 함께하려다 결국 그러지 못하는 이야기가 영화의 줄거리다. 연출의도에서 윤성호는 “기본적을 ‘몸’에 대해 묘사하기보다는 그걸 핑계로 곤두선 ‘신경계’를 늘어놓는다”윤성호, 「<삼천포 가는 길> 연출의도」, 『인디포럼 2001 프로그램북』, 2001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윤성호 초기작을 관통하는 연출론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사건 혹은 대상에 관해 직접 묘사하고 자세한 플롯을 지닌 극으로 풀어내는 대신, 끝없이 “삼천포”로 빠지며 그것과 연계되는 이미지를 풀어 놓는다. 어떠한 영화적 야욕을 찾아볼 수 없는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동정인 남녀가 우연한 인연을 계기로 섹스를 하냐 마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상황 자체다. 이를테면 주인공 구보의 친구인 (윤성호가 직접 연기한) 재석은 섹스 상대를 찾는 것보단 혼자 처리하는 게 낫다며 에로영화와 포르노에 관한 썰을 늘어놓는다. 섹스에 관해 고민하던 시목 주변 친구들은 갑자기 짧은 대화만으로 혈액형을 맞추는 게임을 벌이더니 ‘징기스칸’ 노래에 맞춰 군무를 춘다.

이는 영화의 중심 혹은 주제라 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한 선택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의 중심이라는 것이 무력화되고, 모종의 탈중앙화라 할 수 있는 사태가 영화의 전면에 나타난다. 네 겹의 꿈으로 구성된 <중산층 가정의 대재앙>(2002)에서 각각의 꿈은 뒤섞여 제시된다. 꿈속의 꿈 속의 꿈 속의 꿈이라는 다분히 복잡한 설정은 사실 영화의 외피로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누군가의 꿈 속이라는 설정이 만들어낼 법한 위계는 존재하지 않고, 일본어/영어 회화 테이프에서 음성을 따온 뒤 전혀 다른 의미의 자막을 달아 완성한 내레이션(?)은 영화 속 이미지들의 무의미함을 내적으로 폭로하는 장치가 된다. 다시 말해, 영화제작이라는 관습법은 윤성호의 초기작에서 통용되지 못한다. 이는 전작의 이미지를 재활용하거나 홍콩 TV 시리즈 <의천도룡기>(1986)과 <신조협려>(1983)의 자막과 음악을 덧붙여 사용하는 <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 TV 뉴스부터 CF, 예능까지 폭넓게 인용하며 본래 맥락에서 떼어내는 <산만한 제국>(2003), 자신이 담긴 사진과 영상들을 재구성한 <우익청년 윤성호>(2004) 등 그의 초기작 전체를 통틀어 통용되는 말이다. “예술적 상상력과 의미의 담지자로서의 작가 자신을 전방위적인 농담의 전략을 통해 스스로 해체”하는 “일종의 다큐-픽션”유운성, 「<중산층 가정의 대재앙> 작품소개」, 『인디포럼 2003 프로그램북』, 2003과 같은 평가는 여기에 기인한다.

수많은 이미지를 인용(때로는 자기-인용)하는 것은 일종의 전용이다. 여기서 윤성호가 전용하는 것은 독립영화라는 상황 자체다. 1995년부터 2002년 사이의 독립영화를 잠시 살펴보자. 문민정부의 등장과 IMF로 인해 학생운동은 막을 내렸고, 소형영화/민중영화/작은 영화 등의 운동 또한 동력을 잃었다. 한편으로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인디포럼, 한국독립영화협회, 인디다큐페스티발, 서울독립영화제, 서울아트시네마, 미디액트 등이 차례로 등장했다. 학교, 영화제, 협회, 미디어센터 등 독립영화를 다루는 공공의 영역이 등장하던 시기에 윤성호는 학부를 졸업하고 영화 연출을 시작했다. 민중영화, 작은 영화 등의 다른 명칭을 벗어나 독립영화라는 단일한 명사로 합쳐지고, 독립영화 제작에 대한 공적 지원이 시작된 것이 이 시기다.1998년 한국독립영화협회 설립 이후 1999년부터 영화진흥위원회와의 거버넌스 구축 논의가 시작되었고, 2002년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와 시네마테크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가 문을 여는 것으로 이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하라. 김지현, 「독립영화가 걸어온 길: 정책적 거버넌스 구축을 중심으로」, 『21세기의 독립영화』, 서울독립영화제 엮음, (사)한국독립영화협회, 2014, 180~198p. 2001년 인디포럼 슬로건 “영토확장”이 독립영화의 액티비즘, 애니메이션, 실험, 극영화, 장르영화를 포괄하는 다변화와 양적 성장을 대변한다. 이는 “꽃순이, 칼을 들다”라는 2002년 인디포럼 슬로건과 장르화를 내세운 미쟝센단편영화제 출범을 통해 엿볼 수 있는, 독립영화의 영토에 대한 구획과 확장이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1997~2003)과 같은 대안적 영화제를 통해 윤성호를 비롯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함과 동시에, “기술적 완성도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수상경력을 얻으려는 작품”문석, 최소원, 「십만원 비디오 페스티발 사무국장 최소원」, 『씨네 21』, 2003.09.03.이 점차 늘어나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윤성호, 곡사 형제, 최진성, 김동명 등이 자신이 연관되지 않은 영화제를 찾아 좌판을 깔고 자신의 작품이 담긴 비디오를 ‘강매’했다던 “후보단일화대소동” 팀의 활동과 같은 것은 그러한 순간에서 가능했다. 윤성호 감독은 당시를 “제가 딱 약간 제일 좋았던 시기에 들어왔던 것 같아요. 인디포럼도,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도, 한독협도. … 심지어 저는 들어갔더니 미디액트가 생기는 거예요. 영화제에서는 영화 다 틀어주는 거고 미디액트에서는 장비 다 빌려주는 거고.”마테리알 편집부, 윤성호 인터뷰, 『마테리알』, 2022. 독립영화에 관한 공공 영역의 발생(혹은 독립영화의 제도화)라고 할 수 있는 사건들이 윤성호의 데뷔를 전후해 이뤄졌고, 윤성호는 개방된 독립영화의 영토로 향했다. 이 시기 그의 작업들은 그렇게 열린, 공공영역으로써의 독립영화라는 영토 위에서의 유희다. 이 시기 윤성호와 그의 동료 독립영화인들을 두고 “유희적 모더니즘 세대”문관규, 「한국 독립영화에 나타난 자기반영적 미학과 희극 전략 연구 – 윤성호, 곡사를 중심으로」, 『영화연구』, 한국영화학회, 54호, 2012. 혹은 “새로운 영화적 공기”남다은, 「새로운 영화의 활력: 윤성호, 최진성, 곡사」, 『21세기의 독립영화』, 서울독립영화제 엮음, (사)한국독립영화협회, 2014, 29~41p 등으로 평가된다. 운동을 목적 삼는 리얼리즘 영화와 충무로 진출을 노리는 장르 영화 사이에서 운동권도 영화과 학생도 아닌 사람의 작품이 지닌 영화적 활력은, 스스로 “영화적인 것은 아니고, 사실 UCC인데요.”라고 자평하는 “고집이나 신념이 나 미적인 가치관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만들 줄 아는 방식이 그것밖에 없었”윤성호, 지승호, 「두근두근 영화소년 해방전선 윤성호」, 『감독, 독립영화를 말하다』, 도서출판 수다, 2010, 244p.던 상황의 결과물이다.

윤성호의 초기작은 변화하는 매체환경의 과도기적 상황에서 “열정을 자기가 가진 범위 내에서 극대화하는” 방식의 아마추어리즘최소원, 「新世紀座談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우리 시대의 영화; 무방비 도시」, 『키노』, 인터뷰 진행 이영재, 장훈, 홍지은, 김용언, 주성철, 63호, 2000.05, 33p.을 추구한다. 영화감독 대신 VJ라 불리길 바란다던 말은 이 상황의 반영과도 같다. 독립영화라는 공간은 열렸지만, 독립영화라는 이름 자체는 (적어도 당시의 윤성호에게는) 열리지 않았던 것 같다. 때문에 그가 택한 방식, 독립영화로 불리는 영상물을 제작하지만 스스로 독립영화라 부르지 않는 것은 “독립영화”라는 명명에 대한 전용이다. 윤성호가 그런 것을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영화과 학생도 운동권도 아닌 그의 위치는 충무로라는 헤게모니와 운동이라는 이데올로기 모두에 속하지 않은 자율적인 주체로 자리 잡는다. <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은 그러한 지점에서 흥미롭다. <중산층 가정의 대재앙>과 <산만한 제국>의 계급과 자본 비판이 독립영화의 사회적인 것을 유지하고 있다면, 이 영화는 독립영화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공공영역 중 하나가 폐허로 변했을 때의 심정을 담아내고 있다. 2002년 11월 말 문을 열고 2003년 12월 말 문을 닫은 활력연구소는 윤성호를 비롯한 아마추어 감독들은 물론, 충무로에 진출한 감독과 기성 독립영화인, 일반 시민이 뒤섞일 수 있는 장소였다. 윤성호는 이곳의 폐관을 두고 “가장 먼저 관의 협조를 이끌어냈고, 가장 먼저 관의 협조와 동맹을 맺었고 가장 먼저 버려졌기 때문에, 그러니까 가장 처음 나온 폐허”마테리알 편집부, 윤성호 인터뷰, 『마테리알』, 2022.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은 “아낌없이 내주기만 했던 공공 영역의 실종을 첫사랑을 지키지 못한 회한으로”윤성호, 「활력연구소 살해사건: 우리의 주소, 우리의 영토」, 『미디어스』, 2009.03.02. 풀어낸다. 그의 다른 “비디오 저널리즘” 작업이 그러하듯 이 영화 또한 개인적인 이야기와 사회적인 이야기가 뒤섞여 있고, 다른 영화, TV드라마, 시, 음악 등이 어지럽게 인용된다. 그렇게 이 영화는 스스로 영화감독이라 불리길 꺼리던 그가 독립영화라는 공공에서 받은 수혜에 관해 풀어낸 것이 된다. 그럼으로써 윤성호의 영화는 독립영화가 놓인 상황 자체에 대한 비의도적인 전용이 된다.

매체의 변화라는 과도기

윤성호 스스로가 비디오 에세이라 말하는 일련의 작업은, 윤성호 자신과 인용된 텍스트들이 상호교차하는 장소로서 독립영화로 수용됨과 동시에 독립영화에서 벗어난 것으로 존재한다. 윤성호가 “독립영화인”이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한 것이 어느 시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러한 이중의 상황을 경유한 작품들을 내놓은 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입학한다. 전문사 연출전공 과정 동안 그는 두 편의 단편영화를 제작한다. 기존 단편영화를 DV 포맷으로 제작했던 것과 달리, <이렇게는 계속할 수 없어요>(2005)와 <졸업영화>(2006)<졸업영화>는 윤성호 감독의 비메오 채널에서 관람 가능하다. <이렇게는 계속할 수 없어요>는 한국영상자료원 영상도서관에서 VOD 및 DVD로 관람할 수 있다.은 35mm 필름으로 촬영되었다. 35mm 필름 영화를 제작해야 한다는 졸업요건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그래서 35mm 필름으로 UCC스러운 영상을 찍는, 소심한 반항”윤성호, <졸업영화> 프로덕션 노트.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윤성호 감독은 쓰고 있다. 그는 학교에 다녔던 2년보다 강사로 출강하던 3년 동안의 시기에 학교와 더 친해졌다며, 예술보단 산업에 관한 이야기만 하는 것이 싫었다고 말한다.윤성호, 지승호, 「두근두근 영화소년 해방전선 윤성호」, 『감독, 독립영화를 말하다』, 도서출판 수다, 2010, 267p.

<이렇게는 할 수 없어요>는 이렇게 시작한다. “원래 만들려던 건 갱스터들이 나오는 뮤지컬이었다. … 나는 감정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 그냥 평소 적어놓은 고만고만한 이야기들을 짜투리 필름에 담기로 한다. 하나 건너 아는 사람들에 대한, 한 주짜리 단상들. 따라서, 이 영화는 당분간 저작권법을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그 외에는 주말 연속극과 다를 것이 없다.” 윤성호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내레이션은 영화 연출에의 실패와 극복방안이 담겨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극복방안이다. 관객은 윤성호 감독이 갱스터 뮤지컬을 만드는 것에 정말로 실패하여 이런 영화를 만든 것인지, 반대로 그것 자체가 소심한 반항을 위한 연막인지 알 수 없다. 감독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내레이션, 내레이션이 밝힌 대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로 구성된 챕터와 함께 등장하는 다양한 단상들, 이 영화는 그것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그의 말처럼 소심한 반항일 수도, 흩어진 단상 속에서 꾸준히 발화되는 사회적 발언을 다르게 보여주는 방식일 수도,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부적응자의 발버둥일 수도 있다. <졸업영화>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심장수술을 앞둔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를 찍으려다 수술이 너무 잘 되어 잔소리가 많아지자 촬영을 중단하지만 만일을 위해 앰비언스는 따놓는다”는 시놉시스에서 드러나는 이 영화의 외피는 <이렇게는 계속할 수 없어요>와 비슷한 실패담이며 실패의 결과물이다.

윤성호는 비디오로 작업할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그 자체를 영화로 만들어낸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영화 만들기에 실패했다는 상황은 윤성호 특유의 자기반영성으로 영화에 녹아들고, 그 속에서 윤성호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구성된다. 이상용 평론가는 “디지털 소스를 통해 끊임없이 재편집될 가능성이 있는 열린 영화”가 2000년대 초반의 디지털 비디오 영화라며, 당시 윤성호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이러한 영화는 윤성호 감독을 통해 절정에 다다른다. … 독립영화가 끊임없이 추구해온 것이야말로 바로 ‘다르게 말하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윤성호의 영화는 ‘사회적인 것’에 묶여 있는 독립영화를 수용하면서도 그 안에서 내파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음악과 패러디와 엉터리 언어들을 짜깁기하고 뒤섞어 표출해내는 것은 ‘내파’로서의 독립영화라는 텍스트의 균열이었다.”이상용, 「<독립영화_디지털 프롤로그>에 부쳐」, 『인디포럼 2006 프로그램북』, 2006. 윤성호는 학교라는 요인에 의해 35mm 필름 영화를 만들었지만, “윤성호 영화”라는 대명사가 선사하는 매체의 가벼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가 학교에서 만든 두 편의 영화에는 여전히 윤성호 특유의 연애담과 영화 만들기 자체에 관한 이야기가 산만하게 흩뿌려져 있지만, 그것은 다시 한번 그가 놓인 상황을 변화시키는 전용의 방법론을 따르고 있다. 두 편의 영화는 소위 학생영화라 불리는 틀을 벗어나 영화를 누구나 만들어볼 수 있음 직한 가벼운 매체로, 자신의 처지를 토로할 수 있는 장소로, 모든 것이 UCC로 통용된 것처럼 모든 것을 영화라 부를 수 있을 법한 상황으로 나아간다.

2007년 학교를 졸업한 윤성호는 첫 장편영화 <은하해방전선>을 만든다. 여전히 윤성호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사실상 그의 유일한 장편영화라 볼 수 있는<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디렉터스 컷은 기존에 공개된 동명의 인디-시트콤 에피소드들을 재편집한 것이었고, 아리랑TV의 제안으로 제작된 <도약선생>은 TV 단막극에 가깝다. 이 영화는 그 해 가장 성공적인 독립영화였다. 한국독립영화협회 선정 올해의 독립영화, 디렉터스 컷의 올해의 독립영화 감독, 『씨네 21』 선정 올해의 신인감독 등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이 영화에 관한 윤성호 본인의 생각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단지 윤성호 스스로 여러 차례 자백한 실패한 장면 – “친척 중 정신병력을 가진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사촌 중에 「조선일보」 기자가 있다”고 대답하는 장면 – 때문만은 아니다. 윤성호는 “(단편이) 을지로 3가에서 을지로 6가까지 걷는 것이면, 장편은 종로 3가에서 수원까지 걷는 것이라 그러려면 이유가 있어야 하고 기승전결도 있어야 한다”고 비유하며 “그 고민이 충분히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윤성호, 지승호, 「두근두근 영화소년 해방전선 윤성호」, 『감독, 독립영화를 말하다』, 도서출판 수다, 2010, 245p.라고 말하고 있다. 개봉 당시 인터뷰에서 “제겐 이 영화가 불만족스러워요.”이도훈, 「은하해방전선 인터뷰-거침없이 영화를 믹싱하는 DJ 윤성호를 만나다」, 『독립영화』, 34호, 2007.12, 68p.라고 말하기도 했다. 2017년의 GV에선 “심지어 내러티브가 있는 영화를 할 생각도 없었어요. … 저는 이 영화에 제일하기 싫었던 게 멜로 코드였어요.”인디즈, 「10년 전의 은하해방전선을 떠올리며,  마음이 모인 <은하해방전선>  인디토크 기록」, 2017.11.27.라고 말하기도 한다.

<은하해방전선>은 확실히 그 전까지의 윤성호가 선보인 9편의 단편과 다르다. 영화 전체를 이끌고 가는 내러티브가 영화 전면에 드러나 있고,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캐릭터(영재)가 극을 이끌어간다. 파편화된 단상이 모여 윤성호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이용하던 단편영화들과는 분명 다르다. 이 영화 이전의 윤성호 영화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 혹은 제약을 영화 속으로 끌어들인 뒤 전복시켰다. 앞서 논의한 <이렇게는 계속할 수 없어요>와 <졸업영화>에는 영화학교 졸업요건이라는 제약을 이용해 먹었고, <우익청년 윤성호>는 옴니버스 프로젝트의 적은 제작비라는 제약 자체를 자신에게 투영한 뒤 자신의 생애를 뒤집는 방식을 사용했으며, <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처럼 어떤 공간의 폐허화를 자신의 연애사에 겹쳐 제시하기도 한다. <은하해방전선>에서는 이러한 활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여전히 독립영화지만 청년필름이라는 제작사가 붙어 있고, 개봉을 염두에 둔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규모와 정체성을 예측할 수 없는 대중을 고려해야 했다. 윤성호가 그것을 그가 그간 마주했던 제약들과 다른 것으로 인식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은하해방전선>이라는 결과물은, 그가 그다음 해부터 시작한 “두근두근 시리즈”부터 인디 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2010)에 이르는 작품들이 지닌 것만큼의 활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올해의 신명나는 데뷔작”(정한석)과 “영화제 울타리 밖에서의 생존력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이동진)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여기에 기인한다. ‘데뷔작’이라 말하기엔 이미 두둑한 커리어를 지닌 영화감독이라는 윤성호의 독특한 상황이, 99분의 러닝타임을 이끌어갈 활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후적인 평가이지만, <은하해방전선>이 정말로 “신명나는 데뷔작”이었다면 우리는 윤성호의 두 번째, 세 번째 장편영화를 이미 만나봤을 것이다.

앞서 적은 대로 2008년부터 시작된 “두근두근 시리즈”는 각각 한국영상자료원, 서울아트시네마, 인디스토리의 요청으로 제작된 <두근두근 시네마떼끄>(2008), <두근두근 배창호>(2008), <두근두근 레드카펫>(2008)에서 2018년 <두근두근 외주용역>까지 이어진다. 여기서 제목 앞에 붙는 “두근두근”은 활력연구소의 정기상영회 “두근두근 상영회”에서 따온 것으로 추측되는데, 윤성호 본인은 “뭔가 로맨틱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사용한다고 설명한다.정시우, 「[두근두근 윤성호②]“영화관? 내겐 또 하나의 도서관”(인터뷰)」, 『한경뉴스』, 2015.09.13.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제작된 “두근두근 시리즈”는 인디 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의 한 에피소드가 되거나 ‘자매품’으로 소개되었다. 두 편의 옴니버스 영화에 참여하며 <청소년 드라마의 이해와 실재>(2008), <신자유청년>(2009)을 연출한 것을 제외하면, <은하해방전선> 이후 2~3년간의 윤성호는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로 연결된다. 웹드라마라는 포맷의 시초로 여겨지는 이 작품은 윤성호의 기존 단편영화와도, <은하해방전선>과도 다르다. 끝없이 이어지는 인용도, 자기복제처럼 이어지는 전작의 등장도 확연히 줄어든다. 무엇보다 영화관이 아닌 공간을 1차 유통망 삼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윤성호 커리어의 전환점이 된다.

“윤성호”의 위치를 가늠해보기

지금의 윤성호는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유튜브나 네이버TV 등을 통해 배급되는 웹드라마를 꾸준히 연출 및 제작했고, 시트콤협동조합을 만들어 대안적인 시트콤을 만들어내고자 했으며, 지상파 드라마에 진출하려다 실패했고, 종종 옴니버스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OTT 드라마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평창국제평화영화제에서 윤성호 특별전을 기획하며 정리한 그의 필모그래피평창국제평화영화제 홈페이지를 보고 있자면 그를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지 막막해지는 기분이 든다. 2000년대의 윤성호가 독립영화라는 영토 안에서 활동하는 나름의 일관성을 보여주었다면, 2010년대의 윤성호는 영상매체가 상영될 수 있는 모든 공간을 종횡무진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영역을 넓힘으로써 점차 대중이라는 막막한 대상과의 거리를 좁혀오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윤성호의 2000년대를 되돌아보는 것은 일종의 전환기를 맞이한 한국 독립영화의 역사를 간략하게 되짚어보는 것임과 동시에, 공공영역으로서의 독립영화를 재고하고 매체 및 유통망의 변화를 엿보는 것과 같다. 윤성호와 함께 후보단일화대소동 팀을 구성했던 곡사형제는 CJ ENM이 배급하고 추석 명절 시즌에 개봉한 영화를, 최진성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윤성호와 더불어 이들의 지금과 과거를 무식하게 덧대어보자면, 창작자로서 그들의 생존전략을 얼핏 알아챌 수 있을 것만 같기도 하다. 영화의 바깥에서 영화에 도착한 이들 앞에 마침 열리고 있던 독립영화라는 영토는 ‘활력’이라 할 수 있는 추상적인 에너지가 분출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이 분할되고 새로운 벽과 문이 들어서는 동안 윤성호와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냈다. 어쩌면 지금과는 다른 지형의 당시를 탐구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빈 책장에 책을 꽂아 넣기는 쉽지만 가득 찬 서재를 비우는 것은 끔찍하게 곤란한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과거의 활력을 복원하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그것을 헤집다 보면 무언가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윤성호의 2000년대에서 새삼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