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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 박동수, 마테리알(함연선, 금동현, 이하윤)

활력 찾기 1. 폐허에서 두근두근: 윤성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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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 박동수, 마테리알(함연선, 금동현, 이하윤)

활력 찾기 1. 폐허에서 두근두근: 윤성호 인터뷰

함연선(이하 함):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메일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2000년대 초반에 활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을 지금 동시대에 새로 만들 수 있을지? 그런 것들에 대한 고민 때문에 인터뷰 부탁을 드리게 됐고 윤성호 감독님을 처음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고요. 질문지 읽어 보셨을 텐데, 독립영화에 대한 저희의 문제의식 같은 것들.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질문으로 먼저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동현 씨가 먼저 시작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금동현(이하 금): 활력연구소가 어떤 공간이었는지 간단하게 여쭙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활력연구소와 같은 공간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미디액트에 시네마테크의 느낌이 추가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뭔가 지금은 감상을 하러 가거나 창작을 하는 사람이 같이 안 섞여있는 느낌인데, 활력연구소 당시 문건이나 영상을 보면 좀 섞여 있는 느낌? 그런 어떤 추상적인 상상만 할 수 있더라고요. 건축가 김광수는 활력연구소 건축 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통과(여행)와 목적지(도착)라는 개념이 동시에 존재하길 원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활력연구소가 일종의 아마추어리즘에 머무르려고 하려는 공간이었던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질문을 윤성호 감독님께 드리는 이유는 2000년대에 이미 “포트폴리오로 만드는 영화”, “충무로로 가기 위해서 만드는” 독립영화들 틈바구니에서 윤성호 감독님이 영화의 개념을 확장할 수 있는, 메인스트림 밖의 대안으로 존재할 수 있는 성향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고 김노경 평론가가 인디포럼 소개문에서 쓰셨더라고요. 그래서 사실 그런 대안의 위치에 존재한다는 것, 포트폴리오용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제가 생각할 때 합리적인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일종의 광기나 혹은.

윤성호(이하 윤): 시장을 전제로 했을 때는 그렇게까지 영리하지 못한 행동일 수 있죠.

금: 저는 그런 행동이 좋다는 입장인데, 표현하신 것처럼 영리하지 못한 행동을 할 수 있던 근거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배경이 활력연구소라는 공간이었는지? 아니면 ‘후보단일화대소동’과 같은 친구들 덕분이었을 수도 물론 있고요. 이런 상황에 대해 먼저 여쭙고 싶었습니다.

윤: 너무 이렇게 오랜만에 소환되는 그리웠던 어휘들을 언급해주셔서 재미있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런 전제는 해야 할 것 같아요. 메일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활력연구소는 저한테는 되게 고마웠던 공간이고 그렇기는 한데, 그때 어떤 표상 중에 가장 푯대라고 보기는 좀 힘든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건 활력연구소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활력연구소 딱 하나로 대표되기에는 너무 여러 가지 기운들이, 시장 바깥에서 우리가 뭔가 해보자, 해볼 수 있다. 라는 게 있었기 때문이죠. 얄팍한 비유인데, 요새 제가 좋아하는 스트릿 우먼 파이터(이하 스우파)로 치면. 활력연구소가 그중에 아이키라면, 그 바깥에 모니카도 있고, 가비도 있고, 노제도 있었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한 20년쯤 뒤에 지금의 댄스 열풍을 얘기하면서, ‘아이키’는 어떻게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는가? 라고 얘기를 하면, 아이키가 분명 잘하긴 했지만, 아 혹시 저만 아는 비유인가요? 스우파 혹시 아세요?

함연선: (웃음) 네, 완전 좋아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윤: 그렇게 따지면 가령 프라우드먼이 해 온 것, 립제이가 모니카를 리스펙트하면서 2인자로 있었던 것, 그리고, 홀리뱅의 허니제이와 리헤이의 역사 등 굉장히 많은 것들이 있었던 거죠. 다시 말하면 어느 한 크루가 이슈였다기보다는 다들 K팝이 성장하다 보니까 K팝의 백댄서로만 자리매김하기는 싫지만 바깥에 시장 아닌 시장이 가능했던 거잖아요. 실제 자본의 선순환은 굉장히 불리하게 되고 있지만 모두들 즐겁게 건강하게 인정투쟁하고 있던 크루들의 시장 아닌 공동 네트워크가 있었던 거잖아요.

시장이라는 거에 가격을 매겨서 계속해서 자본의 선순환이 이루어지면서, 그렇게 해서 누가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돈을 버는 건 나쁘다 할 수 없지만, 과연 이게 그다음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지가 우선순위가 되는 데가 시장이고. 당연한 거래와 노동과 교환이 오고 가긴 하지만 그렇게 해서 부가가치를 더 많이 증폭시키느냐가 관건이 아니라 우리가 행복한지 그리고 그 행복이 지속 가능한지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는지가 관건인 게 네트워크, 공동체, 담론이라고 친다면, 그게 자본하고 만나서 빅뱅을 일으킨 것이 스우파 같은 거잖아요.

그때 2000년대 초반이 딱 바깥의 담론과 산업과 산업 바깥이 같이 막 보글보글하기 시작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저는 그때 애초에 영화를 목표로 한 사람이 아니어서, 충무로를 목표로 하지도 않았고. 어쩌다 보니까 잠깐 경유하려던 것이었는데, 지금 윤석열 나이로 마흔다섯 살이 되도록 몸담고 있는 곳이 되어버렸는데, 몸담고 있는 곳도 심지어 원래 생각했던 것 보다 조금 더 산업 쪽이 되어버렸죠.

그런데 아마 그럴 수 있었던 건, 한국 영화 시장도 점점 커지고, 자본도 CJ니 뭐니 들어오기 시작했고, 아직은 거기들도 뭐랄까요?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고. 노선을 확실히 정하지 못했겠죠. 감독들을 서포트 하느냐. 우리가 통제하느냐. 헐리우드 영화처럼 가느냐. K-뭐를 만드느냐. 거기도 몰랐겠죠? 마찬가지로 시장 바깥도 자연스럽게 보글보글하고 있었는데. 그건 어쩌면 IMF 끝나고, 권위주의 독재정권이 90년에 형식적으로라도 청산됐고, 김영삼 때 문민정부, 그러다가 김대중 대통령 같은 문화 대통령이라고 호명되는 분의 시대가 오기도 하고. 형식적으로 무언가 더 갖춰졌잖아요. 갑자기 뭐 만들었다고 와가지고 우르르 잡아가는 시대는 아니게 됐고. 근데 바로 그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뭐 만들었다고 하면 우르르 잡아가거나 통제를 받던 시기였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거 하고 싸우는 데 익숙한, 그런 거랑 투쟁하고 연대하는데 익숙한 독립영화 선배들이 있었고. 가령 〈상계동 올림픽〉(1988)을 만든 김동원 감독님 같은 분이 구심점이 된 푸른영상이라든지. 푸른영상에서 뭐 만들었다고 하니까 경찰이 와서 일단 다 뺏어가고 잡아가고 그런 거 아시잖아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한국독립영화협회가 만들어지고, 뭐 이런 것들이 있었는데. 저는 그때 독립영화인은 아니었고 학생이었지만, 뒤늦게 입문해서 뭔가 궁금하잖아요? 어떻게 이 협회가 만들어졌을까? 협회가 왜 많은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을까? 헤게모니에 비해서 왜 이렇게 돈은 없고 항상 열악할까? 그런 게 궁금하다 보니까.

저는 제가 뭘 만드는 것도 중요한데, 제가 만든 걸 틀어주는 사람들이 왜 틀어줄까? 왜 박봉에 활동할까가 되게 궁금했거든요? 제 사고가 더 윤리적이었다기보다는 제가 메이커나 크리에이터로 출발한 게 아니어서, 그냥 신문방송학과에 재학하면서 매체, 산업이나 풍경에 관심이 있어서, 뭘 하게 되면 자꾸 그 이면이 궁금했던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담론의 작동원리나 이념적인 원리라기보다는 여기가, 이 생태계가 어떻게 순환이 가능하지? 먹고 살아야 할 텐데?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아무튼 그래서 여러 플레이어가 있었는데 그 플레이어들이 산업의 플레이어들과는 다르게 서로 조금씩 어깨 하나씩은 다 걸치고 있었던 거죠.

저의 경우에 처음 만든 걸 처음 튼 곳이 마침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이었고. 그분들이 좀 유쾌하고 요새로 치면 진짜 힙스터들이었거든요? 요새 힙한 분들하고 나 같은 서강대 다니는 학삐리가 이런 사람들하고 어울려도 되나? 이분들이 내 영화에 상을 주고 재미있다고 하는 게 너무 신기하고. 신기한 그걸 경유해서 인디포럼도 가고 서울독립영화제(편집자주: 당시 명칭은 ‘한국독립단편영화제’였다.)도 갔는데, 전 그때 놀랐던 게 모두가 다 친해서 놀랐어요. 왜냐하면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의 이 힙스터들과 또 푸른영상으로 대표되는 뭔가 철거 다큐, 우리나라의 약자들의 다큐를 만드는 분들이, 항상 되게 패션 센스 없이 입고 다니는, 예를 들자면 김동원 감독님과 그 모둠과, 지금 홍대를 걸어 다녀도 힙할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의 그분들과, 그리고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돈 없이 박봉으로 행정 일을 하는 그분들과, 저는 다 서로 다른 단위고 서로 교류가 없을 줄 알았거든요? 놀라울 정도로 다 친해서 너무 신기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빙 돌아서 말하기는 했는데, 두 가지죠. 한국이 되게 좁구나, 한국이 너무 좁은 곳이어서 알고 지낼 수밖에 없구나. 두 번째가 사실은 굉장히 하나로 연대가 되고 통하는 코드들이 있었구나. 이렇게 말하면 좀 쑥스러운데 반자본주의, 다들 좌파성향이었고. 심지어 그때 김대중-노무현 정부에도 계속해서 질문과 의문과 시비를 던지는 그런 사람들이었고. 그런 식의 이념적 성향이 좀 느슨하게, 되게 정교하지는 않아도 있었던 거죠. 누구는 정교하고 철저하고, 거기 NL도 있고 PD도 있었겠죠. 그런 건 잘 모르지만, 가령 푸른영상 김동원 대표님이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고 치면, 한쪽에서는 ‘우린 민족주의 그런 건 몰라. 그런데 노동? 중요하잖아’, 누구는 ‘노동 이런 것도 잘 몰라. 근데 우린 퀴어 페스티벌 하고 싶어’, ‘머리 염색했다고 뭐라고 하는 꼰대들이 싫어’ 이런 식으로 그때는 권위주의가 싫은 사람, 시장의 획일화가 싫은 사람, 자본의 횡포가 싫은 사람, 독재 정권이 싫은 사람, 남북통일하고 싶은 사람 모두가 뭉뚱그려가지고 다들 있었던 것 같아요. 뭉뚱그렸다고 해서 하나로 압축되기보다는 그냥 뒤풀이 자리가 있으면 모든 테이블에 건너가서 합석할 수 있는?

근데 그게 꼭 또 좋았다고 보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분명히 어떤 차이들이 있기 때문에. 아 근데 자본이 그런 걸 획일화시킨 게 아니라, 모두 나빴던 것도 아니고. 자본과 여기가 부글거리는 게 서로 전혀 교류 없이 그러진 않았을 거라는 거죠. 가령 영화진흥위원회가 이런 데다 예산을 쓰기 시작했던 건, 여기가 산업의 생태계가 된다는 판단을 했을 거라는 논리도 가능하고. 그때는 CJ가 지금 생각하면 큰돈이 아니지만, 한국독립영화협회나 서울독립영화제에 천만 원, 이천만 원씩 영화 만들라고 후원해주고 그랬단 말이에요.

그러면 가장 크게 하는 행사 개막식, 폐막식에서 CJ 지원금 받는 걸로 선정된 독립영화 창작자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고 그랬죠. 우린 그때 천만 원이면 엄청 큰돈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지금은 그런 것도 없잖아요. 왜냐하면 이제 그런 건 자기들이 따로 만들면 되니까. 굳이 한국독립영화협회나 서울독립영화제를 중개해서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아무튼 2000년대 초반에 여러 단위의 으쌰으쌰가 있을 수 있었던 건, 자본 입장에서도 빅데이터가 안 나왔고. 담론 입장에서는 더더욱 데이터를 모으는 사람이 아닌 거고. 우리들이 이렇게 저렇게 여기저기 살아있었네? 지금 생각해보면 되게 유구했다고 생각했는데 항상 어디에서나 초심자나 입문자가 착각하는 게 자기가 본 풍경이 한 10년 된 풍경인 줄 아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한독협이 생긴 게 98년이었고, 나중에 뭐 인디스토리 같은 배급사 생긴 것도 98년이었고, 부산국제영화제랑 인디포럼이 생긴 건 96년이었거든요? 96~8년에 뭐가 많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2008년인가 무슨 10주년 행사 기념 영상 같은 걸 많이 의뢰를 받았었는데, 그렇게 10주년 된 곳이 참 많았던 거예요. 그렇게 따지면 제가 2002년에 여기 기웃거리기 시작했을 때, “와! 이런 풍경들. 한국에 이렇게 다양하고 재미있고 뭔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싶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고 서로 다 친했구나!”가 어쩌면 약간은 화양연화의 착각이었죠. 10년 된 20년 된 풍경이 아니라 언제든 갈라질 수 있고 와해될 수 있고 그렇게까지 단단하지 않은? 서울시가 후원을 포기하는 순간 ‘활력연구소’도 없어질 수 있고.

그래서 제가 좀 장황했는데, 활력연구소는 저한텐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에 대한 고마움? 그 멤버가 그대로 활력연구소 멤버였으니까요.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을 몇 년을 하면서, 독특하다는 소리를 듣고 하면서, 그분들은 일회성의 행사를 매년 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 누적되면서 이걸 지속 가능한 무엇인가로 만들고픈 생각이 당연히 들었겠죠. 《마테리알》 하시면서도 그런 생각이 드실 거 아니에요? 지금 우리는 우리의 패기라든지 뭐랄까요, 사명의식 같은 걸로 할 텐데 과연 이게 2032년에도 가능할까? 이런 걱정이 들잖아요? 그러면서 필요한 건 어쩔 수 없이 어떤 예산, 인력, 한마디로 말해서 시스템이잖아요? 공간이 필요할 수도 있고. 그래서 아마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 멤버분들이 공간을 만들자고 생각한 거겠죠.

근데 그 공간을 우리를 위한 영리적인 목적이 아니라 공공성을 담보로 해서 제안을 해보자. 그게 충무로, 서울시에 얘기가 잘 됐나 봐요.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 놓은 ‘활력연구소’가 몇 년 뒤에 이명박 씨가 서울 시장 되면서 이런저런 식으로 하더니, 개관 하고나서 1년도 안 되어서 내년부터 다시 입찰 식으로 바뀐다고 그러니까. 시위도 하고 그랬는데. 저는 잘 모르지만, 괜히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 분들이 고초를 겪으니까 가서 같이 시위도 하고 따라다니면서 다큐도 찍고 그랬던 거죠.

그래서 다시 말해서 활력연구소가 표상이 되기에 좀 아쉬운 건 활력연구소의 가치가 별로여서가 아니라. 너무 그런 단위들이 정말 백가쟁명을. 아 백가쟁명이라고 하면 서로 경쟁하는 느낌인데, 어쨌든 약간 진보정당이 갑자기 10개가 나오는데 서로 싸우는 게 아니라 연대하고 있었던 느낌? 그런 거였던 거죠. 스우파로 얘기하자면 굉장히 서로 친하게 지내는 크루들이 많았고, 막상 스우파도 알고 봤더니, 뭐야 서로 다 알고 친하고 아는 사이였잖아? 왁킹, 락킹 다 따로가 아니라 사실은 알고 보니 조금씩 서로 같이 안무 짜고 했던 거잖아? 저한텐 그런 느낌? 그런데 그중에 활력연구소는 저한테 너무 잠깐 있다가 간.

그런데 사실은 지금 생각해보면 생각이 다른 건 아니고 그런 자본이나 공무원의 논리로 치면, 원래 공공공간은 2년에 한 번씩 입찰이잖아요? 허가받고 짓는 데 1년 걸렸고, 운영하는 데 1년 지났으니까 너희들도 또 입찰해라. 그쪽의 무심한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면 별일 아니었던 것일 수도 있어요. 제가 보기엔 오히려 요즘 들어 그런 난폭한 행정들도 수긍해버리는 분위기가 생긴 듯도 하구요. 근데 활력연구소분들은 그럴 수 없었던 게 거의 맨주먹으로 자기들이 다 만들었으니까. 아까 건축가가 누구인지 저는 몰랐는데, 설계하고 아카이빙하고 시스템 만들고 매뉴얼 만들고 다 했으면, 그랬을 때 보장되어야 하는 기간이 있는데. 그런 거 없이 당시의 서울시 쪽에서는 그냥 몰아내고 싶었던 거죠. 한마디로 머리 염색하고 조리 신고 다니는 사람이 시청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마 싫었나 봐요. 그래서 활력연구소가 존재했던 기간이 좀 짧기도 하고 저는 활력연구소로 퉁 치는 것보다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의 기운이 뿜뿜할 수 있었던 건 아까 말한 그때 한국독립단편영화제라는 이름으로 하셨던 서울독립영화제, 인디포럼이 사실 푯대 같기는 했어요.

왜냐하면 이게 너무 압도적으로 인기가 있고 사람이 많은 영화제였기 때문에요. 굳이 만약 표상이라고 치면 인디포럼은, 그 네 글자는, 저같이 영화를 하지 않고 슬쩍 기웃거리는 청중들한테도, 그리고 각 대학교의 포트폴리오로서 영화를 만드는 영화과 지망생들한테도, 아니면 다큐 액티비스트라든지 실험적인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한테도 몇 년 사이에 굉장히 화제가 됐고 성장을 했기 때문에. 산업의 예비군으로서가 아니라 담론에서 인정받고 싶은 창작자에겐, 굳이 따지자면 인디포럼의 존재감이 더 강하긴 했어요. 압도적으로. 어쩌면 저도 2001년에 처음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에서 영화를 틀어보고 나서야 거기서 뿜뿜 받은 용기로 인디포럼에 또 출품을 했으니까요. 인디포럼 2001년에는 구경하러만 갔어요. 그때 아마 슬로건이 ‘영토확장’이었을 거에요 심지어. 뭔가 광개토대왕 (좌중 웃음) 그런 심리는 아니었겠지만 인디포럼이 워낙 인기 있었던 걸로 기억이 나거든요?

제가 대학생이고 아직 뭘 안 만든 상태에서 제 첫 〈삼천포 가는 길〉(2001)이라는 걸 여름에 만든 이유도, 5월인가 인디포럼에 갔는데 일렬로 소격동 아트선재센터 예전에 있었던 지금 말고 옛날에 삼청동 가는 길에 있는? 거기서 줄을 서서 떡볶이 집 지나서 여기까지 서 있고 저도 거기 서가지고 들어갔던? 그래서 이송희일 감독 〈굿로맨스〉(2001) 보고, 요새는 드라마 작가로 활동하는 송혜진 감독의 〈안다고 말하지 마라〉(2002) 이런 거 보고 그랬거든요?

《씨네21》도 그때는 많이 보던 시절이잖아요. 지금은 아무도 안 보지만. 저도 제 기사 나와도 안 봐요. (좌중 웃음) 그걸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냥 지나치게 돼요. 근데 당시에 그렇게 인기 있던 《씨네21》도 독립영화 축제인 인디포럼을 다룰 때 되려 산업에 관한 기사 이상으로 지면을 할애를 해주고 이러니까. 인디포럼이 아까 말한 상업 영화로 진출하고 싶은 사람도, 아니면 다큐멘터리로 계속 발언을 하고 싶은 사람도, 아니면 저같이 약간 뭔가 특이한 거 만들었는데 내꺼 안 틀어주나? 이렇게 하는 사람에게도 전당 같은? 만신전 같은 느낌이었죠.

심지어 어떤 산업이나 자본이나 시스템이 재고해주는 게 아니라 작가회의라는 시스템으로 하니까 그 일원이 된다는 게 그럴 듯 해 보였고. 그런데 이제 이럴 때 항상 한계가 오는 게 1년, 2년, 3년. 총 50명일 때 80명일 때는 좋은데, 이게 눈뭉치처럼 굴러가다 보면, 싸워서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스템과 매뉴얼이 없으면 그다음부터는 약간 주먹구구가 되고, 또 이런 것들이 화제가 되면 비슷한 단위들이 따로 나오잖아요. 비슷한 아이디어의 행사나 이벤트들이. 그러면 그쪽에서 다른 트로피를 걸 경우에 다시 헤게모니들을 고민하게 되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미장센단편영화제랑 뭐가 다를까? 우리는 그러면 충무로에서 하는 영화제들의 단편 부문이랑 뭐가 다른가? 이런 식의 고민들을 하고. 그럼 안에서 어떤 분들은 첨예하고 어떤 분들은 좀 더 두루뭉술하고 또 어떤 분들은 굉장히 많은 부분에서 예민하긴 하지만 어떤 부분은 관용적이고. 막 이러니까 결국 좀 쇠퇴 될 수밖에 없죠.

이건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누가 나쁘고 누가 옳아서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은 어쩌면 커뮤니티 멤버가 늘어나고 거기에 대한 기대가 커질수록, 또 경쟁의 커뮤니티가 생길수록 혼잡비용이라는 게 생기잖아요. 죄송해요 제가 신방과를 나와서. 커뮤니케이션 혼잡비용을 해결하는 게 모든 공동체의 지속 가능에 가장 중요하거든요 가령, 진보 운동을 했을 때, 진보 정당 운동을 했을 때, 처음에는 좋단 말이에요. 우리의 제일 큰 거는 환경, 여성, 노동, 소수자다고 했을 때, 그게 백 명, 이백 명, 천 명 되는 순간부터 노이즈가 생기거든요? 나쁜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각자 할 말들이 있고 우선순위가 다르니까. 3년에서 5년 동안 진보했던 게 5년, 6년부터는 이제. 아마 《마테리알》도 감히 말하면 몇 년 하셨죠?

함: 이제 4년 차입니다.

윤: 아이고 많이 하셨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주목을. 그런데 주목을 또 별로 안 해주면 오래가기도 해요. (좌중 웃음) 어차피 우리끼리 하는 게임이면. 근데 여러 사람이 플레이어로 들어오고 싶어 하고, 또 우리보다 더 돈이 많은 플레이어가 또 생기고, 다들 말을 얹고 싶어 하고 이러면 그때부터는 노이즈를 걸러내고 해야 하는 거죠.

근데 제가 딱 약간 제일 좋았던 시기에 들어왔던 것 같아요. 인디포럼도,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도, 한독협도. 심지어 저는 들어갔더니 미디액트가 생기는 거예요. 제가 딱 중간인 게, 몇 년 뒤부터는 이게 너무 당연한? 영화제에서는 영화 다 틀어주는 거고 미디액트에서는 장비 다 빌려주는 거고. 이게 너무 당연한 사람들도 생겼고. 또 그전에는 이런 거가 전혀 없었어가지고 이거에 눈물 날 것 같은 사람도 있었고.

그런데 저는 뭐냐면, 어? 들어오는 데 생기네? 좋네? 이런 정도? 약간 쿨과 핫 사이에서 같이 투쟁한 건 없는데, 여기 생긴 공간의 혜택은, 공간과 커뮤니티의 혜택은 입은 사람? 그런데 그 고마움과 지난함은 아는 사람. 없어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아는 사람. 젊거나 뒤에 들어온 분들은 그거에 대한 가치나 효용을 모른다는 게 아니라. 저는 무에서 유로 변하는 과정에서 시혜를 입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민감하다기보다는 그래서 이런 얘기 들었을 때 혼자 대단한 것도 아닌데 마음이 좀 바빠지나 봐요. 아 ‘활력연구소’도 있었고, 여기도 있었고, ‘푸른영상’, ‘서울영상’, 또 ‘빨간눈사람’이라고 그때 빨간 경순 감독, 빨간 동하 감독이라고 해가지고 굉장히 진보적이고 래디컬한 다큐를, 지금 보면 촌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때 다큐멘터리들의 어떤 규칙을 깨면서 만들던 누나와 형이 있었거든요?

지금도 친하다기보다는 교류를 하는데. 노동운동 투쟁을 엄청 해온 분들인데, 그런 분들이 다큐를 2001년에 MTV처럼 만드는 게 엄청 어려운 일이거든요. 자기들의 어떤 금기를 깨면서 해야 되니까? 그런 단위들이 많았어요. 사실은. 그래서 어느 하나로 아까 말한 것처럼 이 하나를 조사하는 것 보다 그렇게 단위들이 많고 그 공동체들이 즐겁게 네트워킹을 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의 배경은 뭐였을까? 그걸 가능하게 한 근거는 뭐였을까? 근데 그것들이 또 급격히 쇠퇴했기보다는 사실은 잘 운영이 되고 있기도 하고, 근데 부침도 있었고, 정권의 탄압을 받는 것도 있었고, 어떤 자체의 한계도 있었고. 그래서 사실은 정권의 탄압, MB나 박근혜 때, 특히 MB 때 사실은 그럴 때 또 오히려 안의 인자들은 단단해지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활동가는 아니지만. 근데 사실은 쇠퇴라기보다는 약간 뭔가 머쓱해진? 결국은 제일 무서운 건 자본인 것 같아요. 자본이 여기를 탄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같이 일해보자 프로포즈를 하면, 여튼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걸 꼭 거절할 필요는 없는 거고. 그럼 자연스럽게 이제 우리는 끄덕이게 된단 말이에요. 저도 그렇고. 제가 오늘 오면서 2000년대 초반 제가 여기저기 청탁받고 기고한 글들을 한번 복기하듯 읽어봤어요. 지금만큼의 시야는 없는 대신 지금은 저한테 가물가물해진 고민들을 써놓은 것들, 저는 전문 필자는 아니니까 어디 가서 축하하는 글을 많이 썼더라고요. 미디액트 몇 주년을 축하하며. 뭐 상상마당 2주년을 축하하며. 그래서 이걸 보면 상상마당이랑은 미디액트는 좀 다른 거죠. 상상마당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시네마테크와 상상마당이 다르고, 미디액트와 오재미동이 다르고 약간 이런 것처럼. 지금 제가 좀 두서없이 말해서 약간 조심스럽지만 혹시 필요하시면 그때 글들이 제 블로그 가면 다 있을 거예요.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독립영화 관련한 글들이 많을 거거든요?

그래서 그 단위들을, 감히 제 욕심이지만 《마테리알》이 뜻이 있으시다면 우리들을 라떼같이 소환하기보다는 이게 가능했던 이유들은 뭐고 여전히 지속이 되고 있는 그 근거, 근데 어떤 면에서 좀 머쓱해진 이유들? 간단히 말해서 핫 하지가 않게 된? 이것들을 한 번 다뤄주신다면 저도 한번 읽고 막 끄덕여보고 싶은 마음? 저도 뭔가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죠.

함: ‘빵빵년대(2000년대)’ 초반에 같이 뿜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포스트 권위주의 정권의 등장이랑 이런 것도 얘기해주셨지만, 제가 미술에도 관심이 좀 많은데. 90년대 그때쯤 해서 약간 신세대 미술 운동가들? 미술 하는 분들도 등장을 했다고 들었어요.

윤: 맞아요. 질문지 보면서 그러고 보니까 2000년대에 대안 공간 이런 말들이 많이 생기긴 했어요. 그렇죠.

함: 그분들이 한 90년대 후반쯤에 IMF 터지고 나서 해외에서 유학하던 젊은 미술가들이 들어와서 홍대에서 씬을 만들고 그다음 빵빵년대 초반에 영화계에 영향을 준걸까? 이런 식의 가설을 세웠었거든요.

윤: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근데 그 교류가 크진 않았던 것 같기는 해요. 너무 좁은 제 소견과 인상이어서 정확히 특정할 수는 없는데, 누가 여기에 영향을 줬다기보다는 전반적인 것이 아니었을까요? 가령 음악 쪽도 그렇고 우리가 생각하는 인디밴드와 인디 씬 이라는 게 커진 것도 2000년대 초반이잖아요?

그러니까 아마 감히 저는 제 가설로 확신하면. 돈은, 파이는 여튼 커지고 있었어요, 콘텐츠라는 거에 자본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니까. 그건 이제 김대중 정부의 역할도 컸던 것 같고. 당연히 그 안에 명암이 있겠지만. 그래도 여튼 산업 또는 관에만 맡기는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을 해보라는 제안들이 있었을 거예요. 잘은 모르지만. 그렇다면 정부에서, 문체부에서 책정한 예산도 있을 거고. 산업도 사실은 두리번거리고 있을 거고. 차세대에 뭐가 될 것인가. 더 중요한 건 시민들이 좀 다른 것을 보고 싶었겠죠. KBS, MBC 말고. 그러니까 케이블도 생기고 이러던 와중에 그런데도 갈증들이 있을 테니까. 그런 걸 채울 것들이 이제 좀 무르익었던? 그래서 90년대를 말씀하신 것처럼. 어떤 것을 우리가 본다는 것, 어떤 공간, 이벤트를 본다는 것은 그게 갑자기 지난 분기에 기획해서 지금 딱 나오는 것들은 사실은 문제가 있는 것들이고. 지자체라든지 어떤, 관이나 기업의 일시적인 수요로 이루어지는 건 별로인 거고. 말씀하신 거나 우리가 주목하는 건 다시 한번 해부하고 싶고 그 기록을 뜯어보고 싶은 것들은 꽤 오랜 세월을 거쳐서 십시일반하고 토론하고 얻어내고 싸우고 이 공간 달라고 해가지고 생긴 것일 거 아니에요.

그러면 사실은 지금 말씀하시는, 저는 빵빵년대라는 표현이 굉장히 재미있는데, 그때 생겨난 아웃풋들의 인풋은 90년대에 계속 있지 않았을까. 아까 말한 가령 푸른영상이랑 뭐 이런 데들이 탄압받으니까, 노동자뉴스제작단이 (줄여서 ‘노뉴단’이라 불리던) 탄압받으니까 싸우다가 야 우리끼리 한 번씩 연대체가 있어야겠다. 협의체해가지고 시위라도 같이 우르르 나가야 하지 않겠냐 해서 만든 게 한독협이라고 친다면. 그런데 한독협은 만들어 놓고 사업을 해야 하는데, 하다가 노동자 이슈 같은 것들은 미디액트가 담당하게 됐고.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은 활력연구소를 담당. 뭐 이런 거 있잖아요. 재미있는 외인부대였던 것 같아요. 왕좌의 게임으로 치면 서로 다른 부족들이 “Winter is Coming” 하면서 노스로 싸우기 위해서 우리는 가는데, 당신은 북쪽 벽을, 당신은 남쪽 벽을 맡아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일사분란 했던 것 같아요.

그때 미술, 방금 말한 대안미술 하시는 분들과의 협업은? 어느 정도인지 제가 잘 모르겠어요. 저한테 피부로 와 닿지는 않았는데, 근데 그게 그분들이 도움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따지는 것도 좀 별로인 게. 분명히 뭐가 있지 않았을까요? 가령 그때 제가 단편을 만들면 그렇게 대안공간에서 연락이 왔어요. 한번 틀고 싶다. 어쨌든 갤러리에서 트는 단편이 서사 위주의 단편보다는 뭔가 이미지들이 확확 지나가는 것을 원했을 거 아니에요. 저는 그때 스토리텔링 없이 누구한테 빌린 캠코더로 약간 파편적인 장면들이 지나가는 걸 많이 하다 보니까 제가 초대가 좀 많았던 것 같고. 그때도 좀 신기했죠, 근데 가면 항상 실망했고. 왜냐하면 그분들 잘못이 아니라,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극장에 다 모여앉아가지고 어둠속에서 보고 나서 끝나고 GV를 하면 여기에 집중했던 사람들과 하는 거고. 갤러리는 영화를 되게 고전적이고 상업적으로 사유하지는 않더라도 끝까지 재생해서 보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친절한 공간이 아니죠.

그리고 인디포럼이 그땐 관객들이 많았단 말이에요? 독립영화 틀면 기본적으로 한, 백 명, 이백 명, 오십 명 앉아있는데. 그에 반해 이른바 대안공간이라는 갤러리 같은 데에 초대받아 가면 나른한 표정의 한 세 명 정도가 왔다 갔다 하고 있으면, 뭐지? 왜 내 걸 트는 거지? 그럼 부르지 말았어야지. 라는 생각도 하게 되고.

이 얘길 하는 건 그래서 그게 안 좋았다 실책이었다. 이런 게 아니라, 어떻게 보면 큰 관심이 없는 저도 교류가 있었던 걸로 봤을 때 분명히 어떤 식의 이심전심은 있지 않았을까? 가령 뉴미디어페스티발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대안적인 실험영화를 모으고 틀고 북돋고 싶어 하는 김연호 씨라고 계셨거든요? 재미있는 게 그런 분들이 한독협 주최의 행사에 가면 다 있었어요. 서로 열심히 떠들고 술 먹고 이랬어가지고.

그런데 여기서 이건 샛길인데, 열심히 술 먹는 거로 연대의 기운을 나누는 패턴이 지금 생각해보면 꼭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 저는 그런 뒤풀이 문화를 좋아하긴 했어요. 저한테는 이분들이 사실은 셀럽이었거든요. 저는 충무로 영화에 관심이 너무 없었어요. 충무로 영화는 1년에 한 편도 안 보는? 저도 좀 못났었죠. 한국영화가 구리다고, 칙칙하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따지고 보면 재미있는 영화들이 있었는데. 저는 충무로 영화에 대한 워너비가 아니고, 그렇다고 뭐 방송 PD가 되고 싶은 워너비도 아니고. 아마 뭔가 다른 표현이나 발언을 하는, 사회적인 이슈와 개인적인 표현의 접점을 찾아가는? 저도 약간 진로를 고민하는 약간 10대 마인드였던 것 같아요. 20대까지.

그래서 그런 저한테 이쪽의 누나 형들이 좀 멋있어 보였단 말이에요. 류승완 감독이 〈베테랑〉(2015)에서도 썼지만, 강수연 배우가 한 말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그거 있잖아요. 저는 근데 ‘저건 우리 독립영화 쪽에서 할 말 아닌가’ 했던 거죠. ‘뭐 충무로는 돈도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이었고. 그 말이 당시 독립영화 씬에 너무 딱 맞는 거예요. 그래서 20대 청춘 시절이니까 이 사람들이 되게 멋있고 궁금했거든요? 그래가지고 제가 여기를 왕래하면서 봤는데 알고 봤더니 다들 친하고 거기에는 약간 음주문화가 되게 중요했던 것 같고. 끝나고 나서 다 같이 연대를 시작하면서 어깨동무를 하면서 자리가 섞이면서 모두가 알게 되는? 그때의 효용은 저는 동감해요. 근데 최근에 전주영화제에 오랜만에 갔어요. 옴니버스 영화로. 뒤풀이 같은 것들도 오랜만에 재개가 된 거예요. 근데 너무 싫더라고요. 코로나 경유하면서 덜 모이고 각자 마시는 문화에 제가 익숙해진 것도 있고. 코로나가 아니어도 저도 이제 변한 거예요. 개인주의라기보다는, 뭐 개인주의일 수도 있는데. 예전 식의 의사소통이 더 이상 좀 유효하지 않은 것 같은? 아직 예전 관습이 더 익숙한 사람은 꼰대다 나쁘다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과거에는 그게 우리가 빨리 하나의 의사소통을 위한, 서로를 지켜주기 위한, 서로 뿜뿜하기 위한, 활력연구소를 지키기 위한, 인디포럼을 유지시키기 위한, 어떤 검열 제도를 철폐시키기 위한, 등급제를 폐지시키기 위한 것들이었던 거죠.

그땐 가령 트위터도 없고, 서로 빨리 알아내서 친해지고 공감대를 확보한 다음에 시위도 빨리하고 대자보도 빨리 쓰는 게 중요했었는데. 지금은 그 전통이 그다지 유효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이건 지금 그 전통이 확고해서 제가 문제제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그게 뭔가 논의와 공동체를 뿜뿜하고 있지는 못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때 분들은 아직도 그러고 있으니까 못났다는 게 아니라 어떻게 보면 다른 식의 보글보글. 아까 말한 빵빵년대에 빵빵했던 것. 산업도 빵빵해지고 있고 여기도 빵빵해지고 있었는데, 근데 산업은 계속 빵빵해졌고. 더 무서울 정도로 빵빵해졌고.

근데 이쪽은, 독립영화나 대안의 담론들은 사실 그에 비해 빵빵해지지 못하단 말이에요. 보글보글이 안된단 말이에요. 근데 보글보글이 안되는 이유는 누구 탓이 아니라 시절이 바뀌면서 풍경이 바뀐 탓이죠. 그러면 커뮤니케이션의 양식이 들어와야 할 텐데, 그건 뭘까? 잘 모르겠어요. 지금 제가 너무 미시적인 얘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미술 교류라고 쳤을 때는 제가 본론을 너무 돌아갔는데. 그때는 제가 잘은 모르겠지만 산업도 정착이 아직 안 됐고. 권위주의 정권은 형식적으로 없어졌고. 그러면서 우리가 뭔가 새로운 것을 하면 열광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가령 류승완 감독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를 만들면 열광을, 지금도 열광할만한 작품이긴 하지만 지금 기준보다 더 열광을 했었고. 가령 장진 감독 같은 연극하던 사람이 와가지고 독특한 전술을 조금만 펼쳐도 다들 새로운 거에 열광하려고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상업적인 부분에서의 절충이나 변주보다도 더 대안적이고 틈새를 원하는, 거기서도 못 다루는 것들을 하는 게 독립영화였죠. 가령 당시 지상파들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같은 전에는 못 만들던 현대사 관련 르뽀를 내보내는 식으로, 벌써 옛날보다는 확실히 민감하고 진일보한 의제를 다뤘단 말이에요. 근데 더 왼쪽, 더 진보를 꿈꾸는 입장에서는 여전히 미흡했겠죠. 장애인, 소수자, 철거민 이런 것들은 못 다루는데 그건 또 여기 독립영화에서만 다루니까. 그러니까 우리들이 다 새로운 거에 열광할 준비가 다 되어있었던 시기. 그러니까 산업에도 그렇지만 대안과 담론의 영역에도. 그러면 거기에 이제 새로운 플레이어들끼리 당연히 자연스럽게 문화라는 공간들을 주축으로 이렇게 저렇게 교류를 하고 뭔가 같이 한 것도 있고. 그런 게 있겠죠.

금: 첫 번째 질문에서 해소가 안 된 부분이 있어서요. 좀 재미있다고 느꼈던 건 감독님께서 경유를 하시다가 눌러앉으셨다고 하셨는데. 그게 활력연구소의 “통과와 목적지라는 개념이 동시에 존재하기를 원했다”라는 공간 건축 의도에 딱 들어맞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는데요. 아무튼 활력연구소가 어떤 공간이었는지 저희가 상상이 안 된다고 했었는데.

윤: 아, 진짜 가보신적이 없으시죠. 지금 오재미동이랑 같아요. 왜냐하면 그걸 만들어 놓은 걸 다른 단위들이 계속 바꿔가지고 쓰는 식이 됐으니까 생긴 건 똑같고. 아까 말한 것처럼 미디액트와 시네마테크가 합쳐졌다는 말도 맞긴 맞는 것 같아요. 근데 시네마테크라고 치기에는 약간 상영을 볼 수 있는 환경이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았고요. 요새로 치면 동네 극장 같은 거 있잖아요. 가령 예전에는 단편 배급하는 데가 인디스토리밖에 없었으면 요새 조금 힙하게 개최하는 단위들이 생겼더라고요. 필름다빈, 오렌지필름, 그런 작은 회사들이 있잖아요?

그런 사업을 개인적으로 해나가는 분들도 멋지시지만 어떻게 보면 약간 이 모든 게 다른 소비를 보여주는 정도의 기표가 된 느낌이 저는 있어요. 근데 그거를 꼭 나쁘다고 볼 건 아니겠죠. 그렇게 파편화된 거에서 또 다른 게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런 작은 배급 사업을 하시는 분들을 폄하하는 말이 절대 아니에요. 다만 예전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 분들은 정기적이고 고정적인 곳이 있어야 된다, 제 표현으로 치면 ‘주소’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신 거죠.

아무튼 활력연구소는 영화를 보기에 유리한 곳은 아니었어요. 딱 그 정도의 프로젝터를 해놓고 삼삼오오 앉아서 볼 수 있는 건데. 그때 기준으로는 그런 것도 없었으니까. 그런 것도 이제 서울아트시네마 하나 있는데 서울아트시네마도 항상 빌려 쓰는 곳이고. 독립영화는 전용관이 아예 없었고.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심지어 얼마나 무식했냐면, 독립영화 전용관 인디스페이스가 처음 2007년에 만들어지고 첫 개관작이 제 영화였거든요? 얼마나 영광이에요. 근데 그땐 무슨 생각을 했냐면 어? 그런데 독립영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틀어주지 않았나? 전용관이 왜 따로 필요하지? 이랬다니까요. 나이브한 거죠. 왜냐하면 독립영화만 1년 내내 틀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니까. 어? 잘 만들면 틀어주던데? 이렇게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잘 만들든 못 만들든 쇠퇴하든 부침이 있든 없든 고정적인 주소가 있는 것. 내가 돈을 잘 벌고 열심히 일할 때만 집이 있는 게 아니라. 안 그래도 기본적으로 집이 하나는 있어야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디스페이스 같은 독립영화 전용관 건립을 해야 된다는 운동을 하면서, 그 와중에 약간 경유하는 그런 공간을, 여기에 드나들 비디오 메이커들이 작품을 딴 데서 안 틀어주더라도 틀 수 있는. CGV 멀티플렉스에서는 당연히 안 틀 테고, 영화제에서 1년에 이벤트로만 트는 것도 아니고. 저는 나이브했던 것 중에 이런 것도 있죠. 어? 영화제에서 틀면 되는데? 왜냐하면 자꾸 영화제에서 많이 틀어주니까. 근데 그게 아니라 사실 주소가 있어야 사람들이 드나드는 건데. 아무튼 그래서 거기 드나드는 비디오메이커들 것도 틀고. 비디오메이커들이라든지 그런 새로운 비디오를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 바깥에 작품도 틀고 이런 거였죠.

저도 기억이 나요. 일본의 어떤 비디오메이커 특별전을 했었는데. ‘오비타니 유리’인가? 어, 이름이 갑자기 기억이 난다. 그걸 보면서 또 대단한 영화도 아니고 비디온데. 아, 오디오랑 비디오를 저렇게 분리하면 재미있구나, 이렇게 생각했던 게 기억도 나고. 근게 그게 기간이 짧았잖아요. 다시 말하지만 서울아트시네마도 인디포럼도 그런 걸 많이 하고 있을 때여서 모두가 다 중요했던 거고. 후보단일화 대소동도 사실은 굉장히 작은 해프닝이었어요. 그때부터 슬슬 어떤 독립영화들은 제대로 DVD로 발매를 하고 팔리기도 하는데 근데 저랑 김곡, 김선 곡사랑 진성이 형 작업들은 DVD로 내긴 또 좀 애매했거든요. 여담인데, 최근에 N번방 다큐멘터리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2022)를 만든 최진성 감독이야말로 그때 독립영화계에 정말 독보적인 스타플레이어였어요. 2001년에서 한 2003년까지는 이 형 다큐멘터리가 너무 인기가 많아서 친하게 같이 다니면 아이돌이랑 같이 다니는 것 같았어요. 근데 그때는 생각해보면 독립영화 전용관도 없고 독립영화 개봉도 거의 안 할 때란 말이에요? 일단 상업적인 의미에서. 근데 이 형은 하루도 안 쉬고 상영회가 있었어요. 근데 그 말은 뭐냐, 이 형의 인기만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뻑큐멘터리 박통진리교〉(2001)라고 박정희의 유산에 대해서 힙하게 질문을 던지는 다큐도 하고. 〈그들만의 월드컵〉(2002)이라고 월드컵에 다 열광했을 때, 근데 월드컵이 착취하는 것은 없을까? 뭐 이런 걸 했어요. 당시로선 도발적이잖아요. 그런데 이런 다큐가 상영관이 없는데 계속 틀어지는 거예요.

노조가, 전교조가, 하자센터가, 지역의 시민단체가. 그러니까 제대로 된 상영은 아닌데, 소모임의 그룹상영에서 계속 틀었던 거죠. 그러니까 이것도 재미있는 건데 주소가 없는 대신 각자가 자기들의 자그마한 공동체로 영화를 초청하는 거죠. 그러면 가서 열 명이 모이든 다섯 명이 모이든. 오십 명이 모이면 굉장한 거고. 가서 틀고 얘기를 나누니까 돈은 없고 불편하지만 뿜뿜하는 느낌은 더 강했던? 그래서 주소를 흐트러트리자는 얘기는 아니지만, 막상 주소를 만들었더니 뿜뿜이 또 그렇게까지 막상 쉽지는 않더라고요.

근데 그건 주소나 공간의 문제는 아니겠죠. 그 사이에 또 매체 풍경도 많이 바뀌어가지고. 지금 말한 그런 것들을 다른 데서도 소개하거나 디바이스를 통해서 소개를 하게 되니까. 복합적인 것 같아요. 디바이스가 달라지고, 뭔가를 누리는 문화가 달라지고, 플레이어들이 갈 수 있는 곳이 달라지고. 기회도 많아졌지만 기회가 많아진 것도 어떻게 보면, 넓은 벌판으로 가면 좋다고 하잖아요?
근데 벌판이 오히려 더 미로 같달까요. 차라리 문이 하나밖에 없을 때는 우리가 그 문으로 모여서 영차영차 하면서 문을 뚫고 뭘 해보는데, 자 마음대로 가세요! 하고 벌판에 내려주면, 어디로 가는 게 맞을지, 어디로 가는 게 우리 공동체와 내 생존과 나의 지속적인 활동에 유리할지 오히려 더 막막하잖아요. 일단 사람이 많아 보이고 북적북적하고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가겠죠. 지금이 어떻게 보면 매체 풍경과 자본주의 시스템과 디바이스와 모든 것이 함께 변해서 누구한테 뭐라고 그러기가 좀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저희 ‘후보단일화 대소동’ 이야기로 돌아갈게요. 당시에 가령 푸른영상은 제작한 다큐들을 자체에서 비디오로 만드는 식으로 배급을 했구요, 변영주 감독님의 〈낮은 목소리〉 같은 다큐는 개봉까지 해서 상당히 반향도 있었구요.. 아, 변영주 감독님은 그때도 대중들이 다 알 정도로 유명한 감독이었는데, 기억이 나요 96년도에 부산영화제를 학교 신방과 선배들하고 갔었는데, 저는 영화를 너무 몰랐어가지고 신방과 선배들이 헉 변영주야. 봤더니 너무 꽃미남이 계신 거예요. 여자분인 줄도 몰랐어요. 저는 영화를 너무 몰라서. “변영주 몰라? 〈낮은 목소리〉!” 영화를 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다 알았던 거죠. 요새로 치면 힙한 인디싱어를 아는 것처럼 그랬었던 기억이 나거든요?

근데 그렇게 꼴을 갖춘 선배들에 비해 아직 그때의 저희 아웃풋들은 뭔가 좀 어설프고 조악하고 이러니까. 장난스럽게 궁리를 한 거죠, 우리도 비디오 테입에 함께 우리 작업을 담아서 프로젝트 제목을 붙여서 노점상처럼 팔자. 제목을 뭘로 할까, 얘기를 많이 했는데, 사실 후보단일화 대소동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아마 군소후보? 진보단일화? 이런 표현이 더 맞을 텐데, 그때 마침 2002년에 대선하면서 노무현하고 정몽준이 합쳤다가 철회하는 그 모습, 당시 정치 상황을 풍자해서 한 것인데, 사실은 뭐 대단한 것은 아니었고 일회성의 해프닝이었어요.

근데 그런 건 느꼈죠. 이름을 재미있게 만들고 우리가 모여서 재미있는 걸 만들면 사람들이 좋아하는구나. 치기 어리게 하는 걸 아직 귀여워해 줄 때. 저희가 근거라기보다는 어떤 증상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걸 우쭈쭈해주고 귀여워해 주는 분위기? 가령 지금 부산영화제를 하는 데 어떤 젊은 감독들이 남의 상영관 앞에서 허락도 안 받고 자기 작품을 비디오에 담았다며 호객하고 판매를 해요. 그러면 ‘왜 남의 잔치에서 저러지?’라는 말을 듣겠죠. 우리는 우리가 초대받지 않은 영화제 앞에서 “사세요, 사세요!” 그랬으니까. (좌중 웃음) 어떻게 보면 그런 모든 치기들이 용납이 되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금: 그러면, 근데 저도 좀 궁금한 것이. 윤성호 감독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다르게 지금 시점에서 돌아보면 후보단일화 대소동이 되게 언론 보도도 많이 나오고 그래서, 커 보인다고 해야 되나? 그런 게 좀 있었거든요. 인터뷰를 읽었었는데. 재미있던.

윤: 《씨네21》 인터뷰요? 활력연구소에서 후보단일화대소동.

금: 아뇨, 《독립영화》지에서 했던 인터뷰입니다.

윤: 아 그렇군요. 그게 《씨네21》 찾아보면 활력연구소도 보도를 해주고 싶고, 또 독립영화에 새로 까부는 애들도 보도를 해주고 싶으니까. 보통 인디포럼을 하면 ‘인디포럼이 이번에 주목하는 신작선’ 그때는 이렇게 다뤘었는데. 지금은 근데 크게 안 다뤄주죠?

박동수(이하 박): 지금은 작년에 개최 기사도 안 났어요. (좌중 웃음)

윤: 그때는 일단 기본 한 대여섯 페이지는 됐거든요? 그리고 인디포럼 개최 시기에는 더. 영화잡지도 많았잖아요. 《필름 2.0》, 《무비위크》. 제가 되게 진짜 좀 병맛 같은 비디오 하나 만들었는데 다 저를 인터뷰하고서. 의식의 흐름대로 만드는 메이커! 이런 거 막 싣고 그랬거든요. (좌중 웃음) 어쨌든 그렇게 좀 우쭈쭈 해줄 때가 있었어요. 근데 《씨네21》도 무가지가 아니니까 뭔가 이슈를 재미있게 해서 코너를 피처를 하고 싶잖아요. 그래서 어쩌면 활력연구소, 젊은 메이커들, 후보단일화 대소동 거기가 두 마리 토끼를 잡기에 좋았던 것 아닐까.

그게 의미가 없는 건 아닌데, 그게 한 십몇 년 지나서 검색해서 나올 때는 어? 이 사람들 활력연구소 너무나 잘 됐었고, 이 사람들 되게 중요한 메이커들이고 플레이어였나? 꼭 그렇다고 보기에는 거기에서 이름 붙이고 까불기에 좋았던 한 꼭지인데 그게 매체에 좀 남은 거라고 보여요. 그래서 제가 좀 쑥스러운 게 있어요. 활력연구소 분들에게도 좀 미안하고. 왜냐하면 그때 활력연구소의 리더였던 최소원 소장님 같은 분. 훌륭한 행정가고 뛰어난 분인데, 제가 보기에는 되게 똑똑하고 예민하고 날렵한 분들이, 날쌘 분들이 많았었는데. 그래서 그분들을 인터뷰도 하고 주목하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있어요.
가령 미디액트로 치면 지금은 미국으로 가신 이주훈 사무국장이라는 분이 다 매뉴얼도 만들고 했거든요? 저는 그래서 어떤 느낌이냐면 미디액트가 좀 신기했어요. 왜냐하면 독립영화 쪽이 약간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게 있는데. 나쁜 뜻에서의 “좋은 게 좋은 거지”가 아니라. 어쨌든 아까 말한 그런 식의 연대고 하니까. 사실 이미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이심전심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그런 느낌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미디액트가 그런 분위기가 아닌 거예요. 그래서 처음엔 사람들이 막 뭐라고 그랬어요. 까칠해서. 왜 이렇게 까칠하지? 장비 하나 빌렸는데 너무 막 이러니까. 뭐가 다른 거지? 근데 그랬어야 되는 게 맞는 거예요. 이분들은 나라 예산을 따내가지고 광화문에다 공간을 만들어놓은 이상, 정말 제대로 하지 않으면 책잡을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것을 알고 해서 예민했던 거죠. 나중에 MB 정부 때 미디액트를 뺏으려고 되게 애썼는데. 아무리 감사를 해도 뭐가 안 나오잖아요. 그래도 뭐 핑계를 대고서는 계속 압박을 했지만. 그래서 생각보다 훈련된 사람이 많았던 느낌? 독립영화 쪽이. 최소원씨도 그렇고. 아까 편집장님 말씀하신 것처럼 90년대 어떤 분들은 노동운동을 많이 하던 분들이다 보니까, 미디액트는 노조운동을 많이 하던 분들이니까 정말 자기들이 꼼꼼하고 정확하지 않으면 진다라는 생각이 확실했던 것 같고.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 같은 경우에는 퀴어 감수성도 있고 다른 여러 가지가 있으면서 우리가 글도 더 잘 쓰고 행정적인 것도 보이지 않으면, 날라리, 뜨내기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 철두철미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독립영화나 이런 쪽에서의 세태는 감독의 욕심과 자본의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건 너무 크고. 또 하나는 여기에 새롭고 정교하고 앞서가는 인력이 이쪽으로 먼저 오지 않을 거라는 거?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요? 가령 글을 잘 쓰는 분들, 아 《마테리알》은 잘 쓰시겠죠. (좌중 웃음) 근데 예를 들어서 어떤 담론을 생성하면서 창의적인 글을 쓰고 싶어요. 그럼 차라리 파워 트위터리안이 되거나 일간 이슬아를 하겠죠. 이슬아 작가님 같이 각개약진하시는 작가님들이 문제라는 게 아니라 지금은 그런 식으로 내가 이 구독 경제에서 살아남는 것이 관건인 세상이 되었잖아요. 거기에 또 유리한 플레이어들이 있고.

그래서 아까 얘기한 행정가들도 솔직히 그 정도의 센스와 뭔가가 있으면 차라리 문체부 공무원이 되든지 아니면 CJ에 들어가서 제가 이런 사업 하나 잘할게요. 가 되거나. 자본들도 R&D를 하나씩 하니까. 저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제가 너무 우회하는 이야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령 넷플릭스가 초반에 영업을 되게 잘했잖아요. 자기들이 세상에서 가장 대안적이고 힙하고 올바르고 이걸로 완전히 브랜드 포지셔닝을 했잖아요? 실은 넷플릭스는 글로벌 자본주의 대기업이고. 나쁘다 좋다가 아니라 이익을 위한 브랜딩을 하는 건데, 사실 한국에서 자기들이 처음에 언더독에서 탑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코어 지지층이 필요하니까 코어 지지층한테 브랜드 전략을 끝내주게 했거든요? 저기만큼 대안적인 데가 없어. 저기는 여성을 지켜줄 거야. 소수자를 지켜 줄 거야. 근데 사실 그렇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악한 집단이라기보다 사실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인 거고 근데 그런 식의 워딩을 만들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공부 잘하고 똑똑하고 돈 많이 받을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자본의 영역에서 오히려 더 다양한 얘기를 할 수 있고, 대안적이고 다양성에 일조하는 느낌과 그에 따른 어떤 쾌감도 얻을 수 있다면, 그리로 가는 게 당연하죠. 2000년대 초반의, 빵빵년대 초반의 활동가들이라든지 브레인, 독립영화나 대안적인 문화의 브레인들이 만약 지금 청춘으로 태어났다면 이쪽으로 오겠어요? 그냥 자본이 많이 할애된 곳으로 가서 거기서 자기가 뭔가 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느낌을 얻으려 하겠죠.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마케팅 잘하고, 홍보 잘하고, 사람들 패키징 잘하는 사람들이 이제 이쪽으로 안 오는데, 독립영화가 대자본과 어떻게 맞서지? 승패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쪽이 과연 앞으로도 유지와 단결이 가능할까? 왜냐하면 자본은 굉장히 영리해서 ‘우리는 돈 많은 권력자들이고 너희들을 고용하겠다!’ 이런 식으로 다가오지 않잖아요. ‘우리 뭔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봐요’, ‘우리 뭔가 다른 틈새를 열어봐요’ 이렇게 접근을 하는데, 그러니까 내가 뭔가 문화적인 발언을 하면서 나의 생계도 해결하면서, 대안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서 어디로 갈까? 그러면 나는 티빙이나 넷플릭스에 갈 거야. 이럴 것 같아요. 거기 가서 한계를 느낀다 하더라도. 그럴 때 제일 무기력함을 느끼죠. 저희가 어떻게 보면 또 그런 증거고. 진성이 형도 이제 넷플릭스 다큐를 만들고 있고. 잘못됐다는 게 아니에요. 자연스러운 일이죠. 자본의 도움을 받아 나름 대안적인 콘텐츠도 만들 수 있는 게 뭐 나쁘겠어요. 다만 ‘상품’으로서가 아니면 독립영화마저 그 존재 의의를 찾기가 힘들어진 지금 시대에, 기본적인 담론의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소통과 거래를 해야 하는 걸까? 참 모르겠어요.

함: 과거에 가령 독립영화계의 똑똑한 사람들? 눈 밝은 사람들이 왜 독립영화계를 매력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윤: 이 생각을 진짜 자주 해봤거든요? 가령 저나 김곡, 김선이나 진성이 형이나, 이런 사람들이 지금 20대였으면 유튜버를 했을 것 같기도 해요. 아냐, 그래도 곡사는 안 그랬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친구들은 근본적인 시네마 주의자들이니까. 여전히 그런 가치관을 견지하면서도 나름 열심히 절충을 잘하고 있는 것 같아요. 가령 뭐 『히치콕과의 대화』 보면 사실 장르영화에 대한 동경들이 있잖아요. 고다르나 트뤼포나. 어쩌면 김곡, 김선 이 친구들은 상업영화에서 장르 영화를 만들면서 자기들은 영화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글들을 생산하는 것으로 노선을 잡은 것 같고. 저는 저대로 다른 식으로 잡는 건데. 그때 우리들이 지금이었으면? 저나 진성이 형은 유튜버였을 것 같아요. 다른 유튜버가 되려고 했겠죠 약간. V로그나 먹방으로 승부하지 않는? 왜냐하면 발언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었으니까. 발화를. 진성이 형은 사회에 대한 발언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고. 저는 어떤 개인적인 V로그 하고 있었을 것 같기도 하네요. 그리고 김곡, 김선 같은 친구들은 다른 식으로 영화를 했을 것 같고요. 지금 식으로. 지금 말한 저희 세 단위는 사실 그때 그렇게 자본, 상업적인 데서 많이 반길 사람들은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우리 셋은 다 훈련이 좀 덜 되어있어서 좀 독특한 걸 했던 것 같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재미있는 문장을 쓰는 외국인처럼. 셋 다 영화를 제대로 배운 게 아니다 보니까. 진성이 형은 VJ처럼 찍고 편집도 자기가하는 원 맨 플레이어였고. 그러면서 마이클 무어가 자기의 레퍼런스였을 테고. 저는 사실 레퍼런스가 한국 독립영화였고. 저는 한국영화도 별로 안보고 외국영화도 별로 안 보던 시절에 〈너희가 중딩을 아느냐〉(1998) 같은, 영파여중 방송반 비디오 (유소라 감독) 보고 충격받고 그랬어요. 너무 잘 찍어서가 아니라, 저렇게 개떡같이 찍어도 내가 집중하면서 보게 되는구나. 화면이 로우파이해도 거기에 분명한 스토리가 있고 어떤 볼 수밖에 없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으면 집중하게 되는구나. 평창영화제에서 리스트 열 개를 뽑아달라고 그래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봤거든요? 독립영화 열 개 리스트? 〈너희가 중딩을 아느냐〉, 〈상계동 올림픽〉. 근데 다들 특징이 로우파이한 비디오. 나는 그렇게 해도 되겠다. 그런 식으로? 근데 또 김곡, 김선 같은 친구들은 사실은 고전적인 영화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런데 우리들이 만든 것들은 사실은 어쨌든 상업영화 영역에서는 내러티브 좀 실종되어 있거나 플롯이 잘 구축되어 있지 않은? 무엇보다 스타들을 캐스팅할 수 없는, 스타들의 캐스팅과 무관한 걸 만드는 사람들이었고. 사실 그때 저희 말고 핫한 분들이 있잖아요. 당시 독립영화 주목받던 분들이 많았는데. 자본은 점점 플레이어가 필요하니까. 새로운 인력들에 대한 수요가 있으니까 독립영화에도 눈을 돌려서 사람들을 데려가는 거죠. 그게 영화과 분들한테는 너무나 당연한 수순인데. 그게 왜 새로웠냐면 그전에는 영화과를 나왔어도 도제식으로 하다가 올라가는 건데, 자꾸 마음이 급한 거죠. 빨리빨리.

마치 지금 OTT 시대랑 비슷해요. 요새는 드라마 수요가 너무 많아서 저 같은 사람한테도 진짜 하루에도 세 개씩 드라마 제안이 들어와요. 그런데 그걸 다 하고 있으면 정말 의외의 드라마들을 제가 많이 연출한 걸로 나왔을 거예요. TV에서 틀어지는 중에 가장 흔한 류의 로맨틱코미디 제안을 저도 받아왔으니까요. 그때가 딱 그런 시대거든요. 한국영화가 막 부흥하니까 단편영화 하나만 잘 만들어도 막 연락 오는 거예요. 감독하라고. 충무로에 도제식으로 하는 분들도 그렇고. 메이커들이 필요하니까.

아무튼 근데 저희들은 거기서 콜이 오는 사람들은 아니었고, 어떻게 보면 더 산업과 독립영화 인디의 중간에서 콜을 받는 분들이 당연히 있었고. 저는 저희가 그거랑 좀 별개로 갈 줄 알았어요. 저는 그때 어떻게 하면 활동가와 창작자의 중간의 경계에서 먹고살면서 나이를 먹을 수 있을까. 그때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게 우리가 20대 중반이고 30대 초반이니까 좀 예뻐해 주는 거지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을 텐데. 그래서 그 고민을 저는 엄청 하고 있던 시절? 그런데 자연스럽게 산업이 커지면서 알고 보면 다들 자기 식으로 지금 생존을 하고 있는 거고.

그래서 사실은 좀 다른 건데, 술자리 네트워킹이 더 이상 유효하거나 아름답지 않은 지금 다른 소통방식을 고안해야하는 것처럼 한국 독립영화씬의 액티비즘 다큐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궁금해요. 그때는 그것들도 항상 영화제에서 핫 했거든요? 꼭 〈송환〉같이 유명한 다큐가 아니어도. 어떤 노동조합을 다룬 다큐, 철거민을 다룬 다큐, 각각 핫 했거든요? 모두가 관심을 가졌고. 재미있는 게 사실 여기 질문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요새의 독립 극영화들은 상당히 대중적인 서사성을 갖추고 있단 말이에요, 그게 나쁜 것이라고 보지는 않아요. 플롯과 내러티브를 갖추고 연기 잘하는 배우들을 캐스팅할 수 있게도 됐고. 그래서 좀 더 많은 대중들과의 접점이 생겼어요.

근데 몇 년 전부터 제 마음이 스멀스멀 두려운 게. 제가 두려워할 건 아닌데. 그 외연이 커진 것에 비해서 여기에서만 할 수 있는 어떤 액티비즘 다큐라든지 그것들이 상대적으로 더 찌그러진 느낌? 가령 실험영화라든지 독립 애니메이션은 원래가 파이가 크지 않아서 그런 위축의 느낌이 그나마 덜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비유를 해볼게요. 여기에 주어진 도토리가 열 개밖에 없을 때에는, 극영화가 그래도 좀 더 인기가 있어서 다섯 알을 배분받아도 우리 다 가난하니까 도긴개긴인 거예요. 두세알이나 다섯 알이나. 근데 언제부턴가 도토리가 오십 알이 주어져요. 판이 커진 거죠. 그래서 그중 마흔 알을 독립 장편극영화가 차지하면, 그때부턴 갭이 확실히 보이는 거죠. 배우를 네임드로 생산할 수 있는 영화들일수록 유리하구나, 싶어지고. 그럴 경우, 다큐는 배우 대신 감독이 네임드가 되어야 하는데 쉽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이 네임드와 팬덤 문화가 독립영화한테 소중한 자산이자 유리천장이 되고 있는 게 굉장히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을까요. 그래도 오십 알이 생기면 좋냐? 하지만 그렇게 늘어난 오십 알에 우리가 자족하는 동안 산업이 차지해버린 도토리는 이제 9,000알 아닌가, 뭐 그런 느낌인 것 같아요.

이하윤: 아까 감독님께서 ‘어떻게 하면 활동가와 창작자의 중간의 경계에서 먹고살면서 나이를 먹을 수 있을까’를 고민 하셨다고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십만원비디오페스티벌이나 활력연구소는 직접 찍은 영화를 남들에게 보여줄 기회를 찾던 사람들이 만들었던 것이고 같이 영화를 만들고 얘기할 사람들을 더 모아보자고, 양성해보자고 만들었어졌었던 공간으로 이해가 됩니다. 감독님 필모그래피를 보면, 영화, 드라마, 웹드라마, OTT 드라마 등 여러 가지 유통 방식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신다고 보였어요. 이런 감독님의 태도에 앞서 말한 90년대 후반 00년대 초반의 활동이 반영되어있다고 볼 수 있을지. 그리고 ‘활동가와 창작자의 중간의 경계에서 먹고사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감독님의 90년대 후반에서 00년대 초중반의 활동들을 어떻게 자평하시고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윤: 굉장히 광범위한 질문이네요. 일단 이렇게 말할게요. 사실 활력연구소와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은 저한테 분명한 자극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제가 처음 만든 비디오를 거기서 틀었고. 저는 사실 그때 인디포럼이나 서울독립영화제는 안 내려고 했거든요? 왠지 내면 안 될 것 같은? 거기는 좀 더 멋지고 연륜 있고 그런 분들이 가는 곳 같은. 그 영화제들은 당연히 그런 제한이 없고 오히려 받아주는 곳이었는데, 저나 제 친구들이 우리가 그런 데 내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어른들의 행사에 우리가 내면 안 되지 않나? 라는 생각이 있었던 거죠. 근데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은 꼭 내려고 했거든요? 어떻게 보면 그런 식으로 이미 사람들을 호명할 때 즐겁게 해준 것 같아요. 호명을 날렵하고 가볍게. 가령 영화감독님이라고 안 부르고 비디오페스티발에 낼 수 있는 ‘작가! 십만 원!’ 십만 원이라는 말이 사실 백만 원으로 만들어서 내도 되는 거잖아요. 그럴 때 십만 원이라는 말이 사람의 어깨를 펴주잖아요. 그건 분명히 자극을 남겼고.

근데 그건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만의 어떤 문화라기보다는 그때 약간 빵빵년대 초반을 설명하는 말인 것 같아요. 아까 말한 영파여중 방송반의 〈너희가 중딩을 아느냐〉를 제가 대학교 강의에서 열심히 봤거든요? 그런 식으로 갑자기 뭐 넷플릭스에서 뭘 틀어야지 텍스트가 되는 게 아니라 사방에서 만들어진 로우파이 한 것도 새로운 기운을 담지 했으면 텍스트로 다뤄지는. 영상이라는 건 그냥 돌아다니다가도 텍스트로 누군가 읽어주는 순간 수명을 얻는 건데. ‘어? 우리 것도 텍스트로 읽어 준단 말이야?’ 저한테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들도록 한 거죠. 저도 남의 것을 일단 텍스트로 읽으려고 했는데 이것도 문제가 이제 5년, 10년 되면 텍스트가 너무 많아지니까. 그렇게 알게 된 모두를 같은 밀도로 읽을 수는 없으니까 문제가 생기긴 하지만요 어쨌든.

그래서 분명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이 우리 것도 누군가한텐 텍스트일 수 있겠구나 라는 자존감을 높여주는 거에는 큰 의미가 있었는데, 다시 말하지만 그건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만의 기운이라기보다는. 그때의 전반적인 기운이었던 거죠. 어떤 늠름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어려서 그랬는지 제 기준에는 다 늠름했던 것 같고. 다음에 활력연구소가 그런 공간 중에 하나가 될 것 같은? 유일무이한 표상이 아니라 미디액트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인디스페이스가, 또 한독협이, 그리고 서울아트시네마가 그런 하나하나의 기지들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그거였는데 활력연구소를 자꾸 말하게 되는 건 그중에 제일 먼저 서리를 맞아버려서. 어떻게 보면 좀 문학적으로 말하자면 동무들이 생기고 있었고 동무들이 생기는 걸 즐거워하고 있었는데. 동무들하고 뭔가 같이 초원을 달릴 줄 알았는데, 가장 먼저 생긴 폐허가 활력연구소. 활력연구소가 제일 활력이 넘쳐서라기보다는, 다른 데도 활력이 넘쳤는데. 가장 먼저 관의 협조를 이끌어냈고, 가장 먼저 관의 협조랑 동맹을 맺었고 가장 먼저 버려졌기 때문에? 그러니까 가장 처음 나온 폐허라는 게 오히려 지금까지 얘기하게 되는 이유인 것 같아요. 다른 곳도 계속 폐허가 될 위기가 있었는데 어지럽게 버티면서 하신 거고. 여기는 이제 다들 이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당황한 상태에서 폐허가 되어버렸으니까. 그리고 제가 만드는 거에 유통 방식이라든지 그런 거에서 좀 날렵하게 대응하는 거에 영향을 끼쳤냐고 한다면 어, 영향을 끼쳤겠죠? 근데 방금 말한 것처럼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뿐만 아니라 많은 것들이 영향을 줬어요.

일단 그밖의 영화제들이 저에게 끼친 영향과 그 아이러니를 말하고 싶은데요. 작업을 하던 초반에는 제가 뭘 만들면 작은 영화제들이 그렇게 좋아해주는 거예요. 제가 잘 만들어서가 아니라 그때 그런 수요가 있었던 거죠. 영화제들도 새로운 아젠다를 만들어야 되잖아요. 전통적인 영화과들이 만든 16mm 필름 영화들 말고. 좀 뭔가 흔드는 플레이어들이 필요한데, 약간 그때 잘 만들지 않았어도 호명을 해주는 게 좀 있었겠죠.

그런 식으로 영화제를 많이 돌다 보니까 영화제 관객에 대한 설렘이 조금은 잦아드는 거예요. 그 관객들을 리스펙트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한 3년 해봐요. 그러면 시큰둥해지는 건 아닌데 좀 더 많은 청중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죠. 근데 좀 더 많이 만나고 싶다고 할 때 대부분은 그때 상업영화로 가고 싶어 하죠. 더 제대로 시나리오를 쓰고 배우를 뭐 한석규, 송강호를 캐스팅해서 상업영화로 관객을 만나고 싶다.

근데 저는 사실 그런 스토리텔러가 아니었거든요? 상업영화를 한다는 건 대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전형적이더라도 좀 강점이 있는 스토리텔링을 하고 거기에 배우라는 탑독을 딱 렌트해가지고 수익을 노리는 베팅인데 저는 그게 자본주의적이라서 싫은 게 아니라 애초에 좀 관심이 없었어요. 너무너무 관심이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청중을 만날 공간이 영화제밖에 없잖아요. 그럼 나는 스토리텔링에 아예 관심 없나? 근데 그렇지는 또 않은 거예요. 어떤 사람 사는 얘기를 보는 거를 좋아하고 만드는 건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 이제 내가 만든 작은 아이러니 같은 것들은 그냥 인터넷 같은 데서 좀 틀어도 되겠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제가 그때도 유튜브를 좀 많이 봤거든요 2004년, 2005년에? 노래 같은 것도 유튜브로 듣고. 그때부터 유튜브를 좀 많이 소비하는 사람이었어 가지고.

그래서 지금 제가 기억나는 게 〈독립영화인 국가보안법 철폐 프로젝트〉(2004)라는 걸 하는데, 옴니버스 영화를 만들기로 한 거예요. 그때도 십만 원을 지원 받았어요. 상징적인 십만 원을 받고, 국가보안법을 반대하는 걸 하는데 저만 이제 극영화를 만드는 애로 들어간 거고. 나머지는 다큐멘터리스트들? 십만 원이라는 상징적인 돈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서 주고. 2004년이니까 이제 무르익었다, 저 악법을 철폐할 때가 됐다라고 해서 하는데.

저는 그때 〈우익청년 윤성호〉(2004)라는 걸 만들었어요. 십만 원 주니까 돈 준 만큼 한 것도 있고. 다른 분들은 되게 열심히 찍어왔어요. (좌중 웃음) 근데 제 생각에는 십만 원이면 하루면 없어질 돈이니까 사람 부르고 어쩌고 하면서 찍을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저는 그냥 제 앨범에 있는 사진만 캡처해서 슬라이드쇼처럼 만들었죠. 뭐 참여한 분들 모두 잘 만들었고 역작이고 반응도 좋았어요. 근데 문제는 다 합치니까 100분인 거예요. 너무 긴 거예요. 저는 애초에 각 10분 정도로 제안 받았으니까 거기 좀 못 미치게 6분짜리를 만들었는데 다른 분들은 20분 막 이렇게 하니까. 그렇게 너무 기니까 어디서 초대가 안 들어와요. 이런 건 사실 많이 틀어야 되는데.

이런 걸 그때 어디서 많이 초대했냐 하면 영화제보다는 어디 노동자대회나 전교조 이런 곳의 행사에서 막간의 상영물로 틀어지는 건데 100분은 좀 긴 거죠. 그러니까 그런 데서 몇 개만 틀면 안 되냐고 요청이 온 거예요. 옴니버스니까. 그때 〈우익청년 윤성호〉에 대한 콜이 많았어요. 근데 그때 못 틀었어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이건 그래서는 안 된다. 다 같이 가야된다. 근데 뭐 저도 동의했죠. 그런데 사실 그러면서도 약간 ‘어우, 내꺼 왜 안 틀어’ 이런 게 아니라. 이게 과연 유효한 전략인가? 캠페인성이고 약간 그때의 정치적인 의도와 계몽의 시도가 있는 건데, 이게 최대한 여기저기 침투를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솔직히 영화제 틀어서 여기 올 관객들은 이미 이걸 지지하고 국가보안법을 악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올 텐데.

가령 인디다큐에서 개막작으로 틀었어요, 장난 아니에요, 분위기 너무 좋아요, 막 박수치고 울고 난리가 났어요. 이게 무슨 소용이 있는 거지? 어차피 여기까지 오는 사람들은 여기 다 동의할 사람들인데? 부산영화제, 인권영화제에서 틀었어요? 물론 영화제들의 효용은 알아요. 영화가 우리를 기다려주는 곳이 있다는 건 역시 되게 중요한 이벤트고 주소라는 생각은 요즘 오히려 부쩍 들어요.

그런데 그때는 워낙 영화제와 영화제 관객들의 문화에 익숙해져서 그랬던 건지 그런 의문이 들었던 거죠. ‘지금 우리가 던진 질문에 이미 동의하고 박수칠 사람들, GV 정도 나눌 사람들이 오는 게 무슨 의미지? 오히려 외곽의 초대들에 더 적극적으로 응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런데 이 옴니버스를 스플릿할 수가 없다? 왜? 우리는 하나의 연대니까? 연대를 하는 건 좋은데 따로 떨어져서 돌아다녀도 되지 않을까?’ 다행히 그때 그렇게 다들 꼰대거나 무지몽매하지는 않아서, 몇 달 있다가 자연스럽게 초대가 별로 없으니까 따로 트는 것을 허용하기로 얘기가 됐어요.

지금도 기억나는 게 〈우익청년 윤성호〉를 2004년인가 2005년에 동국대 운동장에서 하는 전국노동자대회에서 틀었어요. 마침 제가 그때 충무로에 있었어가지고 한 번 걸어가 봤거든요 밤에? 충격적이었어요. 3만 명이 모여서, 나한테는 그런 광경이 처음인 거죠. 내 영화가 틀어지고 있고 3만 명이 보는 거에. 그래서 제가 그런 스펙타클에 대한 감흥이 덜 한가 봐요. 뭐냐면 첫 영화 장편영화 만들어서 VIP 시사를 하고 그런 거에 대해서. 왜냐하면 삼만 명이 보고서 웃고 박수 치는걸 봤어가지고.

그래서 제가 무슨 생각을 했냐면 아 〈우익청년 윤성호〉 틀고 싶다. 인터넷에 올리고 싶다. 많이들 퍼가고 얘기하고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다들 OK해서 〈우익청년 윤성호〉가 올라갔죠. 근데 제 것만 올라간 게 아니라, 진보네트워크라고 있었어요. 지금은 있는지 모르겠는데 진보네트워트 홈페이지가 있어서 거기서 전체 그대로 100분을 올릴까 한 클립을 올릴까 아니면 따로따로 올릴까를 논의하다가 따로따로 올리는 것으로 결정이 됐죠.링크-편집자 주

따로따로 올리니까 반응이 좋아서 나중에 몇 년이 지나서 2006년인가 2007년쯤에 괜찮다고 해서 제가 유튜브에 올렸거든요. 그러니까 그때부터 그런 거죠. 질문에 아마 유통의 감각이 날렵하다고 그랬나? 제 생각엔 오히려 저는 민감하지 못 한 사람이죠. 왜냐면, 가령 당시에 독립영화는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게 가장 번듯한 일이고, 공동체 상영 같은 것에 초대되는 게 더 실속 있었단 말이에요, 근데 그것보다 저는 만드는 전략이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반대할 사람들도 설득하거나 약간 간질이고 싶은 게 좀 컸거든요.

〈우익청년 윤성호〉 같은 경우에. 저도 그때 국가보안법에 관심이 없고 잘 몰랐어요. 저는 대학교 때 너무 날라리라서. (좌중 웃음) 사실은 국가보안법 제안 받고 제일 먼저 생각한 게 “어 근데 있어야 되지 않을까?” (좌중 웃음) “어떻게 하지? 사람들이 기대하는데 안 할 수는 없고?” 해서 이 쟁쟁한 사람들과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고. 그래서 공부부터 했는데, 공부하고서 나오는 결론이 오케이 이거는 정권을 보위하는 데 쓰일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까 이걸 철폐하고 다른 어떤 법들로 갈음할 수 있겠구나. 근데 이건 나 같은 화자를 설정한 다음에 전유의 방법으로 하자라고 생각을 했죠. 근데 사실은 지금도 계속 그런 식이에요. 최근에 만든 정치드라마 같은 경우에도 항상 이미 내가 생각하는 뭐 무결한 말을 하는 사람만 하는 게 아니라, 갸웃거리는 정도의 주체로 하는 걸 원래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만나고 싶은 청중은 사실 갸웃거리는 저 같은 사람인 거죠. ‘국가보안법 꼭 있어야 돼. 없으면 안 되지 않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꼬시고 싶은데 그때의 독립영화 유통 구조를 보면, 영화제나 진보단체의 상영회 같은 곳을 통해 너무 자연스럽게 이미 박수치고 지지하기로 한 사람을 만나니까, 저한텐 유튜브가 좀 필요했던 거죠.

그래서 저는 사실은 핫한 거에 민감한 타입은 아닌 것 같고. 사실은 그렇게 따지면 지금 OTT 시대에 저는 OTT 입점에 혈안이 되어 있어야 되거든요? 아, 혈안이 되어있어요. 그래야지 돈을 벌고. (좌중 웃음) 아까 말한 것처럼 연출 제안도 되게 많아요. 지금 다시 감독 품귀 현상이 와서. 단편 하나만 만들어도 드라마 만들어달라고 제안이 오니까. 저 정도 경력이 있는 사람들한테는 온갖 제안이 다 와요. 온갖 드라마. 근데 그거 웬만한 거 맡으면 편리하거든요? 그냥 무에서 유를 기획하거나 창작하지 않고 이미 웹툰 원작으로 대본 다 써져있는 거 연출만 탁 커트바리를 루틴대로 하고 나서 돈 받으면 그럼 아파트 막. (좌중 웃음) 그렇게 열일하면 조금 과장해서 이 년에 아파트 한 채씩은 살 수 있을 정도로 여기저기 몸값들이 올라있는 상태예요.

어떻게 보면 지금 그런 거품이 껴있는 상태들이에요. 돈만 벌려고 마음먹으면 당장은 많은 것이 해결되는. 그런데 저는 뭐 윤리적이고 훌륭해서 그걸 안 하는 게 아니라, 뭐 뜻이 맞으면 할 건데. 뭐랄까 어쨌든 제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요새 고민이 과연 OTT는 계속 이렇게 될까? 구독 경제 이게 맞을까? 저는 약간 겁이 많아서 그다음을 자꾸 생각하나 봐요.

그러니까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는 거죠.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저도 스스로 고민을 했는데, 지금의 유통 구조에 민감한 사람이면 그 유통 구조를 빨리 선점하고서 거기서 영리를 창출해야 되는 거지, 저처럼 그다음 걱정을 지레 먼저 하고 있진 않는다는 거죠. 저는 그냥 제 개인적인 선호를 따른 거죠. 내가 언제부턴가 영화제 관람보다 유튜브 시청에 더 열성을 보이고 있는데? 그래서 유튜브에 많이 올렸던 거였고. 유튜브를 보는 사람들을 더 설득하고 싶은데? 이래서 올렸던 거였고요. 그다음에 드라마, 영화 같은 게 있는데. OTT로 입점을 한 건, OTT에서 보는 게 나도 사실은 집에서 탁 틀어가지고 보는 게 더 익숙해졌는데. 이런 거고.

근데 지금은 좀 다른 생각인 게 과연 이게 언제까지 가능할까? 티빙도 가입하고 디즈니 플러스도 가입하고 이런 게? 그래서 지금은 사실은 오히려 영화에 더 관심이 있어요. 근데 그게 〈기생충〉같이 영화를 잘 만들어가지고 한 번 이름을 날리고 싶다. 이런 건 아니고. 그건 이제 없을 것 같아요. 이미 다 하셨어요. 이제 더 이상 좋은 일들이 있을까요 다음 세대에? (좌중 웃음) 너무 앞 분들이 많은 걸 해내셔가지고. 그래서 저는 사실은 지금 잘 모르겠어요. 근데 약간 영화가 더 하고 싶은 상태? 그러니까 저는 민감한 사람이 아니라 좀, 어, 영리하지 못한 타입이죠. 합리적이지 않은 시장 행동을 하는 타입 같아요.

함: 말씀해주셔서 연결 지어서 바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과거 〈은하해방전선〉(2007)에서 “친척 중 정신병력을 가진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사촌 중에 「조선일보」 기자가 있다”고 대답하는 장면을 싫어하는 장면으로 꼽으시면서, 특정 집단에서만 통용되는 ‘인사이드 조크’에 대해 회의적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작인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를 보면, 사이비 종교인을 그릴 때 어떤 일말의 여지가 없는 조롱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요. 그러한 장면들이 그 조롱의 맥락을 이미 알고 있는 ‘내부’만이 공유하는 정서를 다시금 재확인하는 것 이상의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저희 내부에서 떠올랐습니다. 또한 과거 말씀하신 ‘인사이드 조크에 대한 회의감’과 대치되는 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요. 이에 대한 감독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윤: 아, 〈은하해방전선〉의 인사이드 조크. 후회가 막심해요. 그때도 이미 후회한다고 느꼈던 게 개봉하고 사람들이 그걸 주목하는 걸 보고 그때 이미 잘못했던 것 같다고 2007년에 블로그에 썼던 기억이 있거든요? 왜냐하면 저는 대중하고 많이 만나고 싶은데, 제가 좋아하는 대중들하고 만나고 싶거든요? 근데 이 말이 우리 편만 만나고 싶다는 게 아니라. 나하고 생각이 좀 다르고 이념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더라도 왠지 나도 친구 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나하고 모든 게 같은데 친구 하기 싫은 아저씨들이 있잖아요. 뭔지 알겠죠.

근데 그때 보니까 〈은하해방전선〉 보고 딱 그것만 오려가지고, 아 감독 너무 뛰어나다, 뭐 발칙하다, 천재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딱 싫어하는 사람들? 《딴지일보》 이런 데. (좌중 웃음) 《딴지일보》에서 그렇게 좋아하는 게 너무 싫었어요. 그때도. 근데 사람이라는 게 자기의 오류나 모순을 자기가 스스로 깨달아야지, 누가 욕했을 때는 못 깨달아요. 오히려 누가 칭찬할 때, 근데 그런 식의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게 아닐 때 많은 것을 깨달아요. 그렇지 않나요? 내가 이 칭찬을 저 사람한테 받고 싶지 않았을 때 아, 내가 잘못 가고 있구나! 깨닫거든요? 그래서 그 뒤로 좀 다르게 가려고 되게 좀 애를 썼는데.

여기서 차이는 뭐냐, 제 윤리적 기준은 뭐냐. 내가 동의하지 않는 가치관을 가진 상대방이 내가 쓴 것과 같은 전법을 썼을 때, 즉 내 화법을 전유했을 때 우리 또한 취약한 타겟이 된다면, 그렇게 서로 소모적인 조소만 날리는 셈이라면, 그건 옳지 않은 방법인 거죠. ‘사촌 중에 조선일보 기자’ 운운하는 식으로 어딘가들에서 ‘한겨레 기자는’ 어쩌고 운운한다면 그냥 둘 다 못난 ‘반사’를 거듭하는 것일 뿐이잖아요.

〈은하해방전선〉의 그 장면이 그랬어요. 판단을 화자가 내리잖아요. ‘정신병’ 이런 안 좋은 어휘를 써가면서. 얼마나 빻았어요. 윤리적이지 못했어요. 근데 지금은 적어도 그렇게 빤한 농담으로 우리 편을 호명하진 않죠. 물론 서사를 전개하는 데 있어 작가의 의도가 개입되는 것조차 막아야 되는 건 아니에요. 그건 애초에 불가능하고. 다만 맥락 없이 내 가치를 주입시키는 식으로, 그것도 저열한 농담을 동원하는 걸 지양하자는 거죠.

그건 뭐 사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에 나오는 잔잔바리 정치 논객을 연상시키는 현진이 형이 연기한 캐릭터도 그렇고. 사실은 그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의도는 있지만. 한 마디로 어떤 화법을 썼을 때의 이슈 같거든요. 글씨를 어떻게 찌그러트렸느냐? 근데 저는 〈은하해방전선〉에서는 너무 대놓고 “윤석열 술 취했다!” 이런 느낌인 거고. (좌중 웃음) 그냥 잘하려면 사실 차분하게 보여주면서 저 말들을 보면서 우리 스스로가 좀 안타깝지 않니? 뭐 이런 정도로 하면 좋겠는데. 그래서 그걸 지금도 후회를 해요.

최근에도 얘기하는 게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공개한 다음에 검색을 할 거 아니에요. 작품을 검색하면. 아, 이거 감독은 역시 예전에 〈은하해방전선〉에서 조선일보 조롱할 때부터 잘했다고.. 제가 전혀 바라지 않는 식의 예찬을 해놓은 거예요. 그런 걸 올려놓은 거 보면 진짜 “어휴, 아저씨들 제발 좀 눈치 챙겨!” 막 이러고 싶은. (좌중 웃음) 암튼 〈은하해방전선〉의 그 조크는 제가 만든 것 중에 제일 극혐하는 장면이에요. 진짜로 진심으로.

박: 조금 반대로 감독님 초기작을, 최근에 인디포럼에서 상영한 것도 있고 최근에 영상자료원에 가서 다시 보기도 했었는데. 〈삼천포 가는 길〉이나 〈이상청〉을 같이 보면 당시 인터넷 밈 문화라든가 저희는 90년대생이니까 UCC라는 개념을 접한 건 한 2005년, 2006년, 2007년 이때쯤이거든요? 원더걸스 ‘텔 미’ 막 이런 거 나올 때요. 〈삼천포 가는 길〉 같은 걸 보고 있으면 그런 밈 문화나 UCC 문화 같은 걸 감독님께서 선취하고 있다는 느낌이 지금 와서 보기에는 그렇게 보이더라고요. 뭔가 이런 패러디, 전유나 전용의 전략 같은 거? 이런 것들이 보이는데. 제가 사무실에서 인디포럼 옛날 프로그램 북을 뒤적거리다가. 유운성 평론가가 프로그램 노트에 썼던 게 “예술적 상상력과 의미의 담지자로서의 작가 자신을 전방위적인 농담의 전략을 통해 스스로 해체한다.”라고 쓰고 계시거든요? 근데 이게 어떻게 보면 감독님의 초기작에서 발견되는 이런 전략들이 기존에 감독님이 데뷔하기 전의 독립영화? 아니면 액티비즘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제가 보기에는 어떤 반발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작품 안에 내러티브가 있기는 있잖아요? 내러티브 자체는 연애나 섹스나 이런 사적인 얘기들, 개인적인 얘기들인데, 작품이 겨냥하는 건 작품 안에 의도적이든 아니든 녹아들어 있는 사회적인 것들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해서 이상용 평론가가 또 얘기를 했던 것인데, “‘사회적인 것’에 묶여 있는 독립영화를 수용하면서도 독립영화라는 텍스트를 ‘내파’한다는 모순”이 감독님의 작품에 있다고 얘기를 하셨거든요? 그래서 그런 감독님 작품의 방법론이 방향은 다르지만 어쩌면 곡사형제의 어떤 아방한 영화들과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곳을 지향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때문에 지금의 시점에서 감독님의 초기작을 다시 떠올리면 다큐멘터리 중심이었던 독립영화를 넘어서거나 부수려고 했다는 생각까지도 들기도 하는데, 당시에 작업을 하실 때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만드셨는지가 궁금합니다.

윤: 간단하게 말해서 제가 진정한 프론티어였던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런 화법에서. 그건 다 있었던 화법인 것 같아요. 근데 저만큼 재미있게 만드는 사람이 없었던 거지. (좌중 웃음) 그래서 사실은 이런 것 같아요. 두 가지가 공존했던 것 같은데요. 있었던 문법에 대항하려면 문법을 알고 구사할 수 있는데 깨뜨리고 싶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고 문법을 몰라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컷을 어떻게 나눠야 되는지도 모르고. 다큐라고 치면 다큐들을 싫어하지는 않았거든요? 영향을 많이 받고 리스펙트하는 게 있어서.

그런데 내가 만들려니까 써야 되는 문법이나, 어, 저의 툴이 없으니까 아까 말한 거랑 같은 것 같아요. 그 언어에 익숙하지가 않으니까 서툴게 하는데, 그 서툴게 하는 게 주는 엇박이나 괴리 같은 걸 사람들이 재미있어해 주니까 그걸 또 얼른 캐치해서 요렇게 하면 또 이렇게 한다고 좋아하네? 하면서 서투름을, 아무 말이나 하는 걸 무기로 썼던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밈에 대해서는 제가 인터넷 밈 문화에 익숙하지가 않아요. 얼리어답터가 아니어가지고. 저는 스마트폰만 해도 남들 다 스마트폰 구입하고도 꽤 있다가 2010년 중반인가에 와서 처음으로 썼던 것 같거든요. 심지어 웹/모바일 드라마의 시초라고 쳐주는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2010)를 만들었을 때도 스마트폰이 없었어요. 그래서 인터뷰 할 때마다 힘들었어요. “자 감독님이 스마트폰 들고 있는 모습을 찍겠습니다.” 어? 3G폰이니까. (좌중 웃음) 제가 그래서 밈 문화나 이런 거에 익숙한 편은 아니고. 실제로 한국영화만 적게 본 게 아니라 진짜로 영화나 드라마를 거의 안 봤어요. 저는 약간 책 보는 거 좋아하고. 다큐 보는 거 좋아하고. 유튜브에서 음악 찾아 듣는 거 좋아했다고는 했지만 그 밖의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엔 거의 들어가 보지 않았었고. 그래가지고 실제로 제가 패러디라기보다는 쓸 수 있는 어떤 어법들이 책이나 텍스트 위주였죠. 그래서 나레이션이나 인용이 되게 많은 거고.

함: 저 아까 해주신 말씀 중에 최소원 사무국장이랑 이주훈 국장님.

윤: 근데 이 두 분 말고도 너무 많아서. 가령 김명준 소장님 같은 분도 굉장히 영민한 분이고. 아 한독협에도 뭐 얼마나 똑똑한 사람들 많은데요. 그런데 이제 그 인력들이 참 신기한 게 20년째 같은 인력들이에요, 20년째. 어휴, 큰일 났다. 이거 위험한 말이다. 사실 저도 요새의 실무자분들은 또 잘 몰라서요, 요새의 실무자분들도 되게 똑똑하고 훌륭하실 텐데.

박: 미디액트 내부에서도 얘기 많이 나오긴 하더라고요. 허리활동가가 없다는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윤: 그것도 지금 계신 분들도 다 훌륭한 분들인데. 어쨌든 이게 인생의 업인 분들은 아니잖아요. 약간 경유지잖아요? 근데 자본은 사실 그런 걸 반기죠. 가령 CJ에 있는 사람 중에 CJ에 뼈를 묻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넷플릭스에 있는 실무자들도 몇 년 있으면 경력을 올려서 딴 데 가지 않겠어요? 티빙, 씨즌 뭐 디즈니 플러스 다 돌아다니겠지요. 그 개인들은 그러면서 자신들의 커리어가 성장하는 거라고 자족할 거고, 자본들 역시 노동유연화 이러면서 그런 분위기를 북돋을 거고. 그런데 이쪽, 독립영화를 비롯해서 어떻게든 대안적인 담론을 하는 쪽은 그걸 애착하고 지키면서 인력 또한 아카이빙이 되어야 하는 건데. 이쪽은 이제 모든 풍경이 사실 아카이빙 되지 않는 풍경이 되어버리니까. 세상이 그런 알고리즘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까.

함: 아, 활력연구소가 가장 먼저 생긴 폐허라고 하셨잖아요.

윤: 예, 그런 표현을 썼네요.

함: 근데 가령 최소원님께서 독립영화계와 멀어지셨고.

윤: 사실 근데 뭐하시는지 몰라서. 여전히 알고 봤더니 독립영화를 지원하고 계신 건 아닌가?

함: 이런 가설도 가능할 것 같아요. 같이 독립영화계에 있었지만 뭔가, 아까도 말씀하신 것처럼 한독협 중심의 어떤 헤게모니? 에서 좀 튕겨져 나간 것은 아닐까?

윤: 별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한독협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던 적이 없는 같아요. 제가 봤을 때는. 한독협이 뭐 이래라저래라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저도 사실 한독협이랑 별도로 살아와가지고 할 말은 없는데, 이쪽이 뭐랄까? 중앙집권을 해가지고 뭐라고 하기에는, 일단 뭐가 파이가 너무 없어가지고…. 저는 여전히 저를 독립영화인의 정체성으로 소개하긴 하거든요. 격년에 한 번씩은 독립영화랑 관련된 프로젝트를 하려고 하고. 무슨 시혜의 차원이 아니라 저를 위해서.

그런 정도로 독립영화하고 여전히 느슨하게 연대하고 있는 입장으로 치자면 여전히 이쪽이 뭔가 큰 힘을 쥐는 일은 별로 없거나, 오히려 어떤 사업이나 단위를 따내면 어떻게든 그건 좀 분산을 해야하는 분위기거든요. 나라에서 돈 쓰는 걸, 한독협에 몰아줄 수가 없는 분위기거든요? 이건 진짜로. 왜냐하면 단위를 만들어야 되고. 그래서 사실 미디액트도 한독협의 무엇이라고 하기엔 사실은 독립된 곳이잖아요. 사실상. 뭐 옛날 한독협에서 일하던 분들이 여기저기 있겠지만 그게 기관장 같은 느낌이라기보다는, 제가 딱히 한독협을 쉴드쳐야 하는 포지션도 아니고. 지금 저는 너무 구심점이 없는 게 오히려 아쉬운 것 같아요. 그런데 또 그걸 저희가 할 수 있을까? 해야 된다? 이것도 잘 모르겠고요.

그래서 지금 어떤 한 군데가 구심점이고 모든 걸 너무 장악하고 있어서 문제라는 말을 하려면 그런 확실한 데이터나 현상이 있어야 되는데. 여전히 그렇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만약에 편집장님이 말씀하신 게 2000년대 초반이라면 왈가왈부를 해볼 수 있는 이슈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왜 미디액트도 인디스페이스도 다 거기가 하느냐?’ 그러면 당시는 나올 수 있는 답이 ‘거기 말고 이거 누가 하냐. 아무도 안 하고 있는데’ 이런 거죠. 활력연구소를 제일 지원해 준 것도 한독협이었고. 다 같이 가서 시위하고 그랬잖아요. 그게 바로 제가 2001년엔가 가서 봤던 예상과 다른 풍경이었다는 거죠. 내부의 사람들끼리 작은 데서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어떤 식의 기스와 뭐가 있을지 저는 모르는데. 그런 게 그리 관건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제가 첨언하고 싶은 건, 그 단위들에서 정말 많은 몫을 음으로 양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창작자나 담론의 생산자로서 복무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청중들 입장에선 알 수 없었던 살림꾼들의 존재예요. 활동가이자 노동자였던 분들. 제가 다 친한 분들도 아니고 허락 없이 그 이름들을 다 말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만, 가령 그중에 친한 분 한 명을 말하자면 한독협과 인디포럼과 인디다큐와 서울독립영화제 사무국장을 두루 거쳤던 수영이 누나라고 있어요, 홍수영. 나중엔 너무 지쳐서 그냥 상수동에서 조그만 카페하셨던. 독립영화들을 위해 이분이 커버했던 영역들에 대한 긴 글이 나오거나 인터뷰가 있거나 이렇지 않잖아요. 수영이 누나는 지방 사시면서 지금도 서울독립영화제 같은 게 개최되는 시기에 오셔서 가장 한산한 상영관을 지키는 자원 활동가로 백의종군을 하세요. 아는 사람들이 단편영화를 찍는데 도와달라고 하면 엑스트라로 조용히 앉아 계시구요. 자기가 좋아하는 새로운 젊은 독립영화를 보면 그 감독을 보면서 설레어 하시구요. 이분 한 분을 칭송하자는 게 아니라 마치 한국 근현대사에서, 산업을 고찰하는 담론에서 양육노동 가사노동 부업노동 등을 이중삼중으로 떠맡았던 여성들이 투명인가 취급받는 것처럼 이렇게 살림을 맡으셨던 분들의 이야기가 어딘가엔 남았으면 좋겠어요. 본인들이 그런 조명을 그닥 원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료로서, 또 지금의 존재들을 복돋기 위해서 필요하지 않을까요.

여성 활동가는 아니지만 이런 분도 있어요. 요새 그 n번방 취재한 걸로 이름 높인 김완 기자 있잖아요. 완 기자가 활력연구소 초기에 가장 어린 멤버였어요. 그때 아마 열아홉 살인가? 스무 살 때.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거기 와서 제일 열심히 안에서 나르고 지고하고 했던. 어쨌든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이 있는 게, 세상 모든 곳이 그렇듯 내부에 어떤 아쉬움과 모순과 오류가 아예 없었을 수는 없겠지만, 그건 제가 말을 얹기엔 과문한 분야이고…

이렇게 얘기를 돌려보죠. 제가 오늘 아침에 트위터 하다가 요새 우리나라 풍경이 그런 것 같아서 하나 올렸는데요. V. S. 나이폴이라는 저자가 쓴 『자유 국가에서』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서 문장이 ‘하나님 제게 적을 보여주세요. 제발’ 제 편을 보여 달라는 게 아니라 적 좀 보여 달라고. 내 적이 없이 내가 편해서가 아니라. 적을 보여주고 적이 누군지 알면 다시 싸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가 싸우기가 제일 힘든 게 적을 특정하기가 너무 힘들어가지고. 근데 이제 왜 내부에다 총질하냐. 이 소리가 아니라. 그것도 얼마든지 필요하면 하면 되는데. 뭐랄까 이제는 너무 이쪽이 지리멸렬한 느낌이어가지고. 근데 그렇다고 치면 각자 사업을 안 하느냐? 되게 열심히 하고 있더라고요. 여기는 몇 년 동안 온갖 일을 해왔잖아요. 온갖 사업과 의미 있는 사업들을. 그런데 이제 예전만큼 왜 안 될까? 예전에는 눈 밝고 재미있는 사람들이 여기부터 모였는데. 이제는 눈 밝고 재미있는 사람들이 여기를 안 오죠. 다른 걸 하겠죠. SNS를 하고. 세상 온갖 IT 플랫폼에서 자신을 위한 일을 할 거고.

그래서 이제 이게 뭘까. 옛날에는 독립영화제 뒤풀이 개막식 있으면 여기에 당대에 가장 예민한 사람들이 앉아있었단 말이에요? 퀴어페스티발도 여기 와있고 다 있었단 말이에요? 지금은 사실 사분오열 됐는데, 서로 싸워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거든요. 어쩌면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출구가 별로 없을 때. 세상이 가부장적이고, 어디서 게이라는 말을 입 밖에도 못 꺼내게 하고. 아방한 건 약간 이상한 거 취급하고 이럴 때는 출구가 여기 밖에 없어가지고. 우리가 모여서 으쌰으쌰 할 때, 문을 뚫을 때 쾌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출구가 다 열려있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에요. 실제로 어느 정도 열려있고. 퀴어페스티발을 극우 기독교 집회가 막잖아요. 지금도. 옆에서 방해하는데, 예전에는 아예 열 수가 없었고. 똥 던지고 막 이랬으니까. 지금은 그렇지는 않단 말이에요. 독립영화도 막 독특한 거 만들었다고 욕먹지 않고. 그러니까 어쩌면 같이 막혀있던 문을 뚫는, 방 탈출을 같이하는 쾌감은 줄어들었을 거고. 그리고 벌판으로 나갔는데 벌판은 ‘여기까지만 해, 이 중에 특출 나는 네임드를 우리가 올려줄게’라고 하죠. 이게 사실 제일 큰 장벽인 것 같아요. 새로운 플레이어들이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거. 근데 새로운 플레이어들이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원래 활동가들이 잘못했냐? 이거는 마치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먹었으니까 공산주의자들이 잘못했다는 거랑 마찬가지잖아요. 사실은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고. 인기가 없으면서도 이 생태계에서 힘을 유지하려면 어떤 게임들을 해야 되는데. 그 게임들을 이 사람들이 안 했거나 못했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했나? 또 모르겠고. 아 죄송해요 계속 모든 질문에다 끝에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다고 하고 끝나네요. 죄송합니다.

함: 그러면, 빵빵년대 때 활력이 뭔가 세대론적인 움직임이었다고 볼 수도 있나요?

윤: 저는 근데 약간 세대가 별로 관건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세대가 개입이 안 될 수는 없을 텐데. 근데 세대, 성별, 인종, 성정체성 다 사실 여기에 개입이 될 수밖에 없잖아요? 우리가 운동을 하고 발언을 하는 데 있어서요. 근데 우리가 그걸 론이라는 말까지 넣고 주의까지 넣으면 그게 가장 심급이 되어야 하잖아요.

근데 그러기에는 가령, 김동원 감독님하고 너나들이하면서 얘기를 나눠요. 사실 세대는 이슈가 아닌 거죠. 근데 뭔가 어떤 말로 논쟁을 하게 돼요. ‘아, 근데 다 미 제국주의가 문제고’, ‘난 미 제국주의보다 다른 게 문제인 것 같아’ 이러면 사실은 세대가 관건이 아닌 거잖아요? 그래서 세대는 오히려 큰 상관이 없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그때는 좀 강박적일 정도란 말은 안 맞지만 제가 아는 독립영화계의 언니, 오빠들은 오히려 그런 거에서 꼰대가 되지 않으려는 자의식이 훨씬 더 강했고. 억지로 꼰대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8~90년대를 진보 투쟁하면서 겪어온 분들은, 정치가들 586들 말고 무명씨들은, 지금보다 훨씬 래디컬 해요. 한마디로 지금 국회에 가 있는 그런 586들 말고 재야에 있는 586들은 정말 래디컬하기 때문에 그때 싸울 거 다 싸우고. 그거에 대한 리워드라든지 인정투쟁을 바라지 않고 있는 거거든요? 그런 기록되지 않은 분들이 요소요소 있었기 때문에 세대가 관건으로 서로 꼰대가 있고,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이제 그중에서 살아남거나 여전히 목소리가 큰 스피커 분들은 조금씩 어쩔 수 없이 관습적인 것도 있고 관성적인 것도 있고 그렇긴 하지만. ‘형, 동생’ 뭐 그런 게 있겠죠. 근데 어쨌든 위아래 챙기면서 동서남북 전후좌우 커뮤니케이션했던 분들이 스피커로는 남았을 거 아니에요. 그나마 목소리가 남은 스피커들 때문에 이쪽이 좀 그런 곳인가? 오해할 수 있는데 그건 약간 확증편향인 게 되겠죠. 마치 2차 대전 때 전투기가 살아 돌아왔더니. 총알 흔적이 제일 많은 쪽이 이쪽이니까 이쪽을 더 강화시켜야겠다. 그때 과학자가 아니 총알 흔적이 거기에 있는데도 살아 돌아온 전투기는 총 맞고도 살아 돌아왔다면 그 부분은 튼튼하다는 얘기다. 안 돌아온 전투기들이 망가진 데는 어디겠느냐. 독립영화인들이라고 했을 때 그분들이 살아남은 건 다른 사람들을 떨어뜨리고 살아남은 게 아니라 어떻게 보면 온갖 관료들과의 행정에서 머리비비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남은 플레이어들일 것이고. 여전히 일을 하고 있고, 지쳐서 다른 일 하고 계시고, 그런 분들이 다 혼연일체가 되어서 했던 게 빵빵년대 씬이기 때문에. 또 지금 남은 스피커들도 사실은 거기서 무슨 자기 영리를 취하거나 누군가를 탈락시키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아닐 거라서. 오히려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챙겼겠죠. 제 인상 비평으로 치자면 그렇고요. 완벽하게는 모르지만. 그래서 그, 세대나 어떤 알력싸움 이런 건 그 한복판을 통과한 저한테도 익숙하지 않은 프레임인 것 같아요.

함: 마지막 질문으로 가도 될 것 같은데. 첨언하고 싶은 게. 《마테리알》이 동인지가 되지 않을까? 동인클럽처럼 되지 않을까라는 그런 걱정을 저도 되게 많이 하고. 저희가 다 공유하고 있을 걱정이라고 생각하는데. 아까 외부로 나가려는 상황에서 인사이드 조크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하셨던 인터뷰도 있었고.

윤: 근데 생각해보니까 인사이드 조크라서 문제가 아니라 웃기지도 않는 못된 조크일 때 문제인 것 같아요. (좌중 웃음)

함: 감독님도 잘 모르겠다고 하셨지만. 외부로 나가는 것? 활력이라는 건 외부를 끌어들이는 것도 있잖아요. 우리가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이 계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데에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윤: 그러니까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사실 《마테리알》이 찾아주셨으면 좋겠어요. 활력을 진짜 매력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까 자석처럼. 아까 이 얘기 하려다가 제가 너무 다른 얘기들을 많이 했는데. 그때 새로운 고민을 하는 플레이어들이 자꾸 독립영화에 유입된 건 여기가 제일 매력적이니까? 성소수자를 주인공 삼아서 다른 서사를 선보이고 싶은데 다른 데서는 그걸 아예 못하게 하던 시절에는 이런 해방구가, 비록 좁고 가난해도 얼마나 매력적이고 간절했겠어요. 근데 이제 TV도 슬쩍 레즈비언 얘기를 많이 하고 그래요. 자본은 스폰지인 거예요. 돈이 되면 다 빨아들여요 이제. 근데 얘네들이 그런 이슈들이 돈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던 시절에 아니면 돈은 되지만 거기서 비롯되는 사회적 혼잡비용들을 아직 자기들이 감수하고 싶지는 않던 시절에 이쪽이 프론티어 역할을 했던 거죠.

프론티어들은 힘들지만 매력적이고 낭만적이잖아요. 자본주의가 성가시다고 외면하는 서사에 있어 독립영화가 먼저 첨병이 되어준 거죠. 근데 이쪽은 첨병이 되려고 첨병을 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들의 생존신고를 하기 위해서. 세상의 다양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했단 말이죠. BL이 돈이 되니까 BL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게이이니까 퀴어물을 만들었던 거예요. 그리고 철거민 다큐를 만들면 ‘그것이 알고 싶다’ 한 회차 아이템을 메울 수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사는 터전이 철거가 되고 있으니까. 나도 철거민 중 한 명이니까 찍는단 말이에요? 아니면 내가 가서 같이 살면서 찍는다든지. 그러니까 자본이 만드는 게 지루했던 거죠. 자본과 정부의 예산으로 만드는 게 지루하고. 오히려 우리가 만드는 게 더 재미있지 않아? 이런 얘기 없지 않아? 다큐든 실험영화든 극영화든. 그게 당장의 반향은 크게 없었지만 우리끼리는 막 신나는 거죠. ‘우리같이 지금 재미있는 사람들이 어디 있어’ 그리고 또 영화제 활동가나 이런 분들은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들을 돕는 우리가 또 즐겁고. 돈도 박봉이고 힘들지만 정동진을 만들든 뭘 하든. 제가 그때부터 약간 영화제 사무국이나 활동가들하고 자꾸 친해지는 거예요. 그러면 사실 이분들이 영화감독들 때문에 얼마나 속 터지는지 알거든요? 독립영화 하나 틀고서는 그 영화감독님들은 나쁜 분들은 아니지만 가령 ‘제 영화가요, 상영 상태가요, 아쉬워요 어째요‘ 막 이러면 또 미칠 노릇이잖아요. 포스터도 인디배급사에서 돈 없이 사실은 적자 보는 걸 감수하고 다큐 포스터를 하나 만들어야 되는데, 다큐 포스터는 크레딧이 되게 많거든요? 가령 갯벌에 있었던 분들 스무 명의 주민들 이름이 들어가는데 한 사람의 스펠이 틀려. 그러면 감독 입장에서는 7년을 거기서 먹고 자고 만들었는데, “이 이름, 함연선이지 함유선이 아니라고!” (좌중 웃음) 이럴 거 아니에요. 그러면 포스터를 다시 찍어내야 되잖아요. 지금은 온라인 선전물만 만드니까 그런 것에 돈이 안 들지만, 그때 영세한 비용으로 홍보마케팅을 진행하던 인디 다큐 배급사의 직원은 마음이 무너질 거잖아요. 그런 식으로 약간 나는 어쩌다 보니까 이쪽의 실무적인 디테일들을 보면서 고충들을 보니까 이랬던 거거든요.

근데 어찌 됐든 이런 사람들도 사실은 여기가 매력적이었던 거죠. 재미있었던 거죠. 자기를 커밍아웃 제일 먼저 한 감독이 여기 있는 거고… 해외영화제에 한국 상업영화는 하나도 진출을 못 하는데, 철거민을 다룬 한국의 독립다큐멘터리는 가서 상을 받고. 그러니 정권도 탄압 못하겠는 거죠. 베를린에서 상을 받으니까. 2002년에 어디 가면 월드컵 4강, 4강 이 얘기만 하는데 그런데 그 사이에 어떤 소수자들은 외면 받고 있는 거 알아? 이런 발화를 하는 영화는 독립영화에만 있었단 말이에요. 근데 이제 그 매력이 사람들을 끌어들일 땐 괜찮았는데. 이제는 다른 데도 그 정도의 매력은 가지고 있는 거죠. 한국 드라마에서, 저는 정치 드라마 최근에 했지만, 사실 웬만한 정치적인 소재며, 약자에 대한 관습적인 위무의 표현들은 이미 메이저 드라마나 영화들에도 다 나오잖아요. 웬만한 거에. 비리 저지르는 국회의원, 건설 자본과의 결탁, 철거민 엄마가 쓰러지니까 가서 주인공 캐릭터가 딱 이단 옆차기 해서 철거 용역 때리고, 이런 거 다 있잖아요. 이제. 그러니까 이제는 여기가 어떻게 하면 더 매력적으로 보이지? 자본이 없는 곳은 여전히 아무런 매력이 없나?

저는 다시 말하지만 신방과였으니까 신방과에서 TV나 영화를 공부하지는 않았고. 저는 계속 커뮤니케이션이랑 저널리즘만 공부했거든요? 저희 때는 좀 옛날 학번이니까. 근데 거기서 항상 이제 자생적인 커뮤니케이션 모델. 그러니까, 커뮤니케이션=커뮤니티에요. 커뮤니케이션이 많아지면 커뮤니티거든요? 만약 저희 다섯이서 계속해서 커뮤니케이션을 빈번하게 주기적으로 고정적으로 충분히 하면 그 순간에 우리는 커뮤니티가 되는 거잖아요.

커뮤니케이션의 성장은 커뮤니티의 성장인데 커뮤니티 성장은 항상 이제 종착역에, 벽에 부딪히거든요? 아까 말한 노이즈가 커졌을 때. 근데 그 노이즈 때문에 민감하고 재미있는 사람들이 떠나가요. 근데 그건 이권이 큰 곳들에서 알력싸움 때문에 떠난 거랑은 좀 다른 것 같아요. 가령 자본이 큰 곳들에서는 거대한 이권이 있기 때문에, 가령 거대 플랫폼의 임원끼리 어떤 예산 결정권을 놓고 알력싸움들을 할 거예요. 근데 자본이 없는 곳에서는 그런 이권을 위한 알력싸움도 아니기 때문에 또 다른 식으로 지쳐가는 게 있어요. 영리를 도모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올바름이 중요하잖아요. PC를 혐오하는 사람들의 그 논리와는 다르게 우리한테는, 우리가 지켜야 할 건 윤리적이고 예민한 건데, 사실 근데 그건 굉장히 많은 에너지가 들잖아요. 우리가 무엇을 대상화하고 있지 않은지. 아니면 관습적인 언어들의 도구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계속 생각하다보면 사실 되게 지치거든요? 경제적인 보상 없이 계속 하다보면? 그러다 보면 예민하고 똑똑한 사람은 남이 나빠서 떠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자원이 고갈됐기 때문에 떠나거나 한단 말이에요. 또 다른 매력적인 데로 가거나 아니면 초야에 묻히거나. 그래서 제가 거기서 남은 스피커들한테 별로 불만이 없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어쨌든 그걸 버텨낸 맷집으로 책임지고 있는 영역이 있으니까. 그렇게 따지면 자생적인 성장모델이 끝날 때 어떤 걸 극복하면 그다음 커뮤니티가 유지되면서 성장할 수 있느냐. 그 혼잡비용을 관리를 해야 되는 게 신방과에서 배운 모델이거든요?

죄송해요 갑자기 개론 강의를 하고 있어. (웃음) 가령 이제 인터넷 커뮤니티라고 치면 듀나의 영화 낙서판이라고 칠게요. 듀나 게시판도 예전에 트위터 없을 때 트위터 역할을 하면 관리를 해 줘야 하잖아요. 꾸준히 악플을 달거나 괜히 의미 없는 걸 계속해서 올리면서 리플을 계속 달아서 페이지 스크롤을 올리는 사람을 관리를 해줘야 되죠. 어떤 매뉴얼이 있어야 하는 거죠. 긍정적인 커뮤니케이션은 키우고 부정적이고 도움이 안 되는 커뮤니케이션은 좀 약간 자연스럽게 배제되게 해야 되는데. 그게 우리 독립영화라든지 대안적인 매체로 보면, 긍정적인 상태, 즉, 크리티컬 포인트를 넘었다는 기준은 뭘까? 매력 있어 하면서 새로운 게 계속 나오는 거? 이미 관습적이고 관성적인 거랑 또 다른 것들을 하는 거? 그렇게 긍정적인 논의는 늘리고, 관습적이고 관성적인 발화들은 이미 시장에서도 잘들 하고 있으니까 그리로 저절로 빠져나가게 만드는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관습적인 발화들이 빠져나갔다고 쭉정이만 남는 게 아니라 그게 빠지고도 매력적인 담론이, 계속 얘기할 거리가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그러려면 노이즈가 제거가 되어야 되고 여기가 좀 매력 있고 신나야 되는데. 근데 그거의 정법 중 하나가 막 우쭈쭈해 주고 좋아해 주는 건데 그건 여기랑 또 안 맞고. 그래서 어떻게 보면 혼잡비용이 첫 번째 문제고요.

두 번째가 이제 더 바깥의 자본이 투입되고 공간이 이미 할애 되어있고, 인지도가 획득되어 있고 이런 것들하고는 또 어떻게 경쟁을 할 거냐거든요? 그중에 커뮤니케이션 이론적으로 이런 게 있어요. 모여 있어야 된다. 대학로가 살아남은 게 사실 대학로에서 연극 할 필요 없잖아요? 심지어 대학로는 지대도 비싸. 근데 어느 순간 대학로는 극단들이 모여 있고 소극장이 있는 곳이 되어버렸어. 그러니까 대학로가 하나의 해방구 아닌 해방구 같은 역할을 하는 거예요. 연극 하는 사람이 돈 없어도 대학로에서 뭘 하고 있다. 그래서 그게 어떤 신호를 주느냐. 시장 신호가 어떻게 되냐면 연극에 관심 없던 사람도 연극 볼 때 어디로 가야 되지가 아니라 대학로 일단 가서 한번 보자. 전단이라도 받든지 그때 가서 검색해보자. 길가다가 현수막이라도 보자 이렇게 되거든요? 물론 대학로도 자본에 먹힌 것도 있겠지만. 어쨌든 자본한테 먹히고 말고를 떠나서 거기가면 뭔가 있어. 마치 스타벅스가 아무리 있어도 어떤 카페는 유지되는 것처럼. 약간 공간집적이 되어야 되는 게 있는데. 그게 요새로 치면 온라인 공간일 수도 있고요. 사실 온라인에서 거기 가면 와글와글 있어, 근데 그게 트위터잖아요. 그럼 뭐 독립영화만의 트위터가 있을 수 있을까? 트위터에서 독립영화가 핫해진다면? 사실 근데 그러기에는 좀 힘든 것 같기도 해요 그것도 여전히. 넷플릭스 재미있잖아요. 어떤 독립영화가 재미있을 때, 어떤 미드가 재미있을 때 알고 보면 그게 뭐 미국의 고전영화 채널인 AMD에서 제작한 시리즈야, 근데 그렇게 안 부르고 넷플릭스 드라마라고 하잖아요. 브랜딩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트위터에서 무언가 핫 했을 때 그게 독립영화여서가 될 수 있다면?

가령 근데 그런 게 있잖아요 여성 서사가 언제부턴가 키워드 되었잖아요. 그러면 그건 사실은 운동은 성공을 한 거예요. 거기에서 또 마이너스 포인트도 있겠지만. 백래쉬도 있고 또 뭐, 여성서사라고 하면서 사실 여성을 입체적으로 다루지 않는, 조금은 플랫한 서사들도 대충 한 패키지로 퉁쳐지는 사이드이펙트도 있겠지만. 어쨌든 여성서사=우리가 지지할 서사? 그런 프레임이 자리 잡았다는 건 일종의 승리거든요? 과연 독립영화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소셜 미디어에서? 그렇게 된다면 저는 그것도 하나의 증거는 될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러면 또다시 부딪히는 문제는 혼잡비용. 노이즈. 그걸 어떻게 관리할 수 있을까. 근데 그게 관리가 안 되겠죠. 그걸 누가 관리를 해주겠어요. CJ 같은 기업은 위에서 관리를 할 테고 홍보팀이 관리를 할 텐데 우리는 그런 게 아니니까. 《마테리알》이 만약에 핫해지면 매력적이면, 그러면 이제 사람들이 말을 얹고 싶어 하면 이때가 와글와글 재미있게 되겠죠 이제. 아휴, 너무 뻔하고 별로인 말이었어요 죄송합니다. 너무 장황하게 떠들어서 죄송해요. 안 그러려고 자중을 했는데. (좌중 웃음)

함: 마지막 질문은 감독님께서 예전에 보내주셨던 메일 내용에 대한 질문인데, 메일에서 “당연히 건재할 줄 알았던 처소나 주소(편집자주: 활력연구소를 말한다.)가 사라지고 나서야 진짜 궁리들이 시작됐다.”라고 하셨는데. 그 진짜 궁리라는 게 과연 어떤 거라고 생각하면 될지.

윤: 멋 부렸네요. 제가 말을. 아까 했던 얘기에 비슷한 맥락이 있었던 것 같아요. 뭐냐면 저보다 조금 전 세대들은. 아무것도 없을 때 자기들이 싸워가면서 ‘우리 주소 하나 있어야겠어요’, ‘우리 이거 비디오 심의, 검열 못 받겠어요’ 이러던 세대고. 저보다 조금 다음 세대들은 그냥 있어야 될 게 있는 세대잖아요. 영화제들도 많아졌고. 제가 아까 말한 것처럼 뭐가 없었던 게 생기는 시대였으니까. 영화제도 생기고 부산, 부천, 전주, 인디포럼, 인디비디오, 네마프 막 생기고, 그런 공간들도 생기고 활동가들도 생기고 그러다가 처음 없어진 게 활력연구소잖아요.

저한테는 딱 그거에요. 뭐냐면 있다 없으니까 이렇게 확 없어질 수 있다는 걸 초기에 체험한 케이스? 깨달은 거죠. 다른 곳들도 활력연구소로 시작을 해가지고 어? 미디액트가 없어질 것 같아. 이상한 사람들이 가져갈 것 같아. 인디스페이스도 무슨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이 “독립영화는 잘못되어 있다!” 하면서? 사실은 그렇게 이상한 시비가, 항상 어디가 힘들 때가 그런 것 같아요. 내부에 분명 아쉬움이 있고 극복해야 될 이슈들이 있는데 그거가 생산적이고 창의적이고 말할 권리와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항상 바깥에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 아, 무명인 건 잘못이 아닌데 이 공공의 영역과 생태계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 그냥 이걸 가져가기 위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

최공재 이런 사람들 있었잖아요. 무슨 영화를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미디액트와 한국독립영화는 잘못되어있다! 내가 접수하겠다!” 뭐 이런. 모르세요? 최공재라는 양반, MB 때 갑자기 되게 요란했어요. 뭐하던 분인지도 모르겠는데… 저 옛날에 미디액트 공청회에서 나는 활동가도 아닌데, 이분이랑 저를 불러서 연사로 갔더니, 부른 이유가 있었더라고요. 최공재 씨가 딱 “윤성호 감독 같은 사람들 얼마나 좋냐. 대안적인 거 고민하시는 분이 있는데. 지금 이런 새로운 물결을 담기 위해서 미디액트나 한독협은 폐기가 되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 저하고 이쪽의 관계를 몰랐던 거죠. 제가 뭐 친인척은 아니지만 저는 이런 분들의 존재 근거를 알고 지지하는 사람이었어요. “저는 이분들이 있어서 방금 말씀하신 걸 만들 수 있었습니다.”라고 토론했던 적이 있거든요? 근데 어떻게 보면 저 같은 세대들은 처음 본 거였죠.

2000년대가 열렸고, 다시 말하지만 정권은 민주화됐고, 문화가 중요하다고 하고 있고, 산업이 융성해지면서 우리는 아직 고까워했지만 여기도 뭔가 으쌰으쌰하고 한마디로 부모님들도 괜찮다고 하는 시대. 우리 부모님도 제가 갑자기 영화를 하겠다고, 갑자기 한예종 전문사를 가겠다고 하는데, 저기 교수로 있던 사람이 장관도 되고 괜찮은 것 같은데? 뭐 이러던 시대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새롭고 대안적인 걸 한다고 해서 철퇴를 맞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던 시대인데. 우리도 같이 까불다가 첫 2년 만에 갑자기 우리 비디오 틀어주던 분들이 충무로에다 이런 것도 짓는대. 와 좋구나! 우리 좋을 때 시작했구나! 이러고. 제가 산만하게 얘기했지만 그러더니 미디액트도 나중에는 없어질 것 같고, 한독협도 내가 이 사람들 월급 80만 원 받고 일하는 거 아는데 한독협도 이상한 감사를 받고. 서독제도 없어질 위기고 이러니까 충격을 받았죠. 사실. 어떻게 보면 이 모든 게 원래 있던 자원이 아니라 누군가 싸워서 만들어놓은 것들이 없어질 수 있구나 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진짜 궁리라는 건 이런 것 같아요. 대단한 게 아니라. 우리 살 궁리를 해야겠다. 이런 게 아니라. 아 이게 원래 주어진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던. 딱 과도기에 여기에 진입해서 과도기에 여기를 학습비용으로 치렀던. 과도기의 1학년이어서, 이 학교가 원래 세워져 있는 게 아니었구나, 원래 황무지였구나, 그 황무지에 어렵게 세운 건데 이 처소들이 또 없어질 수 있구나 라는 걸 알게 된 거죠. 그 다음 분들에게는 이 학교는 원래 있었던 거고. 물론 당연히 항상 위기야 있는데, 짧은 1년 동안 많은 걸 봐버린? 그래서 궁리하고 하기에는 좀 이랬던 것 같아요. 궁리라고 하니까 좀 관념적인데. 두 개를 병행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그때 되게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이거는 저한테 활력연구소만의 이슈는 아니고, 뭐랄까 인디포럼이 사실 또 그랬어요. 인디포럼이 내가 동경하기도 하고 제가 수혜를 입기도 한 영화제인데, 이래저래 자중지란을 벌이더니 없어진다는 거예요. 근데 사실 자중지란도 이슈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봤을 때. 그때 메인 운영진이라고 할 수 있는 김노경 씨랑 채기 감독 등과 또 다른 멤버들과 ‘독립영화란 무엇이냐?’ 하면서 노선 싸움을 하고 어떤 걸 트느냐 마느냐 이런 걸로 계속 논쟁을 벌이는 와중에 영화제의 인기도 예전 같지 않고 사실상 재정도 바닥이 나고 하면서 인디포럼이라는 단위가 없어지겠더라고요. 논쟁을 하고 가치를 고민하고 그런 건 괜찮은데.. 애초에 단위들에 맷집이 없는 거죠.

그래서 제가 느낀 건 이거예요. 힘을 키워야겠다. 힘을 키워야 된다는 게 무슨 말이냐, 실용적인 힘인데. 두 가지를 병행해야겠다. 나는 독립영화의 정체성에서, 좀 쑥스러운데 앙가주망을 해야겠다. 나는 얻은 게 있으니까. 나는 이 시혜를 입은 사람이니까. 그 의도가 되게 컸어요. 나는 여기 아니었으면 지금 뭘 안하고 있을 거다. 인디포럼이나 십만원이나 이런 곳에서 내 작품을 틀어주고 활력연구소나 미디액트에서 장비 빌려주고 나를 우쭈쭈해 주니까 이 일을 하고 있는 거지. 《씨네21》도 실리고 이러는 거지. 나는 내가 타고난 재능가나 크리에이터는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내 몫을 좀 해야 된다는 생각이 있었고요. 또 하나 길러야겠는 힘은, 만약에 이런 공공의 처소들이 일시적으로 멈추고 힘을 발휘하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문을 닫았을 때도 내 생계를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실용적인 일들을 하면서 이쪽에 대한 우정을 나는 계속해서 지켜 가야겠다는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매체환경이나 유통 환경에 대해서 민감했다기보다는 내가 같이 일하는 사람들한테 돈을 계속 주고 나도 벌면서 할 수 있냐가 저한텐 너무 관건이었어요. 진짜. 그래서 거의 들어오는 모든 알바를 다 했던 것 같아요. 근데 그게 저한텐 행운이었던 게 제가 했던 알바들 아마 다 보셨을 거예요. 그게 다 〈두근두근 배창호〉, 뭐 〈두근두근 시국선언〉도 (웃음) 그게 다 알바였거든요. 저는 들어오면 그걸로 내 작품으로 만들자. 들어온 걸 다 한 건 아니고 들어왔을 때 내 작품으로 만들고 내가 마음대로 돌려도 되요? 하면 했거든요? 지금까지 그래요, 최근에 만든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도 그거에요.

제 궁리는 이거였죠. 나에게 시혜를 베푼 공공의 영역이 훼손을 당하거나 침범을 당했을 때도 나는 계속해서 생산 활동을 할 수 있어야 된다. 나는 한 발을 담그고 어느 역할을 해야겠다. 최근에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옴니버스를 한 것도 그런 취지예요. 국민은행이 서독제에 나름 도네이션을 했는데, 그 금액이 지금 시점에 독립장편을 하나 만들기엔 너무 적은데, 서독제는 저한테 프로듀싱을 해달라고 제안을 해오는 거죠. 사실 이건 안 하면 그만이거든요. 그 시간에 다른 걸 하는 게 낫죠. 근데 저는 맡아야겠는 거예요. 그게 제가 굉장히 지사적인 마인드고 의협심에서 한 게 아니라. 저는 그 겁이 항상 있거든요? 더 이상 시장이 저를 콜 하지 않을 때. 아니 그 이전에, 시장 자체도 바뀌어버릴 때. OTT 빅뱅의 거품이 언제까지 유효하겠어요. 어느 순간 정체될 거고, 경제 위기도 올 거고… 그럴 때 제 옆에 있어 주는 건 돈 없을 때도 항상 함께했던 독립영화씬 밖에 없는 것 같아요.

가령 이제 제가 부당하게 외압을 받든 간섭을 당하든 하면 같이 시위해 줄 사람은 지금 딱히 친하게 지내지 않아도, 결국 독립영화인들 밖에는 없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이 영역을 지키지 않으면, 저한텐 항상 마지막 방공호이자 계속 드나드는 어떤 카페와도 같은 셈이어서. 그래서 어떤 롤이 주어지면 그 역할을 제가 해야 되긴 하겠는데… 그런 궁리를 계속하고 있다는 답을 지금 드리는 거겠네요. 방금 말한 서독제 옴니버스 프로젝트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그래서 다섯 에피를 만들 감독님 다섯 분을 모시기로 했어요. 그러고서 핸디캡을 드렸거든요? 한 씬, 한 장소, 두 명만 대화할 수 있고, 스텝은 다섯 명 이내, 여섯 시간만 찍을 수 있다.

그러면 사실 이 순간 착취가 아니게 되거든요? 착취라기보다는 자기가 고생하는 건 감독뿐이고. 사실 감독은 자기한테 남는 자산이 생기는 거고. 그런데 제가 드린 핸디캡이 알리바이가 되겠죠. 이분들한테는. ‘프로듀서가 저렇게 핸디캡을 많이 설정했는데 어떻게 대단한 걸 만들겠어, 그래도 난 최선을 다했어’ 이런 식의 알리바이. 근데 그렇게 좁혀진 문이 오히려 창의력의 출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제약을 통해서 창의력과 공동체의 출구를 찾는 전략? 이게 근데 모든 거에 유효하지는 않겠지만. 이게 자본한테 잘못 이용되면 ‘돈 조금 줄 테니까 최대한 창의적으로 없는 돈과 시간을 들여서 최대한 찍어봐!’ 이게 되겠지만. 근데 그게 아니라 그런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닌 연대와 대안을 목적으로 한 거에서. 어떤 거가 다 열려있는 것 보다 우리에게 핸디캡이 있는데 그 핸디캡을 통과하는 과정에서의 네트워킹을 저는 좋아해 가지고. 그래서 뭐 좀 생뚱맞은 얘기였을 수 있지만 여하튼 앞으로 이걸 병행하는 게 적어도 저한테는 관건인 것 같아요. 물론 그러면 이 병행도 자칫하면 안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어요. 안 좋은 면죄부. 그런 거 있잖아요. ‘나는 상업영화 악덕으로 만들고 좋은 일은 여기서 할 거야’ 이런 것도 저는 사실 이상한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사람이 이거 만들 때는 악덕 업주가 되고 이거 만들 때는 안 그러고… 이건 말이 안 되죠, 이상한 로망이고요. 저도 무결한 사람이 아니고 굉장히 모순이 많고 이제 어떻게든 주변 스탭들의 재능과 노동을 착즙해야야 되는 포지션의 사람이기는 한데, 어떤 걸 맡든 가장 기본적인 것들은 좀 지키려고 하고요. 노동조건 이런 이슈뿐만 아니라요.

제가 지금 말하는 게 오독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돈은 저기서 개처럼 벌어서 독립영화 도와줄 거야’ 이런 얘기가 아니거든요. 오히려 그런 전략이 저는 최악 같아요. 만든 영화는 구려 관습적이야. 근데 나는 그 돈으로 독립영화 투자할 거야. 지원할 거야. 이게 저는 최악이라고 생각해요. 결국엔 그게 같이 가는데 자본주의를 인정하고. 자본주의 시장에서 경쟁하는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 된 건 인정하는데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거나, 얘기할 거리가 있는 사람. 이쪽 가서도 얘기할 거리가 있는 걸 만드는 거고. 반대로 여기서는 제약된 조건에서 네트워킹으로 출구를 찾는데 근데 여기서 만든 건 여기가 보기에도 굉장히 매력은 있었으면. 그 매력이라는 것이 시장에서의 매력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놓치고 있는 얘기 있잖아? 우리가 놓치고 있는 서사 있잖아? 이런 것을 할 수 있는. 메이커로서의 궁리는 저는 이거예요. 언제부턴가.

근데 저는 어쨌든 나이가 있고 시니어가 되어가고 있으니까 계속해서 고용을 창출해야 된다는 것과. 주변 사람들한테 돈을 주면서 일해야 된다가 저한텐 가장 큰 거고. 각자 최진성 감독이라든지 곡사는 나름대로. 곡사는 영화주의자들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친구들은 고전영화랑 관습적인 영화를 좋아하고 잘 만들고 싶었던 사람들이고. 근데 아마 그전에 이 친구들은 활력연구소에 별로 개의치는 않았을 거예요. 워낙에 영화라는 매체가 최우선인 친구들이고. 이천년대에도 작은 돈이었던 천만 원 지원받은 걸로 두 시간짜리 영화를 미친 듯이 만들던 사람들이니까. 그 친구들도 나름의 뭔가 심지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요? 제가 알 수는 없지만? 근데 사실 이런 말이 쑥스러운데 저한테는 좀 이게 중요한데. 다른 사람들한테는 활력연구소나 십만원 비디오 페스티발이 그렇게까지 저처럼 이정표였던 건 아닐 것 같아요 아마. 근데 다만 그래서 모두에게 보편적인 걸 말하자면 어? 독립영화라는 씬이, 누군가들이 이미 우리보다 몇 년 먼저 투쟁해서 일궈놓은 이 텃밭이 우리한테 되게 좋은 기회였구나. 많은 걸 할 수 있었구나. 그러니까 우리가 일조를 계속하자. 미디액트에서 강의를 하든지, 어떤 거에서 같이 성명서를 쓰든지 연대를 하던지 발언을 하든지 그런 게 되는 세대 같은 정도? 그런데 자기가 살 궁리는 해야겠다는 걸 생각했던. 왜냐하면 우리는 운동으로 시작을 안 했으니까. 그 전 세대는 운동으로 시작했던 거고. 저희는 자기 발화와 자기 개성 표현, 인정투쟁과 운동이 약간 자연스럽게 섞여버렸고. 지금의 세대는 자기표현과 자기 발화가 중요하겠죠. 근데 그것도 너무나 중요한 영역이고, 그렇게 생각해요.

이하 원고는 윤성호 감독이 함께 보낸 독립영화에 대한 글의 링크다.[각주 클릭 시 링크로 이동]

*** 2020년에는 스물다섯이 될 / 계간독립영화 원고클릭하면 링크로 이동

*** 아! 청춘모던 미디액트 / Mediact 5주년 기념 에세이클릭하면 링크로 이동

*** 상상마당 네 음절의 효용 / 2007 상상마당 연감클릭하면 링크로 이동

*** 이름 도둑과 활력연구소의 기억, 시네마떼끄, 그리고 누군가의 게으른 글 /클릭하면 링크로 이동

*** 미디액트 인디스페이스, 늦었지만 사랑합니다 / 저널 ACT!클릭하면 링크로 이동

*** 독립연애라는 말은 없잖아요(독립영화는 무엇입니까?) / 영상자료원클릭하면 링크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