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K
강덕구

[제1회 오픈 스페이스] 문화로서 영화: 누가 도대체 진지한 표정으로 영화 이야기를 들을까?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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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구

[제1회 오픈 스페이스] 문화로서 영화: 누가 도대체 진지한 표정으로 영화 이야기를 들을까?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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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강덕구라고 합니다. 콜리그라는 비평 공유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고요, 이런저런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마테리알 운영진분들이 제안 주셨을 때는, 제가 했던 여러 활동들을 경험담 위주로 정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었는데, 그러기에는 제가 한 시간 십 오 분을 얘기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다른 얘기들을 하려고 준비를 해왔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얘기들이 흩어질까 봐, 제가 PPT 같은 것들을 전혀 만들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만들어 왔는데요, 혹시 중간에 두서없이 얘기하더라도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일단 제가 활동을 언제 시작했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말씀드리고 시작을 해야 될 것 같아요. 2016년 3월부터 2017년 8월까지, 오큘로라는 잡지로 글 쓰는 걸 시작했습니다. 다음에, 사실은 이것도 활동이라고 하면 활동이라 할 수 있겠지만, 2018년도에 블로그를 시작했고 지금까지 운영하면서, 4년간이 활동의 시작점, 어떻게 보면 필자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었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때 제가 빠져 있었던 게 블로그스피어인데요.  당시에 마크 피셔가 죽은 이후였지만, 그 때 그가 운영했던 K-punk라든지 아니면 닉 랜드나 CCRU 같은 묻혀 있었던 블로그스피어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공개서한 활동을 진행했습니다. 공개서한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를 하고 싶은 마음은 원래 없었거든요, 공개서한은 역사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말없이 있다가 한 20년, 30년 뒤에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말을 안 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개서한을 진행하면서 여러 가지 상념이 있었습니다. 근데 제가 공개서한 이후로 한 1, 2년 있다가 알게 된 건, 시네필 커뮤니티, 어떤 영화 커뮤니티나 관-산-학 네트워크가 저희 예상과는 다르게 설계되어 있었다는 거였어요. 처음에 시작할 때는, 질문도 사실 여러 개를 만들었었거든요? 다양한 사람들과 직업군, 소비자군에게 이야기를 전한 거죠. 근데 이 영화와 관련된 세계가 생각보다 분리가 많이 되어있었던 것 같아요.

씨네스트인가 어디선가 올라왔었던 글인데, ‘왜 영화 만드는 사람들 얘기만 하냐?’, 혹은 ‘왜 여기서 영화일 하는 이너서클 얘기를 하냐?’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영화를 직접적으로 만드는 영화 산업은 공개서한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고요. 부정적인 반응조차도요. 이런 분리가 있었다는 걸, 의사소통을 설계할 때 염두에 두지 못했던 것 같거든요. 이것은, 뒤에 이어질 내용이 될 것 같은데, 그때 제가 했던 반성 혹은 회상인 것 같아요. 생각보다 시네필들이 자기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나는 영화만 보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강했던 것 같고. 그로 인해 의사소통들이 어긋났던 것 같습니다.

다양한 분들이 콜리그에 글을 보내주고 계십니다. 콜리그의 투고 원칙은, 이걸 애초에 세울 때도 그렇고, 글은 무조건 받자. 명예훼손 급의 어떤 발언들이 있지 않은 이상? 실명을 거론하면서, 모욕죄나 사실관계에 관련된 문제만 없으면, 다 실어야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왜냐면 저도 글을 시작했을 때 어떤 자격이 있거나 혹은 대학원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제 글이 어디까지 퍼져나가야 되는지에 대한 생각을 못 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블로그도 마찬가지고요.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른 독자와 만날 수 있는 길이 뭘까 생각하다가, 비평가로서 어떤 자격이나 제한된 지면 없이, 글을 마음껏 실어주자는 걸 목표로 했습니다. 지금도 사실 그런 마음이 커요.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콜리그를 조금 더 커뮤니티 형식으로 바꾸는 게 목표입니다.

공개서한 활동을 하다 보니까, 의사소통 과정에서 받아들이는 사람들 입장에서 서한에 대한 오해도가 있었습니다. 이전까지 한 활동도 엄밀히 말하면 영화 평론가로서의 활동은 아니었거든요? 한정된 독자 군을 가지고 있다가, 내가 소통할 수 있는 일정부분의 독자들을 잃는 게 아닌가라는 두려움도 들었습니다. 차라리 이런 상황이면 ‘한 번 막 나가보자’라는 생각을 했었고, 그 과정에서 당시에 『프로보커터』, 최근에는 『급진의 20대』 같은 책을 낸 친구 김내훈이 중앙일보에서 진행하는 ‘나는 저격한다’라는 프로젝트에 저를 추천했어요. 이후에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글을 써보려고 했습니다. 이게 어떤 사람들 입장에서는 전형적인 발언일 수도 있지만, 저한텐 여러 가지 복선들이 있었던 것 같거든요? 이를테면 아까 전에 말했던 것처럼, 제가 차지할 수 있는 지면이나 제가 활동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한, 일종의 기회주의로 봐도 무방해요.

또 하나는, 제 생각에 제가 활동하는 곳이나 제가 이렇게 마주 보는 분들과 하는 얘기가 한정된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내가 말할 수 있는 토픽이, 옛날에 정성일 평론가처럼 광의의 독자와 만나는 게 아니고, 한정된 독자랑 만난다는 상정이 있었고, 그래서 저는 영화적인 토픽을 나름대로 카모플라주(위장)를 하고 싶었거든요. 제가 ‘나는 저격한다’를 진행을 한 다음에 블로그에도 소회를 밝혔지만요. 사실상 영화적 토픽이나 제가 이전에 했던 얘기들이 ‘나는 저격한다’의 글에 숨어있었어요. 블로그에 쓴 포효하는 2010년대라는 글은 현재「릿터」에서 연재하는 글의 러프한 초기 버전의 단계이었습니다. 유시민에 대한 글도 사실은 예전에 제가 써 뒀던 글이었고. 영진위에 대한 글도 공개서한에서도 충분히 했던 얘기였거든요. 그런 것들을 하나씩, 너른 독자 군을 통해 실험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은 카모플라주 자체에 없었어요. 칭찬이건, 비난이건 내용물에만 관심을 갖더라고요. 동시에 내가 생각한 게 맞았을까? 이게 도대체… 저는 영화적 형식이라는 것도 그렇고 예술도 그렇고,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공포나 감정, 불안들을 충분히 담아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비평가로서 시도했을 때마다 어떤, 실패의 경험들이 많이 겪었던 것 같아요. 곤혹스러운 상황 속에서 내가 어떻게 얘기를 해야 될까? 이를테면 영화 제도 내에서 영화적 형식을 영화적 형식으로만 얘기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럼에도 영화는 무엇보다 대중예술이라고 봅니다.

영화 비평이라는 게 직업 같은 게 아니거든요. 톰 앤더슨이 한 얘기가 인상 깊었었는데, 자기는 영화 평론가를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커리어가 될 수 없다. 영화 평론은 불안정하고 문화 저널리즘에 따라서 자리가 있다 없다 하는 거고 말하거든요. 예전에 빌리지 보이스에서 글을 쓰던 J 호버먼이 잘리고, 영화 칼럼 지면을 잃어서 논란이 되었던 적도 있고요. 이후에는 까이에 뒤 시네마도 인수당하고. 영화 비평이 사실상 저널리즘 영역에서 추방되고 있는 과정의 일부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는 아예 아무런 스펙이나 자격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한 번 실험실의 쥐처럼 내가 직접적으로 한 번 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돼서 하나씩 하나씩 해보았던 것 같습니다.

‘나는 저격한다’라는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여러 일들도 겪으면서, 영화형식에 담긴 사회적 함의 혹은 에너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영화라는 매체 혹은 장르를 어떻게 사회적 형식으로 볼 것인가? 그래서 제가 생각했던 건 뉴할리우드 영화였습니다. 이건 차차 설명하겠지만요. 시네필로서 저는 뉴할리우드 영화들을 무시하면서 자랐어요. 근데 오히려 여러 가지 실패를 겪다 보니까, ‘내가 어디에 포커스를 맞춰서 생각을 해야 될까’라고 했을 때 그게 뉴할리우드였고 최근의 지정학적인 문제나 혹은 이 사회 시스템 자체의 문제를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뉴할리우드를 해석해야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이어질 얘기들은 왜 지금 뉴할리우드 영화가 필요한 것인가? 느슨히 보면 이게 내가 겪었던 경험과 무슨 연관이 있었을까를 자문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콜리그에서도 후원글로 보내 드렸던 글입니다.  수르코프라는 인물이랑 비선형적 세계에 관한 글인데요. 요 근래 우리가 흔히 세계화라고 하는 것, 글로벌화라고 하는 것이 뒤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것을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이라는 비극을 통해서 저희가 더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고요. 예전에 이라크 전쟁이 있었고 그 이후에도 뭐 여러 가지 국지전들이 있었는데, 왜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이 충격적인 것인지를 제가 생각해봤는데요. 이게 사실은 ‘민주평화론’이라고, 국제정치학에서 보면 민주주의 국가끼리는 서로 전면전은 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거든요? 왜냐면 민주주의는 의사결정 과정이 조금 느리잖아요. 대의민주주의라면 의사를 받아들여서 어떤 결정을 하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그런 정상국가, 러시아 같은 경우는 형식적으로 민주주의를 갖고 있지만, 그런 정상국가끼리 전면전을 했다는 데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아연실색했던 것 같거든요. 그래서 형식적 민주주의, 러시아적 민주주의 생각을 하면서, 이게 예전에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세계화를 조금씩 어그러트리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뉴할리우드 같은 경우에 시작됐던 게, <보니 앤 클라이드>(아서 펜, 1967)인데, 그것도 사실은 베트남전이랑도 연관이 되어있었고, 어떤 지정학적인 상황의 변동에 따라서 영화들이 출현했기 때문인데, 이것이 저희가 뉴할리우드를 다시 봐야 할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수르코프라는 인물은 러시아의 괴벨스, 꺼삐딴 리 같은 사람이에요. 원래는 경호원 일을 하다가 PR 광고업자로 활동을 했고 광고 홍보 대행사를 하다가 정치 홍보까지 맡게 되는 그런 인물입니다. 이게 저희가 민주주의라고 했을 때 생각하는 누군가의 의사를 받아들여서 대의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소위 말해서 러시아의 관리 민주주의, 어떤 경영관리자가 민주주의 체제를 계속해서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그런 시스템을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수르코프를 다룬 글을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모스크바는 아침에는 과두정치가 되고 오후에는 민주주의가 되고 저녁에는 군주제가 되고 취침 시에는 전체주의 국가가 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수르코프는 시민포럼과 인권 NGO에 자금을 대고 동시에 NGO를 비판하는 민족주의 운동을 지지했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분열적인 현상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이것은 수르코프라는 사람의 성격이기도 하고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이런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는 징조이기도 하고요. 저도 그 세대는 아니지만, 예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안 세계화 운동이라고 세계화 비판하고 다국적 기업 비판하고 그런 운동들이 있었는데, 그때랑 지금의 극우 민족주의는 다른 거 같아요. 이를테면 인터넷이나 SNS가 존재하고 있고, 그런 인프라를 활용해서 다시 민족주의적인 운동이 돌아오고 있는거죠. 과거가 제일 첨단의 테크놀로지로 돌아오고 있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그러면서 소위 말하는 동적평형의 세계, 그러니까 초규범화의 세계가 이미 도래한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울리히의 벡『위험사회』라는 책을 보면 현대 사회가 미래의 리스크를 관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고 말합니다. 과거에는 부의 재분배를 생각했는데, 오늘날은 위험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는 거죠. 위기나 위험요소를 막기 위해서는 당연히 과거에 있었던 데이터들을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추론해서 미래에 대항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면 저희가 미래에 대해서 사고할 수 있는 방식은 과거의 데이터를 추적해서 미래에 일어날 어떤 위험을 방지하는 것이 전부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소위 말하는 안정화된 세계, 계속해서 미래에 일어날 변화를 위험으로써 방지하고 그걸 사전에 차단해버리는 그런 세계가 펼쳐진다고 봤습니다.

아울러 민주주의 제도 자체도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러시아가 트럼프 대선 당시에 미국에서 선거개입을 했다는 논란이 있었잖아요? 그때도 보면 흥미로운 게, 제가 읽었던 책 중에서도『모방 시대의 종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가장 선진화된 민주주의 시스템이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런 선거개입이 일어날 수 있느냐? 근데 거꾸로 생각해보면 미국이 여태까지 저질렀던 수많은 선거개입과 라틴아메리카에서 저질렀던 어떤 범죄들이 있잖아요, 칠레부터 시작해서. 이런 식의 선거개입을 거울상으로 돌려준다는 의미, 러시아가 어떤 정치적 이득이나 국제정치적 이익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에 선거개입을 한 게, 미국의 만행을 거울처럼 돌려주겠다는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이라는 책이 있었거든요. 너희들이 했던 것들, 너희들이 진보적으로 세계가 나아갈 거라는 민주평화론에 근거해서 국제정치를 주물렀다면, 이제 우리가 너희들을, 미국이라는 선진화된 국가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겠다는 거죠. 이렇게 세계질서가 조금씩 뒤바뀌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이게 역설적으로 보면 뉴할리우드가 태동했던 시기, 당시의 거대한 혼란기와 맞물려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도 암살, 테러, 급진운동 같은 게 대단히 활발했던 시기이고. 그래서 저는 물론 동아시아의 한국인이기는 하지만, 이런 변화된 상황속에서 영화, 혹은 영화 비평이 어떻게 해서 미래의 조짐들을 잡아내야 될까? 이런 생각들을 했던 것 같습니다. 세계정세도 이전과 달라지고, 시간성 자체도 흩어지고 있다, 민주주의도 대단히 냉소적인 형식으로 전화하고 있는데. 그런 전제에서 영화는 어떻게 변하고, 영화비평은 그 징후들을 어떻게 발견할까요.

다음 챕터는 올드 할리우드 애호와 정통 시네필입니다. 뉴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반작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서부극이 등장하고, 70년대 새로운 뉴할리우드의 서부극이나 이탈리아 웨스턴들이 나왔을 때 수정주의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그때 많이 얘기되었던 게, 장르가 진화한다. 원래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대결 속에서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하고 이런 식의 도식이 가다가, 선악의 도덕적인 정체성이 혼란스러운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을 장르의 진화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수정주의 웨스턴이라는 장르도 있고요.

근데 오히려 이에 대해서 반작용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게 뭐 대단한 거냐, 너희들이 말하는 건 사실상 협잡에 불과하다. 캐릭터를 그런 식으로 만드는 게 뭐가 중요하냐? 영화라는 매체의 성격상 그런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라는 의식이 있었거든요? 제가 예전에 읽었던 베트남 전쟁에서 레이건까지 해서 뉴할리우드 영화를 다루는 로빈 우드도 사실상 <택시 드라이버>(마틴 스콜세지, 1976) 같은 영화를 비판하면서 그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이게 오히려 도덕적 혼란을 빙자해서 파시즘적인 폭력을 옹호한다 라는 얘기를 했었거든요? 아무튼 이 올드 할리우드 애호가 존재합니다. 일종의 영화적 고고학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인상깊게 읽은 대담이 하나 있습니다. 페드로 코스타가 한국에 와서 광주 영화제에서 임재철 평론가와 「시네아스트」 편집장 리처드 포튼이랑 대담을 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었거든요. 임재철 평론가님이 “스탠리 큐브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큐브릭은 유난히 한국에서 존경받는 감독 중 하나다. 젊은 친구들이 큐브릭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을 때마다 솔직히 짜증이 난다.”라고 하니까 페드로 코스타가 “큐브릭에 대해서 얘기하겠다고? 이제 퇴장할 시간이군” 하면서 빈정거리거든요? 큐브릭이 물론 뉴할리우드 감독은 아니지만, 어떤 반감들을 읽을 수 있었어요. 이를테면 사회적이고 진지한 주제를 다룬 예술적 허장성세에 대한 비판의식인 듯싶어요.

예전에 제가 앙드레 바쟁 평전 보면서 되게 확 와 닿았던 비유 중에 돌다리 비유가 있어요. 앙드레 바쟁이 영화에 대해 얘기하면서 돌다리를 얘기해요. 바위 같은 걸 던져 놓고 다리를 만드는 거다. 근데 돌이 원래 갖고 있는 형태도 훼손하지 않고, 위치만 배열하는 거죠. 그니까 리얼리티를 그런 식으로 다뤄야 된다는 거예요.

반면에 스탠리 큐브릭이나 스콜세지는 영화를 공예품처럼 생각하는 게 있어요. 어쨌든 둘 다 배치하고 배열하고 패치워크를 만드는 거지만, 알트만, 스콜세지, 70년대 영화들을 보면 영화에 장식적인 면들이 존재합니다, 그런 걸 숨길 수 없고. 그런 거에 대한 혐오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영화라는 매체는 카메라라는 도구의 성격과 광학적 무의식을 존중해서 최대한 주관적 개입 없이 찍어야 되고, 그 리얼리티로 인해서 영화라는 예술이 의미를 갖는다. 그런 어떤 의식이 있었던 것 같거든요. 물론 영화평론가 집단이나 시네필 집단 내부에서는 당연히 취향적으로 갈릴 것 같긴 하지만 1950년대까지의 올드 할리우드 영화들, 누아르라든지, 그때까지의 영화들을 훨씬 더 존중하는 모양새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뉴할리우드를 일견 무시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부턴 뉴할리우드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뉴할리우드는 <보니 앤 클라이드>로 시작합니다. 1967년에 시작돼서 1976년 <택시 드라이버>로 끝을 맺는 식이거든요? 한 9년 정도의 시기인데, 물론 끝을 1980년으로 잡는 사람도 있어요. <천국의 문>(마이클 치미노, 1980)이나 <성난 황소>(마틴 스콜세지, 1980)까지를 뉴할리우드의 끝이라고 보고 그거의 숨통을 조른 게 스필버그의 <죠스>(1975)랑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1977)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죠스>가 숨통을 조르고 <지옥의 묵시록>(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1979)과 <천국의 문>(마이클 치미노, 1980)이 엄청난 재정적인 실패를 겪으면서 뉴할리우드에 재앙이 됐기 때문에 이걸로 끝났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 시기에 있었던 영화들이 뭐가 그렇게 흥미로운 걸까라고 생각했을 때, 당시의 배경을 봐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미국 내부의 상황이 있었고,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영화로 바뀌는 전면적인 상황의 교체가 있었던 것 같아요. 프리드킨이나 알트만 같은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거든요. 이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텔레비전에서 활동을 했었고, 다큐멘터리도 찍었습니다. 텔레비전이 등장한다는 건 영화가 원래 갖고 있었던 권위나 사회 공동체를 쥐고 있는 힘이 약해졌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지만, 텔레비전이 못하는 걸 영화가 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거든요? 왜냐하면 텔레비전은 전통적인 스튜디오 시스템을 모방하고 있을 때, ‘너희들이 텔레비전에서 이런저런 거 하니까, 우리는 더 진지하고 무거운 것들, 더 자극적인 것들을 다뤄야겠다.’라는 식으로 영화가 묵직해지는 경향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게 <보니 앤 클라이드>에서 등장했던 거고 <이지 라이더>(데니스 호퍼, 1969)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저희가 봐야 될 거는 텔레비전이 등장해서 영화라는 매체가 쇠약해질 때, 오히려 그것도 하나의 기회였다고 보는 거죠. 당시의 영화들이 주류영화로서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많이 했거든요? 그 중에 하나가 안토니오니나 잉마르 베리만 같은 유럽 감독들의 영화를 수입해오는 거였어요.

미학적인 영감을 많이 받은 집단들이 출현합니다. 재미있는 건 영화학교의 출현도 연관이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코폴라나 조지 루카스가 다 UCLA나 USC 같은 영화학교 출신이고 스콜세지도 NYU 영화학교 출신입니다. 여담이데, 저희가 상상하는 것처럼 영화학교가 생기고 제도화가 되면 감독들이 더 확장된 표현을 못 한다, 이런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얘기가 많잖아요, 문창과가 생기면 소설들이 좋아지지 않는다. 그런 얘기가 영화과에도 해당하는 얘기처럼 많이 돌고는 했는데 그거의 반례로서 생각을 해보면 영화학교의 등장으로 인해 오히려 새로운 미학들을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이 시기에는 한 편에 안토니오니가 있고. 다른 한 편에는 로저 코먼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B급 영화라는 게, 사실은 B급 영화가 아니거든요. 과거에 영화를 동시상영 하던 시기에 A 상영, B 상영이라고 해서 영화 두 개를 상영 했습니다. 그래서 보통 A 영화는 메인스트림 영화, B 영화는 다소 허접하고, 좀 빨리 볼 수 있는 영화들. 그렇게 두 번 상영을 했고, 그 동시상영에서 두 번째로 트는 영화를 B 영화라고 했습니다. 로저 코먼이 그때 B 영화를 많이 만들었던 사람이고, 스콜세지나 코폴라 등이 로저 코먼 밑에서 영화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뉴할리우드를 다루는 책들을 보면 안토니오니랑 로저 코먼의 결합이 뉴할리우드다 이런 식으로 규정합니다.

코먼이 만든 영화 형식의 변화는 이전에 많이 다뤄지던 선과 악의 다툼, 하워드 혹스 식의 서부극이 아니라, 모호한 내면이 등장하게 됩니다. 안토니오니의 영화적 형식에 결합했던 것 같아요. 안토니오니 라는 영화감독은 유럽에서 대표적인 예술영화 감독으로 꼽혔고, 모던시네마, 현대영화의 문을 연 대단히 중요한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밤>(1961),<블로우 업>(1966)과 같은 이런 영화들을 통해서도 많이 알려졌는데요, 제가 영화를 보고 난 자리에서 얘기하는 시네토크면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안토니오니 얘기를 이뭉뚱그려서 범주화해서 얘기하면 약간 추상적일 수도 있어서, 그 부분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일상을 모험화합니다. 안토니오니는 큰 사건이 아니라 일상에서의 작은 사건의 디테일 위주로 사건들을 옮겨간다고 얘기를 해요. 미학적으로 생략이나, 리얼리티, 거리의 풍경들을 담는 형식으로 불확실성을 강조했다고 평가를 받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을 불안함으로 가득하게 만들고 영화적 리얼리티 자체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미학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로저 코먼이나 리처드 플레이셔의 B 영화들처럼 범죄자의 내면을 조명하는 장르적 문법들이 있었고요,

**공식 : 불안한 내면을 지닌 영웅들이 바라보는 현실은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다.** 

그 두 개가 섞여서 뉴할리우드라는 새로운 형식이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 근래 뉴할리우드의 문법과 상상력이 다시 부활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나온 두 편의 영화인데, 하나가 <조커>(토드 필립스, 2019)고 다른 하나가 <마인드 헌터>입니다. 마테리알에서도 다루었던 적이 있지만 <마인드 헌터>는 재미있는 시리즈입니다. 초반에 주인공 홀든이 시드니 루멧의 <개 같은 날의 오후>를 보면서 시작해요. 그러면서 그때부터 ‘범죄자들을 어떻게 프로파일링해야 될까’ 라는 생각을 발전시키는데, 어떻게 보면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에 거꾸로 된 내용인 것 같았거든요? 영혼을 어떻게 우리가 보여줘야 될 것인가. 그러니까 살인자, 범죄자라는 게 어떤,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얘기도 있고, 그리고 애초부터 살인자로 태어난다는 얘기도 있잖아요?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이 범죄자를 미리 맞출 수 있을까? 혹은 그 범죄자를 어떻게 범주화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에서 성적인 충동들, 살인에 대한 충동들, 욕구들 이런 것들을 체계화한다는 느낌이 들었었거든요? 그게 거꾸로 보면 1970년대에 있었던 뉴할리우드의 미학을 체계적으로 회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면 1960년대가 대단히 혼란스러운 시기였잖아요. 우드스탁도 있고 락페스티벌도 거대하게 열리고 마약도 많고. 그런 것들이 대부분 내가 누구인지, 혹은 나라는 제약을 벗어나서 어떻게 해서 나를 찾을 것인지에 대한 질문들이었잖아요? 그게 티모시 리어리같은 LSD를 만든 사람의 탐구일 수도 있고, 혹은 그거와 관련이 없다면 헬스 앤젤스나 혹은 샤론 테이트를 살해한 맨슨 패밀리 사건들처럼 히피였다가 범죄자가 된 사람들이 있고. 혹은 공연 현장에서 엄청난 폭력을 저지르는 그런 식의 충격적인 사건들을 <마인드 헌터>가 반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리즈가 되게 흥미로웠고, 1970년대의 미학을 모방하는 <조디악>(데이빗 핀처, 2007)도 매우 훌륭한 영화이긴 하지만, 오히려 <조디악>보다 그 시기를 <마인드 헌터>가 훨씬 더 잘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영화의 반대편에 있는 게 사실 <조커>. <조커>를 보면서 저는, 이거는 쓰레기고 재앙이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에는 대단히 기대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택시 드라이버>를 진짜 좋아해요. 한 열 번 정도 봤던 사람입니다. 근데 <조커>는 모든 면에서 <택시 드라이버>를 따라한 영화잖아요? 근데 이 영화가 제 마음에 안 들었던 건 <조커>가 15세 관람가 히어로 영화의 세계관일 수도 있어서 그렇지만요. 이 영화는 폭력에 대한 상상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거든요.

아서에게 도덕적인 정당화가 전부 부여되어 있어요. 이 사람에게 도덕적인 역사가 있는 것 같아요. 홀어머니랑 살고 애들한테 무시당하잖아요, 초반에 막 발길질 당하지 않나요? 그리고 친구들한테 무시당하고. 그런 도덕적인 전사(前事)들이 그 사람의 범죄를 정당화시켜주거든요? 이 사람을 영웅시하는 내러티브, 플롯을 줘요. 그래서 그게 저는 불만이었어요. 1970년대 있었던 뉴할리우드의 대표적인 특징은 행동을 일으키는 동기의 부재에 있거든요. <택시 드라이버>는 많은 분들이 보셨겠지만 안 보신 분들을 위해 설명 드리자면요. 로버드 드니로가 택시 운전사거든요? 베트남전 참전 용사인데 택시 드라이버를 하다가 사랑에 빠지고 차이고, 갑자기 그다음부터 뭔가 도덕적인 혼란으로 매춘업자들을 살해하고 조디 포스터를 구하는 얘기에요. 이렇게 요약하면 도덕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영화 내에서는 그 연결고리들이 하나도 없어요. 그로 인해 <택시 드라이버>가 비난을 받았던 거기도 했거든요? 살인 기계를 정당화하는 거다 라는 식의 비난이요. 사실 <택시 드라이버>를 보면 여성 혐오적인 표현도 있고, 흑인을 비하하는 표현도 있습니다. 중간에 스콜세지가 나와서 자기 아내 관련해서 하는 얘기나, 아내가 만나고 있었던 사람이 흑인인가 그랬을 거예요. 그런 식의 인종 차별적인 내용도 있고.

<택시 드라이버>가 훌륭한 이유는 인물에게 도덕적인 동기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이 사람이 베트남전에 참전했으니까 이런 일을 저질렀을 거다. 아니면 여자한테 차여서 이런 일을 저질렀을 거다. 이런 식의 암시가 하나도 없어요. 그냥 이 사람은 미친 사람이야. 미친 사람이 저지른 범죄예요. 그것 때문에 살인 기계라고 비난을 받았었고, 로빈 우드나 조너선 로젠봄 같은 사람이 대부분 그런 관점을 채택해서 비난했거든요. <조커>는 그와 바낻로 이 조커라는 인물의 범죄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해서 인셀 문제를 발언하는 입장이었죠. 오히려 저는 범죄자의 내면의 충동이나, 욕구 같은 거를 납작하게 만든 게 아닌가?라고 봤습니다.

정반대 편에 저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2005)가 있습니다. 저는 그 영화를 되게 좋아하는데, 원래 크로넨버그가 기괴한 거 만들잖아요, 사람이 파리 되고(<플라이>), 혼자서 중얼중얼거리고(<스파이더>). <폭력의 역사>는 괴상한 상상력과는 무관합니다. 정상적인 중산층 가장이 운영하는 식당에 갑자기 킬러들 두 명이 들어옵니다. 중산층 가정의 가부장이 그 킬러들을 잔인하게 패 죽이거든요?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한 도덕적인 역사가 하나도 없어요. 이 사람에 대한 도덕적인 동기화를 하나도 안 해요. 그런 불안들을 안고 계속해서 출발하거든요. 아,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살인을 저질렀을까? 이 사람의 과거는 뭘까? 라는 궁금증에 대해 해명하지 않은 채로 동기가 완전히 부재합니다. 그래서 ‘폭력의 역사’라는 표현이 굉장히 재밌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왜냐하면 이 사람은 역사가 거의 없는 인물인데, 완전히 신화 속의 인물처럼 제시되는데, 제목은 폭력은 역사기 때문이죠. 역설적으로 폭력과 역사의 내재적인 본성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뉴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동기의 문제가 핵심적입니다.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인물들이나, 역설적으로 동기가 과부여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소위 말하는 <더티 해리> 같은 영화들. 공권력에 빙의를 해서 사람을 죽이거든요? 별 동기가 없어요. 자기가 공권력이니까 범죄를 소탕하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거지. 우리가 소위 말하는 올드 할리우드 영화들을 보면 동료애도 있고 마을에 침입한 인디언에 대한 내러티브도 있는데 이 시기 영화들을 보면 그런 게 부재해요. 한쪽으로 완전 편향 되어있거나 완전히 동기가 부재하거나. 이런 성격의 문제를 잘 드러내는 영화들을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리 시대의 영화들, 동시대 영화들이 이런 것들을 안 다루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간의 어두운 면이라고 하면 웃기겠지만, 저는 성격이라는 단위의 문제가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걸 어떻게 해서 다룰 수 있을까? 그건 사실 영화라는 매체에서 보이지 않는 건데. 이런 얘기 많이 하잖아요, 허문영 평론가나 홍상수 감독이 하는 얘기인데, 영화라는 매체에서 내면은 볼 수 없다. 누구의 내면도 볼 수 없다. 그래서 이제 표면의 리얼리티를 탐구하는 영화들이 있죠. 근래 제게는 그보다는 정신병리적인 문제가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이제 두 편의 영화입니다. <택시 드라이버>랑 <엄마와 창녀>(장 으스타슈, 1973). <엄마와 창녀>는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장 으스타슈는 고다르나 샤브롤, 누벨바그 이후 감독이거든요? 제가 이 영화를 10년 전에 아트시네마에서 봤었습니다. 그때는 짜증이 났었거든요. 뭐 이런 영화가 있어, 너무 대사가 많았고 (웃음) 그리고 전설적인 영화라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어요. 그 전에 이 사람이 만든 <나의 작은 연인들>이라는 영화가 대단히 좋아서 <엄마와 창녀>도 진짜 좋겠다고 생각하고 봤는데, 졸았던 거예요. 그런데 최근에 <엄마와 창녀>를 다시 봤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이 영화는 내가 완전히 소유하고 싶다. 내 머릿속에서 이 모든 쇼트를 기억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좋았습니다. 근데 왜인지는 모르겠어요.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어, 그냥 그랬습니다. (객석 웃음)

그래서 보면 이 영화가 진행되는 방식이 있는데 저는 이 방식이 지금 동시대에 필요한 성격의 문제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환멸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트뤼포 영화 주인공이기도 하고 <중국 여인>(1967)같은 고다르가 만들었던 혁명적인 영화들에 출연했던 장 피에르 레오가 등장하는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가 좋았던 게, 솔직해요. 대사들이 훌륭합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도 이 영화 각본을 좋아했다고 하더라고요.

이 영화가 으스타슈의 자전적인 얘기인데, 초반에 등장하는 시퀀스 중에 재밌는 게, SS 나치 친위대의 팬인 친구가 한 명 있어요. 친위대 관련된 화보집 같은 걸 보여주고 그러거든요? 전쟁이 끝나고 한 30년 정도 됐잖아요 도덕적인 정당화를 완전히 부정해버려요. 영화 내에서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차피 나치 점령하 프랑스에 관련된 생각은, 이야기는 완전히 잊혀 버렸다. 68혁명도 빨리 잊혀 버리고, 사람도 원래 그런 법이라면서 특유의 환멸적인 분위기를 보여주거든요.

이제 남은 건 성적 자유주의인 거예요. 이게 어떻게 보면 대단히 보수적인 영화고, 근데 그런 맥락들을, 그 대사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제가 10년 전에 봤을 때는 모르고 봤던 것 같아요. 장 피에르 레오가 두 명의 여자를 만나는데, 이게 원래 여자친구고, 새롭게 만난 여자친구입니다. 한 명은 간호산데, 어쨌든 만나면서 도덕이나 그런 거에 대한 혼란이 없어요. 그냥 만나고 다닙니다. 이 영화에서 제일 유명한 장면이 베로니카, 그러니까 프랑수아 르브론이 혼자서 독백을 하는 장면이거든요? 최근에 봤을 때 그 장면이 충격적이었는데, 이 여자가 처음에는 되게 자유롭게 죄의식 없이 섹스한다고 얘기를 하는데, 맨 마지막 장에는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자기는 이제 사랑 없는 섹스는 무의미하다 라는 뜬금없이 보수적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성적 자유주의로 서로 잘 만나고 그러다가…

장 으스타슈는 파리로 올라온 노동계급 출신입니다. 프랑스 남부에서 올라왔는데, 이 사람이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대학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죠. 원래 자기 부인이 까이에 뒤 시네마에서 비서 일을 했었어요. 그걸 통해서 단편 영화들을 찍기 시작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혁명적인 분위기에 대한 노동계급적인 안티테제가 분명히 있었던 것 같아요. 우파 아나키즘의 사고가 있습니다. 장 피에르 레오가 68혁명에 관련된 얘기를 하면서 성적 자유주의를 하는, 이렇게 여러 가지로 사람을 만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하거든요? 혁명도 있고, 사랑도 있고, 그런 것도 다 중요하다. 근데 진짜 자신이 두려워하는 게 있는데, 자기 발밑에 땅이 완전히, 지반이 흔들릴 때다. 자기는 그걸 두려움이라고 생각하고,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라는 얘기를 해요. 이 대사가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더불어 뉴할리우드 시네마에서도 그런 환멸, 변화를 추구하는 이상의 붕괴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엄마와 창녀>는 그러한 혼란들, 가치관 자체가 무너진 암흑의 상황에 대해서 영화죠. <택시 드라이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내면을 꽉 틀어쥐는 어떤 가치가 처참히 붕괴하는 겁니다. 지반이 흔들리는 세상, 암흑만이 지속되는 밤 같은 시간에 우리의 내면은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해서 이 영화는 말하고 있는거죠.

이 영화들을 보면 대부분 실내 장면이 많이 나와요. <택시 드라이버>는 물론 야외 장면의 연출로 유명하기는 하지만, 실내에서 훈련하는 모습이나 운동하는 모습, 그리고 그 유명한 트래비스가 총을 겨누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런 장면들이 유명한데. 원래 <택시 드라이버>의 각본가였던 폴 슈레이더 같은 경우에 칼뱅주의 가정에서 자랐었고, 이 사람 자체도 총기 애호가였어요. 그래서 자살을 되게 많이 꿈꿨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미시마 유키오 영화(<미시마 : 그의 인생>)를 찍는데 그런 얘기를 해요, 자기는 영광의 방편으로 자살하는 이를 다루고 싶은 충동이 있었다. 자살이야말로 자기를 감싼 충동이었다고 얘기를 합니다.

이 영화들에선 방구석에서 생활을 하는 얘기가 많이 나와요. 그게 흥미로웠습니다. 텔레비전으로 인한 변화 중에 하나가 공동체를 분리시키는 거잖아요. 자기 방구석에 있어도 이미지들을 볼 수 있고, 그리고 극장이라는 공동체가 없어도 영화를 볼 수 있게 된 것이죠. <엄마와 창녀>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오거든요. 여자친구가 영화 <노동자 천국에 가다>(엘리오 패트리, 1971)를 보자고 얘기를 해요. 그러니까 장 피에르 레오가, 그건 진실하지 않아, 차라리 토크쇼가 훨씬 진실해 하면서 TV 켜는 장면이 있거든요. 이건 저는 단순히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성을 강조한 게 아니라, 텔레비전 등장 이후에 사람들의 삶의 방식들, 양식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영화 내에 집어넣는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택시 드라이버>나 <엄마와 창녀> 같은 영화들이죠. 그러니까 방 안에 있는, 그런 영화들이 엄청 많았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뉴할리우드 영화나 혹은 나중에 있는 것 중에서 되게 충격적인 영화 중에 하나가 <앙스트>(1983)라는 오스트리아 영화가 있습니다. 연쇄살인범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인데, 감옥에서 출발해서 다른 사람의 집에 가서 사람들을 살해하고, 일가족을 살해하고 다시 감옥으로 돌아오는 얘기거든요? 이렇게 감옥에서 시작했다가 감옥으로 다시 돌아오는 얘기, 텔레비전이 이후의 병리성을 잘 드러낸 사례라서 짧게 설명드려봅니다.

이제 어디로 가야 되겠느냐고 봤을 때, (웃음) 이 세 명, 영광의 트로이카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그때 트로이카의 시기가 흥미로운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지금은 가질 수 없는 일종의 박력도 있었던 것 같고. 이때 보면 이 사람들은 박찬욱이나 봉준호나 혹은 영진위가 만들어지는 모든 일들을 같이 겪으면서 활동했을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제가 재미있게 생각하는 영화 중 하나가 <그때 그 사람들>인데, 임상수가 만든 영화도 보면 과감하게 검열이나 자기검열 없이, 박정희 살해를 가감없이 다 다루거든요. 영화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박정희를 역설적으로 옹호하는 영화로 볼 수도 있죠. 거꾸로 보면 박정희가 갖고 있는 인간성, 원래 신화가 됐던 인간을 밑으로 끌어내리는 작업들을 했었던 시기라는 생각들이 들어요. 노무현 대통령 집권 시기죠? 그때 저는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있었던 게 당연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2002년, 2003년부터라고 생각을 많이 하는데, 그때 있었던 영화들이 <살인의 추억>(봉준호, 2003), <그때 그 사람들>(임상수, 2005), <올드보이>(박찬욱, 2003), <지구를 지켜라>(장준환, 2003)가 있고. 그리고 홍상수도 <극장전> 같은 자기 최고작을 만들었던 시기가 이 당시였다고 생각하고요. 한국은 이때가 뉴할리우드 시기랑 맞닥뜨렸던 시기라고도 생각이 드는데, 봉준호 같은 경우에는 그걸 대단히 많이 흡수했습니다. 이 사람이 좋아하는 감독이 마틴 스콜세지이기도 하고요. 지역 정치학, 시골이나 도시의 대립쌍을 만든 다음에 그 안에서 계속해서 불안들을 주조하는 형식이라든가, 홍상수도 이 당시에 과격하게 영화를 반으로 잘라서 <극장전>같은 매체 실험을 주류 영화 산업 안에서 했었죠. 저는 이런 실험이 가능했던 시기가 당시일 수밖에 없다고 보니다. 단순히 영화에 재능이 있는 영화감독이 있어서 가능하다,는 아니었던 것 같고요. 노무현 시기기도 하고, 그리고 모든 제도들이 빌드업되는 시기. 그게 다 맞물려서 이 시기가 왔다고도 생각이 듭니다.

반복하자면, 한국에서는 시네필 커뮤니티랑 영화를 만드는 커뮤니티가 분리되어있는 것 같아요. 이게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걸 수도 있습니다. 영화산업이라는 것도 규모가 작을지라도 산업이기 때문에 산업 역군들을 양성해야 되는 게 있고, 그걸 소화하는 어떤 일군의 청년들도 있을 거고요. 그게 한국에서는 분리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산업에서 직접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영화제에서 보는 어떤 미학들을 결합시켜서 뭘 만드는 게 아니라, 텔레비전 식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는 2003년도에 걸작들을 만들었던 영화감독들과 시네필 커뮤니티, 평론가들의 관계와는 달리, 점점 더 분리되고 있을까요? 예전에는 영화 소집단 운동이 있었잖아요? 영화를 보고 영화를 찍는 운동 같은 게 있었는데, 지금은 부재합니다.

외부적인 자극들을 영화로 끌어들여서 어떤 결과물들을 만드는 게 아니죠. 더욱 이너서클화됩니다. 외부자극과 창작이 분리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에 대한 완벽한 도피가 시작이 됐던 것 같고. 외국에는 카니예 웨스트 좋아하는 팬들이 팬 포럼 만들어서 ‘브록햄튼’ 같은 거 만들고, 그런 흐름들이 있단 말이에요? 한국은 유독 그런 것들에 대한 거부감들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평론가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영화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등등.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한국 영화 비평에 특히 재현의 윤리에 대해 얘기하는 비평가들이 많았죠. 저는 그것이 논리적 오류라고 봅니다. 재현의 윤리, <카포>의 트래블링에서 발견되는 ‘어떤 금지 요청’이 시대적으로 요구되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자크 리베트라는 영화 평론가가 <카포>(질로 폰테코르보, 1960)의 트래블링 쇼트에 대해 ‘이런 식으로 피해자나 희생자를 다루는 건 도덕적으로 그르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유대인 죽는 장면을 스펙타클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라고 말을 하는데요. 그 재현의 윤리라는 게 당시에 필요했던 시민종교였다고 봅니다. 유대교식으로요.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재앙이 일어났으니까 이 재앙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재현의 문제에 집중해야 된다. 즉 시네필리아에 윤리적 요청이 있는 건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다는 거죠.

아도르노가 홀로코스트 이후에 서정시를 더 이상 쓸 수 없었다고 얘기한 것처럼, 당시의 역사적인 맥락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뚝 떼어서 모든 영화에 일률적으로 적용하게 되면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게 물론 당위적으로 필요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역설적으로 보면 당시에 역사적인 맥락에서만 가능했던 얘기를 보편적으로 적용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부분이 여전히 아쉽더라고요. 그럼 저희 시대에 재현의 윤리를 어떻게 재해석할 것인가, 그 대목이 흥미로운 쟁점 같지만,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흘러간 것 같아요.

더불어 영화 평론 내부의 자기검열적에 대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외부의 자극들, 지정학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시스템을 항구적으로 만드는 흐름에 비평을 위시한 예술이 저항할 수 있을까요. 사회적 자극을 비평으로써 혹은 예술로써 드러내야 된다고 했을 때, 자기검열, 혹은 이런 말을 꺼내도 되냐는 두려움, 그들을 극복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전부터 저는 아마추어리즘의 태도를 실용적으로 이용하고 싶었습니다. 즉 아마추어리즘이 ‘아, 그냥 대충 하자, 못하자’ 이런 태도를 의미하진 않습니다. 제도적이고 체계화된 교육 혹은 사회적인 분위기가 유발하는 자기검열을 뚫고 나가자 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이에 관해선 더 길게 설명할 일이 있을 듯 싶네요.

오늘날, 어떻게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요? 또 어떻게 좋은 예술을 만들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한 비관주의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패배주의적인 기조들? 영화 커뮤니티 내부에서도 그렇고요. 제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지만, 영화 만들고 싶으면 만들면 되는데, 자꾸 입봉이라는 거에만 매달릴까? 그런 사회적인 자극들을 다 끌어내서 뱉어내면 되는 게 아닌가? 한국영화 르네상스나 뉴할리우드 시기의 영화들은 그랬던 것 같아요. 예전에 보면 김소영 평론가가 요즘에는, 영화감독들이 영화감독을 라이프 스타일로 생각한다고. 영화감독을 멋있게 빵모자 쓰고 파이프 같은 거 물고 그런 걸로 생각한다고.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스스로 상상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그런 환상은 지지할 수 있는데, 이게 커리어로만 귀결되면 안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저는 뭐라도 해야 된다. 하면 된다라는 생각을 갖고 (웃음) 나아가고 싶고요.

여기까지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객석 1 초반에 본인 이력을 설명해주셨던 부분 뒤를 한번 논해보면, 뉴할리우드를 중점으로 앞에 지정학적인 비선형성에 대한 얘기가 하나 있었던 것 같고 뒤에 뉴할리우드가 있고 ‘그럼 우린 어떻게 할 거냐’라는 영광의 트로이카 사진이 있는 저 슬라이드. 그렇게 세 개의 이야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뉴할리우드랑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붙는 건 알겠는데, 지정학적 비선형성 얘기랑 뉴할리우드도 붙는 얘기인지 좀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시간이 모자라서 얘기를 못 했습니다. 베트남전부터 지미 카터까지의 시기가 미국의 대단한 혼란기거든요? 닉슨이 있었고요. 워터게이트, 베트남 철수 문제가 있었고. 그리고 중요한 게 네오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원래는 극좌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많았거든요? 한국에서 김문수 지사님이 그랬듯이. (객석 웃음) 당시에 극좌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극우로, 공화당의 매파로 변했던 이유가, 지미 카터 시기에 있었던 이란 대사관 봉쇄 조치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대사관 직원들이 납치가 되는 이란 인질 사태가 일어나면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 민주당에 있었던, 원래 헨리 잭슨이라고 하는 사람이 좌파였거든요, 트로츠키주의자나 혹은 리버럴들이 완전히, 국제정세에 따라서, 네오콘으로 변하게 됩니다. 지미 카터 시기가 대단한 환멸기였어요. 피터 비스킨드라는 사람이 쓴 『헐리웃 문화혁명』이라는 책 말미에 보면 그런 얘기를 하거든요, 민주당원들이 민주당을 끝내버렸다. 레이건 시기의 우주전쟁이나 군비경쟁에 대한 생각, 80년대로 넘어가면서 완전히 많은 것들이 변하죠. 영화도 변하고요. 앞서 말한 변동하는 지정학적 상황이 영화 형식과 영화 미학에 새로운 변화를 요청하는 지점에 대해 같이 얘기하려고 했는데, 흐름상, 시간상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객석 2 두 가지 정도 질문 비슷하게 묻고 싶었는데. 언급된 감독은 아니지만 70년대 뉴할리우드 얘기하시면서 도덕적 표현과 관련된 내용을 듣고 생각이 났는데, 알모도바르 데뷔작의 첫 장면이 경찰이 옆집 건너편에 사는 어떤 여자를 강간하는 걸로 시작을 하거든요? 그러면 여자가 친구들을 모아서 복수를 하는데, 어떤 식의 복수를 하느냐, 뒤를 쫓아가다가 화분을 머리에 내리찍는다든지, 바나나 껍질을 깐다든지 뭐 이런 식으로 굉장히 코믹하게 풀어내서, 초기에 알모도바르에 대한 수용은 굉장히 반발도 심했고, 욕도 굉장히 많이 먹었고, 공격적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알모도바르를 표현하는데 부도덕이나 비도덕이 아니라 무도덕한 영화 세계다, 라는 얘기를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근데 지금에 와서 알모도바르가 받아들여지는 방식을 생각하면, 굉장히 거장이고, 어른이고, 되게 따뜻한 사람이고, 아름다운 영화를 찍는 사람이고, 이런 식으로 아까 말씀하셨던 것 같은 반도덕적인 이런 것들이 뭔가 안전하게 받아들여지는 시기가 된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좀 들거든요? 거기에 관해서 뉴할리우드의 말씀하신 폼들이 지금에 와서 다시 다뤄졌을 때, 좀 다른 식으로 수용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에 대한 견해가 좀 듣고 싶습니다. 한 가지는 또 70년대, 그 뉴할리우드 영화랑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나란히 두시면서 얘기하신 게 있는데. 물론 당연히 거기에 차이들이 있겠지만, 제가 기억하기로 로빈 우드가 그때 <택시 드라이버>에 대해 얘기하면서 혹은 그때 당시의 프리드킨이나 이런 영화들에 대해 비균질적 영화라는 얘기를 했었잖아요. 네, 어쨌든 그 불균질한 영화. 그게 이를테면 말씀하신 것처럼 폴 슈레이더가 각본을 썼고, 스콜세지가 연출을 했고, 이 두 개가 굉장히 부딪치면서 일어나는 효과들, 그다음에 윌리엄 프리드킨이 <크루징>(1980) 같은 영화를 찍을 때, 그, 영화에 드러나는 불균질함 같은 것들을 얘기했던 것 같은데. 폴 슈레이더가 원래는 <택시 드라이버>가 마지막에 흑인을 죽이는 장면을 썼는데, 마틴 스콜세지가 끝까지 거부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고요. 근데 제가 생각하는 한국영화 르네상스 박찬욱, 봉준호 시대의 특징 중에 하나는, 그게 좀 작가 개인에 몰리는 것 같거든요? 봉준호의 유명한 점 중에 하나가 콘티대로 찍고 그대로 영화화된다는 점이 있죠. 비전이 굉장히 확실한 사람인데 그게 저는 개인적으로 <기생충>에 이르러서 정점에 이르고, 오스카와 깐느를 통해서 상징적인 종말을 맞은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그럴 여지가 있을 것 같아요. 근데 거꾸로 보면 제가 좋아하는 영화감독 중에 일레인 메이라고 있거든요. 그 사람이 만든 <마이키와 니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일레인 메이는 <하트브레이크 키드>(1972)처럼 완전히 여성영화 같은 걸 만들다가 <마이키와 니키>를 보면 상상할 수도 없는 남성들의 폭력적인 젠더를 탐구하거든요. 폭력성들을? 보면 중간에 되게 논란이 될 장면도 여러 가지가 있고요. 그러니까, 저는 젠더적인 격차에서 오는 것들도 충분히 미학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건 그냥 단순히 악마가 되자, 도덕주의에서 탈피해서 악마적 힘을 신봉하자, 그런 주장은 아닙니다. 그런 격차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들을 어떻게 수원으로서 끌어들여서 낙차의 에너지를 발생하게 할 수 있을까? 일레인 메이도 일정 부분 상상력에 한계를 두고 영화를 찍었으면 그렇게 못했을 거 아니에요? 내가 당사자고 여자니까 여자의 아이덴티티만 다뤄야 된다고 했다면요. 그것이 달라졌을 때, 역전되었을 때 훨씬 재미있는 효과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일레인 메이랑 혹은 지금 설명한 사례와 다르긴 하지만 바바라 로든의 <완다>(1970), <허니문 킬러스>(1970) 같은 영화에서 일단 예를 들고 싶고요.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답해보겠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한국영화가 코리안 뉴웨이브랑 한국영화 르네상스 이렇게 분리가 되어있는데, 뉴할리우드도 사실상 집단 운동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이를테면 코폴라나 루카스가 같은 영화학교 출신이고 조트로프 같은 거에서 활동하긴 하지만 스콜세지나 그런 사람들도 솔직히 말해서 봉준호 박찬욱 같은 관계였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코리안 뉴웨이브처럼 어떤 영화 소집단 운동에서 출발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 로저 코먼를 따라다니면서 영화를 만들고 영화학교에서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올드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이 붕괴했을 때 들어간 사람들. 그리고 저는 한국영화 르네상스 같은 경우에는 영화 제도가 빌딩이 될 때 그런 기회를 받았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식으로 비교하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영화제도가 조금씩 쇠하는 게 보이는 저희 세대에겐 그런 소집단 운동이 필요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객석 1 이거는 조금은 작가님의 개인적인 것에 대한 것일 수 있어서, 답을 거절하셔도 되는데, 일단 제일 큰 거는 K-punk나 그, 블로그에 서브스택(substack)인가요? 플랫폼 얘기를 해주셨는데, 『사이클로노피디아』에도 나오는 얘기지만 외국의 블로그스피어라고 하는 건 조금 더 폐쇄적이고, 좀 더 이너서클이고 한 거에 반해서, 한국에서의 블로그는 완전히 노출이 되어 있잖아요? 근데 그런 점에서 이게 갖고 있는 문제성이 있고, 또 본인도 글이 닿을 수 있는 걸 좀 정의를 하고 싶다는 생각과 광의의 독자를 확보하고 싶다는 생각이 같이 가는 건지 좀 궁금해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히려 제가 처음 활동 시작했을 때보다 블로그에서 글을 썼던 게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때 이제 K-punk 같은 걸 참고했다는 건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들이 일종의 네트워크였거든요. 이웃도 엄청나게 많이 달려 있잖아요. 그들 블로그가 일종의 군집처럼 되어있습니다.

블로그에서 이제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이들이 정말로 막 하는구나. 가속주의에 관심을 가졌을 때도 흥미롭게 여겼던 건 그 아이디어 자체보다는 아이디어를 밀고 가 방식이었거든요? 말도 안 되는, 사실 농담에 가까운 생각들을 정말 그렇게 진지하게 블로그에서 얘기하면서 그게 의미 과정을 얻는다는 거. 그게 흥미로웠던 것 같아요.

추후에 제 활동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웃음)

네, 질문 없으시면 여기서 마무리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