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K
윤아랑

[제1회 오픈 스페이스] 정당화하는 관점: 임흥순에 대한 불만

뒤로가기
TALK
윤아랑

[제1회 오픈 스페이스] 정당화하는 관점: 임흥순에 대한 불만

,

안녕하세요, 이번 세 번째 타임에 발제를 하게 된 윤아랑이라고 합니다. 방금 전 타임에서 윤원화 선생님이 좀 거시적인 주제로 말씀을 해주셨는데, 저는 좀 미시적인 주제로, 그 중에서 작가론적으로 좀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이미 알고 계시듯이 제가 이 자리에서 얘기하는 것은 임흥순 작가의 작업들에 대한 건데요. 임흥순 작가에 대한 발제를 해달라는 마테리알 측의 제안을 받은 건 지난 2월 달 말입니다만, 어쩌면 오늘 제 발제는 2019년부터 조금씩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마테리알 측에서 제게 임흥순 작가에 대한 얘기를 청탁한 이유가, 제가 2019년 말에 쓴 트윗 때문이기에 그렇습니다.

해당 트윗을 여기 이렇게 친절하게 써 주셨는데요, (웃음) 제가 또 육성으로 한 번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직접 읽어보겠습니다. “내 생각엔 임흥순을 잘 박살내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를 조져버려야 ‘이 다음’이라는 정당성을 쟁취할 수 있을 것 같다.” (웃음) 지금 돌이켜보면 참, 이 트윗이 표출하고 있는 과장된 적의가 굉장히 부끄럽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뜻에 있어서는 생각이 크게 변한 바가 없는 것 같아요. 여기서 방점이 찍혀서 설명이 되어야하는 건 “잘 박살내는” 것. 그리고 “‘이 다음’이라는 정당성”일 것 같습니다. 또 이 트윗은 임흥순의 작업에 대한 적의와 함께 임흥순의 작업에 대한 세간의 인식에 대한 적의를 포괄하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야 대개 임흥순이라는 작가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계시리라고 일단 생각을 하긴 합니다만, 본 발제가 충분한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임흥순이라는 작가가 어떤 작업을 하는지를 충분히 논할 필요를 느끼고요, 또 혹시나 임흥순의 작업을 안보셨을 수도 있기 때문에, 최대한 임흥순이 어떤 작가인지 좀 더, 최대한 친절하게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실제로 임흥순 작가의 작업들이 생각보다 VOD로 많이 안 풀렸더라고요. <려행>(2019) 같은 경우에도 2019년 영화인데, 제가 VOD를 원래는 PPT로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VOD를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제가 겨우겨우 장편영화 중에서 본 것이 <위로공단>(2014)이랑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2019), 이 두 편 밖에 발제를 위한 파일을 찾지 못했어요. 그래서 아마 여러분들도 많이 못 보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듭니다. [발표자 주: 당시 현장에서 사실관계를 틀리게 설명해 덧붙인다. <비념>과 <좋은 빛, 좋은 향기>의 경우에는 네이버 시리즈온같은 플랫폼을 통해 구해서 볼 수 있으나 현장에서는 헷갈려 잘못 말했고, <려행>의 경우에는 북한이탈주민인 출연자들의 생활에 끼칠 영향을 염려해 극장 상영만 진행하겠다는 임흥순의 결단으로 인해 공적인 루트로는 VOD를 구할 수 없다.] 하여튼, 먼저 임흥순을 아는 사람들이 충분히 동의할 그의 특성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죠. <위로공단>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은사자상을 받았었죠? 그때 세간에서 적잖은 화제가 됐을 때, 누군가는 이 영화가 한국 여성 노동운동에 대한 ‘정확한’ 정보의 차원에서라면 별 볼 필요가 없는 영화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의 여성 노동운동가들이나 아니면 대중들 모두가 이 노동운동에 대한 정보의 차원에서 별로 얻어갈 게 없다, 라는 얘기였죠. 확실히, 임흥순이 2008년에 『귀국박스』(2008)나 2017년 MMCA 현대차 시리즈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2017)같은 전시를 아카이브 형식으로 진행하기는 했으나, 제주 4.3사건이나 이른바 ‘공순이’들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정보를 알고 싶다면 그의 작품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불만에 그치는 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예술작품과 연구자료를 동일시하는 태도는 둘째치더라도, 임흥순의 작업의 목표와 유효성은 엄연히 다른 지점을 향하고 있으니 말이죠.

임흥순은 <비념>(2012)에서 ‘1940년대 후반 제주도에서 자행된 국가폭력과 그에 대한 항쟁을 포괄하는 말’로써 제주 4.3 사건을 다루지 않습니다. 또 한 번은 전시로 한 번은 장편으로 공개했었던 <좋은 빛, 좋은 공기>(2018/2021)에서도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이 신군부 세력의 폭압에 맞서 펼친 항쟁’으로써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루지도 않습니다. 그럼 무얼 하느냐? 우리는 전자에서 4.3 사건의 영향이 오늘날의 일본 오사카에서도 발견되며 또한 4.3사건 당시 국가권력의 논리가 수십년 후 제주 해군기지 건설 현장에서 ‘반복’되고 있었음을, 또 후자에서는 남한의 광주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각각의 제노사이드, 그리고 그 이후를 살아가는 후속 세대의 삶들이 서로 교환 가능한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봅니다. 또한 임흥순은 화이트큐브로 들어갈 때는 멀티스크린을 굉장히 애용하는데요, 영화미디어학자 김지훈이 「멀티스크린 인터페이스와 재연의 효과: 임흥순의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이라는 글에서 지적했듯, 임흥순의 멀티스크린은 “다수적인 관계”를 공통의 공간에 제시함으로서 “이데올로기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시간적 축은 물론 국가적, 지리적 경계를 초월하는 공간적, 지정학적 축에서도 작동했음을 암시”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여기에 그가 싱글채널 영상 작업들에서는 서로 다른 위상의 장면들, 가령 인터뷰와 퍼포먼스 씬과 소위 인서트라고들 부르는 잉여적인 숏들을 함께 연쇄시키는 굉장히 불균질한 배열을 취해왔다는, 아마 여기 계신 분들도 다 아실 사실도 함께 거론해야겠죠. 간단히 말해 임흥순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특정한 역사적 사건의 어떤 담론적인 경첩을 풀어 상이한 사건들을 함께 묶는 매듭을 만드는 작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아이디어가 왜 상찬의 대상이 될까요? 앞서 말한 “‘반복’”과 “서로 교환 가능한 성질”을 곱씹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임흥순에 대한 흔한 평 중에 하나는, “거대한 역사의 담론 안에 지워졌던 개개인의 이야기를 회복한다.” 뭐 이런 건데요, 이런 서술은 제가 보기엔 꽤나 큰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임흥순이 역사와 기억을 대립시켜서 이데올로기를 넘어설 정동을 무조건적으로 지향하고 추구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인데, 임흥순은 그러한 작업을 하지 않을뿐더러 이런 논리는 기억이, 그리고 경험이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매개되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되게 순진하고 간단하게 간과한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평론가 서동진은 이러한 점에 대해서 좀 더 세밀하게 접근하고 돌파하고 있습니다. 그가 <위로공단> 개봉 당시 남긴 리뷰 중 일부를 약간 길게 발췌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이 길긴 한데요, 그래도 직접 잠시 좀 읽어보겠습니다.

“역사의 소멸과 기억의 범람이라는 오늘날의 ‘포스트-역사주의적’인 시간 경험의 지평에서 <위로공단>은 자신의 독특한 자리를 마련한다. 이는 의류 공장 여공의 삶을 통해 신산(辛酸)스러운 한국 현대사의 역사 속으로 입장하고자 하면서도 그것을 그에 참여하고 연루되었던 개인들의 파란만장한 개인적인 심적 외상과 기억의 서사와 중첩시킨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역사를 잊은 기억의 서사에 참여하길 주저한다. 그리고 기억과 역사라는 대립적인 서사적인 장력 사이에서 뒤척인다. <위로공단>은 역사에 등을 돌린 기억으로 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역사의 편에서 기억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중략) 외환위기는 나와 너의 기억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기억을 넘어선, 의식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 너머에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반성하고 의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역시 기억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기억을 얕잡아 보는 것은 불철저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기억을 다그쳐 역사에 이르도록 하여야 한다.”

네, 역사 없는 기억은 맹목적이고 기억 없는 역사는 사실 창백할 뿐이죠. 역사와 기억을 대립시키는 대신 임흥순은 역사와 기억을 얽으면서 ―이 이분법이 성립 가능하다면요― 시간, 사건과 그것들의 조건을 함께 바라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임흥순이 동원하는 것은 물론 그의 허구적인 터치들이죠. 흔히들 퍼포먼스 씬이나 재연 장면이라고 일컫는 그의 장면들이요. 임흥순의 작업에서 독특한 건, 분명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탐사보도 TV 프로그램처럼 재연이나 꿈 장면 같은 허구적 터치들을 종종 가미하고 있음에도, 그것의 목적에 있어선 관습적인 ‘재현’을 조금도 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위로공단>의 퍼포먼스 숏이라고 부르는 것들, 아니면 <려행>에는 실제로 탈북자 여성들이 나오죠? 그들은 실제로 북한에서 살았을 때의 자신을 재연합니다. 그런 재연 장면들, 혹은 <환생>(2017)에서 젊은 배우들이 할머니들을 연기하는 장면들이 또 있죠. 이러한 맥락에서 잠깐 우회하자면, 미학자 양효실은 여기에서 “무능한 주체”, “아마추어”로서의 임흥순을 발견하는데요, 이런 논지를 전개한 글인 「누구나 당신인 곳, 인민의 시적 영상화」의 일부를 발췌해보겠습니다. 이것도 직접 읽어드리겠습니다.

“임흥순은 그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사진 ―여기에서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사진은 70년대 여공들이 시위를 했을 때 사측에서 똥물을 뿌린 사건이 있었잖아요? 그때 그 사진을 이르는 겁니다―을 보여주기에 / 착취하기에 앞서, 그러나 그 사진을 보여주어야 하는 윤리적 부담을 진정시키려는 듯, 자신이 만든 유사한 영상을 먼저 보여준다. (중략) 즉 감독이 창안한 미래와 역사적 사건의 순서가 뒤집혀 있기에, 그가 본 미래(의 품) 안에 그 사진, 그 기억, 그 외상을 밀어 넣고 있기에, 우리는 그 끔찍한 사진을 소비하거나 구경할 수 없게 된다. 폭력에 대한 분노가 다시 폭력을 낳는 데 기여하는 희생자 사진, 우리의 나르시스트적 공격성이 투사된 사진이 아니라 생존자의 상처를 그 상처의 착취 없이 끌어안는 ‘희망’의 마음 덕분에, 우리도 모르게 상처가 조금 아무는, 마음이 조금 따듯해지는 경험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임흥순의 작업의 단점으로 지적되곤 하는 일종의 신파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관점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물론 그 스스로도 이 뒤에 가서 “감독의 말을 경청하며 주관적으로, 다소 진부하게 해석”했다고 단서를 달고 있기는 하지만, 제 생각엔 임흥순의 유효성을 한없이 축소시킬 뿐더러 임흥순이 종종 주어진 말과 이미지를 뒤틀기도 한다는 사실을 그냥 지나쳐버립니다. 아마 이게 전면화된 작업은 아마도 모모세 아야와 협업한 결과물인 <교환일기>(2015~2018) 시리즈일 겁니다. 하여튼, 임흥순의 작업 속 ‘재현’은 더 복잡한 얼개를 가지고 있죠. 이 지점을 한 번 얘기해보겠습니다.
극장판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의 경우, 그는 ‘분열’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항일 투쟁부터 탄핵 정국까지의 한반도의 역사를 숨 가쁘게 가로지르면서 그 사이에 ‘반복’을 발견, 혹은 구축하려고 합니다. 근데 그 ‘반복’이란 역설적으로 언제나 간극의 형식을 통해서만 인식이 돼요. 가령 산 속에서 펼쳐지는 ‘환상적인’ 재연 장면들은 그 ‘환상적’인 성질로 인해서 정정화 할머니의 과거를 자명하게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한껏 배반할 뿐만 아니라, 이후 재연 배우들이 과거와 실제로 연관을 가진 사람들, 예를 들어서 정정화 할머니의 조카를 실제로 만나고, 직접 자기가 인터뷰이로 나서서 자신이 탈북자임을 고백한다던지, 이런 재연 장면들을 찍으면서 자신이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 그러한 얘기들을 하면서 ‘빨치산으로서 산을 넘은 정정화’와 ‘정정화-되기를 수행하기 위해서 산을 넘었던 박세현’, 그리고 또 ‘북한이탈주민으로서 산을 넘었을 강나라와 윤수현’, 이 세 개의 항이 교묘하게 묶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더 복잡해지죠. 앞서 “역사와 기억을 얽”는다고 한 건 이런 장면들을 두고 한 말로, 산을 넘는다는 경험은 나에 있어서 내밀하면서도 타인에 있어서 환유적일 수 있는 어떤 이중 구속, 곧 ‘반복’으로 재배열될 수 있는 거죠. 당연하지만 이는 재연 장면들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고요, 평론가 곽영빈은 「페르/소나로서의 역사에 대한 반복강박 – 임흥순과 오디오-비주얼 이미지」라는 논문에서, 증언과 증언의 대상 사이의 간극이 전면화되는 <비념>의 장면들을 예로 들며 임흥순의 “반복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 지각되지 않는다는 역설”, 즉 외견상 그리고 시간상 상이한 사건들 사이의 연동을 발견, 아니면 혹은 구축하는 것의 난관을 오디오-비주얼 이미지 환경에서 고민한다고 말합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임흥순의 허구적 터치라는 어떤 미학적 시도를 정당화하는 배경이란 상이한 사건들을 함께 묶을 수 있게끔 하는 어떤 힘이자 조건으로서의 ‘보편성’universality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보편성’에 더해서, 그는 항상 어떤 공동체를 생각하고 또 갈망합니다. 평론가 정성일은 극장판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의 리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은 우리를 이어놓는 것들을 찾는 중이다. 그러므로 안과 겉의 자리바꿈은 미학적 전복이 아니라 공동체의 존재 방식을 호소하는 시도이다.” 여담이지만 그가 굳이 미학적 전복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저는 사실 되게 마음에 안 든다고(웃음) 생각하는데요, 이러한 말은 굉장히 형식주의를 죄악시하는? 그릇된 태도라고 일단은 생각합니다. 하여튼, 이 말을 더 확장해서 임흥순의 궤적 자체에 적용할 수도 있겠죠. 임흥순 이라는 사람 자체도 인터뷰에서 공동체라는 낱말을 종종 쓰곤 하고요. 물론 <호랑이 잡은 강건성 일병>(2014)같은 ‘사진적’인 비디오 인스톨레이션이나 <북한산>(2015)같은 ‘1인극’이 있다는 것을 저도 모르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비념>부터 <좋은 빛, 좋은 향기>같은 장편영화의 궤적은 기실 공동체에 대한 그의 갈망이 뚜렷해지는 과정이었다고 저는 보고 있고요. 상이한 사건들 속에서, 그리고 동시에 ‘보편성’ 위에서 살아가는 이들, 특히 여자들의 공동체 말이죠.

다만 이 공동체의 방향성은 액티비스트적인 것도 아니고 우리가 미국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그런 자조모임적인 것도 아니어서, 서로 마주치지도 못하고 마주치더라도 아주 잠깐동안만 함께 할 뿐입니다. 심지어는 서로가 존재한다는 걸 모르는 듯 할 때도 있죠. <좋은 빛, 좋은 향기>에서 두 나라의 할머니들의 각각의 인터뷰를 숏-리버스 숏 구도처럼 붙여놓은 게 그런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그 자체로 독립적인 파편들을 그러모아보는 듯하죠. 하지만 임흥순은 서로가 당장에 마주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하여튼 이들을 작업 안에서 하나로 묶어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반복’을 견디고 어떤 ‘반복’에 저항하는데 일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요. 저는 여기서 이런 공동체를 일단 ‘잠재적인 공동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얘기한 것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임흥순은 상이한 사건들 사이에서 ‘보편성’을 찾고 또 그에 맞서고자 ‘잠재적인 공동체’를 또 찾는 작가라고 할 수 있겠죠.

자,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부터 저는 임흥순을 굉장히 의심스럽게 보게 되는데요, 잠재적인 공동체가 차이를 충분히 사유하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미술평론가 클레어 비숍의 저 유명한 글인 「적대와 관계미학(Antagonism and Relational Aesthetics)」(2004)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준비된 임의의 공간에 이런저런 변수가 우발적으로 도입되는 과정 자체를 하나의 미술 작업으로 엮음으로써 거기에서 정치성을 찾는 것을 관계미학이라고 일단 니콜라 부리오를 따라서 얘기할 수 있을 텐데, 클레어 비숍은 이러한 부리오의 관계미학이 관계의 질과 구조를 질문에 부치지 않고 하여튼 겉보기에만 그럴싸한 ‘열린’ 관계, 극히 부르주아적인 환대의 공동체를 조성하는데 급급하다고 비판하면서 미술과 사회에 내재하는 불만, 불화, 적대 같은 것들을 적극적으로 폭로, 반성하는 태도야말로 동시대 미술에 필요하다고 주장을 하죠. 물론 이 「적대와 관계미학」을 위시한 비숍의 기획들에 한계가 없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걸 굳이 이 자리에서 더 얘기를 할 수는 없을 것 같고요. 일단 이 논의에 기댄 채 말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누군가는 <위로공단>을 보고 난 뒤에 임흥순에게서 여성노동의 고난이 직장 내 성차별이라는 심급에서도 발생한다는 사실이 기피되고 있는 것 같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즉, 남자 없는 ‘여성성’ 비판이 가능하냐고 묻는 거라고 볼 수 있는데요, 엄연히 다른 방향성을 가진 작업에 대해 할 말이 아니라는 건 (웃음) 일단 차치를 하고, 이는 이른 바 ‘여성’ 내부에서도 차이 및 투쟁이 발생하며, 그 역시 꽤 중요한 토픽이란 것을 간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임흥순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거든요? 저는 지금 <위로공단>의 마지막 시퀀스, 그러니까 답십리의 동산을 함께 오르는 두 여자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위로공단>의 초반에 나왔었던 자매의 이미지가 여기에 겹쳐지면서 어떤 우애의 감정을 자아내는데요, 이 장면은 분명 여성노동자들 사이에 어떤 ‘잠재적인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이런 결론을 도통 납득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단적으로 얘기하자면, 남한의 여성노동자들과 베트남 출신 여성노동자들 사이의 어떤 ‘잠재적인 공동체’를 상상하는 데 있어서 동질의 구조적 폭력이 가해지며 동질의 슬픔이 있다고 지적하는 게 과연 충분한 제스처일까요? 왜 ‘반복’이 다른 곳 다른 시간에서 나타났는지는 살펴보지 않아도 되는 걸까요? 이는 오히려 풍부한 자기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대상들을 표백시킬 위험을 갖고 있지 않을까요? 그런 의문이 듭니다.

물론 반론이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일단 베트남 전쟁에 대한 00년대 임흥순의 작업들은 물론이고, <위로공단>이나 <환생>같은 작품들도 남한의 권력이 한반도 바깥에서 저지른 악행들을 외면하진 않죠. 또 앞서 말했듯이 “상이한 사건 사이의 연동을 발견 혹은 구축하는 것의 난관”을 다루는 작가로서의 임흥순은, <좋은 빛, 좋은 공기>의 ‘쑥갓’ 파트에서 VR 영상 제작을 위한 그린 스크린을 아무렇지 않게 노출하기도 합니다. ‘쑥갓’ 파트는 초록색을 기준으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컬러로 전환되는 잠깐의 순간인데요, 여기서의 VR 영상이 과거의 사건을 상대의 도시에서 재연해보는, 즉, 사건의 교환 가능성을 시험해보는 시도임을 생각하면 그 함의는 좀 더 뚜렷하게 다가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요소들은 임흥순의 ‘잠재적인 공동체’를 완전히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왜냐? 상이한 사건 사이의 ‘반복’을 찾아 그것을 겪는 각각의 여자들을 ‘무엇무엇 하는 여자’라고 하나로 호명할 때 그 여자들이 각각 어떤 조건에 둘러싸여 있는지를 깊이 파고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보죠. 여자들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거나, 다른 이들과 비교할 때 꽤 다른 제스처를 보이는 인터뷰이를 따라가 보거나, 아예 공동체를 의심하고 공동체를 원치 않는 이가 나온다거나 하는 상황을 임흥순에게서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또, 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사이의 차이, 이란과 베트남의 차이, 캄보디아와 남한의 차이,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관객이 더 찾아봐야 할 부차적인 사안일 뿐이죠. 다시 또 <좋은 빛, 좋은 공기>를 예로 들자면, 아르헨티나의 페론 정부에 의해서 자행된 제노사이드[발표자 주: 당시 현장에서 사실 관계를 틀리게 설명해 덧붙인다. 여기서 설명하는 제노사이드는 페론 정부 시절이 아니라 이사벨 데 페론의 실각 이후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이어진 호르헤 비델라 중심의 군부 독재 시절에 자행된 일명 ‘더러운 전쟁’을 이른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에 의해서 자행된 광주에서의 제노사이드는 분명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피해자 계층의 계급에 있어서도 굉장히 다른데요, 당시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주적으로 삼았던 대상은 좀 당대의 엘리트 계층들, 인텔리 계열이었고, 광주는 그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인 제노사이드였죠. 이 작품에서 임흥순이 다루고 있는 두 할머니들은 서로 다른 계급에 있고, 그래서 이 영화 안에서도 서로 쓰는 어휘가 굉장히 달라요. 그런데 임흥순은 이것을, 이들의 계급차이를 드러내선 안 된다, 해서 이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아니면 이들 사이에 왜 이러한 어휘차가 발생하는지, 이런 것들을 영화에서 최대한 보여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실제로 그가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히기도 했는데, 이는 어떻게 보면 일종의 평등주의적인 제스처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 둘 사이에 있을 어떤 차이,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차이를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아하는 심리가 더 강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오해를 살 수도 있기 때문에 빨리 덧붙이자면, 저는 그가 관계의 마찰을 수집해야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결국에는 주체의 실천 수준에서만 정치를 사고하는 것일 뿐이겠죠. 그리고 제 생각에 클레어 비숍의 기획의 한계 중 하나는 여기서 발생하고요. 하지만 다음과 같이 생각하긴 합니다. 이 ‘잠재적인 공동체’는 차이와 함께 형성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차이를 잠재우고 형성되는 공동체라고요. 그래서 이것은 스피박이 얘기했었던 전략적 본질주의 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들이 과연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은 한 번도 우리 앞에 나타난 적이 없고, 그 대신 공동체가 성립되어야 한다는 당위만 우리 앞에 계속 나타난 거죠. 저는 이런 느낌을 극장판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에서 특히 자주 느끼는데요, 그 어디죠? 한라산 시퀀스가 있습니다. 거기서 아까 말씀드렸었던 정정화-되기를 수행한 남한 출신 배우와 거의 40년동안 장기수 복역을 한 빨치산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함께 한라산을 등반하는데요, 결국에 백록담까지 같이 가서 사진을 찍어요. 근데 이 과정에서, 이 시퀀스에서, 박세현 배우와 이 장기수가 만난다는 사실에 이 박세현 배우가 계속 카메라에 대고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과 만날 수 있는게 굉장히 두렵다, 좀 긴장이 된다. 이런 얘기를 하기는 합니다.[발표자 주: 당시 현장에서 사실 관계를 틀리게 설명해 덧붙인다. 이 시퀀스에 출연한 배우는 박세현이 아니라 북한이탈주민 출신인 윤수련이다.] 그런데 결국에는 그런 게 유야무야 되고 이 둘은 그냥 사이좋게 백록담에서 같이 사진을 찍어요. (웃음) 이런 게 저는 굉장히 우습게 느껴집니다. 모든 액션이 결국에는 공동체=좋은 것이라는 도식 안에서 진행된다고 할까요?

물론 상이한 사건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당연히 나란히 비교되거나 묶일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합니다. 적어도 모더니즘의 시대에 도래했던 영화는 그런 무차별성의 과업을 특히 잘 해내던 양식이죠. 한데 앞서 꾸준히 얘기했듯 ‘상이한 것들을 묶기’라는 말에서 임흥순은 “묶기”에 거의 집중하지 “상이한 것들”은 거의 파고들지 않습니다. 그 자신도, 그를 둘러싼 여러 평자들도 ‘임흥순은 타자에 한없이 열린 사람’이라는 명제를 갖고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정반대거든요? 그러니까 작가로서의 임흥순의 관점은 ‘잠재적인 공동체’를 미리 상정해놓고 그에 맞춰서 사건들과 사람들의 차이를 적당히 정돈해 제시할 수 있는 메타적 조망의 자리에 있습니다. 수직 시점에서 역사를 내려다보고 판단하는 그릇된 관습이 여전히 그에게서 존속되고 있는 거죠. 그렇다면 그가 애착을 보이는 유령의 위상도 함께 의심스러워집니다.

유령이 무엇일까요? 아주 단순하게 얘기하자면 ‘보편성’의 일그러진 산물이자 우리로 하여금 이 ‘보편성’이 ‘보편성’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게끔 하는 실마리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임흥순이 자꾸만 유령을 불러들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죠. <비념>의 오프닝 시퀀스의 유령, 그리고 <위로공단>의 소녀 유령, 그리고 <다음 인생>(2015)의 영혼결혼식, 더 나아가서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에 등장하는 유령들, 그리고 임흥순이 <교환일기>에서 했던 말을 빌리자면, 살아있지도 죽지도 않은 사람들. 어떤 이들은 그가 유령을 포함한 ‘한국적 전통’을 통해 트라우마의 치유를 도모하는 걸 경멸하곤 합니다만, 저는 그 자체가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전통의 형식을 급진화하면서 슬픔이란 정서를 시험해보려고 하지 않고 그냥 이 전통의 탬플릿을 그대로 가져간다는 게 문제라고 할 수는 있겠죠. 그렇지만 이것은 언젠가 나중에 더 얘기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보다 여기서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다루는 유령이 반성하는 주체의 주관적 반영물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위로공단>에서 시위 현장 한가운데 있는 소녀의 유령은 물론 ‘보편성’의 일그러진 산물이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점에서 여전히 비가시적인 대상입니다. 하지만 임흥순의 카메라는 이 흑백으로 된 소녀를 보고 또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죠. 구슬픈 음악도 넣어서 그런 비가시성을 한껏 슬퍼합니다. 근데 거꾸로 보면 이는 유령을 보고 또 슬퍼할 줄 아는 자신, 그러니까 반성하는 자신을 특권화하는 제스처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반성하는 자신이라는 것은, 어떤 예술가로서 이런 반성을 수행하고 다른 것들을 직조하고 연계시키는 임흥순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무엇에 대해서 반성하고 심리적으로 반성할 수 있는 임흥순을 이르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러한 제스처가 메타적 조망의 자리와 결부가 될 때, 다음과 같은 자기합리화의 구실로 쓰이게 되죠. 나는 유령을 뒤늦게라도 보고 슬퍼할 줄 안다, 그렇다면 나는 역사를 내려다보면서 그 차이들을 정련해도 괜찮다, 는 식으로요. 임흥순은 그렇게 스스로의 관점과 손길을 스스로의 관점과 손길을 통해서 정당화합니다.

돌이켜보면 반성은 잘 작동하지 않을 때가 있죠. 반성하는 자신과 반성하지 않는 나머지를 쉽게 분리해서 그 나머지를 마냥 욕하는 것으로 유의미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혹은 반성을 구실삼아서 어떻게든 발언권을 쟁취하거나 유지하려는 이들에 의해서요. 즉 이때의 반성은 어이없게도 보신주의, 그러니까 자아를 그저 옹호하고 자아를 안전하게만하는 그러한 방향으로만 향할 뿐입니다. 자아를 세속적으로 관계들에 계속 열어두는 거야말로 결국에는 반성의 참된 조건인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그릇된 반성과 지금까지 설명한 임흥순의 작업이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는 건 이제 어러분에게도 자명할 거라고 믿습니다. 그럼 이쯤에서 우리가 고민하고 지향해야하는 게 반성 자체가 아니란 것도 자명할 테고요. 타자, 공동체, 불화, 파편성, 가시화 같은 말들이 그 자체로 윤리적이고 유효한 것으로 여겨지는 꼴은 정말 그만 보고 싶습니다. 창작에서든 비평에서든요.

지금까지 이 자리에서는 일단 임흥순만을 다뤘지만, 사실 지금까지 비판한 바는 임흥순에만 해당되는 말은 전혀 아닙니다. 아니, 이 말은 정확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비디오 에세이’나 ‘1인칭’ 같은 식으로 이름만 달리할 뿐 오늘날 시각예술과 미술, 문학 어디에서나 이런 류의 작업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체를 포기하고 소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메타적 조망의 자리에서 여타의 사건들과 대상들을 추상적으로 일반화로 몰아가는, 그러면서도 주체가 포기되고 소거된 것마냥 구는 그러한 작업들이요. 거꾸로 말하자면, 오늘 이 자리에서 임흥순은 환유적인 이름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유의 중점을 다시 주체, 혹은 주체성으로 옮겨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필연적일뿐더러 필수적인 그 주체요. 다만 타자, 공동체, 불화, 파편성, 가시화, 이런 것들과 엮이지 않은 채 제대로 작동하는 주체란 없다는 걸 유념하면서 말이죠. 결국 문제다운 문제는 우리가 우리 손에 들린 무기를 과연 제대로 쓰고 있느냐 하는 것인 것 같습니다. 그걸 자각하는 한에서 우리는 “이 다음”에 대한 생각을 겨우겨우 시작할 수 있겠죠.

예, 제가 지금까지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질문 있으실까요?

[객석1: 임흥순이라는 이름 안에 또 들어갈 수 있는 다른 감독이 있을까 해서, (객석 웃음) 말씀해주실 수 있는 분이 있을지.]

역시 (웃음) 이런 질문을 해주실 줄 알고 준비를 했습니다. (객석 웃음) <철의 꿈>, <군대>의 박경근 감독이나 아니면 정윤석 감독도 여기에 해당이 된다고 저는 생각을 하거든요? 아니면 더 나아가서 KBS의 <모던코리아>, <88/18>과 <모던코리아> 같은 기획도 여기에, 이런 메타적 조망의 자리에서 역사를 내려다보는, 차이를 자기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그런 류의 작업에 속해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결국, 저는 원래는 이 사람들까지 같이 엮어서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일단 분량이나 시간 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서 빼긴 했었거든요. 근데 질문을 해주셔서 다행히 (웃음) 이름을 거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객석2: 저도 여쭤볼 게 있는데 이거는 사실, 청탁을 주신 마테리알 측께도 좀 궁금한 점인데, 왜 하필 임흥순이었는지, 그 당시 화두가 임흥순이어서 단순히 임흥순을 어떤 대표성을 가지는 이름으로 생각을 하신건지? 아니면 별도의 이유가 있으신 건지, 그거를 좀 알고 싶습니다.]

음, 제가 먼저 얘기 할까요? 아니면 마테리알 쪽에서 먼저 얘기해주실까요? [마테리알: 아랑님께서 답변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거는 지금의 저보다는 2019년의 제가 대답을 해야 될 문제인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저는 그때 당시의 다른, 정윤석 감독이나 박경근 감독 같은 분들에 대한, 아니면 나아가서 이후의 2020년에 있었던 이른바 ‘오토픽션’ 얘기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그런 것들에 대한 적의가 충분히 라기 보다, 아주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제 적의가 많이 향하고 가장 의심스럽게 봤던 것은 역시 임흥순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저는. 그리고 제가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사실 임흥순을 다루는 다른 평자들의 방식도 굉장히 불만족스러웠고요. 오히려 그래서 더 임흥순을 더 다뤄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임흥순을 일종의 대표자로서, 환유할 수 있는 중요한 이름으로써 들고 온 것은 결국 그런 이유들 때문인 것 같아요.

[객석3: 자잘 자잘하게 세 개를 한 번 여쭤보고 싶습니다. 일단 가장 처음 질문은 김동령과 박경태는 이 리스트에 포함될 수 있는지 없는지가 괜찮으시다면 좀 궁금합니다.]

(웃음) 저 최근에, 사실 저는 개봉했을 때만 해도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21)를 보지 않았고, 친구들로부터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를 어떻게 봤다, 라는 얘기만 들었었는데요. 그러다가 이번 발제를 준비하면서, 아 이제 피할 수 없겠다, (객석 웃음) 하면서 이 영화를 봤습니다. 저는 임흥순이 00년대 이후에 들어서 어떤 일종의…… 사적인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비디오 에세이라고 할 수도 없는, 어떠한 허구적인 것에 상대적으로 열려있는? 그러한 다큐멘터리가 00년대 들어 남한에서 확실히 늘어났다고 생각하고, 아마 많은 한국영화 연구자들이 (여기에) 동의를 할 텐데요. 그러한 흐름 안에 임흥순이 참여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이렇게 보자면 이 흐름 안에 그들(김동령, 박경태)이 속해있고, 그들 역시 임흥순과 동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일단 제 생각입니다.

[객석3: 두 번째 질문은. 임흥순을 여러 차례 환유적인 이름으로써 언급을 하셨는데, 은유가 아니라 환유라고 하신 이유가 있는지. 왜냐하면 저는 환유라고 하면 지금 제가 있는 자리가 민사소송 재판장인 것 같고, 은유라고 하면 형사소송 재판장에 있는 것 같은데. 그랬을 때 저는, 오히려, 라깡을 빌린다면, 환유는 무한히 일어나고, 은유는 딱 한번 일어나니까? 그래서 이 임흥순이라는 이름을 지금 올려놓으시는 위치가 정확히 어떤 위치인지 약간만 부연을 해주시면, 그러니까 조금 나이브하게 얘기하면 좀 관객으로서인지, 비평가로서인지?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제가 짧은 질문이라고 거짓말해서 죄송합니다.]

(객석 웃음) 아닙니다. (웃음) 음, 일단 제가 환유라고 표현했었던 것은 지금 제가 이 발제문에서, 목표 대상으로 삼고 있는 어떤 작가군? 그런 작가들, 혹은 작업들이 단순히 방금 전에 제가 말씀드렸었던, 나열했었던 이름들뿐만 아니라, 아까 얘기했듯이 1인칭을 쓰는 소설들, 아니면 이른바 사적 비디오에세이 같은 흐름에 참여하는 작품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그것들 역시 목표가 될 수 있다, 라고 생각을 했고 그렇다면 좀 은유적인 이름이라기보다는 그런 것들과 함께, 그런 것들을 대신해서 일단 불려나올 수 있는 이름으로써 임흥순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환유라는 표현이 훨씬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객석3: 마지막 질문은, 이런 주제를 항상 들을 때면 생각나는 것은, 일명 세르주 다네의 「〈카포〉의 트래블링」 글인데, 거기서 물론 다네가 여러 가지 갖가지 해답들을 얘기하지만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해답은 <우게츠 이야기>에, 그,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간단히 설명 드리면 <카포>의 트래블링이 유대인 학살 문제를 다루면서 <쇼아>의 문제를 다룰 때 어떻게, 너무나도, 말하자면 반성 없이 그냥 서사적인 카메라 움직임을 넣을 수가 있느냐. 어떻게 트래블링을 넣을 수 있느냐. 뭐 이런 거라고 저는 이해 하는데. 그런 아무 생각 없는, 말하자면 우수성만을 위한 몰입 없는 트래블링에 반대해서 세르주 다네가 그럼 윤리적인 행동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라고 했을 때, 예시로 제시하는 것이 아까 얘기한 <우게츠 이야기>의 트래블링인데, 거기에서 트래블링이 하나가 약간 멈칫합니다. 하지만 다시 트래블링. (웃음) 그러니까 이 부끄러움을 아는 이런 트래블링이 세르주 다네가 그래도 얘는 염치가 있네, 이런 식으로, 얘는 좀 윤리적이네 이렇게 판단을 하게 되는데, 오히려 발표하신 거에서는 좀 구조가 뒤집혀서 나타나고 있다, 라고 느껴지게 되는 것이, 세르주 다네가 요청한 것이 어떤 반성이라면, 그 반성을 끝까지 밀고나가지 못하는 임흥순이 문제적인 것인지. 그러니까 반성을 하고 있는 자신까지 반성하지 못한, 그런 점에서 임흥순이 문제적인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불가능한 반성을 잘못된 방식으로 시도하려고 했던 임흥순이 문제인 것인지. 그게 이제 제가 좀 더 여쭤보고 싶었던 부분입니다.]

일단, <카포>의 트래블링을 제 관점에서 조금 더 부여하자면, 결국에는 다네가 얘기 했던 것은, 그러한 아우슈비츠의 어떤 폭력적인 순간을 재현하는 것은 굉장히 어떤 종교적인 것, 이콘에 다가가는 순간 같은 것이다, 라는 어떤 종교적인 제스처를 취하는데요, 근데 이런 종교적인 것을 장식화하면 안된다, 라는 식으로 다네의 논리가 펼쳐지는 것이라고 일단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우게츠 이야기>에서 트래블링이라든지, 아니면 또 다네가 예를 드는 게, 르누아르의 <나나>의 트래블링이죠? 거기에서도 잠깐 주춤했다가 다시 또 들어갑니다. 굉장히 잔인하면서도 동시에 부끄러움을 안는, 그런 트래블링이라고 다네는 생각하는 것 같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제가 생각했던 것은, 그러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반성하는 자신까지 충분히 반성하지 못하는 임흥순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애초에 불가능한 반성이라고 한다면 결국에는 김훈처럼 나는 여자를 몰라, 나 남자야 나 여자 몰라, (객석 웃음) 이런 식으로 얘기가 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하거든요? (객석 웃음) 물론 그런 식으로, 난 여자를 몰라 이런 말이 반드시 김훈 식으로 발음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긴 하지만, 일단 제가 이 자리에서 염두에 둔 것은 이 반성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하는 임흥순 인거죠.

[객석4: 약간 적의를 품고 있는 질문을 하겠습니다. 중간에 살짝, 제 입장에서, 거슬렸던 부분인데. 그 세속적이라는 말, 자신이 세속적인 상황·조건 같은 것을 열어두는 거야 말로 참된 반성이라는 말이 들어갔는데요. [“자아를 세속적으로 관계들에 열어두는 거야말로 반성의 참된 조건인데 말이죠.-발표문, 편집자주] 그 앞의 반대항으로 생각을 했었는데요. 음, 근데 저는 그게 즉 임흥순의 관점이라는 생각도 들어서, 그러니까. 임흥순이 반성을 바라볼 때의 관점이, 세속과 반성은 반대 관계에 두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시기에 반성만큼 세속적인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는 입장에 있어서, 반성이 흔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거든요. 이 부분에 대해서 본인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아니라면 세속적이라는 말이 더 구체성에 다가가기 위한 것인지,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어요.]

제가 세속적, 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조르조 아감벤의 ‘세속화’라는 말에서 따온 거거든요. 아감벤이 이야기한 것을 정말 정말, 아주 거칠게 정리를 하자면, (사물이나 행동을) 관계에 열어두는 것? 성상 같은 것도 다른 장식으로 쓸 수 있게 해두고, 아니면은, 일종의 조르조 아감벤의 영화학 실천서 같은 느낌인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 의 경우에서도, 그저 하나의 이미지라는 개념을 말씀 하시죠. 그럼으로써 직접 사용에 열려 있는 이미지, 그 자체로도 무언가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다른 무엇들과 관계하고 연결될 수 있는 이미지, 그런 식으로 아감벤의 세속화를 영화적으로 적용하신다고 봤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세속적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질문 주신 것도 굉장히 유효하고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좀더 곱씹게 되네요 다시.

[객석5: 최근에 <미씽타는 여자들. 보셨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 영화가 좀 불편했거든요. 그건 제 개인적 취향인데. 최근에 독립영화 쪽에서 소위 유명 감독들, 봉준호나 박찬욱 감독들이, 영화를 뛰어주고 있잖아요? 근데 그게 대중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는 좋은 건데, 그게 맞는가? 라는 생각에 대해서, 평론을 하시는 분이라면, 이런 추천사가 관객이 볼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거든요. 그런 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이게 지금 오늘 나온 질문 중에서 제일 어렵고, 제일 답변하기 힘든 질문이네요. 음, 일단 저는 여기에 이중적인 생각이 있는데요. 일단 한방향으로는 그렇게라도 더 마케팅이 필요하다. 그렇게라도 관객이 더 드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한방향이 있고, 동시에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마케팅이 사실 좋은 영화를 보는 것을 방해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그 영화를 어떻게 봐야하는지를 안개 속에 넣어버린다거나, 그런 잘못을 범할 수 있다고, 그런 방향의 생각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 이 두 가지 생각 사이에서 두 가지 생각을 조절하거나 아니면은 조합하거나 그에 대한 구체적 답변을 못 내린 상태입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질문에 답변을 드리기보다는, 오히려 질문과 함께하는 제 고민을 드러내는 게 더 맞는 답변인 것 같네요.

[금동현-마테리알 편집진: 사실 임흥순을 저희가 내부에서 이야기할 때, 조금 궁금했던 건, 되게 임흥순이 세대론적 표지가 되는 것처럼 읽혔어요. 최소한 저희 편집부 사이에서는. 말씀하셨던 그 세대의 평자들과 감독들은 하나같이 좋아하지만, 나와 내 세대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근데 이게 참 교묘하고 세대론적인 이야기가 돼서 어렵고 안 좋은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한편 묻고 싶었던 게, 아랑님이 이런 쪽으로 천착해서 발표를 하시지는 않으셨지만, 세대론적 표지로서 임흥순이라는 게 작동한다면, 그렇게 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함연선-마테리알 편집진: 덧붙여서 질문드리고 싶은데요. 물론 2019년에 쓰신 트윗이지만 ‘이 다음’이라는 문구를 읽었을 때, 저도 세대론적으로 해석을 할 수 밖에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갖고 계쎴던 건지, 아니면 저희가 오독을 했던 건지,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해주셔도 좋겠습니다.]

함연선 님의 질문에서부터 답변을 드리자면, 실제로 세대론적인 함의를 품고 ‘이 다음이라는 정당성’이라는 문구를 쓴 것은 맞습니다. 말씀하셨던 것처럼, 제가 발제문에서 이야기했던 그 세대 평자들이 공통적으로 임흥순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불만과 피로감이 있었거든요. 정말 나를 포함한 나의 주변에는 아무도 임흥순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선생님들이라고 할만한 평자분들은, 이상할 정도로 임흥순에게서 자신에게서 필요한 것을 열심히 찾고 있었어요. 그게 굉장히 기묘하다고 생각했고, 이거를 돌파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 그리고 금동현씨 질문에 답을 하자면,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제가 아직은 찾아내지 못한 것 같아요. 왜 그런 세대적인 분리가 일어나는지? 이것은 좀더 제가 고민을 해봐야 될 지점인 것 같습니다. 전 그런 점에서 <논픽션 다이어리> 같은 작품을 상찬했던 분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전 이해할 수 없어요. <논픽션 다이어리>나 <철의 꿈> 같은, 그리고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를 다룬 어떤 글을 읽었을 때, 굉장히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 애인의 말을 빌리자면, 마치 자신의 미적 시도가 세계를 위한 거대한 시도인 것 마냥 구는? 비평에서도 그런 태도가 나타난다고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러한 작품들이 어떤, 제 윗세대 평론가들에게 이상하게 호소를 하고 있다, 아니면 좀 더 잘 받아들여진다는 생각은 듭니다.

[객석5: 저는 생각이 없었는데. 앞에 분이 반성이 세속화 되었다는 질문을 하셨는데. 구조적으로 그것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세대가 있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관객성 속에서 영화제라는 것, 한국영화에서 산업이 아닌 다른 영역이 나오기 힘든데, 그게 어떻게 보면 하나의 방향 제시가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옹호한 게 아니라, 근데 한 개인이 아니라 저널이라던가 평론쪽이라던가 학계라던가 그런 게 아닌가. 제가 볼 때는 좀 아쉬운 게, 좀 다각도로 접근해서 관객성의 구조적인 걸 보면, 좀 선명하게 보일 수 있는 여지가 있겠죠.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그런 걸 더 보면 풍부해질 것 같아요.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제가 좀 아쉬웠던 게, <위로공단>에 대해서도. 조금 고리타분한 이야기지만 <본명선언>은 보셨죠? <본명선언>에서 상당히 문제가 있었잖아요. 제가 여기서 그걸 대변하는 건 아닌데, 다음 세대를 위해서, 세대 교체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서 좀더 심층적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3자적 관점에서 이야기할 사람들이 관심이 없는 건지, 관심이 보이면 한쪽에 찍힌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그런 담론이 없어요. 그게 좀 슬프기도 하네요.]

[객석6: 아까 차이를 잠재우는 공동체와 차이를 함께하는, 차이를 발생하는 공동체라는 대비를 주셨는데요. 세대론적 관점에서 임흥순을 이야기했다고 하셨는데요. 사실 세대론적 관점을 지나서, 젊은 독립영화 감독들도 크게 다르지 않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들거든요. 그래서 젊은 감독들 중에 혹시 차이와 함께하는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지, 예를 들어주실 분이 있는지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이것 역시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네요. 저는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순전히 공동체를 상상하는데 있어서는, 아직은 한국에서 그런 감독이 없지 않나? 라고 생각을 합니다. 뛰어난 감독님은 분명 있고, 젊은 독립영화 감독들 중에서도 좋은 작품을 내는 감독님이 분명히 있습니다만. 이렇게 프레임을 좁혀서,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배울 수 있을, 그런 감독님은 아직은 없는 것 같다? 혹은 적어도 제가 못 찾았다, 고 생각을 합니다.

[객석7: 오늘 발표를 조금 들어보면서 <김군>(강상우, 2018)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는데요. 반대항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요. 아랑님께서, <김군>의 영화제 버전과 개봉 버전에 대한 글에서, 개봉 버전을 보고 나서, 마지막 장면에서 공동체에 대한 부분, 세 분이 함께 극장에 모이는 장면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을 하신 걸로 기억을 하는데요. <김군>에 대한 이야기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거기서 발견한 긍정에 대해서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제가 그때 당시, <김군>을 한 번은 영화제 버전으로 보고, 다른 한 번은 개봉 버전으로 봤을 때, 이 두 판본의 차이에서 제가 특히 주목했던 것은, 말씀하셨던 극장에서 세 명이 모이는 장면보다는, 아예 마지막 장면 있잖아요?이하 내용은 발표자의 브런치 「<김군>, 순수하지 않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편집자 주 영화제 버전에서는 이 사람이 ‘김군’이다, 라는 암시와 함께 옛 전남도청의 문이 갑자기 닫히는 걸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개봉 버전은 이 부분을 완전히 없앴어요. 이 사람이 ‘김군’이다, 라는 것을 개봉 버전은 완전히 잘라 버리고, 그 대신 개봉 버전 <김군>이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음 장면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게 좋겠네요. 한밤중에 옛 전남도청이 찍히고 그게 불길하게 재현이 됩니다. 제 기억으로는 손전등도 안에 비추고[발표자 주: 당시 현장에서 사실 관계를 틀리게 설명해 덧붙인다. 이 씬에서 손전등은 나오지 않는다.] 80년 5월 당시의 광주를 환기를 시키는데요. 그와 동시에 <김군>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주옥’이라는 분이, 세월호 시위에서 주먹밥을 나누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주옥씨가 옥상에 올라가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또 있어요. 근데 이 영화를 돌아보면 1980년 당시 광주에서 이 주옥이라는 분이, 항쟁을 나가는 남자들한테 주먹밥을 싸줬다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제가 발제문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김군>의 마지막 시퀀스 역시 일종의 반복을 보여주고 있는 거죠. 전남도청의 으스스한 분위기를 통해서 그러한 권력의 논리가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환기하는 동시에, 그것에 저항하려는 사람들의 몸짓도 충분히 돌아올 거라는 일종의 낙관적인 결론으로 <김군>은 끝이 납니다. 저는 이러한 점에서 개봉 버전이 <김군>이 적어도 결말에서는 좀더 좋았다고 생각을 하고, 그 점에서 제가 아까는 떠올리지 못했었지만, 강상우 감독의 경우에는 공동체를 다루는 사람은 아니지만,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는 감독이라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지금 답변을 하면서.

[객석8: 앞에 반성이랑 박살 이 다음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발제 맨 마지막에 언급하신 우리 손에 들린 무기, 에 대해서 무엇을 염두에 두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일단 좁게는 마지막에 이야기했던, 타자, 공동체, 불화, 파편성, 가시화 같은 창작과 비평 모두에서 쓰이는 수사를 이른 거고요. 좀더 넓게 나가면, 비디오 에세이 사적 비디오 에세이나 1인칭 같은 것에도 해당이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들도 일종의 우리 손에 들린 무기 중 하나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근데 질문에서 살짝만 빗겨나가면,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긴 하지만, 저는 이것들이 무기인 동시에 통치성의 도구이기도 하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이 둘이 각자 있는 게 아니라, 무기면서도 통치성의 도구인 거죠. 1인칭을 소설 담론에서 이야기할 때, 1인칭을 통해서 우리는, 강동호의 말을 빌리자면, 이른바 루카치류 리얼리즘에 따른 그런 3인칭을 반성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한편으로는 어떤 반복이지 않느냐? 그러니까 루카치의 총체성의 리얼리즘을 조금 형태를 바꾼 게 아니냐?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거든요. 강동호 평론가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거든요. 사실 이 이야기가 강동호 평론가의 정확한 워딩인지는 제가 기억이 안 나는데.[발표자 주: 강동호, 「비평의 시간 – 김봉곤 사건 ‘이후’의 비평」, 『문학과사회』 2020년 가을호.] 어쨌든, 제가 하려는 말을 축약을 하자면, 제가 이야기 했던 타자, 공동체, 1인칭, 비디오 에세이 영화 같은 것들은 우리에게 어떤 우리 손에 들린 무기면서도 동시에 통치성이기도 하다는 거죠. 그리고 그 점에서 통치성이라는 관점에서 사실 임흥순을 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까 임흥순을 비롯한 임흥순이라는 환유적인 이름에 얽혀있는 어떤, 그런 공동의 방법론? 혹은 태도? 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이 오히려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더 닮아 있고, 더 붙어있는 것은 아닐까? 통치성의 차원에서? 라고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