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6
REVIEW
정경담

게슈탈트와 멈추지 않는 여정: DMZ 국제다멘큐터리 영제화 상영작 When daily life becomes a content, their daily work turns into a kind 純粋な情熱と深い敬意であった。A1のセレクターであり、DJでもあるジャレッ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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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6
REVIEW
정경담

게슈탈트와 멈추지 않는 여정: DMZ 국제다멘큐터리 영제화 상영작

김보용, ‹반도투어›, 2020, DCP, 컬러/흑백, 29분

여러분은 지금 흔히 우리가 캠릿브지 효과, 또는 게탈슈트 붕괴 이론이고라 부느른 형태의 문장을들 보있고다. 서두가 왜 이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을도 모겠르다. 어쨌든 요지는, 인간의 두뇌가 개별 글자의 조합들이 아닌 단어 단위, 혹은 어구 단위를 전체로 인하식고 있기 때문에 내가 문장을들 이렇게 엉진망창의 순서로 배해치도 대적략으로 무슨 뜻인지 충분게하 알아을들 수 있다는 것이다.


혹은, 우리는 이런 문장을 공연히 발음하며 혀뿌리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검토한다. 


함께 점심식사로 챱스테이크를 먹고 카우치에 앉은 챠프포프킨과 치스챠코프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토의 선율이 흐르는 영화 파워트 웨이트를 보며 파워에이드와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과 포테이토 칩과 파파야 등을 포식하였고, 조씨네 커피집으로 걸어가며 건넛마을 타르코프스키댁 편집실 시렁 위에 얹힌 푸른 청청 조좁쌀이 슬은 푸른 청청 조좁쌀인지 안 슬은 푸른 청청 조좁쌀인지 토론하였다.


그러고 나면 으레 좁쌀이나 타르코프스키 같은 익숙한 글자들을 보며 전에 없이 내외를 하게 된다. 익히 아시다시피, 이것은 흔히 ‘게슈탈트 붕괴 이론’의 사례라고 회자되는 유의 것들이다. 그 이전에 게슈탈트란 당최 무엇인가? 게슈탈트 심리학은 ‘전체로서의 형태’를 일컫는 독일어인 게슈탈트(Gestalt)를 차용한 학명으로, 인간이 어떤 대상을 인지할 때 각 부분의 조합보다는 전체로서의 형태와 모양을 통해 인식하는 존재임을 전제하는 것이다. 같은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거나 어구를 이루는 문자들의 배열이 엉망진창일 때 우리는 ‘게슈탈트’가 붕괴되었다고 장난처럼 말하게 됐다. 언제부터 통용의 수준에 이르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에 한정해서는 그 시점을 선명히 기억할 수 있다. 내가 고3이었을 때였다. 야간자율학습을 하던 학교 도서관 열람실 맨 뒤에 나무로 된 가벽이 있었다. 아무도 그 가벽의 존재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그 위에 얼기설기 테이프를 발라서 A4용지 3분의 1 정도 되는 크기의 종이를 붙여둔 게 보였다. 어림잡아 열 명도 넘는 아이들이 그것을 보면서 웅성대고 있었다. 거기에 쓰여있었던 말도 안 되는 문장이 바로 내가 첫머리에 아무렇게나 쓴 것의 원본이었다. 나와 내 친구들은 그날 이후 게슈탈트 붕괴와 캠브릿지 효과라는 말을 오남용하며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곤 했다. 


게슈탈트 붕괴는 일반적으로 어떤 대상에 과도하게 집중했을 때 전체성에 대해 잠깐 잊어버리고 개별적인 부분에 천착하면서 낯선 감각을 느끼게 되는 것을 말한다. 가끔 우리는 걷는 방법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평생 인식을 거치지 않고 걸어오던 나의 다리를 의심하거나, 숨쉬는 것에 집중하다가 숨쉬는 방법을 잊어버리거나, 평소에 혀를 입의 어느 위치에 두곤 했는지 혼돈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런 것들도 넓게 보면 같은 종류의 작동 오류겠다. (그러나 게슈탈트 붕괴 이론은 실재하는 이론은 아니고, 일본의 서브컬쳐를 통해 퍼지기 시작한 모종의 밈 같은 것이다. 하지만 밈의 스케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 그것은 뉴노멀이 되지 않던가? 2013년 MBC ‹아빠 어디가›의 방영 이후 ‘1도 모른다’는 외계어가 유사 표준어로 자리잡게 되는 데까지는 채 반 년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게슈탈트 붕괴 현상이 정말 모든 것을 붕괴시키는 것은 아니다. 붕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우리를 빈사상태에 빠뜨렸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숨쉬는 법을 까먹었다고 호들갑을 떤 뒤에도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호흡하듯이. 발에 가해지는 달의 인력을 별안간 깨달았다고 생각하지만 이내 가벼운 걸음으로 점심 메뉴를 고민하듯이.

김보용, ‹반도투어›, 2020, DCP, 컬러/흑백, 29분

“중력은 우리의 일상과 정신 모두를 지배한다. 중력은 신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미디어였을 것이다 .적어도 과거에는 말이다. 현대의 기술은 우리를 중력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킨다. 이제 우린 중력으로부터 자유롭게 이동하고 관계맺는다. 우리는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위대한 자연의 힘으로부터도.” (‹반도투어› 중에서)


이 내레이션은 중요할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력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 발화되고, 이후 다시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럼 작가는 왜 굳이 서두에 중력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질 미래의 관계에 대한 비전을 내비친 것일까? 나는 그것이 ‹반도투어›의 형식에 대한 암시라고 생각한다.


‹반도투어›는 서울에서 출발하여 중국 대륙의 단둥까지 이어진 육로, ‘아시안 하이웨이’를 학습한 화자의 여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작업에서, 화자는 세 가지 경로의 여정을 동시에 출발시킨다. 첫 번째 여정은 ‘구글 어스(Google Earth)’를 통한 여정이다. 이 경로에는 종종 붉은 색으로 빗금 쳐진 비공개 구역이 등장하긴 하지만 길을 멈추지는 않는다. 서울부터 파주를 거쳐 개성공단을 지나며 끊임없이 달리고 결국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다. 두 번째 여정은 아시안 하이웨이를 따라 실제로 북한을 여행했던 ‘플로리안 자이델’이라는 이름의 구글 유저가 찍은 사진을 겹쳐보며 파편적이지만 연속적으로 경험하는 관념적 여정이다. 화자는 플로리안 자이델에게 메일을 보내고 그를 만난다. 자이델은 자신이 서독 출신이며, 열두 살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와의 만남 이후 화자는 실제로 직접 자동차를 운전해 아시안 하이웨이를 달리는 세 번째 여정을 결심한다. 이는 순식간에 중단된다. 남북출입국사무소라는 장애물 앞에서 진행 불능의 상태에 놓였기 때문이다. 화자는 휴전선 이전의 마지막 기차역인 도라산역에서, 통일의 희망이라는 명분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베를린 장벽 조각을 만난다. 화자가 조각난 장벽 앞에서 고심하는 동안, 구글 어스로 출발한 여정은 이미 평양-개성 고속도로를 통과해 내달리고 있다. (이 여정은 누구에 의해 운전되고 있는가? 그건 아무도 모른다.) 화자는 남측 한계선에 가로막혀 평양과 개성을 지나지는 못했지만 물리적 여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중국 단둥으로 간다.

김보용, ‹반도투어›, 2020, DCP, 컬러/흑백, 29분

구글 어스의 세계는 안전하지 않다. 재난이나 재해, 테러와 범죄의 위험에 놓여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가능성들은 0에 수렴한다. 대신 더 큰 문제가 있다. 이 세계가 언제나 덧씌워질 목소리에 새롭게 혹은 사실과 다르게 재구성되고 재해석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세계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은 세계 속의 동물과 환경과 건물들 역시 안전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구글 어스의 세계에 인간은 없다. 동물도 없다. GPS에 기반한, 이미 너무 많이 축척된 세계인 탓이다. GPS는 세계의 총합을 단편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게슈탈트 붕괴 장치이거나, 역으로 개별의 사유를 강제 통합시키는 게슈타포 게슈탈트 장치다. 


그러니까 GPS라는 것은, 나의 위치와 좌표를 나 스스로가 인지 가능한 어포던스를 기준 삼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별)의 외부에 있는 인공위성과의 교신을 통해서 나를 위치 짓는 시스템이 아닌가. GPS 시스템 속에서 우리의 행위 기준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제3의 시선에 귀속된다. 다시 말해 중력에게서 벗어난 시선에 귀속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완전히 외부자가 된다. 이것은 VR이 경험케 하는 세계와 완전히 대척하는 동시에 매우 비슷하다.


전통적 영화의 스크린이 시각장의 특정 부분만을 사용하여 미메시스를 공유하는 경험이라면 VR 시네마는 이를 신체장으로 확장시켜 몰입감과 현존감을 보다 더 강화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눈코입과 가죽으로만 구성되었다는 기묘한 주장에 다름없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이 직립하고 걸어다닐 수 있는 것은 내장기관과 척추뼈가 중력에 의해 고정된 위치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VR을 통해 내장기관의 위치와 눈높이 같은 것들이 무한히 가변하는 환경 속에 지각장을 주입하였을 때, 시청각, 촉각, 통각 등의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감각들은 결합할 수 없게 된다.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HMD)가 제공하는 이음매 없는 시각적 파노라마는 결국 신체기준좌표와 마주치면서 재해석되기 때문에 온전히 수용될 수 없다는 한계를 갖는다.


J.J. 깁슨은 『시지각에 대한 생태학적 접근』 에서 “눈 가까이에 있는 구멍을 통해 정보를 ‘엿보도록 하는’ 행위”들이 표면의 정보를 최소화하고 현실의 환상을 강화하면서 리얼함을 증폭시키려는 시도이지만 오히려 지각의 행위를 복잡하게 만든다고 설명한다. 물론 책이 쓰여진 시기가 1970년대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여기에 묘사된 시도는 VR과 같은 첨단기술이라기보다는 키네토스코프나 만화경 같은 과거의 장치들이겠으나, 깁슨의 관점에서 VR이 최소한의 의의를 갖기 위해서는 수용자가 HMD를 착용한 바로 그 순간부터 이미 스스로의 정보값과 위치값을 가진 벡터여야만 한다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을 것이다. 벡터라는 것은 좌표와 달리 미래를 내포한다. 좌표는 현재 내가 내딛고 있는 위도와 경도, x축과 y축에 대한 순간적 리포트다. 나를 좌표화하기 위해서 위성은 가상의 불변구조를 만들고 그 그리드 위에 나를 표시한다. 이때 내가 갖는 좌표값은 나에 대한 일시적 사료다.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는 축에 함께 기록되지 않으며, 나는 위치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벡터는 내가 어떤 쪽으로 몸을 틀고 있는지, 어떤 곳을 바라보고 어떤 각도에 얼굴의 정면을 위치시키고 있는지, 어떤 동세로 바람을 가르고 있는지에 대한 힌트와 향방에 대한 정보값을 제공한다. 그래서 HMD를 착용한 순간부터 벡터여야 한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중력에 영향받는 내장기관을 통해 HMD가 제공하는 환각을 운용하겠다는 결의를 가진 인간이어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GPS는? 나의 존재 의의를 좌표로서만 증명할 수 있는 무력한 장소다.


‹반도투어›는 무력하지만 ‘중단 없이 끝까지 갈 수 있는’ 구글 어스의 여정 위에, 끊임없는 중단에 시달리는 화자의 파편적 여정을 계속해서 덧댄다. 그리고 마침내 아시안 하이웨이의 끝, 단둥에 도착한다. 물리적 화자의 여정에는 남북출입국사무소와 단둥 사이의 경로가 통째로 삭제되어 있다. 그러나 구글 어스를 통해서, 그리고 자이델의 사진들, 그와의 문자메시지, 세계 곳곳에 뜬금없이 보관되어 있는 베를린 장벽 조각들을 통해서 그 회색지대는 꽤나 성공적으로 감각된다. 화자가 단파 방송을 통해 “지구라는 하나의 물리적인 스케일을 상상”하곤 했던 것처럼.


그러니까 사실 ‹반도투어›는 숨쉬는 법에 대해 인식하고 고민할 거리를 던져주는 셈이다. 어디까지나 게슈탈트 붕괴는 일시적인 해리현상일 뿐이고, 우리는 이내 다시 전체가 부분의 합임을 잊는다. 균열과 정지는 가능한 새로운 세계로 접속하는 데 쓰여야만 한다. 그 새로움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간에. ‹반도투어›의 러닝타임 8분 남짓 동안, 그리고 상영관을 빠져나오는 좁은 복도에서의 시간 동안 나는 세계를 조각보로 인식하고 낯선 감각을 체험하는 잠깐의 휴지기를 얻은 셈이다. 이후의 세상은 조금 다를 것이다. 직조된 태피스트리의 뒷면을, 세계의 솔기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관과 갤러리에 GPS가 범람하고 있으니, 이는 결국 혼돈을 야기할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이 든다. 시대의 흐름일까? 더 많은 비판적 해체를 위하여? 파룬 하로키… 아, 아니 하룬 파로키가 그랬어….

김보용, ‹반도투어›, 2020, DCP, 컬러/흑백, 29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