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지금 흔히 우리가 캠릿브지 효과, 또는 게탈슈트 붕괴 이론이고라 부느른 형태의 문장을들 보있고다. 서두가 왜 이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을도 모겠르다. 어쨌든 요지는, 인간의 두뇌가 개별 글자의 조합들이 아닌 단어 단위, 혹은 어구 단위를 전체로 인하식고 있기 때문에 내가 문장을들 이렇게 엉진망창의 순서로 배해치도 대적략으로 무슨 뜻인지 충분게하 알아을들 수 있다는 것이다.
혹은, 우리는 이런 문장을 공연히 발음하며 혀뿌리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검토한다.
함께 점심식사로 챱스테이크를 먹고 카우치에 앉은 챠프포프킨과 치스챠코프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토의 선율이 흐르는 영화 파워트 웨이트를 보며 파워에이드와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과 포테이토 칩과 파파야 등을 포식하였고, 조씨네 커피집으로 걸어가며 건넛마을 타르코프스키댁 편집실 시렁 위에 얹힌 푸른 청청 조좁쌀이 슬은 푸른 청청 조좁쌀인지 안 슬은 푸른 청청 조좁쌀인지 토론하였다.
그러고 나면 으레 좁쌀이나 타르코프스키 같은 익숙한 글자들을 보며 전에 없이 내외를 하게 된다. 익히 아시다시피, 이것은 흔히 ‘게슈탈트 붕괴 이론’의 사례라고 회자되는 유의 것들이다. 그 이전에 게슈탈트란 당최 무엇인가? 게슈탈트 심리학은 ‘전체로서의 형태’를 일컫는 독일어인 게슈탈트(Gestalt)를 차용한 학명으로, 인간이 어떤 대상을 인지할 때 각 부분의 조합보다는 전체로서의 형태와 모양을 통해 인식하는 존재임을 전제하는 것이다. 같은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거나 어구를 이루는 문자들의 배열이 엉망진창일 때 우리는 ‘게슈탈트’가 붕괴되었다고 장난처럼 말하게 됐다. 언제부터 통용의 수준에 이르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에 한정해서는 그 시점을 선명히 기억할 수 있다. 내가 고3이었을 때였다. 야간자율학습을 하던 학교 도서관 열람실 맨 뒤에 나무로 된 가벽이 있었다. 아무도 그 가벽의 존재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그 위에 얼기설기 테이프를 발라서 A4용지 3분의 1 정도 되는 크기의 종이를 붙여둔 게 보였다. 어림잡아 열 명도 넘는 아이들이 그것을 보면서 웅성대고 있었다. 거기에 쓰여있었던 말도 안 되는 문장이 바로 내가 첫머리에 아무렇게나 쓴 것의 원본이었다. 나와 내 친구들은 그날 이후 게슈탈트 붕괴와 캠브릿지 효과라는 말을 오남용하며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곤 했다.
게슈탈트 붕괴는 일반적으로 어떤 대상에 과도하게 집중했을 때 전체성에 대해 잠깐 잊어버리고 개별적인 부분에 천착하면서 낯선 감각을 느끼게 되는 것을 말한다. 가끔 우리는 걷는 방법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평생 인식을 거치지 않고 걸어오던 나의 다리를 의심하거나, 숨쉬는 것에 집중하다가 숨쉬는 방법을 잊어버리거나, 평소에 혀를 입의 어느 위치에 두곤 했는지 혼돈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런 것들도 넓게 보면 같은 종류의 작동 오류겠다. (그러나 게슈탈트 붕괴 이론은 실재하는 이론은 아니고, 일본의 서브컬쳐를 통해 퍼지기 시작한 모종의 밈 같은 것이다. 하지만 밈의 스케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 그것은 뉴노멀이 되지 않던가? 2013년 MBC ‹아빠 어디가›의 방영 이후 ‘1도 모른다’는 외계어가 유사 표준어로 자리잡게 되는 데까지는 채 반 년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게슈탈트 붕괴 현상이 정말 모든 것을 붕괴시키는 것은 아니다. 붕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우리를 빈사상태에 빠뜨렸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숨쉬는 법을 까먹었다고 호들갑을 떤 뒤에도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호흡하듯이. 발에 가해지는 달의 인력을 별안간 깨달았다고 생각하지만 이내 가벼운 걸음으로 점심 메뉴를 고민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