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적 세계관과 다른 SM 엔터테인먼트 아이돌 세계관의 차이점이 있다면ㅡ이전에도 SM적 아이돌 세계관은 낭만과 판타지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ㅡ, 에스파적 세계관이 AI 세계관이 적용된 설정이 가진 진지한 무게에 비해 캐릭터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Black Mamba›에서 3D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대표되는 가상 세계의 자아 아이(æ)는, 거울에 비친 에스파(Aespa)의 모습에 반전되어 나타날 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뒤이어 2021년 5월에 발표된 ‹Next Level›에서 도시를 등지고 서있는 에스파의 모습은 이따금 그들을 대변하는 아이의 자아로 완전히 치환되며, 가장 최근에 발표한 곡 ‹Savage›에서야 비로소 전체 멤버라고 할 수 있는 네 명의 에스파와 네 명의 아이가 동시에 같은 무대에 나와 춤을 춘다. 일련의 이미지들은 아이라는 가상 세계 속 자아가 거울 속 환상 혹은 욕망을 의미하는 사용자의 무의식이기도 하고, 에반게리온처럼 두 개의 구성체가 서로에게 탑승하고 있음을 암시하거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아바타이자 독립적인 자아를 지녔지만 여전히 현실의 ‘나’에게 귀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디지몬 시리즈 속 세계관과 같은 인간적 자아와 동반자적 자아의 분리로 읽히기도 한다. 이처럼 아이의 정체성이나 출현 조건은 현실 세계의 에스파에 비해 매우 비정형적이거나 심지어 무정형적으로 비춰지는데, 뮤직비디오 상에서 세계관의 디테일에 대해 포착할 수 있는 정보 자체가 그리 많지 않다. SM 엔터테인먼트 아이돌이 활동에 따라 새로운 컨셉을 들고 나올 때 일부러 안무를 보여주는 씬을 최소화하고 괜찮은 시네마틱 뮤직비디오를 만들기도 했던 사례들을 돌이켜보면, 모든 기표들에 관한 해석을 소비자의 상상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에스파적 세계관은 지나치게 뻔뻔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더불어 가사에서는 세계관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내용을 가늠할 수 있는 ‘광야(Kwangya)’, ‘싱크(Synk)’, ‘P.O.S’ 등의 단어들이 적극적으로 사용되며, 이는 기존에 코드화되는 경향이 심했던 케이팝의 가사에 더해 SM 엔터테인먼트식 백과사전을 만들어 해당 의미를 독점하고자 하는 의지로 나타난다. 주어진 실마리를 통해 세계관에 관한 다양한 추측이 쏟아져 나오는 양상은 한편으로, 이전의 사례(엑소EXO의 초능력과 엔시티NCT의 꿈의 동기화 등)에서 포착할 수 있듯이 SM 엔터테인먼트 아이돌의 세계관이 치밀하게 짜여져 있기보다는 해석을 위한 해석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기획되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AI는 아직 발명된 적 없는 공학적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도래한 듯한’ 미래 사회를 그리는 데 탁월한 소재이며, 무한, 확장, 무정형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세계관을 그려내거나 AI 컨셉을 적용한 아이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장르적인 새로움을 표현하는 방식이 그만큼 진부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융복합, 창조, 4차 산업이 정치권에서 대대적인 슬로건이 되었던 것처럼, 아이돌 세계관 속에서 무한한 가치에 대해 말하는 경향은 미래 대체상품의 캐치 프라이즈나 선거 유세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냉정하게 말해서, 이제는 열린 해석과 난해함을 마케팅 전략으로 삼는 아이돌 이미지를 붙잡고 그럴듯한 이미지 비평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것보다는, 케이팝 산업과 팬덤이 서로에게 어떤 방식으로 기생하고 있는지, 아이돌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어떻게 사변적인 기획 의도를 집단적인 주술로 승화하고 있는지 파헤쳐보는 것이 관건이 아닐까 싶다.
에스파를 독립된 개체로 읽을 수 있다면, 기존의 케이팝 아이돌 서사들이 팬덤과 맺는 관계처럼 일종의 전복적인 확장을 기대해볼 수도 있다. 문화적 자본이 가진 서브컬쳐적 영향력이란, 대중들에게 우상을 통해 그 바깥을 상상하게 하면서 또 다른 이야기에 대한 가능성을 생산하는 역할을 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앞서 에스파적 세계관이 가진 지나치게 열린 해석의 여지를 지적했지만, 동시에 AI 세계관이 적용된 아이돌 서사는 오히려 다양한 상상력에 제약을 건다. 21년 AI 챗봇 ‘이루다’를 향한 성희롱과 혐오 발언으로 서비스가 조기 종료되고, 포르노 영상에 케이팝 아이돌의 얼굴을 덧씌운 딥페이크 기술이 전문 사이트에서 거래되는 등 인공지능 기술을 피상적으로 재현한 사례들이 윤리적 장치의 부재로 인해 남용되고 있는 현실에서,“날 밀어 넣어, deep fake on me (Aespa ‹Savage›)”를 무대 위에서 되뇌이는 아이돌을 감상하는 데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기란 힘든 일이다. 언뜻 스스로를 향한 조소로 보이는 몸짓들은 에스파를 독립될 수 없는 개체, ‘SM의 본질’로 읽어낼 수 밖에 없는 환경적 제약 속에서 공허한 메아리처럼 되풀이된다.
SMCU(SM Culture Universe)를 설명하기 위해 제작한 에스파 세계관 에피소드 ‹aespa 에스파 ‘ep1. Black Mamba’›에서 주인공은 사르트르의 유명한 명제를 곱씹는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아이돌 세계관에서 과연 실존은 무엇이고 본질은 무엇인가? 사회적인 제약에 따라 다르게 구성될 수 있는 실존에 대해 말하고자 하지만, 실존하고자 하는 정체성이 자유의지가 아니라 회사에 종속된 것이라면? 실존하기 위한 선택의 과정이 누락된 AI 아이돌 세계관의 일방적인 기획구도는 한없이 무기력한 실존의 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는 가짜다.” 라고 자백하는 행위가 아티스트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아이돌 엔터테인먼트의 이념을 반영한 자기 최면으로 발화될 때, 그 정체성은 어떤 것보다도 기만적인 표상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