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6
CRITIQUE
조랭

에스파(æspa)에 관한 것은 아닌: 에스파(Aespa)는 나야, 둘이 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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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6
CRITIQUE
조랭

에스파(æspa)에 관한 것은 아닌: 에스파(Aespa)는 나야, 둘이 될 수 없어

잠시 과거부터 이어진,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자아를 그려낸 시리즈물 속 세계관을 떠올려보자. 가상 세계로의 접속과 서로 다른 차원 간의 연결은 근미래 판타지와 SF 장르의 낯선 자아상을 제안하는 중요한 전략이 되어왔다. 예를 들어, AI 기반의 세계관과는 맥락을 조금 달리하지만 또 다른 자아-생명체와의 결합-접속에 관한 모티브로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들 수 있다. 초창기에는 일본 로봇 애니메이션 배틀물의 계보를 잇는 것처럼 보였지만, ‹에반게리온›은 회를 거듭할수록 난해한 세계관과 독특한 연출 방식으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주인공 파일럿들이 탑승할 수 있는 전투 병기를 일컫는 에반게리온은 인간이 처음부터 끝까지 제작한 인조로봇이 아닌 인간형 생체병기로서, 파일럿이 영혼에 해당하는 부분을 담당하고 에반게리온이 육체를 맡아 연결되면 두 개체 간의 싱크로율을 토대로 전투력이 측정되고, 그에 따라 구동이 가능하다는 설정이다. 이곳에서 에반게리온은 외계 생명체의 에너지를 지닌 미지의 육체에 가까웠고, 구체성을 지닌 아바타의 개념은 사용자가 기체로 보이는 물성 안에 탑승을 하는 형태로 이미지화되었다.

90년대 후반 포켓몬스터 게임이 인기를 얻은 이후 포켓몬스터 TV 애니메이션이 시리즈로 방영 되며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을 때,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몬스터 중심 세계관의 쟁쟁한 대항마로 디지몬 시리즈가 있었다. 닌텐도 사의 휴대용 콘솔 게임 보이(Game Boy)용으로 제작된 포켓몬스터의 방향성과 달리, 디지몬은 다마고치의 형태로 처음 출시된 이후 애니메이션과 카드 게임 등으로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세계관에 있어서 두 몬스터들은 확실한 차별점을 보였다. 포켓몬이 현실에서의 펫과 주인의 관계를 확장시킨 세계관, 즉 동물의 자리를 대체한 몬스터와 인간 간의 유대감을 보여주고 훈련과 체육관 시스템을 통해 성장하는 스토리를 기반으로 했다면, 디지몬은 현실과 디지털 월드를 가로질러 여행하는 인간 주인공들과 디지털 데이터의 부산물이 구체화된 디지몬이 함께 모험을 해나가는 컨셉을 내세웠다. 판매부수와 시리즈 제작 현황을 보면 오늘날 포켓몬이 당당하게 밀리언 셀러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포켓몬과 디지몬 세계관에 이입하는 팬덤의 성격은 그들이 가진 장르적 차이만큼이나 달랐던 것 같다. 그러나 가상의 몬스터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시리즈물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온 이후에도, 개인적으로 눈길을 끌었던 디지몬 세계관의 매력은 전뇌 네트워크 상에서 존재하는 디지털 몬스터가 현실 세계에서 단 한 명의 선택된 파트너를 가진다는 점과, 디지몬이 테이머(디지몬 시리즈에서는 디지몬과 파트너를 맺는 인간에게 테이머Tamer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의 자아상태에 지나치게 동화되어 시너지를 일으키는 특정한 순간에 진화를 하거나 심지어 퇴화하기도 하는, 감정적인 연결을 담보로 한 생명체라는 사실이었다.


아이돌 그룹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왠 에반게리온과 디지몬 타령인가 싶겠지만, 두 시리즈는 앞으로 서술할 에스파 세계관에서 설정된 악에 대항하기 위해 주인공들에게 요구되는 수행적 태도와 어느정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 2020년 11월 전염병 바이러스의 유행과 락다운으로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을 무렵, SM 엔터테인먼트에서 몇 년만의 신인 걸그룹을 AI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차용해 선보일 예정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가상세계의 또 다른 ‘나’ 아이(æ)와 현실의 ‘나’ 에스파(æspa)를 합쳐 8명의 멤버로 이루어진 아이돌 그룹 에스파의 구성을 듣고 연이어 그들의 데뷔곡 ‹Black Mamba›의 뮤직비디오를 감상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사이버펑크(Cyberpunk), 근미래 디스토피안적인 공간을 연출하는 데 자주 차용되는 네온 빛깔의 색 배합과 특수 효과로 이루어진 무대 위에 네 명의 에스파 멤버들이 등장한다. 배경에는 선악을 상징하는 과실이 매달린 나무들, 모스크바 지하철을 배경으로 한 뉴클리어 아포칼립스 소설 ‹메트로 2033›의 묘사처럼 오랜 시간 방치하여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난 지하철 내부의 모습을 병치해서 보여 준다. 악의 존재는 블랙 맘바(Black Mamba)라는 거대한 뱀의 형상으로 나타나 에스파가 살아가는 세계를 가로지르지만, 영상의 말미에 등장하는 데이터 화면과 인스타그램의 ‘좋아요’를 연상시키는 대중의 반응을 흡수하여 구성된 그로테스크한 생명체는 인간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다시 디지몬 시리즈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태어나는 시점에서는 현실에서 상상할 수 있는 동물의 혼합체에 가까운 디지몬의 모습이 최종 진화 단계에 이르러서 대부분 인간형이 되고, 사이보그 같은 메탈 소재를 몸에 두르는 패턴이다. 그 패턴 안에는, 단순히 크리쳐 디자인 이상으로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적인 것 혹은 인간의 형태는 선함의 영역으로 전제되는 경향이 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욕망이 가진 불합리하고 비정형적인 모순을 드러내기 위해서 결국 괴수나 돌연변이와 같은 알 수 없는 타자(Other)가 가진 정체성은 다시 인간-다움에 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또 다른 자아와 결합되거나 가상세계와 연결된 주인공에게 주어진 과제는 세계관 내부의 절대 악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다. 히어로 vs 악의 구도를 가진 대부분의 시리즈물이 그렇듯이, 피상적으로 설정된 적을 추적하거나 처치하고 난 이후의 스토리는 그 행위의 정당성을 자문하는 인간 주인공들의 자아 성찰 단계에 맞닿는다. 그리고 성찰의 결실은 종교적인 선악논리가 아닌, 어느 쪽으로도 기울 수 있는 유동성과 불안정성을 내재한 ‘무언가’로 남는다.

‹디지몬 어드벤처›, 1999, 스틸컷

에스파적 세계관과 다른 SM 엔터테인먼트 아이돌 세계관의 차이점이 있다면ㅡ이전에도 SM적 아이돌 세계관은 낭만과 판타지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ㅡ, 에스파적 세계관이 AI 세계관이 적용된 설정이 가진 진지한 무게에 비해 캐릭터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Black Mamba›에서 3D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대표되는 가상 세계의 자아 아이(æ)는, 거울에 비친 에스파(Aespa)의 모습에 반전되어 나타날 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뒤이어 2021년 5월에 발표된 ‹Next Level›에서 도시를 등지고 서있는 에스파의 모습은 이따금 그들을 대변하는 아이의 자아로 완전히 치환되며, 가장 최근에 발표한 곡 ‹Savage›에서야 비로소 전체 멤버라고 할 수 있는 네 명의 에스파와 네 명의 아이가 동시에 같은 무대에 나와 춤을 춘다. 일련의 이미지들은 아이라는 가상 세계 속 자아가 거울 속 환상 혹은 욕망을 의미하는 사용자의 무의식이기도 하고, 에반게리온처럼 두 개의 구성체가 서로에게 탑승하고 있음을 암시하거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아바타이자 독립적인 자아를 지녔지만 여전히 현실의 ‘나’에게 귀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디지몬 시리즈 속 세계관과 같은 인간적 자아와 동반자적 자아의 분리로 읽히기도 한다. 이처럼 아이의 정체성이나 출현 조건은 현실 세계의 에스파에 비해 매우 비정형적이거나 심지어 무정형적으로 비춰지는데, 뮤직비디오 상에서 세계관의 디테일에 대해 포착할 수 있는 정보 자체가 그리 많지 않다. SM 엔터테인먼트 아이돌이 활동에 따라 새로운 컨셉을 들고 나올 때 일부러 안무를 보여주는 씬을 최소화하고 괜찮은 시네마틱 뮤직비디오를 만들기도 했던 사례들을 돌이켜보면, 모든 기표들에 관한 해석을 소비자의 상상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에스파적 세계관은 지나치게 뻔뻔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더불어 가사에서는 세계관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내용을 가늠할 수 있는 ‘광야(Kwangya)’, ‘싱크(Synk)’, ‘P.O.S’ 등의 단어들이 적극적으로 사용되며, 이는 기존에 코드화되는 경향이 심했던 케이팝의 가사에 더해 SM 엔터테인먼트식 백과사전을 만들어 해당 의미를 독점하고자 하는 의지로 나타난다. 주어진 실마리를 통해 세계관에 관한 다양한 추측이 쏟아져 나오는 양상은 한편으로, 이전의 사례(엑소EXO의 초능력과 엔시티NCT의 꿈의 동기화 등)에서 포착할 수 있듯이 SM 엔터테인먼트 아이돌의 세계관이 치밀하게 짜여져 있기보다는 해석을 위한 해석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기획되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AI는 아직 발명된 적 없는 공학적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도래한 듯한’ 미래 사회를 그리는 데 탁월한 소재이며, 무한, 확장, 무정형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세계관을 그려내거나 AI 컨셉을 적용한 아이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장르적인 새로움을 표현하는 방식이 그만큼 진부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융복합, 창조, 4차 산업이 정치권에서 대대적인 슬로건이 되었던 것처럼, 아이돌 세계관 속에서 무한한 가치에 대해 말하는 경향은 미래 대체상품의 캐치 프라이즈나 선거 유세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냉정하게 말해서, 이제는 열린 해석과 난해함을 마케팅 전략으로 삼는 아이돌 이미지를 붙잡고 그럴듯한 이미지 비평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것보다는, 케이팝 산업과 팬덤이 서로에게 어떤 방식으로 기생하고 있는지, 아이돌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어떻게 사변적인 기획 의도를 집단적인 주술로 승화하고 있는지 파헤쳐보는 것이 관건이 아닐까 싶다.


에스파를 독립된 개체로 읽을 수 있다면, 기존의 케이팝 아이돌 서사들이 팬덤과 맺는 관계처럼 일종의 전복적인 확장을 기대해볼 수도 있다. 문화적 자본이 가진 서브컬쳐적 영향력이란, 대중들에게 우상을 통해 그 바깥을 상상하게 하면서 또 다른 이야기에 대한 가능성을 생산하는 역할을 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앞서 에스파적 세계관이 가진 지나치게 열린 해석의 여지를 지적했지만, 동시에 AI 세계관이 적용된 아이돌 서사는 오히려 다양한 상상력에 제약을 건다. 21년 AI 챗봇 ‘이루다’를 향한 성희롱과 혐오 발언으로 서비스가 조기 종료되고, 포르노 영상에 케이팝 아이돌의 얼굴을 덧씌운 딥페이크 기술이 전문 사이트에서 거래되는 등 인공지능 기술을 피상적으로 재현한 사례들이 윤리적 장치의 부재로 인해 남용되고 있는 현실에서,“날 밀어 넣어, deep fake on me (Aespa ‹Savage›)”를 무대 위에서 되뇌이는 아이돌을 감상하는 데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기란 힘든 일이다. 언뜻 스스로를 향한 조소로 보이는 몸짓들은 에스파를 독립될 수 없는 개체, ‘SM의 본질’로 읽어낼 수 밖에 없는 환경적 제약 속에서 공허한 메아리처럼 되풀이된다.


SMCU(SM Culture Universe)를 설명하기 위해 제작한 에스파 세계관 에피소드 ‹aespa 에스파 ‘ep1. Black Mamba’›에서 주인공은 사르트르의 유명한 명제를 곱씹는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아이돌 세계관에서 과연 실존은 무엇이고 본질은 무엇인가? 사회적인 제약에 따라 다르게 구성될 수 있는 실존에 대해 말하고자 하지만, 실존하고자 하는 정체성이 자유의지가 아니라 회사에 종속된 것이라면? 실존하기 위한 선택의 과정이 누락된 AI 아이돌 세계관의 일방적인 기획구도는 한없이 무기력한 실존의 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는 가짜다.” 라고 자백하는 행위가 아티스트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아이돌 엔터테인먼트의 이념을 반영한 자기 최면으로 발화될 때, 그 정체성은 어떤 것보다도 기만적인 표상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