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에 등장하는 넷플릭스 스페셜 쇼의 한국어 제목은 따로 있으나, 원제의 의미와 지나치게 어긋난다는 판단하에 필자가 임의로 번역한 제목을 원제와 병기한다.
2013년 공개된 보 번햄의 첫 번째 넷플릭스 스페셜 ‹뭐. what.›는 유튜브와 넷플릭스에 동시 공개되었다. 이 스페셜은 여전히 그의 유튜브 채널에서 볼 수 있다. 이는 번햄 본인이 내린 결정으로, 그의 커리어가 유튜브에서 시작했기에 이전부터 그를 지켜봐 주던 사람들에게 먼저, 무료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픽셀이 다 보이는 화질의 영상 속 열 대여섯 살의 보 번햄은 키보드나 기타를 연주하며 빠른 속도로 노래한다. 노래인지 랩인지, 더러운 농담이 섞인 재치 있는 코미디 노래를 부른다. 이런 영상이 소위 대박을 터트리면서 번햄은 유튜버라고 불리기에도 무색하게 바로 주류 코미디 세계에 입성하게 되었다. 사실 초창기만 보자면 엄청나게 특별할 것은 없다. 미국/영국 드라마 ‹오피스›(2005-2013)의 영향을 받은, 지극히 백인 남성다운 개그를 쳤으며, 그렇기에 안전했다.
하지만 그의 특유의 카리스마나 위트를 보면 그가 ‘타고났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요약하자면 유튜브에 영상을 올린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방년 22살의 나이에 넷플릭스 단독 쇼를 제작하게 된 것이다. 이런 그의 ‘천재성’은 이미 많은 이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해왔으며, 심지어 나 또한 몇 년 전 대학생 잡지 지면의 구석을 차지한 쪼그마한 글 토막에 어설프게나마 묘사했던 부분이다. 이번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응시력’이다. 보 번햄은 통찰력은 물론 응시력을 갖고 있다. 내가 감탄하게 되는 이 응시력이란 통찰력을 지탱한다. 그는 이 세상에서 느끼는 대립, 분열, 긴장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면서도 끝내 그것을 봉쇄하거나 타협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한쪽으로 수렴하게 되는 유혹을 떨치고 대립, 분열, 긴장을 있는 그대로 보고, 우리에게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대립, 분열, 긴장은 어디서 오는가? 번햄의 첫 번째 넷플릭스 쇼 ‹뭐.›에서는 자아의 분열이 발견된다. 쇼의 초반부터 제2 캐릭터로 등장하는 내레이션의 조롱적 대사에서도 나타나고, 중간에 등장하는 노래 ‘좌뇌 우뇌 Left Brain Right Brain’에서는 두 자아의 대립이 가장 노골적으로 발견된다. 이 분열과 대립이 조성하는 긴장은 마지막 노래 ‘우리는 널 안다고 생각하지 We Think We Know You’에서 폭발한다. 그의 주변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던지는 말들에 괴로워하던 번햄이 자신의 예술에 집중하면서 주변 목소리를 잠재우고 도취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일단 이 쇼에서 번햄은 마임 mime, 그러니까 몸짓개그를 많이 했다는 것이다. 번햄은 쇼의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마지막 퍼포먼스에서 일렉트로닉 기타를 치는 듯한 몸짓을 한다. 몸짓개그라는 ‘펀치라인’을 에어기타라는 ‘퍼포먼스’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이제껏 코미디 기능을 하던 마임이라는 요소를 쇼의 가장 진지한 순간에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과감함이랄까, 카리스마에 반했던 것 같다.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당당함, 너무도 불안정한 감정을 날것의 상태로 수면 위에 끌어올리는 능력에 감탄했다. 내가 응시력이라고 부르는 이 힘, 이 능력을 번햄이 쓸 때면 늘 감탄사가 나오면서도 위태롭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번햄은 문자 그대로 뭔가를 끌어올리는 퍼포먼스를 끝으로 쇼를 폭파하면서 마무리하는 경향이 있어서 늘 탈진이나 소진의 인상을 주곤 한다.
번햄의 두 번째 쇼 ‹행복하기 Make Happy›(2016)에서는 그의 공연하고자 하는 자아와 공연하기를 요구하는 외부세계가 대립한다. 물론 번햄의 첫 번째 공연에서도 외부세계와 갈등하는 그의 욕망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뭐.›의 ‘슬프다 Sad’ 에서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안-웃기는지 unfunny, 그렇기에 농담이나 따먹고 있는 자신을 소시오패스로 묘사하는 자조가 노래의 펀치라인이다. 하지만 ‹뭐.›에서는 마지막 퍼포먼스에서 그것을 극복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긴장이 해소되는 반면, ‹행복하기›의 마지막 퍼포먼스에서는 이 긴장을 해소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여전히 번햄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언제 어디서든, 소비와 생산의 기형적 조합으로서 공연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무심하게 던지는 말과 달리 이에 대해서는 번햄 또한 별달리 손쓸 바가 없다. 더 최악인 것은 우리 모두 여전히 공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번햄은 이런 공연하고자 하는 욕구를 저주로 여긴다. 현재 미국에 사는 백인 남성으로서, 감히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농담이나 따먹으며 발언권을 남용하는 사치를 부릴 수 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연하고 싶고, 공연해야만 한다. 안 그러면 그는 미쳐버린다.
그런데 공연하지 못하는 세상, 관중을 앞에 두는 공연을 하지 못하는 세상이 진짜 도래해버렸다. 팬데믹으로 인해 모두가 ‘안’에 갇혀버리자 번햄은 미쳐버린다. ‹행복하기›에서 해소되지 않은 분열, 대립, 긴장은 가장 최근에 나온 코미디 스페셜 ‹인사이드 Inside›에서 계속된다. 2020년 미국 락다운을 기점으로 번햄이 홀로 자택에서 기획하고 완성한 이 스페셜은 모든 방면에서 그의 성장을 보여준다. 기술적인 완성도만큼이나 그의 고민 또한 깊어졌다. 미니애폴리스 경찰에 의한 시민 조지 플로이드 살인사건이 일어난 2020년 5월을 전후로 총기 규제, 구조화된 인종차별, 경찰 만행 등 미국 내 사회문제가 부각되면서 번햄의 내적 대립 또한 고조된다. ‹행복하기›에서 해소되지 않은 긴장은 그의 공연하고 싶은 마음과 공연하기를 명령하는 사회에 불복종하려는 마음에 기인한다. ‹인사이드›에서는 그와 같은 백인 헤테로 남성이 공연해서는 안 되는 사회를 배경으로 공연을 해야만 하는, 관객에게 자기 생각과 감정을 표출해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의 고뇌를 보여준다. “무감각은 비극이자 따분함은 범죄 […] apathy’s a tragedy and boredom is a crime”, “너는 세상이 망해가고 있다고 말하지. 자기야, 세상은 이미 끝났어 […] you say the whole world is ending; honey, it already did”, “씨발, 너는 이 시국에 농담이 나오냐 […] oh shit, you’re really joking at a time like this” 등의 가사는 그가 공연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세상을 스케치한다.
앞서 말했듯 번햄은 공연해야 살 수 있는 삶의 조건을 일종의 저주로 보고 있다. ‹행복하기›에서는 쇼 중간에 관객석의 불을 켜고 독백을 하는 등 이를 세대 공통적 저주로 바라보고자 한다면,
‹인사이드›에서는 본인의 개인적 저주로 보려는 듯하다. 그는 방에 혼자 갇혀, 관객 앞에서 공연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자신을 보며 당해도 싸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 노래에 해당하는 ‘다 나를 쳐다봐 All Eyes On Me’은 관객을 앞에 두고 있다는 환상이 광기로 치달으며 끝내 그의 외로움이 폭발한다. 이와 대조를 이루는 ‘안녕 Goodbye’은 이렇게 끝난다. ”쯧쯧, 또다시 안에 틀어박힌 네 꼴을 좀 봐라/ 숨기 위한 변명을 찾으러 나서더니 결국 찾아버렸네/ 이제 손들고 나와, 너는 포위되었으니. […] well, well, look who’s inside again/ went out to look for a reason to hide again/ well, well, buddy you found it/ now come out with your hands up, we’ve got you surrounded” 번햄은 자신을 문자 그대로 헐벗기고 끝까지 스스로 벌한다.‹인사이드›는 번햄이 마침내 집 밖으로 나가면서 끝난다. 하지만 밖에서 기다리는 것은 자유가 아닌, 여전히 공연하기를 명령하는 사회다. 안에 갇혀있을 때는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사람들의 웃음과 스포트라이트가 이제는 피할 수 없이 쏟아지는 총알 다발처럼 번햄을 공격한다. 보 번햄이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이다. 남들에게도 중요한 이야기로 시작하면서도 끝내 자신에게 특수한 문제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만의 특수한 문제를 ‘더 큰 이야기’, 즉 사회적 문제 뒤에 숨기지 않고 쇼의 가장 드라마틱한 지점에 자리를 내준다. 자신의 취약성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용감한 선택이다.
‹인사이드›는 절규하는 자신의 모습을 빔프로젝터로 감상하며 슬슬 웃는 번햄의 얼굴을 비추며 막을 내린다. 이 묘한 웃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번햄의 커리어 초반부터 중요한 주제로 다룬 분열, 대립, 긴장은 ‹인사이드›에서 최고조로 달하며 해소되기를, 혹은 해소해주기를 거부한다. 가능한 해석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자신의 비극에 진정히 웃을 줄 아는 코미디언의 모습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웃음이라도 있어야 새로운 스페셜을 기획할 힘이 날 테니까. 다른 하나는 끝나지 않는 자조이다. ‹행복하기› 중, 막간에 관객 한 명이 뭐라 크게 소리친다. 여기에 번햄은 “내가 공들여 작업한 거 지금 역사에 길이 남기려고 하니까 제발 닥쳐! I’m trying to immortalize something that I’ve worked on for a long time. Shut up!”라고 한다. 번햄이 겉으로는 밥 딜런 행세를 하면서 속셈은 이기적인 놈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이중적이다. 하지만 지금껏 예술가를 둘러싼 담론이 이런 다층적이고 어쩌면 어두운 면을 ‘천재적 예술가’, ‘자선적 예술가’ 등의 타이틀로 감추려 했다. 번햄은 이 타이틀 뒤에 숨기를 거부한다. 그는 정말 끝까지 ‘이 시국에 농담하려 하다니 너는 외로운 종말을 맞이하는 벌을 받아야 싸’라고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이야기하고, 이 세상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진정 해피엔딩을 찾을 수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