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6
REVIEW
이한범

잃어버린 그림자의 강: 모순과 진실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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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6
REVIEW
이한범

잃어버린 그림자의 강: 모순과 진실의 회복

나는 직물을 짜는 듯한 솔닛의 걷기를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일 테지만, 내가 이해하기론 솔닛에게 걷기와 글쓰기는 그렇게 다른 일이 아니다. 그에게 걷기와 글쓰기는 모두 시간을 들여 어떤 장소를 가로지르는 육체적인 행위이다. 장소를 방문하고 장소를 이해하는 일이며, 나아가 장소를 되찾는 일이다. 여기서 장소를 되찾는다는 것은 지도 위의 한 영역을 경계 짓고 다른 색으로 칠하는 것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곳의 대지가 가지고 있는 잊힌 기억을 회복하고 지워진 길을 발견하는 일이다. 나는 가끔 그가 옷에서 떨어진 단추를 찾아 배회하는 것만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찾아서는 우리의 벌어진 옷깃을 여며준다. 솔닛의 걷기-글쓰기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 상실한 것들의 장소에서 이루어지며 그곳에서 다시 짜는 연대를 골몰한다. 무엇을 잃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잃어버린 것을 위해 솔닛은 그의 경험들과 온갖 종류의 허구를 끊임없이 기워내어 도대체 현재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추측하고 그 현재와의 거리를 만든다. 솔닛이 현재와 가지는 거리는 망각된 과거의 기억을 향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래의 윤리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걷기의 인문학』 한국어판 서문에서 솔닛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대립하는 듯한 두 항이 이 책에서는 보행을 통해 하나로 연결됩니다. 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고 걸어가는 길이 실이라면,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입니다. 보행은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입니다.”리베카 솔닛 지음, 김정아 옮김, 『걷기의 인문학』, 반비, 2017, 10-11쪽.
찢어진 곳에 그가 덧대어 놓은 직물은 언제나 다채롭고 복잡하며 쉴 새 없이 요철해있다. 이 복잡함은 그의 수준 높은 교양이나 박학다식 때문이 아니라 장소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던 과정이고 방법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기억되고 회복될 것이다. 


현대의 기원, 모순의 형상


『그림자의 강』을 아래에서 떠받치는 것은 “현대 세계, 즉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10쪽)에 대한 비판이다. 솔닛이 인용하는 조너선 크래리의 정의에 따르면 “현대화란, 뿌리를 내리고 있던 것들을 자본주의가 갈아엎고 이동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유통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치우고, 유일무이한 것들을 교환 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과정이다.”(189쪽) 그리고 솔닛이 보기에 현대의 기원은 무엇이든 이동시키는, 그러니까 장소를 약화하고 소멸시키는 ‘철도’와 ‘영상’이라는 기술이 번성한 19세기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다. 그곳은 애초에 욕망과 판타지가 사실을 점유하는 모순된 장소였고 이후 “모든 장소가 동질화되는 세계, 기계로 이루어진 그물망과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기업체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야생이나 외진 곳 혹은 지역 고유의 문화 등을 해체하는 세계, 점점 더 정보나 이미지로만 경험되는 세계”(39쪽), “시간과 공간이 소멸한 세계, 뭔가 분명하지 않은 방식으로 해체되고 탈장소화되고 비물질화된 세계, 중심이라는 개념 자체가 혼란스러워진 세계”(394쪽)로 나아간다. “우리는 지금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한 미래에 살고 있다.”(14쪽) 


솔닛은 현대의 기원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해 했고, 어떻게 기원이 될 수 있었으며, 그것이 무엇을 구축하고 무엇을 밀어냈는지 찾고자 했다. 그 기원적 장소를 탐색하다 보니 발견한 형상,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꾸만 마주친 형상이 바로 머이브리지다. “그의 행적을 따라가는 것은 지금 우리를 있게 한 선택들을 따라가는 일”(42쪽)이었다. 그런데 머이브리지 또한 복잡한 인물이라는 것을 솔닛은 곧 깨닫는다. 그를 그저 현대를 촉발한 ‘움직이는 사진’의 발명가라고만 하기에는 그 자체가 또한 모순적인, 바로 그 시대의 총체라고 할 만한 형상이었다. 그는 성공을 욕망했지만 동시에 진실을 탐구했고, 그의 생애는 한데 놓일 수 없을 것 같은 영화적 실천들이 뒤엉켜 있다. 한 인물이 무엇을 선택했으며 그 결과가 어떻게 이후의 일에 반영되었는지는 선형적인 서사로 구성되어 역사의 전개로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 주변에 들끓고 있던 다른 선택들을 살피는 것은 머이브리지라는 인물 개인에 관한 이해를 넘어 현재의 우리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알려준다는 것을 솔닛은 이해하고 있다. 『그림자의 강』에서 솔닛이 끊임없이 머이브리지의 작품을 해석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해석은 역사를 구성하기 위해 필연적이다. 이 책은 시대의 욕망과 조응했던 머이브리지와 시대와 어긋나있던 머이브리지를 동시에 다룬다. 그 모순은 실재이고 여전히 그렇다. “구질서는 사라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대체한 것은 새로운 질서가 아니라 혼란과 끊임없는 변화였다.”(21쪽) 바로 그 안에서 머이브리지의 작업은 비평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솔닛은 그의 작업이 머금고 있던, 아직 말이 되지 못했던 웅얼거리는 기획들을, 작품을 초과하여 세계와 등가적으로 놓는다. 


사진들


솔닛은 “머이브리지를 살펴봐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그가 없었다면 영화 매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있었기 때문에 영화의 근원에 관한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234쪽)이라고 단언한다. 사실 『그림자의 강』 전체가 머이브리지를 통해 영화라는 것을 되새기는 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텐데, 혹자는 영화 감독이나 영화 작품이라고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 이 책이 어떻게 영화에 대한 사유일 수 있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솔닛이 진실을 다루는 글쓰기를 위해 선택하는 방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영화라 불리는 것을 가져와 영화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라 이르지 못할 파편들을 모아 영화라 이를 것을 구성해 보여준다(의미심장하게도 이것 자체가 영화적이다). 이 책은 머이브리지라는 사람과 그 사람이 남긴 것을 뒤적거리며 그 진실의 작은 조각을 찾는다. 현대에 관한, 그리고 영화에 관한 진실. 솔닛은 머이브리지의 가장 유명한 업적인 1877년 이후의 ‘동작 연구’ 작업에 곧장 진입하지 않고 그 이전에 이루어진 사진 작업들을 하나씩 차분히,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살펴 나간다. 왜냐하면 명시적으로 영상과 관련하는 ‘동작 연구’ 이외의 사진 작업들 속에서도 “변하는 것, 흘러가는 것, 그리고 고정되지 않은 것에 대한 그의 꾸준한 열정”(81쪽)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대상을 재현하는 그의 예술적(혹은 과학적) 실천은 당대의 작가들과도 변별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이어지는 영상의 시대를 예비하기 때문이다. 


머이브리지의 하늘 사진은 다른 풍경 사진가들의 그것보다 더 현실과 닮아 보였는데, 순전히 조작된 구름 때문이다. 머이브리지는 과노출로 하얗게 날아간 하늘 위에 다른 시간에 찍어 둔 구름을 얹어 생생한 하늘을 표현했다. 솔닛은 머이브리지의 구름에 대해 그것이 ‘진실을 알려주는 거짓’(79쪽)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아마도 머이브리지와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요체이자 모순일 것이다. 진실하다는 것의 정의는 여전히 논쟁적일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진실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이들로부터 진실의 장소성을 탈환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진실은 어디 있는가? 머이브리지의 관심은 “시간에 의해 가려져 있었던 세계”(128쪽)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가 1872년 작업한 요세미티 사진 또한 이와 관련한다. 오직 그 대상이 변하고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관심 있었던 머이브리지는 요세미티를 웅장한 이상향으로도, 질주하는 진보와 개척의 땅으로도 표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끊임없이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어떤 장소로 재현한다. 솔닛은 특히 머이브리지가 찍은 51장의 매머드판 사진 속에 등장하는,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아주 작은 인물을 의미심장하게 살펴보는데, 그것은 당대 여타의 사진가들의 사진에서 인물이 등장하는 방식과 매우 다르다는 이유 때문이다. 머이브리지 사진 속 인물들은 뚜렷한 목표가 없이, 모호하게 풍경과의 연관 없이 사진 속에 존재한다. 그 거대한 땅을 발견한 사람으로서도, 그것을 정복하는 사람으로서도 아니며, “대중을 위해, 미국과 이성적인 정신을 위해”(136쪽)서도 아니다. 즉 “미국을 휩쓸던 자기 창조의 열풍”(134쪽)에 속한 사진이 아니었다. 그것은 원주민과 앞선 땅에 대한 의도적인 삭제에서 한발 거리를 두는 일이기도 했다. 끊임없는 움직임의 공간, 움직이는 것들에 대한 관심과 움직임의 총체로서의 자연에 대한 사유가 시각적 모호함으로 충만한 결과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움직임만이 중요했던 이에게 장소의 요소는 누락될 수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움직임에는 시간 그 자체도 포함되며, 과거는 시간의 한 요소다. 


1877년부터 1878년까지 머이브리지는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에 대한 파노라마 연작을 작업한다. 파노라마라는 용어는 이미 18세기 말에 생겨났고, 현실이야 어떻든 눈앞에 보이는 재현에 매혹되고 열광하는 문화는 그보다 더 이르게 형성되어 왔다. 물론 예술적 성취로서가 아니라 대중적 오락으로서 그러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것은 분명 인간과 문화에 관한 아주 복잡한 수수께끼 중 하나일 것이며, 초기의 영화 이론은 이와 같은 영화라는 신비로움을 규명하려는 노력이었다. 영화는 아주 강력한 현실효과의 장치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현실과 도무지 겹치지 않는 불가능한 현실이라는 점에서 모순적이다. 솔닛이 간파하는 머이브리지의 파노라마 사진은 바로 그러한 작업이다. 머이브리지는 공간을 순차적으로 패닝하듯 보여주는 스테레오 카드 형식의 파노라마로 풍경을 담았다. 하지만 그의 파노라마 사진은 실제 시간의 전개와 일치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관람객은 다양한 방위를 동시에 볼 뿐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각에 포착한 여러 순간들 역시 동시에 보는 셈이다. 마치 영화처럼, 1877년의 파노라마 사진은 비연속적인 여러 시간 조각들을 편집해 그럴듯한 가상의 연속성을 부여한 작품”(247쪽)이다. 하지만 솔닛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풍경이었는지를, 당시 절정에 달했던 대파업의 혼란과 요동을 언급함으로써 진술한다. 머이브리지의 사진은 매혹적이었고 동시에 지나치게 고요했던 것이다. 이후 머이브리지는 그 유명한 ‘동작 연구’ 작업을 통해 순수한 움직임, 그러니까 장소 없고 배경 없는 움직임에 몰두한다. 


영화가 시작되기 이전의 영화 


『그림자의 강』에서 가장 압도적인 한 문장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기술에 대한 가장 진지한 숙고를 불러일으키는 다음 문장을 찾을 것이다. “기술이란 세상이나 세상에 대한 경험을 변화시키는 어떤 실천, 기법, 혹은 장치이다.”(176쪽) 이 문장은 개척자들과 원주민 모도크족 사이에서의 전쟁에 대해 얘기하는 제5장 ‘잃어버린 강’에서 등장한다. 머이브리지는 이 전쟁의 공식 사진가였다. 이 장에서 솔닛은 머이브리지의 사진에 대해서보다는 모도크 전쟁 자체의 의미를 더 많이 곱씹는다. 그것은 두 다른 세계의 충돌이었고,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저 깊은 굴속으로, 변방으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몰아냈기 때문이다. 자연히 한 세계가 가시적이게 되었으며 그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로 이어진다. 


모도크족의 세계가 구체적인 장소를 구심점 삼기에 가능했다면 개척자들의 세계는 장소를 지우는 힘들로 가득했다. 1870년대에 서부 곳곳으로 퍼진 원주민들의 종교 ‘유령의 춤’은 그들의 깊은 상실감에서 비롯한 것이었고 솔닛은 이를 “하나의 기술”(175쪽)이라고 규정한다. 그것은 현실의 변화를 기원하고 지나간 죽음을 애도하는 행위의 집합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제 (캘리포니아의 후손인) 우리는 비과학, 미신이라고 여기지만, 솔닛이 보기에는 달 탐사나 유전자 조작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기술이다. 그리고 또한 영화와 크게 다르지도 않다. “다른 말로 하면, 영화 자체가 일종의 유령의 춤이 될 것이었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 놓인 벽에 생긴 작은 틈이었고, 지금도 그렇다.”(178쪽) 영화가 시간에 관여하고 시간에 대한 경험을 구성함으로써 다른 현실을 만들어 내는 반복의 장치이라면, 영화라는 것을 숙고할 때 우리는 우리의 시간 바깥의 시간까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화가 그저 있음과 없음의 교차로 이루어지는 그림자의 시간이라면, 그림자와 관계 맺는 다양한 방식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것이 영화의 여러 장소를 사유하는 적절한 방법일 것이다. 솔닛은 영화 이전의 영화를 기억함으로써 장소를 회복하고자 한다. 그것은 오늘날의 영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를 통해서만 가능한 영화가 있다는 것, 그러한 세계는 그저 역사적인 힘에 의해 밀려났을 뿐이라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솔닛은 장소 상실을 조건 삼는 현대를 플라톤의 동굴에 비유한다. 다소 길지만, 인용하며 곱씹어 본다. 이것은 현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이러저러한 영화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리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플라톤의 동굴은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사람들이 전적으로 재현만 존재하는 실내 공간에서 지내게 된 상황에 대한 비유일 수도 있다. 앞선 사람들의 상상력 안에서 만들어낸 우주에만 존재하게 된 상황, 겹겹이 포개져 있는 러시아 인형처럼, 세대를 거치며 이제는 답답하게 느껴지는 어떤 상상의 세계 안에 갇힌 상황 말이다. 머이브리지는 두 개의 상황 사이를 오가며 작업했다. 한쪽에는 팰로앨토의 경주 트랙에 두른 흰색 벽과 필라델피아 작업실의 검은색 벽면, 즉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공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밖의 작품에서 보이는, 과테말라에서 알래스카에 이르는 다양한 장소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있다. 그는 동작연구를 위해 장소들을 포기했고, 그런 포기를 통해 영화의 뼈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우리 역시 두 상황 사이를 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캡틴 잭의 동굴과 플라톤의 동굴 사이를 말이다.”(384쪽)

에드워드 머이브리지, 일러스트: 류한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