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6
ESSAY
최정규

140자 타래보다 조금 더 긴 미술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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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6
ESSAY
최정규

140자 타래보다 조금 더 긴 미술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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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스트릿 패션 씬에는 ‘스지’ “스지의 어원을 찾아서”, VISLA Magazine, 2019년 8월 2일 게시, 2021년 11월 11일 접속, https://visla.kr/feature/96859/.
라는 단어가 있다. ‘스트릿 지인’의 줄임말로 어렴풋이 안면을 트고 인사를 주고받는 씬 안에 있는 사람을 칭하는 단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난공불락의 요새로 여겨진 백화점에 처음으로 입성한 도매스틱 브랜드 BROWNBREATH의 전 공동대표 현 AECA WHITE의 서인재 대표. 라이풀(지금은 분리되었다)로 시작해 지금은 LMC 등 여러 브랜드의 수장인 LAYER의 신찬호 대표. 옥승철 작가가 아직 아오키지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당시 티셔츠에 선정적 일러스트를 박던 그 ‘퍼킹 썸머’라는 로고를 쓰는 브랜드, LEATA의 수장 손희락은 스지의 왕으로도 불린다. 해당 씬의 인물 나열 말고 위 각주 글의 한 대목을 인용하여 상술하자면, ‘띵보다 꽁술 한잔하고 나와 입구에 모인 친구들과 함께 길빵, 고성방가, 타인의 간지 체크를 일삼는’ 사람이다.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주기를 청탁받았으면서 왜 패션 쪽 사람들의 이름을 읊고 있냐고? 저 씬에 꽤나 긴 기간 적을 두다 그다음으로 넘어온 시각예술 씬에서도 이와 동일한 행태가 있었고 앞서 말한 날것의 시쳇말보다 좀 더 정돈된 단어로 칭해졌지만, 실상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로나 3년차를 막 발 디딘 지금은 언제 그랬었나 싶지만 (이러한 시국에도 어떤 전시는 오프닝날 보러 가면 케이터링이 놓여있고 마스크를 벗고 하하호호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전시 오프닝, 클로징 그리고 작가와의 대화를 빙자한 셀털 지인파티를 가면 어딘가 모를 기시감이 들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면 여기에도 고스란히 스지 컬쳐가 있는 거였다. 그렇게 내 머릿속의 아트솔라리스를 업데이트해 가며 전시와 전시의 크레딧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1. 패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였으니 최하늘 작가의 개인전 «Bulky»(2021, 아라리오뮤지엄 언더그라운드 인 스페이스) 이야기를 이어서 하고자 한다. 합정지구에서 진행되었던 첫 개인전 «No Shadow Saber»(2017, 합정지구)를 아직도 기억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작품 캡션 때문이다. 석재와 같은 외관을 지닌 정형의 형체를 칼로 베어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생명체의 속살을 드러낸 작품의 외관도 인상적이었지만 이와 같은 결을 보여주는 ‘용의 허물과 알 껍데기 등’이라 적힌 캡션도 갸우뚱한 고개의 뇌리에 박혔다. 그때에는 인용의 출처가 가상의 이세계였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라진 근래 작업에서 보이는 변화 중 주목하는 부분은 의류를 직접 착용시키는 것이다. ‹주짓수 Bulky_sex(combine) 2›(2021)를 보면 도복을 입고 겨루기를 하는 듯이 얽혀있는 두 형체는 로고 플레이를 하는 대표적인 두 브랜드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머리띠와 도복을 걸치고 있다. 으레 몸과 옷으로 본인이 지닌 형체 이상으로 자신의 위상을 벌크업하여 으스대는 행태를 보았기에 꽤나 찰떡 같은 전시명이지 않나 생각했다. 유광과 무광의 대결, 나이키와 아디다스, 벌크업 하기 위해 열심히 운동기구를 타는 얄팍한 형태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을 마주보는 올록볼록하게 돌출된 반짝이고 빤질대는 부위들.

최하늘, «Bulky», 전시 전경, 2021, 아라리오뮤지엄 언더그라운드 인 스페이스

2. 오랜 시간 전시장에서 장서영 작가의 «블랙홀바디»(2017, CR Collective) 전시를 보았다. 영상 작품은 그 시작과 끝이 영상 재생 프로그램의 타임라인으로 명백히 구분되지만, 작가는 유한히 반복되는 전시장의 환경을 이용하여 그 사이가 자연스레 이어진 작품을 보여줬다. 영상 작업을 보는 엉덩이 힘은 그다지 없는 터라 전부를 온전히 곱씹어 본 작품이 적다. 다리와 엉덩이에 웬만한 힘이 없지 않은 이상, 작품에 애정이 없다면 미디어 작업은 일시의 파편만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지 않을까. 위 전시에서 이렇게 일부분만 보게 되는 영상작업에 대해 자조적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었다. 어떤 부분을 잘라서 보아도 그 작품 전체의 인상을 대표하게 되는 게 미디어 작업의 딜레마가 아닐까.


3. 어찌 보면 전시장은 보이지 않는 모눈종이로 가득 찬 영역일지도 모른다. 공간디자인 작업을 할 때 실측한 수치를 기입하여 3D 공간을 만들고 점선과 실선을 빼곡히 집어넣어 전시가 실제로 이루어지기 전에 가상의 전시공간을 만들어 시뮬레이션을 하고 이를 실제 공간에 실현해낼 때마다 그렇게 느끼곤 한다. 마침 전시 설치를 마치고 보러 갔던 전시가 바로 손지형 작가의 개인전 «MOTIVE»(2021, 레인보우큐브)였다. 규격화된 지면인 모눈종이에 반복적으로 또 수행적으로 그리고 이를 정돈되게 전시장의 벽에 나열해놓은 광경을 보며 몇 개의 참조점이 떠올랐고 동행과 이야기를 나누다 사무실에서 작가님이 전시장으로 나오시는 바람에 꽤나 멋쩍었다. 보통 전시를 혼자 보러 다니는데 이날따라 동행과 같이 가고 또 말이 잘 나오더라니….

4. 장지우 작가의 영상 작업을 꽤나 지난 시기이지만 상영회를 통해 정주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작업을 처음 마주하였을 때보다 좀 더 수련이 되었기에 어떤 레퍼런스가 어떻게 쓰였는지 좀 더 포착하며 보았지만 그때에도 또 지금도 드는 의구점이 있다. 지금은 풀프레임의 DSLR을 사지 않아도 손전화를 통해 4K 화질의 영상을 찍을 수 있으며 유튜브에서 보는 제품 리뷰 영상은 불필요하다고 느낄 정도로 과한 카메라를 사용하여 높은 화질을 보여준다. 작품이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영상은 아직 전문가의 영역이라 생각 들 정도로 입문 장벽이 있었고 거기다 합성은 정말로 프로의 영역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작가가 일인다역을 수행하며 자신의 이름에서 따온 가상의 영웅 서사를 만든다는 건 꽤나 흥미롭고 고된 일이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하여 해낸다라는 일념으로 만들어진 작업을 보면서 이러한 열정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전달되는 타오르는 영웅의 서사시이지만 속편은 더이상 기약이 없는 듯하다.


완성도라는 주제로 미술관에서 전시를 보고 동행과 설전을 벌였던 적이 있다. 고전 명화 작품이 대거 출품된 전시로 왜 이런 마스터피스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지 싶을 정도로 찬찬히 본 전시였는데, 하나같이 이름값 하는 완성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보고 왜 신진작가의 갤러리, 아트페어 진출이라는 주제의 이야기까지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작품이 상품으로서 취급되는 지역에 진입한다면 아이디어와 스타일은 물론이고 그에 상응하는 완성도와 마감을 지녀야 한다는 게 내 주장이었고 상대방은 전자만 충족되면 되었지 후자는 작품이 선택되고 거래되는 데 중요한 지점이 아니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서울시립미술관 북서울관에서 진행된 기획전에 장지우 작가의 작품이 출품되었을 때 전시장에서 마주친 작가님께 팬심 가득 쥐어짜내 몇 가지를 질문하였을 때 받은 답은 ‘할 수 있는 만큼 하였다’였다. 폭발 이펙트에 노이즈가 끼고 원근감이 어긋난 합성이 담긴 영상 작업이지만 이 작품에서 그러한 기술적 한계는 중요한 지점이 아니었다. 여담이지만 후속편이 나오던 시절에 지우맨 상영회도 직접 갔었지만, 작품의 크레딧에 이름과 닉네임이 둘 다 적혀있었다는 건 이때야 알았다. 그때는 그만큼 크레딧에 주의를 두지 않았던 걸까.

장지우, ‹지우맨 에피소드 2›, 2016, 싱글채널, 11분 11초

5. 2021년 마지막으로 본 전시는 레인보우큐브에서 진행된 루이즈더우먼 단체전 «Serials», 찬찬히 공간을 둘러보고 아카이브 섹션에서 주목하고 있는 작가들의 파일을 열어보고 떠오른 문장은 ‘야마도 있고 야망도 있는 작업’이었다. 한정된 지면에서 어떤 내용을 보여줄 수 있으까. 전략은 여러가지이다. 기존 작업의 발전 단계의 과정, 스틸컷의 연속, 프로토타입, 이후 이어질 작업의 단서, 티저 등. 인상 깊게 본 대조적인 두 작가를 꼽자면 폴더 안 얇은 낱장 페이지에 아주 두터운 질량의 색채를 담은 이나하 작가와 밀푀유와 같이 겹겹의 레이어를 얹어 하나의 나베를 만든 전영주 작가가 있다. 전영주 작가의 경우 새롭게 연구하여 작업하고 있는 작품 시리즈의 설명서와 이후 이어질 작업에 대한 미끼와 같은 폴더로 단락 초반에 언급한 ‘야망’이 이 대목에서 확 밀어 덮쳐왔다.


6. 마지막으로 후다닥 종결을 위해 기억에 남는 전시 10개를 나열하며 글을 끝내고자 한다. 

허연화 «Floating People»

엄유정 «FEUILLES»

김은정 «가장 희미한 해»

사박 «Hiiing: A Little Sad»

김민희 «이미지 앨범»

최하늘 «BULKY»

이서윤 «휘 휘 수프를 저어»

이십칠 이윤지 «crumble!»

장윤정 «혹 What if»

유지영 «Cupbo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