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6
INTERVIEW
금동현

김기영의 (후레)자식들: 강철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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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6
INTERVIEW
금동현

김기영의 (후레)자식들: 강철웅 인터뷰

김기영, 일러스트: 류한솔

“김기영의 인적 계보로 확인할 수 있는 인물로는 성인연극 ‹교수와 여제자›로 유명한 강철웅이 있다. 강철웅에 대해서는 ‹마이 트루스토리› 6화 ‘나는 매일 여자를 벗긴다―강철웅’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해당 에피소드에는 ‹느미›(1979), ‹수녀›(1979)의 조감독을 맡은 에로영화 감독 송명근도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육체의 약속›(1975)을 시작으로 7편의 영화에 주역을 맡은 김정철은 1990년대 ‘에로영화’ 다수를 연출한 감독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강철웅, 송명근, 김정철 등을 김기영의 은폐된 계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2021년 01월, 나는 「협잡꾼 당신」의 서두에 기대를 품고 작은 여담을 남겨뒀다. ‘직계를 형성하지 않은 감독’이라는 김기영 연구사의 상식과 별개로 존재하는 에로 연극/영화계에서 활동한 ‘김기영의 은폐된 계보’에 대한 내용이었다. 마치 스루패스처럼, 나는 그 여담이 조사된 바 없는 한국영화사의 빈 공간open space을 열어젖히기를 기대했다. 알다시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관/지면을 과대평가한 걸까? 아님 나를 과대평가한 걸까? 여하간 그해 늦여름, 나는 마테리알 편집진을 만나 ‘김기영의 은폐된 계보’를 함께 조사하자고 제안했다. 이번에는 ‘은폐된 계보’가 아니라, ‘김기영의 (후레)자식들’이라는 표제로. 스루패스를 보내도 받는 팀원이 없다면 내가 뛰어야 한다. 


돌아보면 「협잡꾼 당신」의 여담은 애초 스루패스로 기능하기 어려운 주제였다. 허문영은 기형도의 심야극장에서의 죽음에 대한 글을 추적하며 당시 극장에서 상영되었던 영화가 ‹뽕2›라는 사실이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다고, ‹뽕2›(이두용, 1988)가 “젊은 시인의 고독한 죽음이라는, 얼마간 신화적 분위기마저 풍기는 장면에 어울리지 않는 민망한 소품”처럼 비쳤기 때문일 거라 추측했다.허문영, 「전조들-1988년의 기억」, 『문학동네』, 2016, 473쪽 참조. 김기영의 직계―에로영화 감독들이 좀처럼 조사되지 않은 이유도, 이와 유사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적史的 검토에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 실은 잔디가 고르지 못한 곳으로 공을 보내버린 것이다. 하지만 ‹뽕2›가 이두용의 근사한 소품이듯, ‘에로작품’이라는 라벨링은 물러날 근거가 되지 못한다. “김기영의 (후레)자식들”이라는 표제는 이러한 맥락에서 설정되었다. 그들은 불순한 존재로 괄호 쳐졌지만, 검토를 통해 언제든 접두사―후레―를 지고 혹은 버리고 등장할 수 있다.


이쯤에서, 혹자는 이러한 조사를 ‘호사가적 취미’라고 공박할지 모른다. 그러나 김기영→ 봉준호, 박찬욱이라는 한국의 매끈한 영화사에 관심이 없다면―나는 KMDb의 김기영 영화 크레디트의 하이퍼링크 처리된 이름을 무작정 눌러보다가 (후레)자식들을 발견했다. KMDb의 하이퍼링크를 무작정 눌러보는 것은 성긴 지도로 한국영화사를 관광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혹은 매끈한 영화사에 구멍을 내고 싶다면, (후레)자식들은 유효하다. 가령 과격하게 그를 ‘에로영화 감독들의 스승’이라고만 전제할 때, 한국영화사에서 김기영을 특권화한 그의 섹슈얼리티 혹은 도착적이고 과장된 형식/양식은 어떻게 비치는가? 김기영→봉준호, 박찬욱이 작동하는 사실이라면, 김기영→김정철, 강철웅, 송명근은 존재했던 사실이다.


고백하자면 「협잡꾼 당신」, 「어느 부전자의 초상」금동현, 「어느 부전자의 초상-『김기영 평전』을 위한 단편 (2)」, 『콜리그』, 2021.이라는 글과 그 제목으로 알렸듯, 나는 의도적으로 김기영을 속되게 읽고 있다. 그를 비非역사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꿍쳐두고는 곧잘 실재를 파악할 수 있었던 특권적 위치로 격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실 김기영 그는 실재보다, 경합하는 사회적 요소(전근대와 근대, 여성과 남성)와 미학적 요소(일본 신파극과 사실주의 연극)가 소용돌이치는 진창을 이용하는, 협잡꾼 혹은 부전자로 존재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물론, 나는 그 저속성을 예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철웅을 만났다. 「협잡꾼 당신」을 쓴 이후 티캐스트가 ‹마이 트루 스토리› 서비스를 멈춰,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영상자료는―유튜브 검색으로 확인할 수 있다―EBS에서 방영한 ‹대한민국 화해 프로젝트 용서―10개월 350만원, 갑과 을의 전쟁› 밖에 남지 않았다. 참고로 갑이 강철웅이다. 아무튼 강철웅은 김기영의 ‹수녀水女›(1979) 연출부로 입문하여 ‹느미›(1979), ‹화녀‘ 82›(1982), ‹바보사냥›(1984), ‹육식동물›(1984), ‹죽어도 좋은 경험›(1990)까지 김기영 영화 현장에 있었다. 김기영 영화 현장을 떠난 강철웅은 1993년 한국 최초의 성인연극 「마지막 시도」를 무대에 올렸다. 강철웅은 성인연극을 시작한 계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 적 있다. “김 감독의 영화 중엔 성불구 등 성을 소재로 하면서 컬트 요소를 결합한 작품이 많다. 난 거기서 컬트 요소만 뺐다.”최호열, 「“내가 변태? 性의 진실성 추구할 뿐”-성인 연극 대부 강철웅」, 『신동아』, 2013.12.18.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12655/1(2022.01.13.확인) 성인연극으로 성공한 강철웅은 1994년에는 김기영이 연출하고 각본을 쓴 연극 「사랑 속에 숨고 싶다」를 기획하기도 했다.김기영, 「창작극: 사랑 속에 숨고 싶다」, 1994. 김기영이 조감독을 두지 않았다는 통념과 달리, 강철웅은 오랜 기간 김기영의 조감독으로 활동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이쯤이면 강철웅 인터뷰의 필요성이 충분히 설명된 것 같다. 인터뷰는 대학로의 밥집과 카페에서 진행되었다.

금동현(이하 금): 영화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강철웅(이하 강): 내가 옛날에 경산 유원지에서 경산여고생하고 손잡고 데이트를 했었어. 근데 불량배가 어~ 그림 좋네 하는 거야. 그러더니 하나둘 몰려오더니. 내 파트너 손을 확 잡는 거야. 그래서 싸움을 하게 됐지. 그때 내가 한참 봤던 게 이소룡 영화야. 내가 쌍절곤을 갖고 다니고 이리저리 휘둘렀지. 그 ‹말죽거리 잔혹사›(유하, 2004) 그게 내 이야기야. 아무튼 그걸 어떤 영화 제작부장이 보고는, “영화 하면 돈 많이 벌어”라고 꼬신 거지. 그때 내가 육사를 가기로 했었어. 애인을 만나러 갔다가 졸지에 내 인생이 바뀌어버린 거야. 그리고 내가 홍콩을 갔잖아 스턴트로. 그때 액션배우 왕우 씨가 전성시대. 근데 1년 만에 그런 영화들이 쏙 들어간 거야. 극장에서 그런 영화는 안 되는 거야. 그런 잔잔바리들이. 그래서 어떻게 이거 큰일 났다. 그래서 [김기영 ‹수녀›의―편집자] 연출 조수로 들어갔지. 그때 내 본명은 최성용인데, 강철이가 됐어. 내 선배가 이경웅이야. 그 사람이 이기환 감독이라고 내 직속 선배였어.강철웅의 말과 달리, KMDb에 따르면 이기환의 본명은 이중휘이다. ‹타인의 둥지›(이기환, 1982) 감독을 한 사람이야. 그래서 웅 자를 주신 거야. 그래서 강철웅이 된 거지.


금: 김기영 감독님에게 그럼 많이 배우셨겠네요.


강: 그렇지. 우리 스승님은 항상 나한테 채찍질을 하셨지. 다른 채찍질이 아니라, 시나리오를 쓸 때 그때, 결과물을 가지고 가면 너무 감성적이라는 거야. 그렇게 감성적이면 영화적인 표현이 안 된다는 거야. 감독님은 색깔 있는 걸 좋아하셔. 말하자면 색이 너무 찐해. 전체적으로 색이 찐하고 강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이 난 참 아픔이었어. 그리고 시나리오를 쓰는 방법도 배웠지. 감독님이 시나리오 「생존자」[김기영이 유작으로 준비한 시나리오―편집자]를 쓸 때도 그랬는데, 조시면서 쓰셨어요. 앉아서 조시다가 꿈을 꾸면 시나리오를 쓰시는 거야. 나도 그래. 꿈을 꾸고 나면 써져. 「비선실세 순실이」라는 대본을, 나는 하루 만에 썼어. 하루에 원고지 100장을 썼다니까. 아무튼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다 우리 스승님의 부단한 채찍질이었어. 원고지를 내 머리에 던지셔서 내가 확 일어나면 다시 나를 앉혀놓으시고, 요런 부분은 괜찮은데, 하고는 다 여기 안 해 (손으로 곱표를 그으며) 라고 하며 옆에 휴지통 거기다 원고지를 채로 버려. 우리 스승님이 왜 돌아가셨나면 가스곤로[풍로―편집자], 부탄으로 밀어 넣는 난로가 있어요. 근데 스승님이 원고지도 그렇고 담배도 툭툭 털고 하니깐, 그게 인화한 거야. 거기서 조신 거고 휴지통에 종이들이 있으니까. 아무튼 감독님이 돌아가시고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가족들이 나는 참 애틋하고 진짜 내 가족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거야. 왜냐면 김기영 감독님은 나의 아버지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나의 진짜 아버지보다 더 많이 지냈으니까. 내가 32편 중에 총 6편의 조수 생활을 했잖아요. ‹수녀›, ‹느미›, ‹화녀 82›, ‹바보사냥›, ‹육식동물› 그 뒤에 ‹죽어도 좋은 경험›.

금: 아, 그러면 「악녀」[1997년 김기영 사망 직전까지 준비하던 시나리오―편집자] 때도 하시기로 하셨던 건가요?


강: 그리고 ‹악녀› 시나리오도 여관방 비용을 내가 대드렸지. 시나리오 쓸 때 감독님이 너 돈 많이 버니까, 그러기에 알았어요 했지. 감독님은 매번 “낙산 가든에서 식사를 하시고 써야 되는데…” 그러시길래 쓰십쇼, 쓰십쇼 했지. 그리고 특히 「사랑 속에 숨고 싶다」라는 연극[1994년 김기영이 입센의 「유령」을 각색하고 연출한 연극. 기획이 강철웅이었다―편집자]을 왜 내가 하게 해드렸냐면, 입센의 「유령」을 하시겠다는 거야. 그래서 감독님, “입센의 「유령」 그거 너무 고전이라 손님 안 와요.” 그랬더니 타이틀을 「사랑 속에 숨고 싶다」래. 아이고 뭐라고 말도 못 하고 제목이 그게 뭐야. 그래도 내가 돈을 벌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배우는 임영규, 그 견미리 전남편을 내가 데려오래. 또 조주미, 나머지는 그냥 연극하는 애들 이렇게 썼지. 아무튼 스승님한테 입센의 「유령」을 왜 하게 해드렸냐면. 그냥 충전하라는 의미였지. 하시고 싶은 것도, 욕망도 있으신데 투자를 못 받으시니까. 감독님은 어디 가서 영화 만드는데 나 투자해 달라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없어. 투자회사가 먼저 붙어야 하지. 나도 마찬가지야. 항상 내 돈으로만 제작했고, 제작 각본 연출 다 스스로 하는 거지. 스승님한테 고스란히 배운 거야. 돈이 없으면 안 쓰고, 있으면 마음껏 쓰고, 누가 달라면 마음껏 주고. 못 받아도 포기하고. 스트레스 안 받고. 


함연선(이하 함): 그러면 「사랑 속에 숨고 싶다」는 김기영 감독님이 먼저 하고 싶다고 하신 건가요?

김기영, KMDb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강: 그렇죠. 입센의 「유령」을 하고 싶다 그러시고 이제 한국적인 타이틀로 하자고 했지. 스승님은 제목이 제일 중요하다고 나한테 가르치셨는데, 「사랑 속에 숨고 싶다」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지? 그래도 그 자리에서는 내가 뭐라도 하지도 못하고 막 좋습니다 그랬지. 거기서 아닙니다! 이렇게는 못 해. 아니 ‹바보사냥›은 뭐고 ‹육식동물›은 또 뭐고. ‹느미›야 원작 소설의 이름이고 뭐. 아 그래 ‹수녀›. 근데 ‹수녀›는 안산, 거기 바닷가에서 찍었거든요 김자옥 씨랑. 맨 처음에 막 연출부 스크립터를 했는데 그때 김자옥을 딱 본 거야. 김자옥이 아주 수수하고 참 착하더라고. 아주 즐겁게 촬영했어. ‹느미›할 때는 장미희 어머님이 떡을 싸서 오셨고 그랬지. 안소영이랑은 ‹자유처녀›를 했는데, 그때는 나한테 푹 빠져가지고, 그랬었지. 다른 사람이랑 결혼했지만. 어느 순간 백발이 돼서 나타난 안소영 씨랑 극동다방에서 만났던 게, 그것도 벌써 6-7년 됐네. 


금: 감독님, 근데 「사랑 속에 숨고 싶다」는 말씀하셨다시피, 원작이 입센 「유령」이잖아요. 근데 김 감독님이 1949년, 서울대학교 재학 중에 이미 「유령」을 하셨잖아요. 「유령」에 감독님이 좀 꽂혀 있으시거나, 그랬던 건가요?


강: 그렇지. 원래 입센에 꽂혀 있었어. 그래서 그걸 하고 싶어 하셨기 때문에. 한국적으로 각색을 하셨지. 「사랑 속에 숨고 싶다」는 내가 단 한 자도 안 건드렸지. 근데 다른 작품들은 반은 내가 좀 고쳤어. 왜 고쳤냐면 감독님 대사가 너무 올드해서. 감독님이 요 부분을 고쳐봐라, 하는 부분을 내가 좀 고쳤지. 감독님이 허락하시는 부분들. 그래서 다행인 게 내가 글재주가 있었던 것은 우리 스승님의 열여덟 해 동안, 그분의 영향력을 백프로 받았지. 봉준호가 ‹하녀›, ‹육식동물› 보고 자랐다 해서 참 고맙고 예의도 있고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도리어 후배지만 참 존경스럽더라니까. 윤여정 씨야 뿌리가 김기영 감독님이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금: 그럼 감독님 현장에도 계셨을 거잖아요. 김기영 감독님 영화를 보면 사실적이라기보다, 좀 과장스럽잖아요. 그런 연기가 나오는데, 다 액팅이 이뤄지는 건가요?


강: 그것은 감독님이 그 걸음마저도 만들어주셔서. 마음에 안 들면 막 컷! 컷! 완전히 끊고 고민을 하시고 직접 실연을 하고 슛, 테스트하고 계속 테스트하는 거야. 그러다 오케이 나고, 그럼 기분이 풀리거든. 그때 촬영이 들어가는 거야. 일사천리로 빠질 때는 몇 십 컷 쉼 없이 가버리고, 하루에 몇 컷 안 찍을 때도 있고.


금: 아, 되게 디테일한 부분까지 다 건드리신 거군요.


강: 디테일한 정도가 아니라, 뭐? 봉테일? 어림도 없어. 머리가 워낙 좋으셔. 머리가 아주 크시잖아. 머릿속에 컴퓨터가 몇 대가 들어서는, 계산이 이미 다 나와 있어. 모든 컷이. 절대 튀지 않아. 내가 편집을 하는데. 16미리로 붙이고 하는데, 근데 재밌는 게, 필름을 계속 보다 보면 감독님 참, 머리가 좋은 사람이구나. 너무너무 좋은 사람이구나. 순서 작업만 했을 뿐인데 어느 정도 커팅만 하면 끝나. 고를 것도 없어. 보충 촬영을 좀 해야 할 때도 있지만, 거의 없어. 한 달 내로 영화를 찍어야할 때도 있는데, 그래도 편안하게 찍어버린다고. 버릴 것 없이. 그때 필름이 만 자도 안 돼서 끝나버렸어. 제작비가 덜 드니까 화천공사[제작사―편집자]에서 나를 불러서는 봉투를 주기도 했다고. 근데 나는 또 좋았던 거는 대가를 모시니까 조감독을 따로 계약해서 따로 받았지. 내가 콘티를 보고 예행연습 시키는 걸 잘했거든. 내가 미리 촬영에 앞서 예행 연습을 하는 거야. 매번 연습을 해. 그 다음에 감독님 “슛 갑니다~” 하면 감독님이 파이프 담배를 탁 피우고 계시다가, “오케이! 가자! 레디~고!” 한다고. 일사천리로 됐어, 그때. 필름을 몇만 자씩 쓰던 시대에 만 자도 안 들었다고. 필름이 헛되게 가는 게 없어. (금: 상영할 때 필름이 그럼 얼마나 되죠?) 상영할 때 필름이 거의 만 자가 안 되지. 


금: 조감독이 되신 건 언제부터셨죠?


강: ‹바보사냥› 때부터였지. 두 작품 하고 바로. “네가 해야 되겠다.” “왜요? 위에 선배가 있는데.” “걔는 감독 입봉을 하고, 네 위의 세컨드는 인간성이 별로고 시나리오가 안 되고, 넌 나랑 계속 살고 하니까, 네가 해라.” 졸지에 내가 세 작품 조감독을 했지. 근데 연수는 많이 갔지. 79년부터 쭈욱이니까. ‹바보사냥› 찍은 배규빈, 김병학 그 친구들은 뭐 할까. 따로 궁금하네. 아무튼 우리 스승님은 대학로의 내 극장 가깝게 있었기 때문에, 구경 오셔서 식사도 하고 가끔씩 마광수랑 얼굴도 보고 그랬지. 이야기 하면 스승님이 마광수가 참 재밌대. 근데 마광수는, 내 인생에 있어서 김기영 감독님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이야. 어마어마하게 많은 생활을 했던 사람이고, 모든 작품세계를 나는 마광수에게 쏟았어. 아무튼 마 교수를 조명할 필요가 있어요. 김기영 감독보다도 말이야.

함: 감독님, 그러면 ‹수녀›로 이제 참여하실 때, 김기영 감독님 처음 보신 거잖아요. 그때 첫인상은 어떠셨나요?


강: 첫인상? 무슨 거의 무섭게 느껴졌어요. 숨이 막힐 것 같았어. 위엄이 느껴진다? 큰 바위가 앞에 딱 있는데,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압도당해서 말을 못 했다니까. 아 김기영 감독은 발음이 부정확하셔. 무슨 말 하시는지, 인터뷰하러 오면 거의 못 알아듣더라고. 그래서 내가 막 통역을 해주고 그러기도 했지. 아무튼 내가 1년 정도를 같이 살았는데, 같이 살아보니 참 따뜻하셨어. 내가 일을 못할 때, 그 당시 용돈을 일주일에 오천 원씩 주셨어. 라면을 다섯 그릇 살 수 있는 돈이었어. 감독님은 모밀을 정말 좋아하셨어. 매일 모밀만 먹는 거야. 직접 육수 내고 다데기 만들고 모밀을 그렇게 드셨어. 라면을 끓이실 때는, 일본식 라면을 끓여주셔. 정말 맛있었는데, 그냥 삼양라면에다가 수프를 넣고 양파를 잘라서 넣어 그 다음에 오뚜기 겨자를 하나 둘 셋 정도 넣고 수프를 미리 끓여, 그리고 라면을 딱 넣어. 하~그게, 이 라면이, 그 대신 양파를 완벽하게 익혀야 해요? 우리 애들 지금도 끓여주거든요? 진짜 맛있어요. 한번 해 드셔봐요. 감독님이 그렇게 일본식 라면을 많이 끓여주셨었지. 감독님은 일본 시나리오 이야기도 많이 하셨어. 일본 시나리오, 소설, 그걸 내가 얼마나 많이 들었던지. 내가 일본도 몇 번을 갔지 감독님 때문에. 


함: 김기영 감독님이랑 사셨다는 게, 그럼 작업하면서 만나셨다는 이야긴가요?

‹바보사냥›(1984) 촬영 당시의 김기영, KMDb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강: 아니죠. 아예 집에서 기거를 했어요. 출퇴근이 아니라, 기거. 서초동 진흥아파트 11동 1103호에 계셨지. 강남역 진흥아파트 11동 3호에 사셨어요. 


정경담(이하 정): 아 그럼 출퇴근을 그 쪽으로 하신 건가요?


강: 아뇨. 아예 거기에 내 방이 있었어. (함: 그러면 감독님 가족분이랑 같이 사신 건가요?) 감독님, 사모님, 그리고 작품 속에도 나오는 식모님이 계셨지. 가족분들 둘째 아들 동양이라고, 가끔 오고, 동원 씨나 며느리도 가끔 오고. 나는 아예 거기 살았으니까, 자식들보다 내가 더 오래 살았지. 동원 씨나, 누나는 광운대역 있죠? 거기 김기영 감독님 큰딸 김여미 원장이 계셨지. 아. 근데 김기영 감독님이 치대를 나온 게 아니에요. 이비인후과를 나온 것도 아니에요. 감독님은 산부인과를 나왔어요. 사모님이 치대를 나오신 거지, 화신 앞에서 김유봉치과의원을 개원하고 계셨지. 화신에 김유봉치과의원이라고 3층에 있었어요.


금: 감독님 연출할 때,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데요. ‹화녀‘ 82›같은 거 보면, 섹스 씬에서 시계가 막 넘어가고 그런 표현들 있잖아요. 이런 것은 어떤 의도였나요?

 


강: 그 시대가 검열 때문에 할 수 없어서 그랬던 거지. 기껏 사탕섹스나 하고, 펄럭이는 걸로 표현했지. 불가능한 시대에 있었기 때문이야. 가위질 당하고. 내가 성인연극에서 공연하는 걸 보고 감독님이 큰 충격을 받았지. 뭐 근데 나는 그게 나쁘다고 생각 안 해요. (희곡 「마지막 시도」를 주시며) 이 책을 보시면 알겠지만, 가장이 바로 서는 이야기거든요. 이게 학교[감옥을 말한다. 1997년 「續 마지막 시도」가 ‘외설’이라는 이유로 강철웅은 구속되었다―편집자.]갈 이야기인가요? 말이 안 된다고. 이런 것도 누가 조명해야 돼. 마 교수의 『즐거운 사라』도 좀 읽어보고 그래야지. 마 교수는 책으로 가고 나는 공연으로 갔지.


금: 그럼 김기영 감독님도 직접 성애 묘사를 하고 싶고 그랬었나요?


강: 응 그렇지. 못하니까. 


금: 그럼 혹시 직접적인 성애 묘사가 이뤄지는 ‹이어도›(1977)에 대해서는 들으신 게 없나요? 물론 직접 참여는 안 하셨지만…


강: 몰라요. 내가 참여를 안 했잖아요. 나는 모르는 이야기를 못 해요.


금: 정말, 듣고 보니 강철웅 감독님이야말로, 김기영 감독님이랑 가장 가까우신 분이셨네요.


강: 그렇게 보시면 돼요. 우리 김동원, 김동양, 김여미 씨한테 물어봐요. 식모가 없는 날에는 밥도 하고 라면도 끓이고 그랬다고요. 한두 작품 잠깐 발만 담근 사람들의 말은 믿지 마요. 난 만 18년을, 돌아가시는 날까지 봤어요. 김기영 감독님은 나의 삶이야. 내 인생에서 그분을 빼면 안 돼. 아무튼 우리 스승님에 대한 조명은 너무 많이 되었기에, 내가 할 말이 없을 텐데 하고 인터뷰 자리에 나왔다니까. 난 이렇게 생각해요. 확실하게 발가벗겨라. 우리 감독님의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겠죠. 좋은 점은, 작품으로, 최고의 그 마성을… 누구는 컬트니 뭐니 하지만, 난 잔혹한 그 마성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작품 속에 투영하는, 그야말로 영화적 악마였다고 생각해. 마성을 드러낸 것이고, 사람들이 그 후에 그걸 컬트로 멋지게 포장했지. 난 사실 그렇게 멋지다고 생각 안 해. 너무 조금, 어쩔 때는 좀 변태 같아. 그래서 마교수랑은 안 맞았어요. 마 교수는 진짜 신사 도덕자였다고. 


함: 그러면 감독님께서, 에로연극을 하시게 된 영향은 누구에게 받으신 건가요?


강: 김기영 감독님이죠. 표현을 해야 하는데, 그 시대가 컷을 하니까 못하고 항상 괴로워하고. 기껏 한 게 형이상학적이고 상상 속의, 관객들의 자극적인 뇌에 울림만 주는 표현을 하는 것에 감독님은 진절머리가 났거든요. 윤리위원회에서 싹둑싹둑 잘라버렸어요. 그 시대는 그랬어요. 지금은 TV에서도 키스하고 별거 다 하던데. (금: 아, 그럼 감독님이 성애 표현을 직접적으로 못 하는 거에 좀 답답하셨던 건가요) 네. 제가 성인연극으로 표현을 하잖아요? 감독님이 감탄하고 참 좋아그러셨어요.


금: 근데 김 감독님은 84년 이후에, 영화 활동을 못 하셨잖아요. 그때 그럼 감독님이 그러시면 생계를 어떻게 유지하셨는지가 좀 궁금했어요.


강: 아 감독님은, 그 수색 세트장. 거기 한 천 평짜리 세트장이 있었어요. 영화해서 돈도 이미 버셨고, 사모님께서도 돈도 많이 버셔서. 생계 걱정은 하나도 안 했죠.


금: 그러다가 90년에 ‹죽어도 좋은 경험›을 김기영 감독님이 연출했잖아요. 근데 그 작품이 개봉은 못 하고 이정권 감독님 이름으로 유통이 되었잖아요. 여기에는 어떤 배경이 있었나요?


강: 정권이가 내 밑에 세컨드지. 그 영화는 회사에서 누구도 모르게, 그렇게 해버린 거야. 동원 씨도 전혀 몰랐다고. 왜 이정권이라고 했냐 하면, 그냥… 뭐 이 부분은 더 안 팠으면 좋겠어. 그 작품은 옥의 티야. 예산도 없었고, 만들어야 할 이유도 없었는데, 며칠 시간 내서 후다닥 찍고 개봉을 않고 그냥 버렸던 작품이야. 그런데 제작사에서 얼마간 회수를 하려고 욕심을 부렸던 거지. 개봉해서는 안 되었던 영화야. 가슴 아파. 


금: 아, 그렇군요. 혹시 이정권 감독님 말고, 김기영 감독님이랑 가까웠던 분을 몇 분 소개받을 수 있을까요?


강: ‹가문의 영광›(2002) 만든 정흥순이 김기영 감독의 조수였지. 그리고 설춘환이라고도 있어.


함: 그럼 감독님은 이제 어떤 준비 하고 계신가요?


강: 나는 영화 ‹삼청교육대› 준비하고 있죠. 성인연극은 이제 계획 없고. 이거 봐요 (페이스북을 보여주며) 내가 상황버섯 올린 포스트에는 좋아요를 120개나 눌렀는데, 전두환 욕하는 「삼청교육대」 포스트는 좋아요가 13개네. 아무튼, 이제 다른 거는,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덧붙여요. 나 먼저 갈 테니까, 정리하고 조심히 가세요.

고백하자면 나는 강철웅이 부덕자이길 바랐다. 서두에서 ‘에로영화’라는 라벨링이 물러섬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또 이윤종의 역진(逆進)으로서 에로영화에 관심을 갖고 있긴 했지만, 부덕자를 인터뷰한다는 위반에서 일종의 흥미를 끌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위 인터뷰에서 알 수 있듯, 기대는 보기 좋게 좌절되었다. 강철웅은 부덕자는커녕 보기 드문 도덕자였다. 우리를 단 한 순간도 하대하지 않았고, 김기영에 대한 질문이라면 기꺼이 질문보다 더 많은 대답을 해주었다. 지금껏 이 사람을 안 찾아가고 뭐했지? 라는 생각을 줄곧 하며 듣는 데 바빴다. 인터뷰가 다소 산만하게 된 것은―우선적으로 인터뷰를 잘 이끌지 못한 우리의 책임이지만―그런 이유다. 


하얀 벽면에 김기영의 측면 얼굴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옴니버스 영화 ‹여›(정진우, 유현목, 김기영, 1968)의 첫 번째 에피소드, 김기영이 카메오로 등장하는 한 컷의 시작 장면이 그것이다. 2019년 『김기영 평전』을 목적한 후부터, 종종 그―영화 안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으며 그저 스쳐지나가는―그림자를 떠올렸다. 가령 작년 하반기 김기영의 육필 자료를 검토할 때: 나는 그 육필의 내용보다, 육필이라는 형식과 누렇게 바래고 해진 문서의 상태에 더 감화되었다. 자료는 텅 비고, 내가 김기영을 직접 만지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강철웅을 만난 날도 같은 느낌이었다. 역사를 직접 운반하는 그 심부름꾼들, 나는 그들을 더 많이 만나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