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6
REVIEW
진세영

너무 많은 아카이브 너무 많은 재현 너무 많은 불가능성, 그러니 극히 드문 ‘자본’이라는 것을 가지고 시도하기: 잭슨홍 · 재커리 폼왈트, 《신실한 실패: 재현 불가능한 재현》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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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6
REVIEW
진세영

너무 많은 아카이브 너무 많은 재현 너무 많은 불가능성, 그러니 극히 드문 ‘자본’이라는 것을 가지고 시도하기: 잭슨홍 · 재커리 폼왈트, 《신실한 실패: 재현 불가능한 재현》 리뷰

너무 많은 유적 발굴이, 너무 많은 심해로의 잠수가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추적, 발굴, 발명, 포착, 발견, 모색……. 동시대미술엔 발명가나 개발자보다는 탐정 주체가 넘쳐 난다. 오늘날엔 진리 같은 것이 없음이 여실하기에, 차라리 그 빈자리를 다른 것들로 채워보려 한다. 그 자리에 들어설 수 있는 비-진리에 해당하던 것들을 하나씩 놓아보는 식으로. 또 다른 방면으로는 진리가 텅 빈 공백의 자리임을 기꺼이 드러내며 이 사실 자체를 잊지 말 것을 당부하는 시도들도 있겠다. 여하간 이 탐정 주체들은 빈자리를 노려보며 수사를 펼친다. 그 자리에 정작 놓였어야 했던 것들의 타당성을 조사하는가 하면, 어째서 놓이지 못했던 것인지 모순된 구조를 찾고, 문서고를 뒤지며 갖가지 증거를 수집한다. 그러나 이 탐정들은 끝끝내 범인을 잡지 못한다. 혹은 빈자리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본래 있었는데 없어진 건지, 아니면 있었던 시간이 원체 찰나여서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원래부터 그냥 없었던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범인 검거는 거듭 지연되며, 과정 그 자체가 결과로 둔갑해 단락화된 시간대로, 특정 대상/소재/주제의 작은 이야깃거리로 제시될 수 있을 뿐이다.이 내용은 발굴, 기록, 수집 등의 아카이브 행위 당사자 또한 제기하는 문제의식이다. 수류산방, 『김중업 서산부인과의원』, 2019, 9쪽을 참고할 것: “기록물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련의 작업을 가리키는 ‘아카이브/아카이빙’이라는 영어 낱말이 지난 몇 년 사이에 (‘큐레이팅’을 지나간 유행으로 밀어내면서) 새롭게 등장한 양 뜨거운 관심을 받았고, 표현성과는 가장 대척점에 있을 법한 이 개념이 동시대적 예술 창작 방법론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사실 전승할 만한 가치들을 나름의 체계로 모으고 형태로 정리해 세대를 이어 기억되게 하려는 의지와 그 산물은 그것이 근대적 의미의 아카이브 방법론을 취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인류 문명 안의 어떠한 사회에도 다양한 형식으로 존재해 왔다. 오히려 식민지 체제 아래에서 주체적으로 근대를 개척해 낼 기회를 박탈당했던 이후의 지난 한 세기 동안, 그리고 유사 이래 최초로 압도적 비율의 미성년이 고등 교육을 받으며 성인이 되는 오늘날 여기에서, ‘아카이브’란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 생각하지 않아도 큰 탈이 없는 주제로 몰려 있었던 듯 보인다. 그러다 별안간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각계에서 ‘아카이브’라는 이름과 ‘아카이빙’의 태도가 소비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동시대미술의 영역에서만 특수하게 나타나는 문제가 아니다. 이 원리는 삶의 곳곳에 깔려있다. 필자는 대학에 철학과로 입학했으나,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하는 과정에서 철학과가 없어졌음을 몸소 경험한 바 있다.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고 행정상으로는 있었고, 학과휴게실도 있고 그랬는데, 근데, 없었다. 처음엔 대학총장을 범인으로 생각했는데, 우리 학교만 그런 게 아니라고 한다. ‘이렇게나 전국 동시다발적인 것이라면, 어쩌면 대통령일지도? 근데 대통령은 우리 학교의 존재를 모를 건데…….’ 그래도 필자가 아예 눈치가 없진 않아서 범인이 돈이란 걸 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철학과 졸업생은 돈으로 환산이 잘 되지 않으니 없앤 것이다. 대학을 품고 있는 물리적 장소로의 도시, 좁게는 한 동네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도시 자체가 끊임없이 재생의 대상이다. 다시 말해 도시의 정책가라면 무릇 오늘 하루는 뭔가를 말소시키고, 다음 날은 자신들이 없앴던 것인지, 자연히 없어진 것인지, (여기도 돈 때문에 없어졌을 것이다) 하여튼 없어진 뭔가를 찾겠다며 복원가의 손길을, 시민의 회고를 요청한다.구본기, 「‘도시 재생’이라고? ‘인간 살생’은 어찌하고」, 『프레시안』 , 2018년 2월 12.일자(http://www.pressian.com/pages/articles/185924). “작금 현장에서 도시재생이라는 말은, 대충 아무 데나 갖다 붙이면 되는 짜장면집 스티커처럼 쓰인다. (…) 우선 정부가 거길 ‘도시재생 선도지역’으로 천명한다. 그러면 소위 활동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투입되어 일부 주민들과 무엇을 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하면(예컨대 주민공동이용시설이라도 하나 조성하면) ‘도시재생 사업’이 된다. 서울에서 뉴타운이 최초로 해제된 지역인 종로구 창신·숭인동이 꼭 그러하다.” 정지돈의 한 소설 대목을 눈여겨봐도 좋을 것 같다: “을지로와 종로에 도열한 건물들을 봐. 도시 경관과 도시 재생, 시민들의 복지를 핑계로 세계가 스크린化 하고 있어. 이 세계가 스크린이라면 중요한 건 결국 해상도야. (…) 도시재생=디지털 리마스터링. 거리와 건물은 새로운 시대에 맞게 “재생”되어야 한다. 여기서 재생은 recycle인 동시에 playback이야. 기존의 형태는 유지하되 더 깨끗하고 선명하게, 어둡고 칙칙한 부분은 걷어내고 산뜻한 RGB컬러와 신소재를 입힌 모습으로 play!”, 정지돈, ‹나는 그것이 환영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1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2021.9.16.~2021.10.31.) 잡지에선 레트로(retro)가 대세라며 세월의 풍파로 사라진 실내건축 사례를 소개하고, 텔레비전에선 지난 것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가령 ‘응답하라’ 시리즈가 드라마로 열풍을 일으키는가 하면, 문화비평에선 이러한 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어찌 되었든 돈 때문에 한 때 진리로 대접받던 것들이 폭파되고, 다시 돈을 노리고 진리를 복원하는 데로 투자가 이뤄진다. 필자는 범인이 응당 사람이어야 하는데, 돈이라고 지목되기에 체포에 실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제보를 받습니다, 성공한 검거의 사례. 사람들은 아마 돈이 범인인 걸 수긍하면서도 끝내 의심할 것이다. 필자의 외할머니는 살아생전에 검찰 조사받는 TV화면 속 정치인 이미지를 보며 늘 중얼댔다, “돈이 무슨 잘못이냐, 돈을 나쁘게 쓰는 놈들이 문제지.”


보는 것, 보이는 것, 보여주는 것에 얽힌 문제에 골몰하는 시각 예술가라면, 치열한 고민 끝에 결국 오늘날 가능한 작업이란, 불가능한 것을 가리켜 불가능하다고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이라 말함 직하다. 빈자리에 세워 놓을 진리란 이미 인류 역사와 함께 수차례도 더 생산되어 왔으니, 이젠 무엇을 가져다 놓아도 반복이고, 단순 변형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실패와 불가능이란 정확하고 제대로 된 것일수록 차라리 성공이다. 이 전시 역시 어떤 실패에 대한 예찬, 어떤 불가능에 대한 미학적 발화를 보여준다. ‘재현 불가능한 재현’이라는 부제목 그대로 잭슨홍과 재커리 폼왈트는 오늘날 경제, 정치, 현실의 조건임에도 어째서인지 구체적으로 파악이 불가한 대상을 시각적으로 옮기려 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지점은 실패와 불가능성 같은 말들이 겉보기에 유행이고 상당한 매혹을 풍기지만, ‘금융시장’, ‘화폐자본’과 같은 고도로 추상적인 경제학 개념어로 작정하고 선뜻 빠져든 이들은 별로 없었다는 사실이다. «신실한 실패»가 반가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산현대미술관의 잭슨홍과 재커리 폼왈트의 2인전, «신실한 실패»는 돈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그 몽타주를 그리려 한다. 지금, 여기에서, 만 원짜리 종이, 즉 지폐로 표현되고 상징되던 화폐란 것을 무엇으로 나타내느냐 하는 것이다, 토스(toss)나 카카오페이(kakao pay) 같은 앱(app) 속에서 숫자로만 돌아다니는 그것들 말이다.


너도나도 주식, 비트코인(bitcoin) 따위를 권유하는 시대에 이는 적절한 화두가 분명해 보인다. 탐정 노릇을 하던 다수가 이러한 주제어에 집중하지 않았던 것은 어엿한 현실이다 (필자의 단순 느낌이 아니라). 글의 첫머리에서 언급했던 오늘날의 아카이브 경향성은 은근하게 감상적인 태도를 끝내 버리지 않았거나, 못했으며 (그리하여 이 개념은 재현과 도덕의 문제로 자주 논해지곤 했다) 따라서 미묘한 화해, 통합, 해묵은 감정의 한풀이 지점을 도출하는 것으로 매 순간을 넘겨 왔다. 혹은 자본이라는 것이 문제임을 간파했을지라도, 그것을 논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 사라져가는 소중한 일상의 것에 집중하기 시간이 모자랐을 것이다. 무언가를 진리로 세움에 혹은 비-진리의 것들을 조명하는 일엔 새로운 역사 역시 제시된다. 때문에 그 대열에 포함되어야 할 마땅한 새로운 대상들은 늘 추가된다. 전시기획을 위한 사전 조사, 창작을 위한 자료 발굴 등의 일련의 행위와 과정은 늘 그렇듯 멈추지 못할 목록을 남길 뿐이다.논의의 층위가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정은영은 국극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목록 확장의 순간을 경계하는 태도를 보인 바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누가 어떤 자료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들을 자주 전해 듣기도 했고, 언제나 그 자료들을 직접보고 질감하고 싶었지만, 나는 차츰 그 실물 자료들을 향한 물신화된 집착을 멈추기로 결정했다. 역사적 실증주의에 매몰된 페티시스트가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오혜진 기획, 정은영, 「틀린 색인-‘여성국극 프로젝트’와 타자들의 기억술」, 『원본 없는 판타지』, 후마니타스, 2020, 1부의 정은영 텍스트를 참고할 것. 서동진은 분명하게 지적한 바 있다. 미시사 연구활동이 되었든, 도시연구나 문화연구가 되었든 특정 주체가 스스로 고유하게 창안해내고자 하는 역사 꿰기는 결국 오늘날의 금융자본주의 체제를 내버려 두고서는 그저 ‘생애 다큐’로 그칠 것이라고 말이다. 정확하게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옮겨 보니 정확하게 지적한 것은 아니긴 하나,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 이를테면 우리는 청바지가 어떻게 상품 사슬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바꿔나가는지 추적하기 위해 면화 농장으로부터 출발해 도쿄의 긴자거리에 있는 H&M 스토어에 이르는 먼 길을 추적해볼 수 있다. (…) 그러나 그것을 모두 추적한다고 해서 자본을 재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청바지라는 물건의 생애에 관한 다큐멘터리에 그친다. (…) 우리는 이러한 잉여가치 생산의 비밀을 알기 위해 관계자 외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있는 공장이 아니라 금융기관 속으로 들어가 보아야 한다.”서동진, ‹미술관은 금융시장인가?›, 2020, 단채널 비디오, 2k, 컬러, 사운드 중에서. 부산현대미술관 «동시대-미술-비즈니스: 동시대미술의 새로운 질서들» (2020.12.11.~2021.3.21.) 강조는 인용자.


그런데 서동진은 인용 대목의 바로 뒤에 이어 지적하길, 금융기관 내부로 들어가는 일이란 불가능하다 전한다. 혹은 가능하더라도 거기엔 뭐가 없다. 거기에 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는 재커리 폼왈트가 제격이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영상작품 ‹아크에 비추어›(2013)는 중국 선전증권거래소의 내부에 카메라의 렌즈를 들이민다. 정말로 거기엔 뭐가 없다. 뭐가 없는 걸 알고 재커리 폼왈트는 결국 이 건물 안에 깜빡이는 아크 빛을 화면에 담고 (왜냐하면 아무 것도 없지만 그건 그럼에도 ‘있는’ 것이다) 그걸로 논증을 시작한다. 아크의 빛(불꽃)은 철을 녹이는 기계가 생산하는 잔여 부산물인데, 이 아크의 빛이 있기에 이곳 증권거래소 같은 건물이 지어질 수 있다. 그 빛으로 만들어낸 이 건물의 안에는 거래를 대체하는 ‘광’섬유 네트워크, 시장의 그래픽 ‘픽셀조각’으로 이어진다 (바깥으로는 통유리에 반짝이는 태양의 반사빛과 포개진다). 이것이 제 아무리 포착하려 해도 포착할 수 없던 범인이다. 청바지를 추적해도 나타나지 않던 그 범인 말이다. 추적하면 할수록 외려 각각의 현장에서 살아가며 관계를 만드는 사람들의 동고동락, 희로애락, 영웅담 따위의 기억-이야기가 미담으로 굳어질 뿐이었던. 없었는데 실은 있었던, 범인의 얼굴이 점멸하는 빛인 것이다.


금융이란 것이 빛이라는 추상적인 비물질/물질로 비로소 재현되었고, 우리가 그걸 미술관 안에서 여전히 찝찝하게 실패한 상태로 본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그렇게 알아보긴 하는가? 이러한 물음들을 잠시 뒤로 하고, 전시의 또 다른 참여작가 잭슨홍의 소개말을 살펴보자. 그는 이전의 작업 전반에선 작품을 기능과 작동성에 중점을 두었다 밝힌다. 그에겐 작품이 하나의 디자인된 도구로, 관객들에 의해서 움직이고 쓰일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러나 후에,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흰 벽을 바탕으로 놓인 덩어리(실루엣)로 작품들이 보이길 바라며, 작품들의 표면적이고 장식적인 측면에 집중할 것을 권유한다.부산현대미술관 유튜브(YouTube) 채널 영상, «신실한 실패: 재현 불가능한 재현» 참여작가 가이드 투어 비디오 (2021. 11. 5.) https://www.youtube.com/watch?v=zfRDgWQJ1KA 아울러 작가가 작가가 작업전환의 이유까지 밝히지는 않으나, 전시의 리플렛에선 이러한 맥락을 “어떤 비판적인 맥락에서든 사물 또한 결론적으로 자본주의 상품 시장의 논리로 귀결할 수밖에 없다는 구조적 한계에 대한 불가피한 수용”이라 설명하고 또한 이를 넘어 “비판적 서사를 구축하기보다, 오히려 상품-사물 세계가 만들어내는 유희적인 상황을 연출, 구축”하는 시도로 “신자유주의적 리얼리즘” 그 자체 되기라 설명한다. 그의 말을 따를 때,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시리얼 박스, 세제통, 농구공이나 가위 등과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상품과 사물의 재현물들이다. 그는 자본의 재현으로는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지만 (왜냐하면 시리얼 박스는 시리얼 박스의 재현이지 자본의 재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품-사물이 곧 자본에 해당하는 것은 일견 맞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재현을 자본 재현으로도 판단할 수 있다. 이게 아니면 재현할 수가 없다, 불가능하니깐.

전시의 제목 그대로 두 작가 모두 불가능한 재현을 시도함으로 실패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 실패로부터 그 실패의 지점에 대한 생각보다는 외려 작가 저마다가 발설하고 있는 다른 말들과 제스쳐에 유독 신경이 쏠린다. 이른바 인스타그래머블하다고 할 수 있는 잭슨홍 섹션은 그의 보기 제안을 들은 이후에는 전시장이 차츰 기이하고 인공적인 아름다움으로 인해 폐쇄적으로 느껴진다. 관람객을 사용자로 철저히 배제한 도구-물품-조각으로 (심지어 너무나도 쨍하고 선명한 색감들로) 꽉 찬 전시장. 이것은 무섭다. 왜 무서운가? 가지고 놀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작품들이, 만질 수 없는 것들이고, 누구나 충분히 알아볼 유명 기업의 상품 재현을 두고 그저 표면에 집중하라니. 이 조건 자체가 머릿속, 시선 속 어딘가에서 이물감을 느끼게 한다. 


재커리 폼왈트 역시 마찬가지다. 재커리 폼왈트의 작품 총 상영시간은 대략 150분 이상이고, 전시장은 다소 쌀쌀한 온도, 딱딱한 좌석, 불편한 작품 관람 각도를 유지, 제공한다. 이러한 전시구성은 재커리 폼왈트의 영상이미지들을 한층 더디게 만들고 나의 의심을 더 확고하게 만든다. 필자는 재커리 폼왈트의 영상작업들은 영화이미지학의 (내지는 영상미학의) 개념들을 적용해 읽어낼 만한 작품들이 아니라고 판단하는데, 관객이 그의 작품 앞에서 집중할 것은 내래이션과 자막이 전부여서 그렇다. 말로 행해지는 스토리텔링, 정보전달 이외에 특별한 순간은 잘 없다. 느릿느릿한 영상이미지는 설명을 보충하는 도구일 뿐인지라, 말로 하는 설명이 끝날 때까지 한참을 기다린다. 그의 작품을 상영하는 널찍한 스크린은 귀로 듣고 (눈으로 자막을 따르며) 멍때리는 이미지들을 지나치게 커다랗게, 오래도록 보여주는 셈이다. 그의 영상화면은 그래서 전혀 핵심적인 이미지가 아니다. 재커리 폼왈트 역시 이러한 차원에선 예술이란 이름으로 이미지가 놓일 자리, 스크린을 관람객의 시선을 조작하는 장소로 사용한다, 잭슨홍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들이 뮤지엄에서 행하게 된 계기나 배경과는 또 다르게 정작 뮤지엄 안에서 행하고 있는 것은 자본-리얼리즘의 문제보단 관객-시선논리로 여겨지는 구석이 분명 있다. 반복하지만, 잭슨홍은 줄거리가 소거된 상태로 이리저리 놓여있는 조각 덩어리들을 바라볼 관객들을 이미 선점적인 위치에서 제 자신의 전시로서 관람하고 있다. 관객들이 매끈한 표면과 선명한 색감을 즐겨볼 것을 권유하면서. 재커리 폼왈트는 톤을 조절하면서 또박거림과 중얼거림을 반복하며 드라마틱한 스토리텔링을 제공한다. 화면에는 천천히 이미지를 흘려보낼 뿐이고, 이것은 차라리 영상의 앰비언트-이미지에 가까운, 유령과도 같은 나긋한 무빙-이미지들을 잔뜩 남겨놓는다. 그에게 자본-재현은 시각적으로 재현되는 대상이 아니라, 시각적으로 촉발되고, 내래이션으로 성립되는 무엇인 것이다. 


잭슨홍과 재커리 폼왈트, 아니 어쩌면 이 전시의 큐레이터는, 아무리 자본이니 금융이니 하는 것들을 재현해 보여준들 그것들이 그저 미술관 고유의 형식적인 작품으로 뻔하게 보여질 운명을 일찍이 예감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관람객의 시선논리를 선전하는 것으로 금융재현이 좀 더 명징한 불가능으로, 제대로 된 실패로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놓아둔다. 또 결코 재현해내지 못했음을 이미지로 던져놓고, 말로 완성시킨다. 불가능함, 실패를 놓아둘 마당의 형편, 즉 뮤지엄의 논리 역시 믿을만한 게 되지 못했지 싶다. 결코 드러날 수 없는 자본을 멱살 잡고 끌고 와, 흰 벽 앞에 던져놓은들, 그 흰 벽의 공간이 자본 논리 속에 포섭된 곳이란 말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무덤에 방문하길 원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입장료를 내고, 사진촬영까지 하려면 추가요금을 내야 하는 모종의 역설과 다를 바가 없다.“마르크스의 무덤을 방문하길 원하는 이들은 우선 입장료를 내고 티켓을 사야 한다. 마르크스의 무덤 역시 상품으로, 그 상품은 한 장례 회시가 관리하고 있다. 몇몇의 방문객만이 그 무덤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사진을 찍고(사진을 찍으려면 약간의 돈을 더 내어야 한다) 있다고, 『데어 슈피겔』 은 보도하고 있다.” 허수경,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난다, 2018, 7쪽. 보나마나 관객인 우리가 내심 이 실패를 이 불가능을, 하나의 성공으로 삼을 것이다. 그런 시선-욕망이라면 작가든 큐레이터든 어떻게든 묶어두어야 했을 것이다. 

«신실한 실패: 재현 불가능한 재현», 참여작가 가이드 투어 비디오 영상화면

재커리 폼왈트의 영상을 보면서 그를 출중한 리서치 기반의 아키비스트로 생각하며, 또 다음엔 어떤 걸 탐사하러 심해로 깊이 잠수할지 생각해본 순간이 분명 있다. 어느 한 가문의 저택을, 어느 기차역과 광장을 연구했으니 다음엔 뭘 하려나, 하고 말이다. 고저택을, 기차역과 광장을 연구하고 보여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도 그러려니 했던 것이다. 그가 가져와 보여주던 것은 그러한 박물관학적 소재들이 아니라 ‘자본’이었는데……. 따라서 시선의 선점적인 위치를 점하는 부분에선 이들이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잭슨홍은 소셜미디어 어플 속에서, 무작위의 배경 이미지로 쓰일 자신의 섹션을 반가워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금융상품을 외관은 실패했는데 (왜냐면 그건 외관이 없으니깐) 속성은 성공적으로 재현했다! 역시 표면에 집중하라고 얘기하길 잘했어! 아니라면 죄송합니다.


너무 많은 발굴이, 너무 많은 재현이, 너무 많은 불가능성이, 너도나도 실패가 만연하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것들은 그러한 이유에서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고, 인지적으로 소통 가능한 콘텐츠들을 남긴다. 재현이란 말이 표현이란 말과 뒤섞여 있으며, 불가능하기에 전시장에서 선보일 수 없어야 할 것이 그림으로 걸리고 조각으로 놓인다. 해독될 수 없는 것, 정말로 불가능한 것, 그것들을 성공이 아닌 실패로 남길 방법은 이 전시에서 택한 방식 말곤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방식이란 ‘자본’이란 개념을 어떻게든 염두에 두는 것 다름 아니다. 불가능과 실패를 예정하고 시작하는 많은 발굴의 과정들이 상상력이나 표현이나 취재 속 등장하는 미담 등으로 성공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오늘날, 지극히 드문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의 재현은 정말로 불가능한 실패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새삼스레 알린다. 자본에 대한 사유의 경유, 포함은 불가능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시선의 논리를 형이상학적 지평이 아니라 현실적 층위에서 발동시킨다. 더 많은 작가가 이 자본이란 이름에 휩싸이는 날이 오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