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은 유적 발굴이, 너무 많은 심해로의 잠수가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추적, 발굴, 발명, 포착, 발견, 모색……. 동시대미술엔 발명가나 개발자보다는 탐정 주체가 넘쳐 난다. 오늘날엔 진리 같은 것이 없음이 여실하기에, 차라리 그 빈자리를 다른 것들로 채워보려 한다. 그 자리에 들어설 수 있는 비-진리에 해당하던 것들을 하나씩 놓아보는 식으로. 또 다른 방면으로는 진리가 텅 빈 공백의 자리임을 기꺼이 드러내며 이 사실 자체를 잊지 말 것을 당부하는 시도들도 있겠다. 여하간 이 탐정 주체들은 빈자리를 노려보며 수사를 펼친다. 그 자리에 정작 놓였어야 했던 것들의 타당성을 조사하는가 하면, 어째서 놓이지 못했던 것인지 모순된 구조를 찾고, 문서고를 뒤지며 갖가지 증거를 수집한다. 그러나 이 탐정들은 끝끝내 범인을 잡지 못한다. 혹은 빈자리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본래 있었는데 없어진 건지, 아니면 있었던 시간이 원체 찰나여서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원래부터 그냥 없었던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범인 검거는 거듭 지연되며, 과정 그 자체가 결과로 둔갑해 단락화된 시간대로, 특정 대상/소재/주제의 작은 이야깃거리로 제시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것은 동시대미술의 영역에서만 특수하게 나타나는 문제가 아니다. 이 원리는 삶의 곳곳에 깔려있다. 필자는 대학에 철학과로 입학했으나,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하는 과정에서 철학과가 없어졌음을 몸소 경험한 바 있다.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고 행정상으로는 있었고, 학과휴게실도 있고 그랬는데, 근데, 없었다. 처음엔 대학총장을 범인으로 생각했는데, 우리 학교만 그런 게 아니라고 한다. ‘이렇게나 전국 동시다발적인 것이라면, 어쩌면 대통령일지도? 근데 대통령은 우리 학교의 존재를 모를 건데…….’ 그래도 필자가 아예 눈치가 없진 않아서 범인이 돈이란 걸 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철학과 졸업생은 돈으로 환산이 잘 되지 않으니 없앤 것이다. 대학을 품고 있는 물리적 장소로의 도시, 좁게는 한 동네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도시 자체가 끊임없이 재생의 대상이다. 다시 말해 도시의 정책가라면 무릇 오늘 하루는 뭔가를 말소시키고, 다음 날은 자신들이 없앴던 것인지, 자연히 없어진 것인지, (여기도 돈 때문에 없어졌을 것이다) 하여튼 없어진 뭔가를 찾겠다며 복원가의 손길을, 시민의 회고를 요청한다.
잡지에선 레트로(retro)가 대세라며 세월의 풍파로 사라진 실내건축 사례를 소개하고, 텔레비전에선 지난 것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가령 ‘응답하라’ 시리즈가 드라마로 열풍을 일으키는가 하면, 문화비평에선 이러한 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어찌 되었든 돈 때문에 한 때 진리로 대접받던 것들이 폭파되고, 다시 돈을 노리고 진리를 복원하는 데로 투자가 이뤄진다. 필자는 범인이 응당 사람이어야 하는데, 돈이라고 지목되기에 체포에 실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제보를 받습니다, 성공한 검거의 사례. 사람들은 아마 돈이 범인인 걸 수긍하면서도 끝내 의심할 것이다. 필자의 외할머니는 살아생전에 검찰 조사받는 TV화면 속 정치인 이미지를 보며 늘 중얼댔다, “돈이 무슨 잘못이냐, 돈을 나쁘게 쓰는 놈들이 문제지.”보는 것, 보이는 것, 보여주는 것에 얽힌 문제에 골몰하는 시각 예술가라면, 치열한 고민 끝에 결국 오늘날 가능한 작업이란, 불가능한 것을 가리켜 불가능하다고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이라 말함 직하다. 빈자리에 세워 놓을 진리란 이미 인류 역사와 함께 수차례도 더 생산되어 왔으니, 이젠 무엇을 가져다 놓아도 반복이고, 단순 변형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실패와 불가능이란 정확하고 제대로 된 것일수록 차라리 성공이다. 이 전시 역시 어떤 실패에 대한 예찬, 어떤 불가능에 대한 미학적 발화를 보여준다. ‘재현 불가능한 재현’이라는 부제목 그대로 잭슨홍과 재커리 폼왈트는 오늘날 경제, 정치, 현실의 조건임에도 어째서인지 구체적으로 파악이 불가한 대상을 시각적으로 옮기려 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지점은 실패와 불가능성 같은 말들이 겉보기에 유행이고 상당한 매혹을 풍기지만, ‘금융시장’, ‘화폐자본’과 같은 고도로 추상적인 경제학 개념어로 작정하고 선뜻 빠져든 이들은 별로 없었다는 사실이다. «신실한 실패»가 반가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산현대미술관의 잭슨홍과 재커리 폼왈트의 2인전, «신실한 실패»는 돈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그 몽타주를 그리려 한다. 지금, 여기에서, 만 원짜리 종이, 즉 지폐로 표현되고 상징되던 화폐란 것을 무엇으로 나타내느냐 하는 것이다, 토스(toss)나 카카오페이(kakao pay) 같은 앱(app) 속에서 숫자로만 돌아다니는 그것들 말이다.
너도나도 주식, 비트코인(bitcoin) 따위를 권유하는 시대에 이는 적절한 화두가 분명해 보인다. 탐정 노릇을 하던 다수가 이러한 주제어에 집중하지 않았던 것은 어엿한 현실이다 (필자의 단순 느낌이 아니라). 글의 첫머리에서 언급했던 오늘날의 아카이브 경향성은 은근하게 감상적인 태도를 끝내 버리지 않았거나, 못했으며 (그리하여 이 개념은 재현과 도덕의 문제로 자주 논해지곤 했다) 따라서 미묘한 화해, 통합, 해묵은 감정의 한풀이 지점을 도출하는 것으로 매 순간을 넘겨 왔다. 혹은 자본이라는 것이 문제임을 간파했을지라도, 그것을 논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 사라져가는 소중한 일상의 것에 집중하기 시간이 모자랐을 것이다. 무언가를 진리로 세움에 혹은 비-진리의 것들을 조명하는 일엔 새로운 역사 역시 제시된다. 때문에 그 대열에 포함되어야 할 마땅한 새로운 대상들은 늘 추가된다. 전시기획을 위한 사전 조사, 창작을 위한 자료 발굴 등의 일련의 행위와 과정은 늘 그렇듯 멈추지 못할 목록을 남길 뿐이다.
서동진은 분명하게 지적한 바 있다. 미시사 연구활동이 되었든, 도시연구나 문화연구가 되었든 특정 주체가 스스로 고유하게 창안해내고자 하는 역사 꿰기는 결국 오늘날의 금융자본주의 체제를 내버려 두고서는 그저 ‘생애 다큐’로 그칠 것이라고 말이다. 정확하게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옮겨 보니 정확하게 지적한 것은 아니긴 하나,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이를테면 우리는 청바지가 어떻게 상품 사슬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바꿔나가는지 추적하기 위해 면화 농장으로부터 출발해 도쿄의 긴자거리에 있는 H&M 스토어에 이르는 먼 길을 추적해볼 수 있다. (…) 그러나 그것을 모두 추적한다고 해서 자본을 재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청바지라는 물건의 생애에 관한 다큐멘터리에 그친다. (…) 우리는 이러한 잉여가치 생산의 비밀을 알기 위해 관계자 외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있는 공장이 아니라 금융기관 속으로 들어가 보아야 한다.”
그런데 서동진은 인용 대목의 바로 뒤에 이어 지적하길, 금융기관 내부로 들어가는 일이란 불가능하다 전한다. 혹은 가능하더라도 거기엔 뭐가 없다. 거기에 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는 재커리 폼왈트가 제격이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영상작품 ‹아크에 비추어›(2013)는 중국 선전증권거래소의 내부에 카메라의 렌즈를 들이민다. 정말로 거기엔 뭐가 없다. 뭐가 없는 걸 알고 재커리 폼왈트는 결국 이 건물 안에 깜빡이는 아크 빛을 화면에 담고 (왜냐하면 아무 것도 없지만 그건 그럼에도 ‘있는’ 것이다) 그걸로 논증을 시작한다. 아크의 빛(불꽃)은 철을 녹이는 기계가 생산하는 잔여 부산물인데, 이 아크의 빛이 있기에 이곳 증권거래소 같은 건물이 지어질 수 있다. 그 빛으로 만들어낸 이 건물의 안에는 거래를 대체하는 ‘광’섬유 네트워크, 시장의 그래픽 ‘픽셀조각’으로 이어진다 (바깥으로는 통유리에 반짝이는 태양의 반사빛과 포개진다). 이것이 제 아무리 포착하려 해도 포착할 수 없던 범인이다. 청바지를 추적해도 나타나지 않던 그 범인 말이다. 추적하면 할수록 외려 각각의 현장에서 살아가며 관계를 만드는 사람들의 동고동락, 희로애락, 영웅담 따위의 기억-이야기가 미담으로 굳어질 뿐이었던. 없었는데 실은 있었던, 범인의 얼굴이 점멸하는 빛인 것이다.
금융이란 것이 빛이라는 추상적인 비물질/물질로 비로소 재현되었고, 우리가 그걸 미술관 안에서 여전히 찝찝하게 실패한 상태로 본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그렇게 알아보긴 하는가? 이러한 물음들을 잠시 뒤로 하고, 전시의 또 다른 참여작가 잭슨홍의 소개말을 살펴보자. 그는 이전의 작업 전반에선 작품을 기능과 작동성에 중점을 두었다 밝힌다. 그에겐 작품이 하나의 디자인된 도구로, 관객들에 의해서 움직이고 쓰일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러나 후에,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흰 벽을 바탕으로 놓인 덩어리(실루엣)로 작품들이 보이길 바라며, 작품들의 표면적이고 장식적인 측면에 집중할 것을 권유한다.
그의 말을 따를 때,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시리얼 박스, 세제통, 농구공이나 가위 등과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상품과 사물의 재현물들이다. 그는 자본의 재현으로는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지만 (왜냐하면 시리얼 박스는 시리얼 박스의 재현이지 자본의 재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품-사물이 곧 자본에 해당하는 것은 일견 맞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재현을 자본 재현으로도 판단할 수 있다. 이게 아니면 재현할 수가 없다, 불가능하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