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6
INTERVIEW
차재민×이상희

ʚဝိူɞ: 서신-코멘터리(차재민×이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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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6
INTERVIEW
차재민×이상희

ʚဝိူɞ: 서신-코멘터리(차재민×이상희)

차재민, ‹네임리스 신드롬›, 2022, 단채널 비디오, 4K, 컬러/사운드, 24분

2022년에 전시 «아트스펙트럼»에서 공개될 신작네임리스 신드롬제자리 비행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차재민 작가와 나눈 대화입니다. 구글 문서도구(Google Docs)를 통해 17일 동안 질문과 답신을 주고 받았습니다. 두 편의 영상 작업을 만드는 과정을 비롯해 차재민 작가의 생각들, 작업 현장의 순간들을 살펴볼 수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2022/01/07 10:10:00



🐯
: ʚဝိူɞ이 특수문자가제자리 비행›(2022)이랑 조금 닮은 것 같아서 인터뷰의 제목을 이렇게 붙여 보았어요. 어떤가요?



🐌
: . 마음에 쏙 들어요. 반지로 만들어 끼워 보고 싶네요. 반지 좋아해요.



🐯
: 💍 (희희) 그리고 작가님께서 촬영 현장에서부터 협업을 진행하시는 동안 애칭(?)을 얻었다고 하셨는데, DJ Arexibo님이 붙여주신핑핑이(🐌)”를 잠깐 초대해볼까 해요.



🐌
: DJ Arexibo, 퍼포머로 등장했던 김지우 씨와 저, 이렇게 셋이서아렉시보의 방과 후 음악교실이라는 텔레그램 채팅방을 만들어 작업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눠왔어요. 두 사람이 스폰지밥과 뚱이이고, 저는 그들의 애완달팽이라서핑핑이라는 애칭을 얻었어요!‹제자리 비행은 저에게 새로운 시도였고, 완전히 다른 접근으로 작업을 만드는 과정이었어요. 그런 저에게 두 사람은 사려 깊은 관심과 대화를 나눠 줬어요. 지켜보는 사람이 있을 때 작업이 싹튼다는 걸, 새삼 깨달은 시간이었는데요.‹제자리 비행은 모두의 이름으로 만들어지는 협업은 아니었지만, 미술하기를 중심에 두고 나누는 수다, 농담, 새로운 시도, 의심, 레퍼런스 나누기 등 이 모든 게 짜릿하고 재밌는 시간이라는 걸 다시 기억하게 했어요. ‘작업하기를 다시 사랑하게 된 시기였달까요.



🐯
: 곰곰이 생각해보니 누군가와 함께함으로써 생겨나는 것들이 작업의 먼지 같은 무언가를 이루기도 하는 것 같아요. 어딘가에 묻어있기도 하고, 뭉쳐진 채 덩어리를 이루기도 하고, 텁텁한 입과 콜록거리는 기침같이 스쳐 지나가지만 미약하게나마 걸리적거리는 듯한 존재감을 가지는 것들?
🐌님의 영상들은, 현실의 것을 렌즈로 바라보고 담아내는 기조로 이루어지는데 몇 장면들은마치영화적인연출처럼 느껴지다가도 더 들여다보면 (‘영화적인이라는 단어가 모호한데… ‘영화감독처럼짜여진 시나리오와 콘티를 토대로 영화 문법을 사용하며 이미지의 구도, 요소, 색조를 만든다기보다는) 어떤 상황 속에서 세심한 관찰을 토대로 카메라가 예민하게 담아내고자 하는 시도들이 얽혀 있어요. 그렇기에 관찰과 리서치 과정을 거쳐 카메라를 들기까지의 구상이 늘 궁금했어요. 물론 작업마다연출의 스펙트럼과 특징이 다양하다고 생각하지만요!



🐌
: ‘영화적인’, ‘사회적인’, ‘시적인’… 이런 표현들은 계속 부연설명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정의하면 안 될 것 같은.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은. 말씀하신 대로 제 작업은 주제나 연출방식이 작업마다 달라졌는데요. 매번 달라지는 이유는, 무엇에 집중할지 선택하는 것 자체로 작업의 구조가 달라지는 까닭이에요. 저 자신이 무언가로, 어딘가로 다가가 보려고 하고, 그 무언가, 어딘가에 따라 달라지는 작업을 하려고 해요. 그리고 관찰하고 있는 그상태에 준하는 작업을 완성하겠다는 목표가 있어요.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어려운 것은 어렵게, 부서지는 것은 부서지게, 불편한 것은 불편하게. 축소하거나 과장하지 않기, 이 두 가지 태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어떻게 촬영할 것인가의 많은 부분이 결정되곤 해요.



🐯
: “무언가, 어딘가로 다가간다는 답변을 듣고 보니 창작자가 취하는 태도가 작업으로 연결되는 지점에 대해 곱씹게 되네요.‹네임리스 신드롬›(2022)에서도 의료 행위의 상황을, 검사실 안과 밖을 나누는 유리 위에 피검사자와 검사자의 몸과 얼굴이 비쳐 겹쳐진 표면으로 담아내는 씬에서도 섬세한 관찰이 느껴졌어요.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검사 현장을 찍는다라고 마음먹었을 때, 화면 구도 속에 피검사자와 검사자, 그리고 검사실이라는 공간이라는 요소만 가지고 단순하게 촬영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짐작건대 촬영이 이루어질 공간, 그 안의 상황과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컷의 구도를 세심하게 준비하는 데에는 기술적인 걸 비롯해 많은 여건이 고려될 것으로 예상되어요. 촬영의 순간에 진입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시나요? 👀 관찰의 방식, 조사 관찰을 토대로 쇼트를 고안하실 때의 아이디어도 궁금하고 촬영 계획을 어떻게 설계하셨는지, 선택하신 방법들의 이유는 무엇일지 궁금해요.

🐌: 지금까지 제가 만들어 온 작업은 일종의모큐멘터리에 가까운데요. 이를테면,‹네임리스 신드롬의 청각 검사 장면은, 실제 청각사가 본인이 늘 일하는 것과 같은 상황을 보여줘요. 디테일을 계산한 재연이라기보다, ‘촬영 중이라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익숙한 상황을 다시 한 번 겪는다는 설명이 적절할 것 같아요. 저에겐,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과 하는계획약속이 중요해요. 즉흥적인 촬영이 필요할 때도 있겠지만 그런 방식은 제 정서와 조금 거리가 있어요. ‘찍히는 일은 대체로 유쾌한 일이 아니라서요.

카메라를 들기까지의 구상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요소는장소인 것 같아요. 작업하는 과정에서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 촬영장소를 찾으러 다니는 것이에요. 부러 꾸미거나 무언가 없애지 않아도 되는 적절한 공간을 찾기만 한다면, 그 촬영은 언제나 성공적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로케이션헌팅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 책을 써보고 싶을 정도로, 어떤장소에 머무르는 비범한 사람을 기가 막힌 타이밍에 만났던 경험이 많아요. “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촬영을 반기는 분들이 계세요. 그 장소를 어떻게 촬영하면 좋을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거기 그 자리에 있어요. (물론 간혹 촬영을 반기지 않는 분들도 계세요.)

사실 촬영장소를 결정하는 단계는 이미 수개월 동안의 작업 리서치와 구상이 마무리된 단계인데요. 저는 민족지학적 연구 방식을 (상당히) 신뢰해요. ,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말한 것 혹은 제삼자의 의견을 통하는 것보다, 제가 바로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걸 선호해요. 거의 모든 작업이 현장 조사에서 마주했던 우연을 품고 있어요. 그 우연을 어떤 자율 구조structure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굵은 털실로 성긴 뜨개질을 하다가 점점 촘촘한 바느질로 지어지는 구조 같은 것인데, 주제, 리서치, 인적 네트워크, 이동 거리, 예산 적용, 촬영 순서, 렌즈 선택, 테이크 횟수 등 이 모든 선택이 매듭을 형성해요. ‘자율 구조라는 표현은 제가 원하는 대로 이 모든 것을 설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 수많은 선택이 모여서 어떤 일관된 윤리를 구축하는 자력이 있다는 뜻에 가까워요.

네임리스 신드롬

‹네임리스 신드롬› 현장 스틸, 사진: 변혜진, 작가 제공

🐯:‹네임리스 신드롬은 다섯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병을 앓는 여성들의 문장을 담은 내레이션 안에서 앤 보이어의 책 『언다잉』, 그리고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에세이 「징후들:실마리 찾기의 뿌리」를 인용하는 텍스트가 이어지는데요. 텍스트랑 이미지가 서로 (짧고 작은 폭뿐만 아니라) 큰 폭의 단위로 의미를 발생시키는 몽타주를 이루는 것처럼 보여요.

‹네임리스 신드롬› 현장 스틸, 사진: 변혜진, 작가 제공

🐌:‹네임리스 신드롬은 이미지가 필요로 하는 텍스트를 찾는 것, 평범한 이미지를 다시 보게 할언어를 찾는 것이 중요한 작업이었어요. 특히 이 작업을 구상하는 동안은읽기듣기에 집중했는데, 이번만큼은 정말 많은 양의 독서가 필요했습니다. 한동안은 작업을 중단하고 앤 보이어의 전작을 읽는 데 빠져있기도 했고요. 사실 이 작업 내레이션 스크립트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아요. 번역체도 많고 접속사의 사용이나 문장과 문장 사이가 엉성하거든요. 한 번 듣고 푹 빠질 수 있는 쉬운 내용도 아니고요. 문학적인 완성도를 위해서는 더 많은 수정이 필요하지만, 퇴고할수록 어쩐지 좀 징그러운 텍스트가 된다고 느꼈어요.‹네임리스 신드롬의 나레이션은 어떤 길에서 주운 나뭇가지를 모아서 쌓은 탑 같은 면이 있어요. 스크립트를 쥐고서 가장 고심한 부분은 배열인데, 순서를 많이 뒤섞어 봤어요. 말씀해주신이라는 단위가 이 작업의 문장과 이미지를 설명하는 데 퍽 적절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미지 순서와 길이, 내레이션이 나오지 않는 부분의 길이 등을 결정할 때도, 등뼈를 세우고 한 프레임씩 움직여가면서 편집했거든요. 몽타주를 쉽게 설명하자면, 어떤 장면과 어떤 장면을 붙여서 발생하는 감각일 텐데정말 이 감각을 어떻게 결정하는지는 말로 설명이 불가능한 거 같아요. 악기를 연주하는, 특히 드럼을 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아요.

‹네임리스 신드롬› 현장 스틸, 사진: 변혜진, 작가 제공

🐌 : 내레이션 스크립트를 쓰면서 🐯님의 에세이 영상들이 생각났었어요. 주석을 어떻게 처리할지 🐯님과 대화했던 기억이 나더라고요. 수업을 통해서 볼 수 있었던 에세이 필름들을 어떻게 비평했어야 했을지도 다시금 고민하게 되었어요. 아름다운 문장, 사람을 한번에 혹하게 하는 문장을 경계하는 마음에 대해서. 매혹적인 언어를 두려워하는 마음에 대해서.


🐯: 주석의 경우는, 정보 차원에서 출처를 전달하는 문제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의 문장들이 가지는 지표와 그들이 영상 작업 속으로 이동하는 경로를 어떻게 드러낼지에 대한 대화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 :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감각적인 문장이 아니라면 눈길도 주지 않는 문장물신주의자들을 알아요. 반면 이 물신적 성격이 거슬리는 자들이 인용문만으로 이루어진 책을 꿈꾸기도 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인용이 많은 에세이 영상을 보면서, 풍족한 레퍼런스가 작업의 알리바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실은 문장을 재조립해서 내적 통로를 만드는 것에 집중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늦은 이해가 있었습니다.

‹네임리스 신드롬› 현장 스틸, 사진: 변혜진, 작가 제공

🐯: 영상을 이루는 호흡에 대해서도 여쭤보고 싶어요. 씬이라는 영상 이미지의 시간적인 길이, 쇼트 전환의 템포, 이미지가 언어와 포개졌을 때 의미가 발생하는 단위들…. 이런 것들이 이루는 호흡에 대해서요. 수학적으로도 그렇지만, 의미 발생의 차원에서도네임리스 신드롬의 타임라인이 큰 호흡으로 구성된 것처럼 다가왔는데요.
예를 들면, 첫 번째 챕터의 현대 의학 체계와 추론적 지식, 두 번째 챕터의조반니 모렐리, 코난 도일, 프로이트이 삼총사의 분석에 관한 내용을 지나 마지막 챕터의 벵갈인의 지식과 식민지배에 관한 내용으로 넘어갔을 때, 머릿속에서도 큰 단위로 점프하며 의미적 차원에서의 연결점이 생기는 것 같아요. 이번 작업에서 내레이션 스크립트와 쇼트씬의 타임라인을 편집하실 때 이런 호흡에 대해서도 특별히 염두에 두신 것들이 있으실까요?



🐌
: 저에겐 11:13 – 11:32 구간의 호흡이 중요해요. 단어를 따라 말하는 장면에 이르러, 수영장으로 이동하고, 마치 꿈에서 깨어 어디론가 이동하는 느낌을 주려고 했어요. 뭐랄까 다른 차원의 세계로 전환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수영장 장면의 컷은 최대한 나누지 않으려고 했어요. 사실 더 호감을 주는 장면은 많았어요. (게다가 수영장이라는 곳에서 부정적 감정을 느끼기 어려우니) 물이라는 거울에 비치는 몸을 잘 보여주는 숏 위주로 고르긴 했지만, 짧은 컷으로 편집하고 싶지가 않더라고요. 여성의 신체가 나오는 장면에서 부러다양한 이미지를 찾는 방식을 지양하고 싶었어요. 숏의 길이나, 흐름, 호흡에 관해서 더 이야기해 보자면, 사실사운드가든›(2019)에서부터 유사한 리듬이 생긴 것 같은데요. 속된 말로멍 때리고 보는영상에 대해서 자주 생각해요. 영상을 보는 도중에 핸드폰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을 정도의 흥미, 몰입하게 하는 긴장과는 좀 다른집중상태인데요. 2020아트 오브 리얼에 참여할 때, 필름앳링컨센터(Film at Lincoln Center) 팟캐스트에서사운드가든명상적인 영상이라고 소개해주신 적이 있었어요. 그 표현을 듣고명상적인 영상이 뭔지, 왜 그렇게 되는지 답을 내보고 싶더라고요. 냉정하게 말하면 작업은, 애초에는 오직 저에게만 절실하게 느껴지는 감정의 순간에서 출발할 텐데요. 과정과 변형을 거쳐서, 어떤 절실함이 휘발될 때, 작업이 완성되었다는 느낌을 받아요. 어떤 열감이 사라진 채 무언가 길고 납작하게 펼치는 감각과 흡사한 것 같아요. 하지만 그림을 그리다가 붓을 떼는 순간을 결정하기 힘든 것처럼, 영상의 완성도 마찬가지긴 해요. 그 완성의 순간에 자꾸자꾸 도달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체온이 낮아지는 느낌, 그게 좋아서. 마지막 챕터‹5. 지문에 나오는 이야기, 그러니까 첫 번째 챕터에서 마지막 챕터에 걸쳐진 범위는 사실 제가 선택한 배열이라기보다,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에세이가 그런 넓은 범주에서 의미를 길어 올려요. 사실 긴즈부르그의 글은 더 촘촘하게 그 연결을 따라가요. 아마도 관객은 1, 2, 3, 4 챕터의 유사성을 생각하면서 영상의 후반까지 따라오실 거라고 생각하는데, 챕터 5가 좀 비약적으로 느껴지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전체가 선행적 내러티브로 이어지기보다, 각 챕터의 연결, 카드 다섯 장을 쥐고서 순서를 배열할 때마다 이야기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그런 구상을 했어요. 네 장의 카드에, 어떤 카드를 한 장을 더하면? 아마 누군가는 한 장의 카드에 네 장의 카드를 붙여볼 수도 있겠죠. 하나의 문장이 아니라, 하나의 단락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랐어요.



🐯
: 카드로서의 챕터도 앞서 말씀해주신 배열의 시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아요. , 미주endnote 격인 영상의 말미, 그리고 인용하고 있음을 밝히는 오프닝 씬도 조커 카드처럼, 예외적이면서도 특유한 역할을 맡은 것 같아서 주석을 처리하신 방식이 인상 깊었어요.
한편으로는, 그런 스크립트가 시의 특성과 친연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문장 자체가 시의 작법을 취하지 않고, 이따금 사실을 설명하는 평서문이 옮겨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언어라는 기표와 이미지가 함께 만날 때, 사전적인 뜻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언어가 추상으로서 의미를 형성할 때도 있고, 이미지가 모호하지만, 감각적인 속성을 빌리어 의미를 연상시키는 순간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안에서 이미지와 언어가 서로 함께 있음으로써 의미를 발생시키는 도약적인 만남을 형성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촬영된 푸티지와 스크립트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그 둘 사이가 만나는 때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하셨는지 듣고 싶어요.



🐌
: ‘도약적인 만남이라는 표현을 여러 번 읽었네요. ! 듣고 싶었던 말. 하나의 단어 옆에 다른 단어를 곁에 놓아두고 그것들이 합쳐지기를 기다려보고, 이미지와 언어를 나란히 두고 그것들이 갈마드는 순간을 느껴보고, 그리고 그 주변으로 여러 가지 감정들이 생기는 것을 지켜봅니다. 인용과 배치 그리고 컴파일링을 활용하는 방식은엘리의 눈›(2020)이라는 작업부터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진실한 이미지라는 말을 자주 떠올리는데요. 이미지만으로, 이미지 스스로 진실함을 획득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이미 도래했기에…. 하룬 파로키가 말했듯이, 세상의 모든 이미지가 적절한 텍스트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텍스트가 이미지에 새로운 가시성을 부여할 수 있는지를 실험해 보려고 합니다. 사실 이런 방식이 실패하면, 이미지는 기존 언어를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 삽화가 되고 마는데요. 혹은 언어의 전횡을 두고보는 지경에서 못 헤어나올 때도 있고요. 이런 실험과 실패를 엎치락뒤치락하는 와중인 것 같아요.

예술이 가진 미약함을결함으로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는 굉장한 균형감각이 필요한 것 같아요. 관성적으로 냉소하게 되는 시기는 분명히 찾아오고, 계속해서 찾아오는 것 같아요. 삶이라는 현실은 이미지나 언어에 구겨넣어지지 않아서, 예술을 대하는 마음이 한결같지 않아요. 왕왕 화가 나잖아요. 그 화를 잘 다스리는 것, 예술의 미약함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미약함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가 시심 아닐까요. 이미지와 언어라는 두 조각이 서로를 설명하거나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평행을 만들고, 우리의 미약하고 협소한 상상의 경계를 두드리도록. 그렇게 하려고 애쓴다는 점에서와 친연하고 싶어요.

‹네임리스 신드롬› 현장 스틸, 사진: 변혜진, 작가 제공

🐯: “세상의 모든 이미지가 적절한 텍스트를 기다리고 있다는 파로키의 말, 충격적으로 멋지네요! 하룬 파로키의 말을 회고하다 보니 생각난 질문이 있는데요…. 근래에 국내 미술 현장 속 영상들이 어떤 양태로서의 에세이를 양산하고 있다는 점과 관련해 의견이 분분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고 있어요. 특히, 서술로서의 에세이 영상들에 관해서요. 사실에세이 영화에서의에세이의 출현과 맥락을 생각해보면, 작금의 미술 영상에서 에세이가 남발되고 있다는 점에도 공감이 가지만 한편으로는영상과 텍스트의 결합이라는 표면을 근거로 온갖 것들이 한데 묶여 부정적으로 독해되고 있지 않나 싶은 의구심도 들어요. 그래서 님의 새로운 시도들에서 그런 양태에 대한 고민도 있으셨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해요.


🐌: 🐯님이 말씀하시는 비판에 대해 생각하자면, 사실 작금의 미술 영상의 양태뿐 아니라 동시대 문화 경향을 살펴볼 필요도 있는 것 같아요. 1인 매체, SNS, 메일링 서비스 등을 이용해서작가라는 타인의 인정 없이도 기꺼이자기 이야기를 쏟아내는 개인들이 많아졌다는 것에 주목해요. ‘에세이의 범람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이런 현상으로 소수자성을 담은 이야기들이 많이 터져 나온 면도 있고, 제도권 예술을 비판하는 계기가 되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반면, 자아 인플레이션 현상을 보게 되는 면도 있는 것 같고요.정희진, 「‘모두가 작가인 시대’를 사는 법-신자유주의 시대의 자아와 글쓰기」, 『릿터』 31호(2021) 참조. 그러니까, 미술에서의 에세이 영상을 만드는 주체들도 흡사한 경향 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해봐요. ‘작가라는 주체는개인이라는 주체일 뿐이고, 미술사에 남을 작업을 남기고 말겠다고 우격다짐하는 작가가 비웃음거리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느껴요. 얼핏 보기엔 창작 활동이 민주적이고 덜 권위적인 환경에서 이뤄지는 것 같지만, 확대되는 개인주의 속에서 그저 고만고만함에 도취되는 면도 없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을 비평의 잣대로 바라보기보다 향유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판단을 해요. 지금 이 시대에 더 필요한 예술이 뭘까, 아직 더 쏟아질 게 많은 것 아닐까, 그런 고민을 하므로.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분명 작업마다 다르게 적용이 되는 부분이 있을거예요.

🐯: 내용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여쭤보고 싶어요.‹네임리스 신드롬이 의학 분야에서의 보기viewing를 살펴본다는 점에서엘리의 눈에서 보여주셨던, 심리상담에서의 투사project하는 이미지 기술에 관해 살펴보신 문제의식과도 연결되는 것 같아요.‹네임리스 신드롬이 다가간 여성들은 진단명이 없고, 어떤 체계의 바깥에 있기에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하는 여건에 계신 분들이었는데 그러한 현실에서는언어가 발명“불가사의한 불편함을 겪는 당사자들은 힘을 합쳐 언어를 발명하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주 29)” (〈네임리스 신드롬›에서 재인용)(〈네임리스 신드롬› 속 해당 문장은 앤 보이어의 책 『언다잉』의 문장을 응용하였습니다. “불가사의한 불편함에 시달리는 몸은 그런 통증에 응답하기 위한 어휘를 찾기를 고대하며 스스로를 의학에 내맡긴다. 통증을 충분히 표현해주는 언어를 찾지 못하면 그 통증을 견디고 있는 당사자들이 힘을 합쳐 언어를 발명해야 한다.” (앤 보이어, 『언다잉』, 양미래 옮김(서울: 플레이타임, 2021), 28쪽.))된다는 점과 함께의학과 같은 실증적 체계에서의 이미지의 작용에 대한 성찰이 필수 불가결한 주제였다고 생각되어요.
개인적으로이미지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어 두 작업에서 이미지에 대한 생각을 녹여내는 방법을 주의 깊게 보게 되었는데요. 이미지에 대해 성찰하고자 하는 바가, 이미지를 어떻게 인식하냐는 문제에 직결되다 보니 ‘‘이미지로만이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할까?’ 싶은 궁금증이 들고, 그런 성찰을 시도할 수 있는방법을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지가 언제나 중요한 고민으로 남아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작업하시는 동안에 있었을 어떤 결정과 선택이 궁금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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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임리스 신드롬은 과학(의학)이 알아낸 것과 알아내지 못한 것 사이의 모순을 담고 있어요. 그런 낙차 속에서도 의학적이미지,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일지라도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객관성을 의심받지 않아요. 그런데 이런이미지들을 독해할 수 있는 권력은 따로 있어서, ‘의 데이터를내가읽을 수 없어요. 이렇게 주체성이 결여된 이미지 경험이 이 작업의 주요한 아이디어와 연결되어 있어요. 이미지 작용은 중요한critical 것이지만, 이조차도 보여주기만 있고 말하기가 누락된 정보가 되었을 때 어떤 기만성이 뒤따른다고 생각해요. ‘이미지의 타자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이미지의 내용 역시 잃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자크 랑시에르, 『이미지의 운명』, 김상운 옮김(서울: 현실문화, 2014), 10쪽.

나에게만 진실인 것, 진실처럼 들리는 것 중에 입증하고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면, 이때 검증하고 확인하는 방식으로서의 과학은 신성하고 심오하게 느껴져요. 하지만 과학이나 의학이 절대적이거나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할 때, 인간이 기술을 동원해 인간에 대한 지식을 완성할 때, 인간이 모르는 것이 있다는 걸 망각할 때, 인간을 대상화하는 방식이 더 견고해질 거라고 생각해요. 지식을최대한모으는 와중에도 언제나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는 점, 그게네임리스 신드롬의 출발점이었어요. (인간의 무능함을 아는 것과 무지를 찬양하는 것은 완전 다른 이야기라는 점도 강조하고 싶어요.)

네임리스 신드롬에는명명에 관한 여러 이야기도 포개어져 있는데요, 특히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는언어를 발명해야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주목하고 있어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정의하거나 이름 붙이기 힘들다는 생각에서 이런 제목을 붙인 면도 있는데요. 이 세계를 감응하는 능력patiency이 있는 자, 세계를 느끼고 견디는 자, 감수자patient로서의 환자를 주목하고 있어요.김홍중, 『은둔기계』 (파주: 문학동네, 2020), 270쪽.

‹네임리스 신드롬› 현장 스틸, 사진: 변혜진, 작가 제공

🐯: 노은주 작가님의 회화 작업을 X-선 검사실 벽면에 거신 이유와 드론스쿨에서 드론을 날리는 씬을 넣으신 맥락도 궁금해요. 특히, 노은주 작가님의 그림이 강렬하게 눈에 들어왔는데요. 화면 안에 어떤 이미지를 오브제로서 넣어 연출하는 것인데 그로 인해 (두 분 모두의) 작가적 의도와 무관한 방식으로 이미지가 힘이 쎄질 수도 있고, 같은 화면 안의 인물에 대해서도 슈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보니 여러 고민이 있었을 것 같아요. 드론스쿨에서의 장면은, 그전까지 보여주셨던 장면들과는 결이 달라 보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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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제가 섭외한 병원 원장님이 (개인) 컬렉터였어요. 서울 내 유방 검사가 가능한 병원 리스트를 만들어 촬영 협조를 구하고 있었거든요. 그 리스트의 90%의 병원으로부터 거절을 당하고, 어느 날 모처의 병원에 가봤는데 대기실에 ○○○ 작가님 작업이 걸려있었어요. 느낌이 왔죠. 여기다. 여기. 그리고 검사실에도 그림이 하나 걸려있었는데, 그걸 본 순간 바로, ‘모렐리, 프로이트, 코난 도일이 나오는 내레이션과 그림이 걸린 방사선실을 합쳐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노은주 작가님의 작업을 생각했던 것은, 정적이지 않고 움직이는 에너지가 담긴 그림을 찾고 싶었어요.‹녹는형태연습›(2017)라는 제목의 회화 작업인데요. 일견 형상이 무엇인지 포착이 안 되는 그림을 찾았던 거죠. 말씀하신 대로 의도와 무관한 방식으로 이미지의 힘이 강화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림 그 자체로 그 위치에 있어 줄 그림을 찾았어요.

드론스쿨 장면은 아무래도 그 전까지 실내 장면이었다가 실외로 나오는 장면이라서 이질감이 있어요. 내용으로도 그렇고요. 제일 고민이 되었던 지점이, 정말 많은 사람이 드론 = 감시로, 학생 = 희망으로 읽어버릴 수 있다는 것인데요. 이런 이미지 독해를 부정하기보다, 직관적인 1차 독해 이후에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그 부분이 중요하리라 생각했어요. ‘드론지문을 연결해, 거시적인 시야와 미시적인 존재가 충돌하는 지점까지 이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게 관건인 장면이었어요.

그리고 드론스쿨 장면은가시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꼭 넣고 싶기도 했어요. 공교롭게도엘리의 눈›,‹네임리스 신드롬두 작업이 연이어 의학적 이미징imaging를 다루고 있는데, 몸속이라는 개인의 영역이 가시화되는 것에 대한 경이로움과 두려움, 두 감정의 공존을 다루고 있어요. 유익한 목적의 가시화, 이미지, 데이터 기저에 정말 유익함만 있는 것일까, 그런 의심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사실가시화와 관련한 다른 경험들은 그저 불길하잖아요. “사람들은 가시적인 방식으로 죽고, 가시적인 방식으로 걱정하고, 가시적인 방식으로 고통받으며…”앤 보이어, 『언다잉』, 양미래 옮김(서울: 플레이타임, 2021), 180쪽. 가시성을 가져야만 진실이라고 여기는 그런 기류가 압도적인 세상이니까. 사람들이 열렬히 신봉하는 것들은 죄다 이미지적인 것들이지만, 그게 반드시 사실이 아닌 것도 많아서 문제 되는 세상이니까. 그저 내 모든 게 털린다는 느낌을 받으니까. 빤하게 다 보여야 하니까. 진짜 어디 숨을 곳이 없으니까….

‹네임리스 신드롬› 현장 스틸, 사진: 변혜진, 작가 제공

🐯:‹제자리 비행은 전작들과는 사뭇 다른 특징이 크게 다가왔어요. “소리 연극(audio play)을 발생시키는 퍼포먼스 영상작가 스테이트먼트에서 인용.이라고 하셨는데 3개의 모니터를 통해 재생되는 타임라인 속에서 시차를 발생시키고, 여러 트랙 위에서 퍼포머들의 비언어적인 소리를 디제잉 하는 구조를 만들며 실험하고 있는 듯 보여요. 그로 인해 영상의 타임라인이 MIDI 작곡 프로그램의 트랙과도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어요. 또 스틸 이미지가 삽입되어 있는데 안초롱 작가님께서 스냅 사진을 촬영해주신 거더라고요. 디제잉은 DJ Arexibo님이 함께 참여하셨고요.
세 명의 퍼포머뿐만 아니라 사진가와 DJ제자리 비행이라는 소리연극(play)”에 가담하고 있다고 생각해본다면, 현장에서 어떤 형태의 과정이 있었는지 궁금해요. 특히 어린이 퍼포머가 여러 비언어적인 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여주던데 그런 소리에 대한 퍼포먼스는 어떤 계기로, 어떤 방식으로 헌책방에서 진행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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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의 모든 경험이 이미지 중심적인 반면에, 그렇지 않은 경험을 한 적이 있었어요. 소리가 가장 충격적인 순간들이 있잖아요. 어머니가 중환자실에서 사망했던 날, 그날의 기억은 거의 소리만 떠올라요. 맥박과 혈압 수치가 떨어지는 기계 소리, 가족들이 오열하는소리’. 그날, 옆에 있는 간호사가 그러는 거예요. “귀가 가장 마지막에 닫혀요. 지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하세요. 다 듣고 가실 겁니다.” 그 말이 오묘했어요. 죽음에 대한 경험 이후에소리라는 게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느껴지더라고요. 그전부터 사운드 작업을 해오지는 않았지만, 눈을 감고 소리만 들어도 좋을 영상을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제가 고차원의 녹음이나 믹싱, 화성, 작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말 기초적인 방식으로 소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시면 되는데요. ‘MIDI 작곡 프로그램의 트랙과 비슷하다니,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아요. 녹음 소스를 자르고 붙여서 조금씩 어긋나는 사운드 축적을 만들었달까요. 영상 편집 프로그램으로 녹음 소스를 이어붙여서 여러 시퀀스를 만들었고, 그걸 DJ Arexibo에게 들려줬어요. 제가 어설프게 만든 사운드를 듣고 DJ Arexibo가 멋진 음악을 만들어줬어요.

이 작업은 퍼포머로 등장하는 아이, 제 조카의 영향도 커요. 원래 이 아이는 어떤 소리 패턴을 읽는 감각이 좋았어요. 자신보다 더 큰 존재라고 여기는 것들의 동작이나 소리를 잘 따라 했거든요. (기차, 지하철 덕후이기도 해요) 조카와 함께 일종의 워크숍을 많이 했는데, 기억을 위주로 소리 모사를 해봤어요. 예를 들면, 캠핑을 하러 갔다가 아침에 죽은 고라니를 봤대요. 어른들을 깨우지 않고 혼자 동사무소에 전화해서 동물 사체가 있다고 알렸다는 거예요.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 언어를 빼고, 기억나는 소리를 내보기. 그런 상황을 제안하면서 녹음을 해봤어요. 그러면서 작업이 점점언어가 사라진 세계로 좁혀가고 있더라고요. 그 와중에 옥타비아 버틀러의 「말과 소리」라는 소설을 퍼포머인 김지우 씨가 추천해줬어요. 그 소설을 읽고, ‘언어가 사라진 세계라는 설정을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로 했어요.

헌책방은 과거에 누군가가 선택했던 책들, 이전에 열망했던 것들이 모여있는 곳이라는 이유로 선택했어요. 책의 내용이나 지식이 누군가의 기억에 스미고, 남은 물질만이 쌓여 있는 곳이라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그리고 나선형으로 책 탑을 쌓아올려, 위에서 봤을 때는 높이가 보이지 않고, 언제나 평평해 보이는 그런 탑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책을 쌓는 게 만만치 않았는데, 거의 한 달 동안 책 쌓기 연구, 연습만 했거든요. 특히 일본 서점에서 시도하는 멋진 책 디스플레이를 참고해가면서책 탑쌓기에 몰두했었어요. 그런데 현장에서 그걸 유지하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촬영 전날 밤에 공을 들여 책 탑을 쌓아두고 갔는데, 다음 날 아침에 가보니 절반이 무너져 있었고, 촬영 중간중간에도 연방 폭삭 주저앉는 거예요. 나중에 보니 그날의 책 탑 모습은 영상에는 거의 담기지 못했고, 안초롱 작가님이 일일이 책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에만 남아 있었어요. 안초롱 작가님께서 그날 하루, 이 퍼포먼스의 목격자observer 로서 사진 촬영을 맡아주신 것 같아요. 나중에 사진을 받아보니, 암 그렇고 말고요, 고개를 끄덕이게 됐죠.

‹제자리 비행› 현장 스틸, 사진: 안초롱, 작가 제공

🐯: 해주신 이야기를 듣고 돌이켜보니제자리 비행이 소리를 듣는 감각을 통해 어디론가 거슬러 가고 소용돌이치는, 동적인 작업이란 게 더 생생해지네요. 이 작업에서 언어적인 것을 꼽자면 제목이 유일한 듯싶어요. 제목에서비행이 동음이의어로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 느껴지는데요. “Maneuver in Place”이라는 영제와 함께 비행을非行”(‘잘못되거나 그릇된 행위’)로 표기하셨는데제자리 비행의 움직임이 언뜻공중으로 날다는 뜻의 비행飛行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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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제자리 비행은 오래전에 생각했던 아이디어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작업이에요. 영상에서는 처음의 아이디어들이 많이 희석되어 있지만, 애초의 생각은망하는 것에서 시작했어요. 문 닫기 직전의 서점, 죽음을 앞둔 환자의 병실, 기약이 없는 고립 속에 있는 사람들, 철거를 앞둔 부서진 집들, ‘필멸성을 감지할 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그런 생각이 이 작업의 시작이었어요. 망하는 서점의 책을 한 권씩 꺼내 누군가 읽어주면 어떨까. 그걸 들으면서 망한다면. 망한 책방에서의 낭독을 듣는 죽음을 앞둔 환자. 그런 연대. 그런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연대. 그런 느슨한 상상을 했었거든요. ‘필멸’, ‘고립’, ‘은둔’, ‘연대’, ‘성장’, ‘고통’, ‘비행非行이런 단어를 쥐고서 작업을 발전시켜나갔어요. 양팔을 뻗고 제자리에 서서 균형을 잡아본다, 한 번의 숨을 끝까지 쉬어본다, 라임rhyme을 만들어본다지겹고 힘들었던 팬데믹의 한 시절에. 그런 단순하지만 반복되는 생각을 모아 만든 작업이에요. 관객들 역시 이 작업을 복잡하게 독해하기보다, 직관적으로 느껴주셨으면 해요.

사실비행이라는 단어에 묘한 구석이 있지 않나요? 한때는 미술보다 비행非行이 더 미술처럼 느껴지던 때도 있었는데특히 비행非行을 벌이는 자가 그게 비행非行인 걸 모르는 상태일 때 매력적이잖아요. 심각한 범죄까지 치닫지 않는 비행非行은 성장의 필수요소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이런 이중성을 생각하면서 행위의 목적이 무화되는 단어 조합을 만들어 봤어요.

‹제자리 비행› 현장 스틸, 사진: 안초롱, 작가 제공

🐯: “지겹고 힘들었던 팬데믹의 한 시절에” “‘필멸성을 감지할 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라는 에필로그가 큰 울림으로 다가오네요. 마치나는 슬플 때 빗속에서 힙합을 춰…’하는. 고립, 우울, 낙담, 희망, 지속, 연대, 이 모든 게 섞인…. 그런 마음가짐으로 이 시간을 살아가기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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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보편적인 특성이 죽음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던 한 시절이었어요. 이런 생각이 꼭 죽음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었는데, 가령 베인 손가락이 아무는 걸 보면서, 이게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거의 초능력에 가까운 능력 아닐까, 한참을 쳐다보고 있고 그랬습니다. 저 혼자만 아는 기분은 아닐텐데…. 🐯과 대화 나누며 들뜬 마음을 다독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2/01/23 23: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