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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나원영

썩은 인터넷 가설: 2020년대 상반기 웹에 대한 간략한 소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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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영

썩은 인터넷 가설: 2020년대 상반기 웹에 대한 간략한 소고 (3)

*본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25 한국미술 비평지원’ 사업의 후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3. 뇌썩음

브레인롯(brain rot): [명사] 사소하거나 도전적이지 않다고 간주되는 (이제는 특히나 온라인 콘텐츠) 자료들을 과도하게 소비한 결과, 사람의 정신적 또는 지적 상태가 악화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현상. 또는 그런 악화로 이끄는 경향이 있다고 특징지어지는 것.해당 번역문은 다음 기사를 참조해 변형했다; 김미나, “멍 때리고 휴대폰 보는 ‘브레인 롯’…옥스포드대 올해의 단어 선정”, 『한겨레』, 2024.12.02.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1170273.html)

유래: 본지는 ‘브레인 롯’의 첫 사용 기록을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1854년 저서 『월든』과, 19세기에 출현한 소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왜 이 단어가 후보 목록에?: 새롭다거나 근래의 개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브레인 롯’은 올해의 소셜 미디어, 특히나 틱톡에서 널리 사용되어 왔다. 이 단어의 사용은 더욱 두드러졌는데, 본지의 말뭉치에서는 2023년과 2024년 사이 백만 단어당 사용 빈도가 250%씩이나 증가했다.https://corp.oup.com/word-of-the-year/#shortlist-2024 에서 ‘brain rot’에 해당하는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 영광스럽게 선정한 ‘2024년 올해의 단어’인 브레인롯, ‘뇌썩음’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겠다. 원래 이 단어는 영어권 웹에서 어린이·청소년 사용자들이 밈으로 남발하는 온갖 속어와 은어를 묶어 부르는 데에 쓰였다. 이를테면 유튜브에서 거대한 인기를 끈 SFM 시리즈인 《스키비디 토일렛(Skibidi Toilet)》을 부르는 ‘스키비디’부터 초대형 스트리머 카이 세낫(Kai Cenat)과 친구들의 방송에서 애용되는 온갖 미국 흑인 영어(AAVE) 표현까지 말이다. 심지어 옥스퍼드 영어 사전마저도 이러한 ‘브레인롯’ 계열 밈의 대표 주자인 ‘리즈(rizz)’를 ‘2023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할 만큼 영향력이 막강했던 뇌썩음은, 흥미롭게도 2024년의 단어로 선정된 이후부터는 한 묶음의 유행어와 밈에서 썩어들어가는 디지털 정신 상태로 재정의되었다.동시에 ‘2023년 올해의 단어’의 최종 후보에 무엇보다도 ‘프롬프트’가 도사리는 듯이 실려있다는 점은 조금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https://languages.oup.com/word-of-the-year/2023/) 이는 2회차에서 다룬 슬롭이 저품질의 생성형 콘텐츠만을 가리켰다가 그저 누군가에게 ‘쓰레기’로 느껴질 만한 모든 걸 비하적으로 지칭하면서 원래 쓰임에 가깝게 복귀하고 있다는 점과 함께 두자면 더욱 흥미롭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 다양하게 쓰였고 쓰일 수 있을 두 단어를 특히나 “저품질이나 모조품, 혹은 부정확하다고 특징 지어지는”, 또는 “사소하거나 도전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는” 웹상의 온갖 ‘자료(material)’들과 긴밀하게 엮었기 때문이다.

다만 2020년대 중순의 웹이 처한 같은 상황의 두 국면이기도 할 오물과 뇌썩음 중에서 범람하는 생성형 콘텐츠보다 그 속에서 썩어들어가는 정신 상태를 ‘올해의 단어’로 최종 선정하는 건, 온라인 전반에서 발생하는 서비스 및 콘텐츠의 품질 저하를 너무 인간 사용자 중심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지난 회차들에서 밝혔듯이, ‘썩은 인터넷 가설’에 대한 나의 의문은 동시대의 뇌썩음이 전적으로 생성형 인공지능과 디지털 오물의 탓이기만 한 건지, 혹은 이 또한 어쨌든 무언가가 부패한 탓에 발생한 것은 아닌지에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째서 스스로를 오물과 뇌썩음을 향해 이렇게 쉽게 내몰면서, 부패해 가는 웹에 기꺼이 정신머리를 예속시키는 것일까? 적어도 내가 주의력이나 문해력과 같은 이유를 드는 것보다 로어화를 거쳐 내놓을 수 있는 답변이란, 웹과 사용자가 특정한 정보를 연관 지어 허구적인 뒷이야기를 만들어 짓는 방식 자체가 서로에게 동기화된 채 부패했다는 것이다. ‘뇌썩음’이라는 비유는 어쩌면 이러한 부패를 너무 늦게서야 지칭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브레인롯의 또 다른 쓰임에서도 웹과 사용자 전반의 부패를 실감할 수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 시기를 대표하는 밈이라 할 만한 ‘이탈리안 브레인롯’은 신발을 신은 세 다리 상어나 폭격기의 몸체를 띤 악어처럼 주로 각기 다른 동물과 사물을 합성하고 여기에 뒷이야기에 가까운 설정과 말장난 같은 이름을 덧붙이는 식으로 이뤄졌다. 대량 생산과 간편한 파생이 가능한 기본 형식을 바탕 삼은 이탈리안 브레인롯들이 웹상에서 인기를 얻을수록 다양하게 불어나고 서로 맞부딪히며 일정한 ‘캐릭터’나 ‘세계관’이 되어가는 과정은 예전의 크리피파스타 괴물들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고전적인 로어화 과정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현대적인 밈으로서의 이탈리안 브레인롯은 다른 밈들처럼 재료로 쓰이는 이미지·비디오·텍스트를 과격하게 비약하는 제작 공정을 따른다. 그러나 웹상의 로어화가 심화함에 따라 “합성된 이미지와 텍스트 간의 맥락과 관계를 헐겁게 떨어뜨려 놓는”(150) 것도 충분히 가능해진 밈의 형식과 내용을 더 나아가 ‘자동 생성’했다는 점에서, 이탈리안 브레인롯은 2020년대 중순의 오물에 무척 어울리기도 한다. 그 기괴한 겉모습은 웹에 우글거리는 수많은 봇의 행동거지와 그들이 생성한 스팸 및 슬롭이 그러하듯 ‘블랙박스 같은 불가해함’의 공포를 가져다 주기도 하고 말이다. 곧 슬롭의 시기에는 밈마저도 “자동화된 알고리즘처럼 아무 조합의 구성 요소들에나 밈적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높아진 인위성과 임의성”(155)으로만 가득 채워진 채 짧디짧은 생애를 누리며, 웹상의 다른 모든 오물과 별다르지 않아지는 것은 물론, 적극적으로 스팸에서 슬롭으로 갱신된 오물의 형상을 그저 웃기고 재미있다는 이유만으로 웹 전역에 널리 배포하는 셈이다.

한편 음모론적인 의미에서 지난 10여 년 간의 뇌썩음을 상징할 수 있을 만한 동시대의 다른 밈으로는 『대현유』의 5+장에서도 다뤘던 이른바 ‘아모구스’가 있는데, 이는 세상 만물에서 인디 게임 《어몽어스》 캐릭터의 형상을 찾아내며 수상쩍다고 읊어대는 밈이었다. 이에 대해 인간의 두뇌에서 (공교롭게도 기계학습을 연상시키는) ‘패턴인식’이 너무 발전해버려, 인류가 모든 것에서 끊임없이 상징만을 찾아내게 되었다며 ‘내 머리에서 나가’를 절망적으로 반복하며 호들갑을 떠는 밈이란 「썩은 인터넷 가설」의 맥락에서 보자면 부패하는 로어화나 뇌썩음에 시달리는 사용자의 원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밈 중에서도 ‘온라인 말기병’의 부패한 정신머리를 한탄하는 내용이 얼마나 많고, 또 얼마나 많은 사용자들이 그런 밈을 보며 자신의 부패한 정신머리가 ‘온라인 말기병’이라고 한탄하던가?) 겉면에 보이는 상징이나 패턴에 거대한 이면과 더 나아가 음모가 존재한다고 믿으며 광기에 빠지는 모습이란 이제는 너무나 친숙할 테고 말이다. 이렇게 모든 곳에서 숨겨진 어몽어스 형상이 보이는 걸 멈출 수 없어지거나, 생성형 인공지능에 우스운 프롬프트를 입력해 임의적인 조합을 자동 실행하거나 하는, 2020년대 상반기의 대표적인 ‘뇌썩음’ 유형의 밈들은 웹과 사용자 양쪽 모두에서 부패한 정보들이 부패한 방식으로 연관 지어지고 있다는 점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그 난장판 속에서는 손수 제작해 유통하는 밈도 결과적으로는 봇이 내뿜는 오물과 그리 다르지 않게만 보인다. 최신 유행어 모음집으로서의 브레인롯이 밈으로 전달될 때 저 수많은 속어와 은어가 똑같은 뇌썩음을 공유하는 사용자들을 반사적으로 웃기기 위해 제 맥락을 잃고 스팸 문자 및 게시글 같이 키워드들로 ‘무지성’하게 나열될 뿐인 것처럼: “리즐러를 위해 네 갸트를 내밀어~ / 넌 정말 스키디비해, 넌 정말 패넘 택스야~ / 네 시그마가 되고 싶을 뿐인데~”넓은 의미에서 ‘하이퍼 팝’ 유행에 속할 수어사이드-아이돌(Suicide-Idol)의 바이럴 히트곡 “엑스터시(Ecstacy)”의 노랫말을 바꿔 부른 틱톡 패러디는 자연스레 영미권 웹 브레인롯의 상징이 되었다.

이렇듯, 밈이라는 브레인롯의 원형을 참조했을 때, 뇌썩음이란 단순히 온라인 오물을 과도하게 소비하며 얻는 정신적 피로나 산만함 등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사례들은 동시대의 자동로어화되고 음모론적인 웹에서 ‘지적 상태의 악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즉 서로에게 동기화된 웹과 사용자가 정보들에 연관성과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 어떻게 공모하며 썩어들어가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 사례로서의 브레인롯 밈들은 우리 사용자들에게 뇌썩음이란 다름 아니라 웹처럼 또는 봇처럼 생각하는 것임을, 허구적인 연관성과 뒷이야기만 만들어 붙일 수 있다면 무엇이든 진위와 맥락에 상관없이 로어의 단위로 자동적이게 엮어버리는 식의 사유임을 알려준다. 2회차에 록우드를 인용하며 다뤘듯 ‘포털이 글을 쓰는 방식’, 오로지 ‘한순간의 번뜩임, 시냅스’로만 이뤄지는 새로운 연결이 주어진 정보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무이한 방식이 되어버리는 로어화의 부패가 곧 뇌썩음을 불러오는 것이다. 그러한 뇌썩음에 시달리는 정신머리는 이제 사용자 본인에게마저도 불가해한 블랙박스에 가까워진다.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의 첫 절반이 분절된 단문들을 불연속적으로 나열하며 이런 ‘포털이 글을 쓰는 방식’이 어떻게 인간이 글을 쓰는 방식을 물들였는지를 보인다면, 조던 카스트로의 『노블리스트』는 동기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웹에 가깝게 재편된 정신머리를 어떻게든 부여잡으며 글쓰기를 해내려는 소설가의 머릿속을 잡설과 여담과 세부의 강박적 서술을 통해 선보임으로써 뇌썩음의 작동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오작동 중인 컴퓨터처럼 나의 뇌가 지직거리는 게 느껴졌다. 내 생각들은 마치 원치 않는 팝업 창 같았다. 만약 기술의 목표가 의식을 완전히 모방하는 것이라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엔지니어들은 그것을 벌써 이루었다. 개 같은 팝업 창과 스팸 메일이 내 생각들과 똑같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이 팝업 창 같다는 걸 메모해 두기 위해 반사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휴대폰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조던 카스트로, 『노블리스트』, 류한경 옮김, 어반북스, 2023, 239쪽. ‘개 같은 팝업창과 스팸 메일이 내 생각들과 똑같기 때문’이라 투덜거리자마자 바로 그러한 팝업창과 스팸 메일처럼 ‘반사적으로’ 움직이다가 무언가를 잠깐 ‘기억해 내’면서 움찔거리듯 작동하는 이 머릿속.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 정의 내렸던 것과 달리, 동시대의 웹에서 ‘저품질이나 모조품, 혹은 부정확하다고 특징 지어지는’ 또 ‘사소하거나 도전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는’ 자료들로 이뤄진 것은 웹뿐만 아니라 이미 그와 깊숙이 동기화된 우리 자신의 정신머리일 테다. 웹 전체가 사용자의 썩어빠진 시냅스에 잠시라도 번뜩이는 자극만 준다면, 로어라는 단위나 슬롭이라는 산물이 아예 저 시냅스의 수용체인 신경전달물질이 되어버린다면, 무언가가 그럴싸하게 말이 되는 재미를 아주 잠깐이라도 느끼고 믿어볼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뇌썩음을 향해 머리뼈를 쪼개 열어젖힐 뇌수를 휘저을 수가 있다.

오물이 그렇듯이 뇌썩음도 결코 2020년대 중순의 문제만은 아니다. 다시 한번, 『대현유』의 4장에서 “현실에서 반쯤 어긋난 공간에 자그마하게 마련된 무대인 줄만 알았던 곳이, 어느새 현실 그 자체에 깊이 침범해 그 도구와 문법을 고스란히 퍼뜨려 ”(117)버렸다며 짧게 언급만 한 피자게이트(Pizzagate)는 또 다른 좋은 예시다. 1회차에서 (자동)로어화와 음모론의 관계를 설명했듯, 피자게이트는 정전이 아닌 외전만을 믿으며 악화한 뇌썩음이 ‘현실 세계’에 폭력적으로 분출된 사례이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 유세를 둘러싼 정치·문화적 혼란이 최고조를 찍을 즈음인 2016년 말에 (에브너가 『한낮의 어둠』에서 취재하기도 했던) 음모론자 집단인 큐어넌(QAnon)을 중심으로 제기된 피자게이트는 미국 민주당이 거대한 아동 성 착취 및 인신매매 카르텔을 운영 중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여기까지는 상대적으로 ‘평범한’ 정치적 음모론에 불과하겠지만, 중요한 점은 이들이 ‘카르텔’의 본거지로 웬 피자 가게의 지하실을 지목하며 로고 이미지가 사탄의 상징들로 이뤄졌다거나 위키리크스에 유출된 선거 관리원의 이메일에 등장하는 ‘치즈피자’ 따위의 일상적인 단어가 실은 범죄를 지시하는 비밀스러운 암호라는 ‘근거 없는’ 근거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애초에 지지대가 없기에 반박될 수도 없을 로어가 든든하게 완성되었으니, 이제 남은 할 일은 악의 소굴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지만 애초에 지하실조차 없던 피자 가게에 쳐들어가서 총기를 난사하는 일뿐.

이러한 피자게이트와 큐어넌 이후 등장하는 수많은 정치적 음모론은 삼각형이나 눈알의 형상만 보이면 모든 게 일루미나티와 연계되었다고 주장하는 ‘고전적인’ 음모론의 훨씬 더 맹목적으로 열화된 판본일 테다. 이 음모론들은 (2회차에서 다뤘듯이) 수제 오물에 가깝게 생성된 온갖 ‘자료’들을 (1회차에서 다뤘듯이) 자동화된 로어의 꼴로 연관 지어버렸다. 이를 바탕으로 큐어넌의 내부자들은 일관된 허구조차 될 수 없을 뇌썩음을 공유하게 되었으며, 이런 유형의 음모론들은 밈으로서의 뇌썩음이 어떠한 형식으로 제시되는지와 무척 닮아 있기도 하다. 원본 맥락에서 무분별하게 떼어 온 각종 기호와 키워드를을 그 사이에서 허구적인 연관성과 뒷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나열하고, 사용자의 정신머리 속 신경전달물질을 타고 ‘한순간의 번뜩임’을 끝없이 생성할 수 있을 만한 ‘연상 게임’을 유동적으로 구축하기. 실로 웹상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저 수많은 ‘논란 및 사건 사고’들은 부패한 음모론으로서 피자게이트가 연장된, 어쩌면 거기서마저도 열화된 판본이라고 느껴진다. 그 출처와 맥락과 쓰임에 상관 없이 눈에 띠는 특정 기호나 키워드를 진위가 불분명한 음모 집단과 무조건적으로 연관 짓는 비약에서 출발하는 낙인·취소 문화부터, 그런 특정 기호와 키워드를 출처와 맥락과 쓰임에 상관 없이 비약적으로 연관 짓는 것에서 출발해 진위가 불분명한 음모 집단이 실제한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선동질까지. 뇌썩음의 이러한 두 양태는 이런 음모론적인 폐쇄 회로 속에서 되먹임하며 웹과 동기화된 사용자의 정신머리를 좀먹는다.

우리에게 끔찍할 정도로 익숙해질 풍경이 가시적으로 돌출했다는 점에서, 2016~7년의 엘사게이트와 피자게이트는 2024년의 신조어들이 지시하는 현상이 단지 2020년대 중순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점과 지난 10여 년간 웹과 사용자의 저류에서 무엇이 우글대고 있었는지를 넌지시 알려준다. 이 부패는 대체 언제 또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일까? 당연하게도, 애초에 이 두 사건이 ‘막간처럼 느껴질 만’한 2010년대 중순에 발생했다는 점은 다시금 웹과 사용자 간의 동기화된 부패와 인터넷의 느리고 점진적인 불모화가 그 이전부터도 착실하게 진행 중이었다는 점 또한 암시할테다. 그러나 내게 조금 더 시급하고 섬뜩하게 다가오는 건 과거보다는 현재의 상황이다. 국제적인 전염병 탓에 방구석에 갇혀버린 모두가 썩어들어가는 웹에 쳐 박힐 수밖에 없던 2020년대 초가 지나가는 동안 비트코인과 NFT부터 메타버스까지 웹이 구체적인 현실과 더욱 무관해지도록 조정하는 각종 ‘신기술’이 유행했고, 거대한 소셜 미디어를 중심으로 이를 적용하고 홍보하는 빅 테크 기업들은 갈수록 추상화되는 웹이 구체적인 현실에 동기화되며 미치는 악영향을 무책임하고 방치하는 경향이 훨씬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처럼 찾아 온 2020년대 중순의 광경, 데이터 추출부터 환각까지 웹과 사용자의 극심한 부패를 그야말로 기술적으로 구현한 듯 작동하는 생성형 인공지능과, 그에 대한 수많은 사용자의 재빠른 예속과 호들갑은 여태까지의 부패 과정에 무척 어울리는 귀결이다. 사용자들로 하여금 오물 생산과 뇌썩음마저도 ‘손수’ 해내지 않고 대리로 맡기도록 하는 이 장치들은 그동안의 부패를 더욱 뻔뻔하고 역겨운 외견들로 요란하게 가시화하고, 착취적이고 파괴적인 자동화 과정 없이도 알아서 진행되고 있던 오물과 뇌썩음을 대형 플랫폼으로 재개발된 소수의 웹 전역에 하향적이고 비가역적인 ‘업데이트’로 제도화할 뿐이다.당장에 「썩은 인터넷 가설」이 연재되는 올 9월만 하더라도 한국어권 웹의 플랫폼 독과점을 상징할 만한 메신저 서비스 카카오톡과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블로그 서비스가 광고와 홍보에 적합한 이미지·비디오 중심 소셜 미디어에 가깝게 UI/UX를 개편했다. 동시에, 국가정보자원관리원 전산실에서 화재가 발생하며 웹에 크게 의존하는 정부의 각종 행정 업무 시스템 및 서비스가 며칠 간 대거 마비되기도 했다. 시의적절하게 일어난 이 두 사건은 「썩은 인터넷 가설」의 관점에서 보자면, 현실이 물리적으로 취약한 웹에 얼마나 긴밀하게 동기화되어버렸고, 그러한 웹이 어떻게 초대형 독점 기업들의 이윤 추구를 위해 적극적으로 쓰레기장이 되어가고 있는지를 보인다. ‘부패’는 이러한 조건들이 맞물리면서 특히나 효과적으로 진행될 텐데,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 코리 닥터로는 ‘똥망화(enshittification)’라는 또 다른 직관적인 신조어를 통해 동시대의 웹 전역에서 “플랫폼이 어떻게 죽어 가는지”를 설명한 바 있다. (Cory Doctorow, “The ‘Enshittification’ of TikTok”, WIRED, 2023.01.23. (https://www.wired.com/story/tiktok-platforms-cory-doctorow/))

여하튼 나의 썩은 인터넷 가설이란 이렇다. 정말로 죽어가거나 썩어가고 있는 것은 도망치거나 놀러 갈 수 있을 만한 장소나 공간으로서의 웹이 아니라 차라리 수많은 정보를 로어화하는 도구이자 방법으로서의 웹, 무엇보다도 웹이 정보들에 허구적인 연관성과 뒷이야기를 부여하는 방식을 자신의 뇌와 긴밀하게 동기화한 우리 사용자들이라는 가설. 이 속에서 우리 사용자들은 스스로를 살아 있는 인간이라 굳게 믿고 있으나 실은 죽어 있는 스팸 봇과 그리 다르지 않게 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 그렇기에 생성형 인공지능 따위의 뻔뻔한 오물 및 뇌썩음 자동 생산 장치에 제 정신머리를 순순히 맡길 지경까지 와버렸다는 가설. 그러므로 장소나 공간으로서의 웹은 어느새 또는 애초부터 ‘우리’를 위하거나 심지어 원하는 곳마저 아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 그리고 이 모든 부패가 2020년대 상반기나 중순만의 현상이 아니라, 어쩌면 지난 10여 년이나 그 이전의 웹에서부터 차근차근 진행되어 왔을지도 모른다는 가설. 물론, 가설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글을 읽으며 짐작했을 수도 있겠지만 로어화 따위를 운운하는 나부터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뇌썩음에 찌들어 가설이 아닌 음모론 찌꺼기만을 쏟아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고 말이다. (『대현유』 또한 결국에는 그런 결과물이 아니었나?)

밝히건대, 「썩은 인터넷 가설」은 지난 2020년대 상반기 동안, 혹은 어쩌면 그 이전부터 웹을 돌아다니고 거기에 머물면서 느낀 “무력감과 낭패감, 아니면 권태와 분노, 무엇보다도 미칠 듯한 답답함”에서 출발했다.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한 허구로서의 웹으로 도망 온 나에게 저 수많은 대체 현실의 유령들은 이곳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을, 우리가 ‘진심으로 믿는 척’할 수 있는 허구가 얼마나 매력적인 동시에 위험한지를 알려주었다. 손쓸 수 없이 썩어버린 지가 오래인 것처럼 느껴지는 동시대의 웹과 현실에 밀려들어 온 부패에 감염된 나의 뇌는 내게 이 귀중한 교훈을 정반대의 방식으로 알려준다. 웹이 편리하지만 절대 편안하지는 않게 제공하는 사용자 맞춤형 대체 현실에 사로잡힌 우리들은 그나마 가까스로 합의해 온 현실을 폐기해 버렸으니까. 결국 『대체 현실 유령』의 맥락에서 다시금 생각해 보자면, 웹과 사용자 그리고 로어화에 일어난 부패란 정보를 연관 짓는 것만큼이나 각기 다른 대체 현실을 구분 짓는 능력의 부패이기도 할 테다.

그 속에서 우리는 대체 무엇을 희망하고 시도해 볼 수 있을까? 죄송스럽게도, 나는 그 해답을 모른다. 그러나 「썩은 인터넷 가설」을 위해 준비하면서든 아니면 그 이전이든, 웹과 사용자의 부패를 지적하는 수많은 (이 글보다 더욱 뛰어난) 참고 자료 중에서도 유난하게 ‘해독’을 해법으로 제시하는 쪽은 언제나 불만이긴 했다. 마치 웹과 사용자 양편이 완벽하게 분리되어 ‘롤백’할 수 있다거나 그보다도 우리 사용자의 정신머리가 애초부터 완벽하게 순수했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듯 느껴졌으니까. 그러나 오히려, 동시대의 웹과 사용자가 공모하는 이 난국에서 빠져나가거나 심지어 이 상황을 돌려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용자로서 늘 불순하다는 점, 웹과 동기화된 이상 어느 정도는 썩어 있고 죽어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칠 듯이 답답한 화면 속의 창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상상하기가 아직까지 버겁다면, 썩어 들어가는 웹과 정신머리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그 안쪽에서라도 어떻게든 도피처나 제 집을 만들고 싶다면 말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죽은 인터넷 이론’ 같은 건 하등 무섭거나 섬뜩하지도 않다. 죽은 것보다도 무서운 것은 죽어 있으면서 살아있는 것 아니었나? 이 글이 만들어진 웹이 그러해 왔듯이,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읽고 있는 당신들이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