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8
CRITICISM
박경태

상상된 세대(론)와 탈계급적 문화정치의 무능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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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8
CRITICISM
박경태

상상된 세대(론)와 탈계급적 문화정치의 무능함에 대하여

스크린쿼터 축소 저지를 위한 범영화인 규탄대회(1999.06.18, 서울 광화문빌딩 앞) -집단 삭발을 한 후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영화인들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이 글은 마테리알의 제2회 오픈 스페이스(2023.4.9.)를 위해 준비한 발제문을 수정한 것이다.



‘한국영화 산업이 위기를 맞았다’고 하는 이야기는 2023년 2월, 한국영화감독조합 디렉터스컷 행사에서 최동훈, 윤제균 감독의 대화에서 시작됐다. 이 발언 이후 영화계 안팎에서 위기 진단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윤제균 감독의 발언은 산업의 중심에서 나온 ‘위기’라는 점에서 중요했지만, 더 흥미로운 점은 위기를 대하는 다양한 영화인들의 태도를 볼 수 있었던 점이다. 물론 재미난 이야기가 넘쳐나는 ‘K 콘텐츠’는 글로벌 OTT에서 저비용 고효율을 내며 위기론에 비켜서 있었다. 하지만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미국 국적 거대 OTT들의 인수합병, 구독자 수 감소 등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중이고 극장 기반 한국 영화인들은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 배회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어간다. 그렇다면 스크린쿼터 투쟁과 부산국제영화제 성공 이후 형성된 ‘한국영화’라는 정체성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한국영화’ 산업에 기대온 ‘한국 독립영화’ 또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이 꼬리를 문다. 파국에 관한 이야기는 새로운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그동안 당연하게 느꼈던 영화산업의 풍경이 낯설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우선 이것에 답하기 위해서 한국영화 산업에서 ‘시장이란 무엇인가?’부터 질문해야 한다.



◆ 공동체의 상상과 집합적 정치

그런데 생각해보면, 시장은 언제나 위기 속에 있기 마련이다. 흔히 시장을 ‘상품을 사고 파는 장소’로 정의하지만, 여기서는 ‘돈을 벌거나 잃는’, ‘증여와 답례’가 발생하는, 즉 빈부의 차이를 만드는 자본의 교환양식으로 보고자 한다.가라타니 고진, 『네이션과 미학』,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09. 참조. 이때 위기는 시장에 활력을 제공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면서 어떤 상품이 가치 있는지 환기해 새로운 시장으로 확장-이동할 수 있게 추동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위기를 통해 ‘시장’이 ‘정치’와 만나는 지점이다. 시장의 위기를 인식하는 방법에 따라 정치적 태도가 구별된다. 즉, 신자유주의 시대의 정치는 위기를 말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수사와 호명, 집단적 상상력이 마치 오랜 전통 속에 나온 사태의 본질인 양 동원되며 국가 거버넌스 기구, 영화제와 영화학교, 대기업과 시장의 호혜적 위계 질서에 의문이 발생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위기를 해석하는 방법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위기를 인식하는 방법의 목적을 묻는 것이다. 위기는 집단을 동원하기 위한 담론으로 종종 연결된다. 그리고 그 집단을 상상하고 펼쳐보일 때, 위기를 해석하는 크리틱이 발생한다. ‘너희의 위기와 우리의 결핍 또는 우리의 위기와 너희의 부도덕함’을 나누는 방식, 위기를 통해 경계를 설정하는 상상적 형식 만들기, 만약 집합행동이 성공한다면 이것은 역사적 기억으로 상승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위기를 매개로 그동안 수없이 많은 담론화 시도가 있었지만 성공한 경우는 드물다. ‘Korean New Wave Cinema’와 같은 성공한 담론만이 한국영화 산업을 실제로 움직이는 강력한 실체가 되었다.김소연, 『실재의 죽음』, 도서출판 b, 2008. 23-56쪽. 참조. 그러면 지금까지의 한국영화 위기 담론을 두껍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이고 가장 강력했던 위기 담론은 시장개방에 반대한 영화인의 연대를 통해 구성된 ‘한국영화(National Cinema) 지키기’라는 집합적 열광이었다. 80년대 후반 UIP 직배 반대 운동부터 20년 가까이 영화인들은 ‘미제국주의-헐리우드’라는 외부에 맞서 ‘한국영화’ 지키기에 나섰다. 반면 5공화국 권위주의 정권에서 ‘한국영화’는 식민지 남성의 오리엔탈리즘에 호소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모토를 기억하는가? 사실 ‘한국적인 것’의 시작은 1964년 한일협정과 71년 광주대단지 사건과 같이 재식민화에 대한 공포 그리고 근대화 과정에서 촉발된 위기의식을 통해 재발명된 개념이었다.김원, 「“한국적인 것”의 전유를 둘러싼 경쟁: 민족중흥, 내재적 발전 그리고 대중문화의 흔적」, 『한국사회사학회』, 2013. 참조. 하지만 한국적인 것의 합의는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민중’을 매개로 균열과 확장을 시도한다. 오리엔탈리즘에 맞서 비판적, 실재론적 리얼리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영화계는 민족문화를 억압하는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저항의 방법으로서 ‘한국영화’를 구성해 나갔다. 즉 한국 영화인들은 20여 년간 연대와 투쟁을 끈질기게 반복하며 국민국가의 문화 예술인으로 표상되어 왔다. 그 결과 생산하는 한국 영화인과 소비하는 한국 관객의 교환 관계를 통해 ‘한국영화’의 상상된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상품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서구를 향한 콤플렉스와 반제국주의의 열망이 동전의 양면처럼 등퇴장을 반복했다. 양적 경제, 민족 정체성과 같은 수사를 통해 헐리우드 지배와 한국영화 종말을 경고했던 영화인들의 위기예언은 모두 틀렸다. 다만 ‘한국영화’라는 상상된 상품 속에 한국영화, 영화인의 예술장이 마련되었다. 그 안에 86세대의 정치적 헤게모니 전략이 영화계 안에서도 빛을 발했다. ‘국내 시장’과 ‘한민족’이라는 명분은 신구 세대가 평화롭게 만날 수 있는 지점이었다. 그런데 86세대의 전략은 구세대 영화인이 보지 못한 것을 계산하고 있었다. 집단적 투쟁을 매개로 포스트 권위주의 정부에서 교섭권을 확보한 뒤 그들은 민관 거버넌스, 즉 영화진흥위원회 시대를 열어갔으며, 매력적인 투자 대상으로서 새로운 한국영화, ‘Korean New Wave Cinema’라는 개념을 비평적으로 분류해 가면서 구세대 영화인-단체를 제치고 무대의 주인공으로 부상하는 데 성공했다. 분류를 통한 선택과 배제의 담론 만들기가 성공한 것이다. 이 시점에 1992년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김대중 후보는 국회연설에서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이른바 ‘팔걸이 문화 정책’을 발표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탁월한 식견은 오늘날 한국 문화산업의 현상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다. 그는 대통령이 된 이후 매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영상 축전을 보냈는데 ‘팔걸이 정책’은 언제나 시장의 해법과 함께 등장했다. 대통령은 1999년 축전에서 “영화산업이야말로 굴뚝 없는 기간 산업,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하겠습니다”라며 2003년까지 1,500억 원의 영화진흥기금을 조성하겠다 약속했고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 ‘연설기록’ 참조(https://www.pa.go.kr/research/contents/speech/index.jsp). 이후 한국영화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함께 ‘단절’을 통해 제도권에 진입한 담론권력은 반대로 한국영화 100년의 새로운 전통을 재발명한다. 〈의리적 구토〉(1919)를 한국영화의 기원으로 공식화하며 100년사의 출발점을 〈아리랑〉(1926)에서 7년 앞당기자, 〈기생충〉(2019)의 성공으로 뜻하지 않게 민족사적 내러티브가 완성되었다.

‘대중’을 전복적으로 읽는 시도 또한 2000년대 초 새롭게 등장했다. 당시 유행했던 문화비평에서는 예술을 엘리트 문화와 대중예술로 구분하며 ‘대중’에게 변혁 가능한 정치성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이는 시장주의를 긍정하는 담론의 등장이었다. 순식간에 ‘민중’이란 구세대 단어는 ‘대중’에 의해 밀려났다. 사람들은 소비력을 갖춘 능동적인 민주시민으로서 시장과 정치 영역을 빠르게 옮겨다녔고 한국적 정치성을 담지한 ‘천만영화’가 그 증표가 되었다. 이 성과 앞에 86세대 영화인들은 시장의 성과와 정치적 명예,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풍요로운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엘리트 정치인들로 과잉 대표된 86세대론과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말이다. 86세대는 구체제 사람과 달리 자신의 세대를 거리에서 체험하며, 혁명적 집단으로 상상하며 생물학적 동일 세대를 한 집단으로 동일시했다. 민족과 계급 해방을 걸고 싸웠지만 역설적으로 내부의 계급적 적대는 누락시켰다. 대의를 위해 동일 세대 노동자,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과 함께 신성한 소명의식에 동원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담론 속에 수없이 등장한 노동자는 대자적 계급으로 존재할 뿐, 보이지 않는 실재였다. 현실사회주의 붕괴와 함께 가라타니 고진 식으로 말하자면, 입신출세로 나아갔다. 하지만 민주화 세대 혹은 86세대라는 공동체의 상상은 살아남아 진영논리의 단골 레퍼토리로 등장한다.



◆ 민주화 운동과 시장의 선택적 친화력

민주화 운동과 시장의 성공이 86세대에게 시대정신이 되는 순간, 합의의 정치와 시장의 성장이 우발적인 만남의 장을 형성하였다. 물론 86세대는 기성세대 권력을 넘어서는 데 부족했다. 사법, 행정, 언론, 경제 권력은 여전히 과거 세력에 속했다. 이승만이 이룬 친일, 반공 독재 국가와 박정희 시대 국가자본주의가 한국 보수를 지탱하는 두 다리였다. 반면 87 민주화 항쟁 이후 86세대는 현실 정치에서 제도 정치권력의 헤게모니를 확장해 갔다. 자유주의의 확장은 민주당의 확장이면서 동시에 시장의 성과로도 증명되었다. 즉 시장과 민주화 운동이 선택적 친화력의 호혜성으로 결합된 것이다. 그들은 지식기반 뉴테크놀로지 벤처 산업, 뉴미디어, 유통업 등 대기업 틈새로 스며들었고 성공한 사례가 속출했다. 그중 영화시장이 대표적이었다. 물론 한국사회 핵심 기득권과 비교하자면 여전히 주변부에 불과했지만, 86세대는 시장과 협력하며 전통적 보수 세력을 견제하고 세번째 기득권으로 등장하는 데 일단은 성공하게 된다. 이는 신자유주의를 매개로 한 민주화 세대가 한국의 세번째 보수로 성장하며, 동의에 기반한 문화정치가 가능해졌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사회의 계급은 세 축의 보수 진영이 가족과 학교, 직업 속에 분배를 통한 지속가능한 구조를 재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이후 세대에게 이 재생산 구조는 진입장벽이 높아진 것을 뜻했다. 물론 잘 안 보여서 그렇지 기존 보수진영 안에도 계급 간 적대와 배제의 긴장은 첨예했다. 반공과 산업화 세력 간의 빈부 차이는 극명하게 갈리지만 국가주의를 통한다면 그들은 화합의 길로 나갈 수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한국사회의 균질적 공간은 해방 이후 반공 국민을 거쳐 민중을 더해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는 상위 계급에 자신을 동일시 했다면 후자는 하위 계급에 자신의 존재 이유를 위치시켜 나간 점이다.

다시 영화계로 돌아오면, 영진위 공론장의 거버넌스,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과 정치적 시련이 반복되고 계속해서 영화제와 영화학교가 급증했다. 대기업 멀티플렉스 영화관도 기록적인 성장을 이뤄갔고 관람객도 이에 비례, 2013년부터 2억 표 이상이 팔리며 50%가 넘는 세계 시장의 유례없는 자국 영화 점유율을 기록했다. “2013년 이후 관객 수는 2억 1천만 명대 머물러 있다가 전년 대비 4.8%로 증가하며 2억 2천만 명대를 최초로 돌파했다. 한국영화 관객 점유율은 51.0%로 9년 연속 외국영화 관객보다 많았으며, 인구 1인당 연평균 관람횟수 4.37회로 세계 1위 수준을 굳건히 다졌다.”(영화진흥위원회, ‘2019년 영화산업 결산보고’, 2020.2.18.(https://www.kofic.or.kr/kofic/business/noti/findNewsDetail.do?seqNo=45538) 한국 영화시장은 헐리우드 지배라는 위기담론을 업고 천만영화를 목표한 제작 방식으로 재편되었다. 여기서 한국영화 산업 구조라 하면, 멀티플렉스 스크린을 보유한 대기업 독과점과 투자금융, 그리고 그 수익에서 운영되는 거버넌스 기관인 영화진흥위원회와 상징자본을 생산하는 영화제, 끝으로 재생산을 담당하는 영화학교를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제는 상업영화가 벌어다준 세금과 지방자치 덕분에 매년 성장해 갔다. 예산은 꾸준히 증가했고 월드프리미어 확보, 지원 작품 수의 폭증으로 영화제의 존재 가치가 평가되었다. 한국의 ‘저예산/ 예술/ 독립’ 영화는 매년 천여 편이 넘는 출품 수로 영화제 규모를 키워주고 월드프리미어의 실적을 채워주고 영화제로부터는 ‘한국영화’라는 상징자본을 받으며 호혜적 교환관계를 이룰 수 있었다. 매년 기록적인 영화 편수의 생산은 포트폴리오 영화, 졸업 영화를 쏟아내는 영화학교가 담당, 저예산/ 예술/ 독립영화의 산업예비군을 생산한다. 그로 인해 학교는 영화제 성과로 등급화되고 학생들은 제작비 유치를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지원금을 따내는 영업사원이 되어갔다. 물론 재력 있는 부모를 만나면 이런 수고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영화학교 학생들은 시장의 언어를 배우고 그를 통해 공적지원금을 벌기 위해 경쟁한다. 그들은 경매시장을 닮은 듯 보이는 공론장에서 평가당하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들의 심리적 스트레스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커지고 지원금을 따온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으로 나뉜다. 교수는 교육의 질적 향상보다 학생들의 실적 향상을 위한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 멘토링 프로그램이 넘쳐난다. 이제 문자 그대로 ‘독립’적인 방식으로 영화는 생산과 보급이 이뤄지지 않는다. 있긴 있지만 위치를 상실한 그 영화가 ‘있다’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 분업의 완성과 시장에서 결정되는 상상력

2000년대 영화시장은 수직계열화, 독점, 분업 등 구조조정에 성공하며 위기를 타개해 갔다. 그런데 감독은 여전히 분업되지 않았다. 한 영화를 창작하기 위해 감독은 오랜 시간 고통 속에 자신의 시나리오를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다 기적적으로 투자 받고 상업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 회전 속도를 떨어트리는 요소이다. 인간적인 감정노동과 지난한 시간, 불확실한 거래 속에 감독이 저작권마저 소유하는 것은 리스크임에 틀림없다. 될성싶은 감독을 만나면 그의 성장통을 지켜보고 다독거려 준다. 학교에서 만난 선후배 관계, 현장에서 만난 인간적인 관계의 지표들이 한국영화의 아비투스를 형성해왔다. 여기서 의도하지 않았다지만, 상당수 여성 영화인이 배제된다. 위기는 이런 감독과 제작자의 관계마저 조정하며 개입된다. 위기 관리의 첫 번째 목표는 감독의 저작권 일체를 양도받는 것이다. 즉 잉여가치-착취의 비율을 높이며 투자자에게 모든 저작재산권-IP를 부여하며 영화자본은 위기를 돌파해갔다. 이제 남은 것은 감독과 시나리오작가를 분리, 분업하는 일이다. 그래서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를 구분하는 일은 의외로 어렵지 않다. 저작권 여부이다.

그리고 영화산업이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기 때문에 위기가 온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2000년대 한국영화 위기는 시장의 질적 변화를 일으켰고 영화산업은 플랫폼 자본을 완성한다. 즉 하나의 영화에 투자하는 개인에게 영화는 하이리스크로 다가오지만 수직계열화를 완성한 기업은 천만영화 회전율을 일정하게 관리하면서 그 리스크를 줄여왔다. 이 과정에서 빅데이터의 관리와 분석 상당 부분을 영진위가 제공하고 극장-기업은 영화발전기금을 납부하는 교환관계를 이어간다. 공적 영역과 시장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지속가능한 발전, 즉 선순환의 고리를 완성한다. 따라서 자본의 입장에서 극장은 소비의 공간이 아니라 생산의 영역이다. 거대한 영화 플랫폼 자본주의는 멀티플렉스라는 장소 특정적 자원이 있기에 가능하다. 팬데믹 직전까지 스크린 수는 매년 늘어갔다. 공장 라인을 만들면 만들수록 관객 수도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가 임계점인지 모를 스크린 수는 늘어갔지만, 뜻하지 않은 팬데믹과 함께 신화는 무너졌다. 극장표 값을 줄여야 한다거나 홀드백 정책을 내야 한다든가 하는 고민은 오직 시장에서만 솔루션을 찾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하다. 소비자와 노동자를 이상적으로 나누는 경계가 실제로 있다면 좋겠지만 이런 시도는 자본주의 공동체의 상상물에 불과하다. 결국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담론의 하나일 뿐, 불평등의 구조는 은폐된다. 이렇게 시장의 위기는 스크린쿼터 이후 정체된 ‘한국영화’의 생산과 교환양식을 변화시킨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오직 천만영화만 선택적으로 보는 관객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 글을 수정하는 지금, 〈서울의 봄〉의 천삼백만 관객 돌파와 〈파묘〉의 극장 흥행이 새로이 시작되면서 한국영화 위기를 말하는 영화인도 사라지고 있다. 그러면 위기의 불안감은 사라졌는가? 호혜적 교환관계가 유지될 거라 안심하는 편이 차라리 정확할 것이다.



◆ 독립영화의 상상된 시장과 공적 상징의 정치

어쨌든 여기에 중요한 행위자로서 독립영화가 있다. 다른 진영에 비해 독립영화는 영화제를 제외하고는 산업이라 부를 수 있는 요소가 없다. 독립영화에도 자체적인 시장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영화를 유통하기 위해 입소문에 의존하며 배급은 멀티플렉스에 기생해야 한다. 독립영화 활동가들은 시장과 독립영화 생산의 장을 기능적으로 구분할 뿐 교환 관계에서 오는 재생산 전략은 보지 못하는 듯 하다. 아마 〈워낭소리〉, 〈두개의 문〉, 〈노무현입니다〉와 같은 성공 사례 이후 멀티플렉스 영화산업 시장을 독립영화 시장으로 오인하는 결과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독립영화 정책의 전략은 ‘한 번만 봐주십사’하는 빈곤의 홍보 전략만 남게 되었다. 급기야 독립영화가 블랙리스트와 같은 정치적 탄압을 경험한 후 그들의 선택은 ‘유통’이었다. 이내 영진위에서 ‘인디그라운드’라는 OTT를 지향하는 공공 홍보 플랫폼(2020)이 만들어지고 매년 20억 원 내외의 공적지원을 받고 있다.영화진흥위원회, 『2023년도 예산운영계획』 참조. 참고로 2024년 예산운영계획에 따르면 17억 원이다. 물론 이 사건은 독립영화가 한국영화계에 차지하는 위치가 중요해졌음을 반증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해 독립영화를 향유하는 시민이 증가할 수 있을까? 인디그라운드는 장기간 성과지표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맞는 말이다. 2021년도 인디그라운드 성과평가모델 개발 연구의 표 ‘인디그라운드 이해관계자 구조화’를 보면,독립미디어연구소 사회적협동조합, 『독립예술영화 유통배급지원센터 인디그라운드 성과평가모델 개발연구』, 2021, 22쪽. 공적지원 거버넌스를 통한 독립영화계 생태계 구축과 그로 인한 새로운 활동주체 양성, 협력기관 확대 그리고 관객 이용자 확보 등의 상향 발전단계식 선순환 구조로 파악하고 있다.

인디그라운드 이해관계자 구조화(출처: 독립미어연구소 사회적협동조합, 2021)
그런데 선순환이 무엇일까? 수요가 공급을 이끌고 공공 영역이 건강한 시장을 보장하는 구조가 아니라, 공적지원이 수요의 출발점이 되는 것을 선순환이라 말하고 있다. 만약 토대가 되는 공적지원이 없다면, ‘인디그라운드’라는 생태계는 어떻게 되는가? 토대와 상부구조 형식은 붕괴형 구조이다.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단 한 해라도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20억 원 내외 규모의 생태계는 유지/구축되기 힘들 것이다. 시장의 위기가 아니라 정치적 위기가 독립영화 정책을 좌지우지하는데, 이 또한 시장이 없음을 방증하는 꼴이다. 결국 장기지원을 보장받기 위해 ‘NPO 성과지표에 따른 역량강화’라는 복잡하고 어려운 분류표를 만들었다. 내부 이해관계자와 외부 이해관계자, 다시 말해 인디그라운드에 참여하는 행위자·단체들의 만족도 조사로 만족하고, OTT 스트리밍 수(얼마나 봤는가?), 대중인지도(‘독립영화’라는 말 자체를 아는가?) 상승 등은 주요 성과지표에서 제외되어 언젠가 이뤄야 할 목표로 한정한다. 만약 시장에서 해결책을 원하는 것이라면 스트리밍 수와 인지도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관객은 서비스 혜택을 받는 대상으로 한정되고 인디그라운드라는 연결망에 들어온 단체 혹은 본인 같은 독립영화 배급지원작 선정에 따라 지표가 평가된다면,본인 연출작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가 2022년 인디그라운드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작품에 지원을 받았다. 온라인 영화제로서 탑다운 방식의 진입장벽 높이기에는 성공한 셈이다.

영진위 독립영화 개봉 지원 또한 상업영화 형식을 닮아 있다. 상업영화 홍보 비용의 1% 이하(아마도 0.1% 이하) 수준만 다를 뿐 개봉할 때 그 형식은 동일하다. 손익분기점을 넘는 독립영화는 통계를 내기도 민망할 정도로 희박하다. 영화제의 풍경 또한 비슷하다. 팔리지도 않을 독립영화를 위해 마켓을 열고 피칭(pitching), 멘토링 프로그램을 넣어 젊은 감독들을 초대하여 시장을 전제로 한 교육을 제공한다. 이렇게 독립영화는 시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유통에서만 해결책을 찾고 있다. 시장이 없는 곳에서 유통 행사를 지원하면 수요가 발생하는가? 다른 형태의 독립영화 시장 정책은 불가능한가? 선순환을 원한다면, 아래에서 올라오는 정책이 필요하다. 즉 관객 개발을 위한 인프라 구축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방향은 다르지만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멀티플렉스 경영자는 1개관에서 영진위가 인정하는 예술·독립영화를 최소 60% 이상 의무상영 하도록 하는 법’을 민주당 최민희 의원이 대표 발의(2014)한 적이 있다. 즉 독과점에 대한 규제법으로 발의됐는데, 이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영진위가 법률자문과 현장의 소리를 담아 자료를 발간했다. 장서희 변호사는 ‘직업선택의 자유 침해’와 ‘평등권 위배’를 들어 의무상영이 위법임을 강조했다. 그동안 대기업에게 골목상권부터 첨단산업까지 직업선택 자유를 무한히 열어줬던 터라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독립·예술영화 진영에서 나온 반대는 독립영화의 교환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징후로 다가온다. 원승환 당시 독립영화전용관 시민모임 대표는 “쿼터는 상영업자에게 강요”가 될 것이고 멀티플렉스가 독립영화관 관객을 빼앗아 갈 것을 우려했다. 엣나인 정상진 대표도 “쿼터는 시장을 침해하는 강요”라는 입장과 함께 “한국 관객의 성향이 오락영화에 있는데 그에 미치지 못하는 독립영화를 의무상영하면 역효과”라며 대기업을 걱정하고 있었다. 또한 고영재 당시 한독협 대표는 “실효성 있는 지원제도와 법을 만들라”며 지원을 특히 강조하며 반대했다. 이들의 아이러니는 독립·예술영화 배급을 대기업이 독점할 것이라는 걱정으로 이어진다. 결국 새로운 관객 개발, 상영관 확대 보다 중요한 것이 협단체의 독립·예술영화 정책 헤게모니를 뺏길 수 있다는 우려에 있었다. 만약 이 법이 통과가 됐더라면 최소 200개 이상의 스크린을 확보한 현재 독립·예술 영화계의 모습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규제법을 정비해 가면서 각 영화관에 지원제도를 도입, 스크린마다 신진 프로그래머를 양성하고 지역별 커뮤니티와 아카이브를 병행했다면 새로운 산업 기반에 따른 시장이 생성되지 않았을까?

나 또한 독립영화 시장 가능성을 간절히 바라는 입장이지만, 진부한 독립영화 진흥정책에서 이제는 파국을 본다. 요컨대 선순환, 브랜딩화 식의 경제적 용어의 남발은 굳이 ‘독립’이란 단어의 당위성에 의문만 제기할 뿐 새로운 상상력을 앗아간다. 신자유주의 시대 시장의 풍경이 그렇듯 공적지원이 시장을 일으키고 구매자가 되며 선순환의 책임자로 등장하는, 다시 말해 시장과 공공 영역을 혼동케 해 공공성을 위축시키는 길로 나가게 한다. 결국 수요가 공적지원에 한정되는 한 독립영화 시장의 위기는 없다. 그러니까 독립영화 유통해서 돈을 벌거나 잃는 사람이 있는가? 모두 공적지원에 의존해 독립영화 시장이라는 가상공간 속에 연기를 이어가는 한 어느 누구도 위기를 직면하지 않는다. 그나마 위기라고 한다면 소량의 공적지원에 의존해야 하는 만성적 빈곤 상태뿐. 이제는 독립영화 플랫폼만 진흥되는 실정이다. 다시 말해 ‘독립영화’라는 단어만 매개하면 시장과 공공성은 하나의 개념으로 번역 가능해진다. 결국 그들은 대중적 상상력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지만, 시장과 공공성을 하나로 만드는 상상에는 성공했다. 이유를 찾기 위해서 독립영화의 신자유주의화 과정을 들춰봐야 한다.



◆ 독립영화 ‘변방에서 중심으로’

표현의 자유가 억압됐던 시절, 독립영화는 영화의 정치적 가치를 생산하는 중요한 실천의 장이었다. ‘영화란 무엇인가?’를 질문할 때 이런 의미에서 독립영화는 누락될 수 없는 존재였다. 초기 영화진흥위원회의 공적지원은 상대적으로 약소했다. 1998년 정부 상대 교섭권 확보를 목표로 한 보편적 영상시민운동 단체로서 ‘한국독립영화협회’가 결성되었다.김명준, 「한독협은 어떻게 ‘조직적’ 협회가 될 수 있을까?」, 『독립영화』, 1999.5. 김동원 감독은 여러 반발을 뒤로하고 스크린쿼터 운동에 동참했다. 투쟁 참여는 교섭권 및 지분 확보와 연결된다는 점을 김동원 감독은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고은기, 「스크린쿼터 참관기」, 『독립영화』, 1999.9. 참조. 그 덕분에 독립영화는 〈우뢰매〉, 〈영구와 땡칠이〉 같은 어린이 코미디 영화와 달리 ‘한국영화’에서 누락되지 않았다. 참여는 성공적이었다. 스크린쿼터 운동은 밥그릇 싸움이라는 오명 속에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을 관객들로부터 요구받았다. 이때 한독협의 등장은 스크린쿼터 운동에 ‘문화 다양성’이라는 진보의 새로운 활력을 제공하며 정치적 명분을 확보, 헤게모니 투쟁의 승리를 견인했다.Young-a Park, Unexpected Alliances, 2015, Stanford University Press. 이후 독립영화는 한국영화의 위기마다 표현의 자유와 진정성의 상징으로 등장하곤 했다. 교섭권의 확보는 인디스페이스 극장 하나와 영화제, 소액의 제작 지원을 교환 혹은 쟁취할 수 있었다. 다만 스크린쿼터 내부에 독립영화 스크린쿼터는 인정되지 않았다. 대기업 극장의 수익률을 넘어선 요구는 (정부로부터) 인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독립영화는 한국영화 제도 속에 절반의 인정만을 얻은 셈이다. 이마저도 상업영화가 벌어온 돈을, 비록 세금이지만, 독립영화에 쓴다고 힐난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 아무튼 정치적 처세에 성공하면서 그는 한국 독립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 되었다. 그는 방송다큐나 시장과 만나는 접점에서 독립다큐계에 유연한 태도를 요구했다.김동원, 황철민, 「indie special 01」, 『독립영화』, 2003.11.10., 67쪽. 한때 아마추어 영상으로 폄하당하던 독립다큐는 영화제와 개봉 지원, 방송진출을 통해 점차 환대받는 존재로 입지를 굳혀갔다. 시장에서의 성공이 정치적 동의로 확대되는 과정은 여기서도 반복된다. 약간의 뉘앙스의 차이라면, 상업영화에서는 시장의 흥행이 정치적 동의의 방증이라면, 독립영화에서는 정치적 승리를 위해 시장의 동의를 얻는 것이 목표가 된다. 초반에만 해도 여전히 이상을 쫓는 독립 영화인이 상존했기에 탈계급적 문화정치는 진통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독립영화 또한 새로운 정치적 명분을 만들며 시장을 향해 늦은 출발을 서둘렀다.

잘 알려졌다시피 김동원 감독은 웰메이드 영화에 반대한다. 반대하는 정도가 아니라 독립다큐와 웰메이드 영화는 상충되는 존재라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피칭 제도를 들여오는 데 적극적이었으며 이를 독립영화계의 새로운 풍경으로 발전시켰다. 이제는 독립다큐계에서 마켓과 피칭은 상식이 되었다. 처음 웰메이드 영화라는 말은 영화운동 초창기 급진적 86세대 영화인에게서 나왔다. 당시만 해도 기술적으로 최소한 볼 수 있을 정도는 돼야 한다는 요구에서 나온 ‘웰메이드’였다. 하지만 웰메이드는 충무로 제도권 영화로 표상되며 급진적 영화인들의 헤게모니 장이 되었다. 영화가 대중을 계몽하여 해방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충무로를 잠식해 들어가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때 급진파들은 “반제국주의, 계급 해방과 같은 선명한 목적을 둬야 한다”민족영화연구소, 『민족영화』, 친구, 1989. 주장했고 제도권과 거리를 둔 독립다큐 같은 민중문화 영화인들은 낭만주의자로 평가됐다. 그런데 이 독립다큐멘터리도 제도화 과정을 거치면서 시장을 만나게 된다.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영화인을 만나 교류하려면 마켓을 가야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곳에 가면 생산자와 구매자를 연결하자는 취지로 피칭 행사가 열리고 ‘디시전메이커’라는 이름의 심사위원을 공적지원을 통해 국제적으로 모셔와 시장 분위기를 고취시킨다. 물론 다큐멘터리 시장이 활성화돼 있다면, 경매 시장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은 다큐영화를 안정적으로 상영할 극장과 채널이 없어 수익원을 찾을 길이 없다. 게다가 방송국은 외주제작 시스템에 따른 업무상 저작물 등의 이유로 저작권을 독점하면서 굳이 유럽식 선구매에 뛰어들 이유도 없다. 오직 OTT에서 선구매와 함께 배급이 이뤄지지만 극소수의 작품과 한정된 소재에 머문다. 그래서 영화제 마켓에서 계약 성과는 얼마나 될까?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해외 합작 영화 외에 성과는 없어 보인다. 문제는 다큐멘터리 해외 합작품에 한국의 공적지원 규모가 적지 않고 정부 지원이 해외 투자 발생이라는 성과를 홍보할 수 있어 윈윈하는 시장처럼 보이는 데 있다. 그런데 해외 투자금은 얼마이며 어떻게 계약이 이뤄지는가? 만약 한국의 한 제작자가 해외 제작사에 투자-입금하고 그 비밀스러운 투자금이 한국 공공기관으로부터 해외투자로 인정받아 거액의 공적지원을 받고, 다시 그 공적지원으로 다른 해외투자처를 넓혀간다면, 결국 해외투자 없는 해외펀드 시장의 불공정 행위는 누가 제어할 수 있을까? 그리고 피칭 행사 또한 신진작가들은 아낌없이 자신의 아이템을 던져야 하는데, 만약 멘토 중에 그 아이템을 갈취해 자기 영화로 만든다면 행사 기관은 그것을 제지할 능력이 있을까? 그래서 시장의 조건은 판매자와 유통업이 만나는 행사에 있지 않고, 아래에서부터 인프라를 구축할 극장 설립과 함께 창작자의 저작권 보장에 따른 구매자의 확보와 아카이브를 통한 공공상영 확대부터 갖춰야 하는 건 아닐까.



◆ 한국적인 영화의 종말?

끝으로 위기 담론으로 돌아와서, 시장의 위기론 앞에 잠시 그 파국을 즐기고 싶지만, 공공성이 시장의 그늘 아래 존재하기 때문에 시장의 파국은 터전의 상실처럼 느껴진다. 위기를 말하는 영화인도 소수에 불과하다. 스크린쿼터 운동만 예를 들었지만 한국영화의 위기론은 언제든 등장한 화법이었다. 영화의 위기라기보다 영화 진영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앞다퉈 영화 위기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 위기 담론은 그때와 비교해보면 시장의 변화 앞에 있기 때문에 전환력을 보유한 영화인이 이번 위기 앞에 살아남고 번영을 이어갈 것이다. 시장과 소비 취향의 집단적 변화에 따라 구조조정을 앞둔 영화계의 현실에서 자본이 있는 자는 새로운 매체로 전환해갈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 한국영화 산업은 OTT 산업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소위 ‘토종 OTT’가 가능할까? 넷플릭스에서 한국 콘텐츠는 아시아의 가입자 수를 유지 성장시키는 디딤돌 같은 역할로, 작은 비용으로 고수익을 얻는 매력적인 IP 상품이 되었다. 넷플릭스를 제외한 모든 OTT가 적자 상태에 빠진 이때 승자의 관심사는 전 세계의 모든 정체성을 소비할 수 있는 다양성을 확장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OTT의 본질은 시차와 외국어를 뛰어넘는 초국적 다양성, 또는 플랫폼 자본주의에 있지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소위 토종 OTT는 국민국가 내부의 극장을 인터넷으로 연결하는 일차원적 상상일 뿐 넷플릭스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물론 아시아 시장을 노리고 있다지만, 아시아의 국가들은 이미 다양한 자국 OTT를 보유하고 있다. 헐리우드 콘텐츠에서 유래된 미국 국적 OTT를 제외하고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OTT는 나오지 않았다. 만약 내셔널 영화에서 글로벌 콘텐츠로 굳이 질적 변화를 감행해야 한다면, 글로벌 플랫폼은 누가 어디서 만들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닉 서르닉, 『플랫폼 자본주의』, 심성보 옮김, 킹콩북, 2020, 44-55쪽. 글로벌 플랫폼은 시장을 직접 만들지 않는다. 비물질 노동, 컨텐츠, 정보인프라 구조를 만들면서 시장을 매개한다. 말하자면 시장의 시장이다. 그동안 민족영화로서 쌓아온 한국영화, 김대중 대통령이 말한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은 대상의 뜻하지 않은 수혜자는 글로벌 플랫폼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물론 그 OTT 플랫폼 또한 지속가능한지는 두고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