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7
ESSAY
김얼터

‘의제 부재’라는 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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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7
ESSAY
김얼터

‘의제 부재’라는 의제

내가 앞서 발표한 몇몇 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나는 90년대생, 나아가 소위 MZ 세대로 지칭되는 특정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의제를 형성할 수 있는, 실체가 있는 집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런 종류의 호명이 어떤 식으로든 유리하다면 호응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들은 제각각 자라왔으며 어긋남으로 둘러싸여 있고 우리의 환경을 대하는 태도도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미술계를 절망스러운 막다른 골목으로 보겠지만 누군가는 이곳을 아직 탐험되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볼 것이다. 이들을 묶는 일은 유의미한 지반이 될 것 같지 않다. 이 전시에, 이 행사에, 이 책에 90년대생 작가, 기획자, 비평가가 몇 명이나 포함되었는지 계산하는 일은 유용하지도 유효하지도 우아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우리 주변의 무엇에 관하여 말하거나 쓸 수 있을 것인가? 말하기나 쓰기의 전략적인 입장은 어떻게 설정되어야 할까? ‘의제 부재’라는 의제가 우리 앞에 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뛰고 있는 이 필드의 몇 가지 조건을 좌표로 만들어 보고자 한다. 편의를 위하여 두 개의 조건을 설정하였지만 사실상 악순환의 두 항일 뿐이므로 각 조건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공간의 이름과 콜렉티브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것이 맞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쳤으나, 최종적으로는 쓰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특정인, 특정 단체, 특정 공간에게 비판을 가장한 비난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구조를 명료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건 1. 전시 공간

2018년 영등포에 위치한 전시 공간 2/W에서 진행된 전시 《호버링》의 연계 출판물 『호버링 텍스트』에서는 다음과 같은 설문조사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 어떤 공간에서 개인전을 하고 싶은지 물어봤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 1위가…… (…) 1위가 시청각이었죠. 2위가 아마도 예술 공간, 3위가 아카이브 봄이고, 4위가 우정국인가…….”강정석, 권시우, 윤태웅, 황재민, 「강정석 작가와의 대담」, 『호버링 텍스트』, 권시우 외 지음(서울: 미디어버스, 2018), 268.

이러한 설문 결과는 현재에도 유효할까? 당신이 작가라면 전시 공간 선정을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가? 특정 기획자나 작가가 어떤 공간에서 어떤 내용의 전시를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되는가? 어떤 공간의 전시를 꾸준히 관람하고 있는가?

2018년과 비교할 때 전시를 위한 공간 선정에 있어 많은 고려 요소들이 달라졌다는 인상을 준다. 과거에는 공간의 물리적 위치와 미술계 내 위상 및 포지셔닝, 공간의 정체성, 공간이 표방하는 의제가 전시 공간 선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면 현재에는 공간의 생김새와 운용할 수 있는 예산의 범위가 가장 큰 고려 요소가 아닐까 추정해 볼 만하다. (이때 공간의 생김새란 공간이 공사장 폐허처럼 생겼냐, 화이트큐브와 비슷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전시 설치에 필요한 제반 요소를 갖추고 있느냐의 문제다. 예컨대 전자 장비를 사용하는 작가들의 경우 전선을 딸 수 있는 구석이 전혀 없어서 전문 테크니션이 반드시 필요한 공간을 한정된 예산 안에서 전시 공간으로 삼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공간에 방문할 때 때로는 이런 공간에서라도 전시를 하는, 그리고 이런 공간에서 전시를 하며 행복해하는 작가들을 보며 씁쓸하기까지 하다.) 공간을 기반으로 전개되었던 2010년대 미술계 내 일련의 움직임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용적 측면에서든 공간 운영의 방법적 측면에서든 일종의 콘셉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 콘셉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공간을 기반으로 모여 담론을, 최소한 담론이 될 만한 의제들을 발굴하고 제안했다.

2018년으로 돌아와서. 당신이 전시를 할 수 있는 기금을 마련해 예산을 편성하는 중이라면 대관료는 전체 예산 중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항목일 것이다. 이제는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를 잡은 예술창작 지원제도와 부동산 가격의 상승에 따라 대관료 또한 상승하여 ‘대관 장사’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러나 이 말의 실체는 단순히 대관료가 너무 비싸다는 의미가 아니라 각 전시 공간에 고유한 성격이나 색상이 없고 전시 공간만을 제공하기에 전시하는 자와 전시 공간 사이에 어떤 시너지 효과도 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소수의 비영리 전시 공간들, 내가 전국의 모든 전시 공간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몇몇의 비영리 전시 공간을 제외하고서는 하나의 의제를 심도 있게 다루거나 강력한 발화 의지를 표명하는 공간을 보기 힘들다. 어떠한 문제의식하에 설립되고 운영되며 퀄리티 있는 자체 콘텐츠를 생산할 능력과 인프라를 갖춘 공간도 마찬가지로 보기 힘들다. 아무런 기반 없이 단지 공간만 제공하는 오픈 콜은 공간의 자체 콘텐츠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한 메리트인 것처럼 인스타그램에 광고를 올리는 것이 현실이다. 비영리 전시 공간에서 주류 전시 공간인 국공립 미술관으로 넘어가는 중간 다리인 사립 미술관들의 오기능, 비기능도 문제가 있다. 서울의 그 많은 사립 미술관들 중에서 최근 몇 년간 끈기를 가지고, 최소 일 년만이라도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여 담론을 형성하려 시도한 미술관은 몇 개나 될까?

청탁 받은 글 방향을 생각하여 신진 작가로 폭을 좁혔지만 위와 같은 판단은 90년대생이 전시를 꾸리는 상황에 한정된 기술이 아니다. 신생 공간 이후의 신생 공간들에서 중견 작가의 전시를 본 적 있는가? 원로 작가의 전시는? 최소한 자기가 묶여 있는 세대 바깥의 작업자들과 함께해 보려는 움직임은? 이런 상황에서 90년대생만을 호명하는 일은 정말로 필요하고 유효할까. 그보다는 미술 실천자라는 이름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이는 것이 조금 더 유리할지도 모른다. 세대를 아우르는 모임에 있어서는 두 가지 제언이 가능하겠다. 일, 상징 자본에 쫄지 말자. 어차피 제도 앞에 우리의 목소리는 모두 같은 볼륨이다. 이, 그렇다고 분노나 시비조로 일관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사춘기가 덜 끝난 것처럼 보여 불리할 것이다. 침착하고 상냥하지만 날카로운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어쨌든 2019년 즈음에는 작업자들이 물리적 거점인 공간을 버리고 콜렉티브로 그 중점이 이동한 듯했는데, 미술 전문 잡지 『미술세계』는 당시 미술 콜렉티브들의 활동에 주목하며 각 콜렉티브들의 인터뷰를 수록했다.「2019 콜렉티브 작동법① 고고다다 큐레토리얼 콜렉티브」, 『미술세계』412호, 2019년 3월,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9937669&memberNo=46017567 콜렉티브들의 출현을 신생 공간 이후의 흐름으로 맥락화하며 얼토당토않는 세대론을 투사하여 강제로 호명하기보다 콜렉티브의 활동과 그 방향을 조명하고자 했다. 콜렉티브가 신생 공간을 대체했는지에 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남는다. 물리적인 공간에는 불특정한 다수의 사람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으며 그 때문에 공(共)을 위한 곳이라는 느낌을 준다면 비물리적 공간인 콜렉티브는 대부분 멤버의 수가 고정되어 있고 사적인 활동을 위한 느슨한 거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 콜렉티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여전히 목소리를 모으고 있는 콜렉티브들이 있는가 하면 모임의 동력을 잃고 공중분해된 듯한 콜렉티브도 있다.



조건 2. 작품과 전시의 퀄리티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조건 또한 산업화된 예술창작 지원제도에 따른 결과이며 조건 1과 무관하지 않다. 현행 예술창작 지원제도의 예산 규모는 작게는 200만 원, 크게는 최대 3,000만 원까지 다양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약 800만 원에서 1,400만 원 선이 신진 작가들의 개인전을 위해 제공되는 일반적인 금액이라 볼 수 있다. 서울문화재단의 경우 5년 이하 경력의 작가와 기획자, 비평가들을 A트랙으로 묶어 1,000만 원 내외의 지원금을 제공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경우 청년 트랙에 선정된 작가들에게 역시 1,000만 원 내외의 지원금을 제공한다. 전시 공간 대관료의 경우 적은 곳은 1주일에 70만 원 정도이지만 규모와 어느 정도의 제반 사항이 갖추어진 곳, 경쟁률이 높은 곳이라면 1주일에 200만 원을 지출해야 하기도 한다. 각 작가마다 필요한 전시 규모는 작업에 따라 다를 텐데, 천편일률적인 지원금 규모는 결국 작업과 전시의 퀄리티에 혹은 퀄리티의 동질화에 영향을 준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업과 전시도 나쁘지만, 더 나쁜 것은 물론 후자다.

비영리 전시 공간에서 진행되는 작업들의 크기는 대부분 고만고만한 수준이다. 일반적으로 제도권 밖 전시장에는 작품용 출입구가 갖춰져 있을 리 없기 때문에 작품은 전시장의 좁고 굽은 통로 안으로 반입 가능할 만큼의 크기를 가져야 한다. 혹은 작은 단위로 제작되어 전시장 안에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어야 할 것인데, 이 경우 설치 일정이 문제가 된다. 대관으로 전시를 진행할 시 실질적으로 주어지는 설치 기간은 길게는 일주일부터 짧게는 하루나 이틀에 이른다. 이 기간 동안 목표한 최종 설치를 위해서는 더 많은 인력이 투여되어야 하고, 여기에도 또한 예산이 배정되어야 한다. 물론 작은 크기더라도 놀랄 만한 퀄리티를 보여 주는 작업들은 언제나 있다. 그러나 이 정도 규모의 예산 안에서 전시의 마무리이자 작가의 최종 성취로 취급되는 도록까지 퀄리티 있게 제작하기란 단적으로 말해 무리다. 전시 제작의 파트너가 되어줄 기획자와 그래픽 디자이너도, 첫 번째 외부 관객이 되어줄 비평가도, 작가의 작업을 충분히 숙고할 만한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필수적이지만 예산 안에서 감당하기에는 벅차다. 결국 모두가 모두의 너른 양해를 구하며 최소한 착취당한다는 기분이 들지 않게 착해지게 되거나 무언가를 포기하게 되고, 전시가 끝난 작가는 소진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는 제도 차원에서나 당사자들 차원에서나 정말로 재고되어야 하는 문제다. 예술창작지원제도의 다른 방법을 구상할 때이다.

조건 1과 마찬가지로 이는 비단 90년대생만의 문제가 아니다. 삼십 대 작가도 있고, 사십 대, 오십 대, 육십 대 작가도 있다. 비슷한 나이대의 작가들이 비슷한 예산으로 전시를 꾸려야 한다는 것은 동세대 작가들의 작업과 전시를 다 고만고만한 수준으로 동질화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진다는 점에서 미술 실천자들 공통의 문제이다. 불특정 다수로 묶인 우리가 겨냥해야 하는 것은 제도이지, 남의 밥그릇이 아니다.

비평 또한 마찬가지이다. 현행 예술창작 지원제도에서 비평은 거의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게토라고 볼 수 있는데, 비평계 내부적으로는 양질의 유의미한 비평을 생산하든 생산하지 못했든 예술에서 작품 밖의 글쓰기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사람들에게 잘 알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글쓰기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합의가 거의 절망스러운 수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울문화재단의 원고료는 원고지 1매당 12,000원이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원고료는 원고지 1매당 12,500원이다. 경력에 따른 원고료 차이는 없다. 즉, 박사까지 공부한 선생님이든 갓 비평을 시작한 사람이든 동일하게 12,000원 선이다. 『한겨레』의 한 기사에서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1~4인 임금노동자 가구가 일상 유지를 위해 필요한 최소 금액은 247만 원이다.신다은, 「“노동자 한달 최저 생계비 247만원… 시급 1만1860원 해당”」, 『한겨레신문』, 2022년 5월 24일, https://www.hani.co.kr/arti/society/labor/1044165.html 이 금액을 벌기 위해서 비평가는 한 달에 200자 원고지 기준 약 197.6매를 써야 하는데, 글자수로 따지자면 39,520자이다. A4 1쪽은 약 1,495자이며, 그러니까 약 26.4347826장을 매달 써야 한다는 뜻이다. 참고로 서울문화재단에서는 A4 1쪽을 700자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 규정에 따르면 약 56.4571429장을 써야 한다. 과연 가능한 일인가?



나는 언젠가의 전시 서문에서 신생 공간 이후 우리의 상황에 관하여 “지금은 지금일 뿐 좋지도 나쁘지도 이상하지도 않죠.”라고 썼다. 이 견해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이곳이 되돌릴 수 없는 폐허도, 인위적이고 고상한 취향으로만 도배된 정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는 그냥 우리가 서있는 곳일 뿐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목소리가 커진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누구를 어떻게 모을 것인가에 관한 문제에서 90년대라는 좁은 범주에 집착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세대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집합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그러나 환대와 공감을 토대로 했던 기존의 연대 방법론은 냉소와 농담으로 구성된 우리 시대에 적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순진해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