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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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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조각

제69회 플래허티 필름 세미나 포스터, 플래허티 필름 세미나

플래허티세미나는 ‹북극의 나누크 Nanook of the North›(1922)와 ‹아란의 사람들 Man of Aran›(1934) 등을 연출한 다큐멘터리 감독 로버트 플래허티 Robert J. Flaherty 사후 그의 아내인 프란시스 플래허티 Frances H. Flaherty가 기획해 지금까지도 매년 개최되는 세미나로, 주로 뉴욕에 근거지를 두고 세미나를 진행해 왔다. 세미나의 스케줄이 꽤 혹독하지만, 초청되는 게스트와 펠로들뿐만 아니라 일반 참여자들이 가진 논픽션 필름메이킹에 대한 열정도 상당하며, 몇십 년 동안 꾸준히 방문하는 ‘베테랑’ 참여자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세미나 시작 전까지 상영작과 게스트를 공지하지 않아, 상영관에 앉아서 실제로 영화가 상영되기 전까지는 무엇을 볼지 아무도 모른다는 기획을 고수해 개최자인 프란시스 플래허티가 제안한 “선입견 깨기(non-preconception)”의 전통을 단단히 지켜가고 있다. 모두가 평등한 환경에서 세미나를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 큐레이터와 게스트, 세미나 관계자, 펠로, 일반 참여자가 구분 없이 같이 상영관에 앉아 토론한다. 플래허티 세미나의 상영작들과 뒤따르는 토론은 그 수준이 다들 높지만, 기본적으로 이 세미나는 영미권 학계에서 후원하고 기획하는, ‘백인 학계’의 연장선이라는 것을 확실히 밝히고자 한다. 하지만 이번 해는 최초로 아시아에서 진행해 태국영상자료원과 협력했으며, 아시아계 큐레이터인 메이 아다돌 인가와닛 May Adadol Ingawanij와 줄리언 로스 Julian Ross가 “코뮌으로(To Commune)”라는 테마 하에 지구 남반부와 아시아권을 연결하는 기획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원래 세미나의 시작점에서 크게 앞서갔다고 볼 수 있겠다.“To Commune”이라는 원제는 “이야기를 나누다”, “마음을 통하다” 혹은 “교감하다” 등으로 번역이 될 수 있겠지만 “꼬뮌(Commune)이라는 장소로 향한다”는 의미로 번역해 서술한다.

첫날 저녁에는 오프닝 필름으로 탐롱 루자나판드 Thamrong Rujanaphand 감독의 ‹야생의 정글 Tamone Prai›(1959)이 변사 퍼포먼스와 함께 야외 공간에서 상영되었다. 태국 남부의 무슬림 마을에서 벌어지는 킹콩의 습격을 표현한 슬랩스틱 코미디 영화로, 영어 자막이 없이 상영되었다. 태국인 참여자들을 제외한 (그리고 플래허티 세미나의 주류 구성원이라고 할 수 있는) 영어 사용자를 비롯하여 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관객들은 이미지와 소리의 혼합만으로 그 내용을 가늠하며 영화를 봐야만 했다. 비영어권 관람객들이 자막 없이 영미권 영화를 보는 경험을 반대로 선사해, 슬랩스틱 영화를 능가하는 속시원함이 있었다. 둘째 날부터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Korakrit Arunanondchai의 ‹웃긴 이름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찬 방에 역사는 없다 5 No History in a Room Filled with People with Funny Names 5›(2018)로 본격적인 세미나 상영이 시작되어, 야마시로 치카코 山城知佳子, 리아르 리잘디 Riar Rizaldi, 스리와나 스퐁 Sriwhana Spong, 호추니엔 Ho Tzu Nyen, 주마나 만나 Jumana Manna, 사이드 타지 파로키 Saeed Taji Farouky, 아라야 라스잠리안숙 Araya Rasdjarmrearnsook, 파이종 라이사군 Paijong Laisakul이 엿새 동안 게스트로 참여하며 상영작들과 함께 소개되었다. 이뿐 아니라 고레에다 히로카즈 是枝裕和 감독이 연출한, 대안 교육의 일환으로 송아지를 기르는 초등학생들이 주인공인 ‹또 하나의 교육 もう一つの敎育›(1991), 레바논 난민 캠프에서 생활하는 팔레스타인 공동체를 기록한 모하메드 말라스 Mohammad Malas 감독의 ‹꿈 The Dream›(1987), 우스만 셈벤 Ousmane Sembène과 티에르노 파티 소우 Thierno Faty Sow가 공동 연출한, 프랑스 식민지배령의 서아프리카군 학살 사건을 담은 ‹티아로예 캠프 Camp de Thiaroye›(1988)를 같이 큐레이팅하여 “코뮌으로”라는 주제에 걸맞는 상영작이 주류를 이뤘다.

이와 더불어 나를 충격받게 했던 건 태국영상자료원의 방대한 규모와 디지털 복원 기술이었다. 보존실 문을 열자 디지털 스토리지, 필름 보존고, 복원 작업실, 컬러그레이딩실 등 생전 처음 보는 공간과 장비가 눈앞에 펼쳐졌다. 의외의 부분에서 채용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느낌도 받았는데, 예를 들어 필름 복원 테크니션 채용 시 따로 요구하는 학위나 경력이 없으며 유럽권의 전문가를 초청해 테크니션 교육을 받게 해준다는 점이 그랬다. (태국에서는 영화 보존 전문가가 되기 위한 학위나 코스가 따로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모습과는 반대로, 영자원 앞에는 테마파크처럼 유럽식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영화사 체험관의 기능을 하며, 뜬금없이 에디슨과 뤼미에르 형제, 조르주 멜리에스 같은 유럽 영화의 유산들에 대해 설명해 주는 투어를 진행하고 있었다. 심지어 태국영상자료원의 기념품 가게 이름은 ‘머이브릿지 숍’이다! 아시아권의 영화 교육은 우리의 영화적 부모를 연구하고 가르칠 힘이 부족하지만, 그러므로 더 흥미로운 혼종성을 가지기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복잡한 사회적 맥락을 가지는 미국 영화 아이콘 ‘킹콩’이 ‹야생의 정글›에서는 그 맥락이 다소 소거된 채 등장한 점도 그렇다) 교육 기관에서 유럽권의 예술을 부모로 배운 아시아권의 창작자 중에 과연 몇 명이나 아시아권에 기반을 둔 자신의 정신적 근본을 떠올릴 수 있을까?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고아’ 창작자들이나 다름없어서, ‘애비 없는’ 레퍼런스들을 마구 섞기도 하고 직접 자신의 근본을 찾아가는 여정을 떠나기도 한다.

‹야생의 정글 Tamone Prai› 상영 기록, photo by Vinai Dithajohn, courtesy of The Flaherty.

게스트 작가는 일련의 분류 하에 초청되었다. 태국의 정치적 상황과 근대 역사를 신화적 상상과 카운터컬쳐로 조명해 풀어내는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주일미군의 오키나와 주둔에 따른 원주민 억압과 오키나와 여성성을 탐구하는 야마시로 치카코, 인도네시아의 지역정치학(geopolitics)적 역사를 장르 영화와 메탈 음악에 대한 애정을 섞어 이야기하는 리아르 리잘디, 자전적인 기억을 통해 발리계 정체성을 돌아보고 퍼포먼스 아티스트로도 활동 중인 스리와나 스퐁, 싱가포르 작가로서의 혼종적 정체성뿐만 아니라 아시아 근대 역사의 뒤죽박죽 함에 집중하는 호추니엔이 참여해, 한 작가 혹은 국적에 집중하기보다 아시아 정체성이라는 공통분모를 톺아볼 수 있었다.

또한, 팔레스타인 저항을 기록한 상영작들이 많이 소개되었는데, 현재 유럽의 정치적 상황으로는 팔레스타인 연대 큐레이팅을 쉽게 실시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점에서 태국영상자료원이 일종의 생츄어리(sanctuary)가 되었다고 느꼈다. 게스트로 초청된 주마나 만나의 ‹야생의 채집자들 Foragers›(2022)을 관람하며 등장인물들에 집중하고 빼앗긴 팔레스타인 땅 위에 뜬 보름달을 같이 보는 것은 실로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 상영관에 모인 사람들이 영화에 관해 토론한다고 해서 곧바로 가자 지구의 폭격이 멈추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슬퍼지기도 했다. 수많은 이미지로 팔레스타인 학살을 피부결처럼 느낄 수 있는 지금, 사이드 타지 파로키는 슬라이드 대부분이 검게 도배된 렉처 퍼포먼스 ‹죽음은 확실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다 Death is Certain But Not Final›(2023)를 통해 반대로 이미지 ‘없음’의 상태를 상상하도록 했다.

아다치 마사오의 ‹적군/PFLP: 세계전쟁선언›(1971)에서, 팔레스타인 활동가들이 “우리의 투쟁이 사실은 단 하나의 투쟁이기 때문에, 그 투쟁에는 끝이 없다. (It is because all our struggles are one single struggle, there is no end to our struggle.)”라고 언급한 것처럼 우리의 투쟁은 아주 과거로부터 진행되어온 단 하나의 투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투쟁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감화된다. 단순히 아시아권의 작품을 소개하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재진행형의 투쟁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해하려 노력했다고 느꼈다.

‹웃긴 이름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찬 방에 역사는 없다 5 No History in a Room Filled with People with Funny Names 5›: Image © Korakrit Arunanondchai 2024, Courtesy of the artist.

“코뮌으로”라는 주제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과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경험 자체가 굉장히 ‘코뮌적’이기도 했다. 함께 영화를 보며 웃고 우는 것만큼 사람들을 빨리 친해지게 하는 행위가 있을까? 6일이나 연속으로 그 경험을 반복하면 세미나 참여자들이 전원 영혼의 동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자신이 거점을 두고 있는 곳에서 “나만 이런 걸 만들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이런 영화 좋아하는 사람이 이 동네에 나 말고 있을까?” “누구랑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같은 고민을 지속하고 있었다. 마음 맞는 동료를 한 명도 찾기 어려운 지금 같은 시대에도, 플래허티 세미나에 가면 나처럼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온다! 영화를 보고 느낀 것을 국적과 직위를 넘어, 스스럼없이 얘기할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의견이 안 맞아서 엄청나게 싸우기도 한다!)

그럼에도 언어 장벽의 문제로 많은 태국 출신 참여자들이 토론에서 배제되었다. 주말 상영에는 일반 관객들도 입장이 가능했기 때문에 영화들에 태국어 자막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외의 상영과 토론은 거의 영어로만 진행되어 미국에서 진행되던 기존의 플래허티 세미나와 무엇이 다른지 고민하기도 했다. 이 경험은 나에게 정말 복잡한 감정을 안겨다 주었다. 내가 플래허티 세미나에 대해 미리 알고 있고, 상영작들을 이해하고, 토론에 영어로 참여할 수 있는 건 내가 한국과 영국의 교육 시스템을 통해 얻은 특권 덕분이다. 아시아권 창작자로서 같은 생각을 하는 동료를 만나고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그중 많은 수가 실제 교육은 영미권에서 받은, 소위 ‘유학파’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 고민은 우리 공통의 고민이었다. 영어로 소통하지 않고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할 수가 없어, 마치 모국어가 없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먼 친척을 찾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이 세미나는 태국을 거점으로 했음에도, 아시아권 창작자들 사이에서는 자생한 적이 없는 ‘외세 문물’로 여전히 작용하고 있었으며, 나 또한 플래허티 세미나와 같은 경험을 한국 내에서는 거의 느껴 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유학을 떠나 ‘외세 문물’을 배우고 한국으로 돌아와 임플란트(implant)가 된 나 자신을 괴상한 방식으로 깨닫는 장이기도 했다.

세미나의 후반부의 상영작 중 가장 충격적인 작품은 아라야 라스잠리안숙의 ‹수업 The Class›(2005)이었다. 아라야 본인이 칠판 앞에 서서 죽음에 대해 가르치는데, 그 앞에는 실제 무연고 사망자의 시신 6구가 누워 있다. 아라야가 아무리 죽음에 대해 영어로 설명해도, 이미 죽어 있는 시신들은 죽음에 대한 수업을 이해할 수도 없고 아라야의 말에 대답할 수도 없다. 아라야가 “수업 뒤에 토론하겠습니다.”고 안내하는 장면은 마치 아침부터 밤까지 토론으로 점철된 플래허티 세미나를 비꼬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는 그 뒤에 이어진 전체 토론에서 어떤 언급도 나오지 않은 데다, 시신에 대한 금기가 특히 상당한 한국에서 자란 나는 충격을 받고 점심을 먹으면서 주변에 앉은 태국 창작자들에게 쉴 새 없이 물었다.

“왜 태국 영화나 미디어에는 그렇게 시체가 많이 나와?”
타나킷타나킷 킷사나유뇽 Tanakit Kitsanayunyong, ‹열대 식물 Tropical Plant›(2021), ‹물에는 고기가 살고 논에는 벼가 자라네 There are Fish in the Water and Rice in the Fields›(2022) 연출.이 말한다. “우리는 원시인들(primitive humans)이니까.”
나는 더 혼란을 느끼고 다시 묻는다. “혹시 불교 때문이야?”
옆에서 차나손차나손 차이키티폰 Chanasorn Chaikittiporn, ‹당신이 두고 간 모든 것들 All the Things You Leave Behind›(2022), ‹여기에 우리가 있다 Here We Are›(2024) 연출.이 받아친다. “외국인들은 모든 게 다 불교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농담 같기도, 답답함을 토로하는 것 같기도 한 차나손의 대답은 내 귀에 계속해서 울렸다. 외국에서 태국 미디어와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엄청난 무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 외부의 시선은 태국인을 원시인으로 바라보는 걸까? 또한, 무언가를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에는 복잡다단한 교육학적 목표가 설정되어 있다. 과연 누가 그 기준점을 정해, 가르치고 배우게 하는 걸까? 나뿐만 아니라 많은 참여자가 ‹수업›에 대해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눴다는 점에서, ‹수업›은 전 상영작 중 내 인상에 가장 깊게 남은 영화였다.

‹야생의 채집자들 Foragers›: Image © Jumana Manna 2024, Courtesy of the artist.

‹수업›이 제일 격정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인 데 반해, ‹통판 Tongpan›(1977)은 모든 참여자에게 찬사를 받은 작품으로, 70년대 태국 북동부의 가난한 농민 통판과 그의 가족이 댐 건설로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과정을 다큐드라마의 형식으로 담았다. 댐 건설 청문회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하는 한 대학생 활동가에게, 통판이 묻는다: “청문회가 뭐요? (What’s a seminar?)” 대학생 활동가는 친절하게 답한다. “청문회는 많은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기 위해 모이는 자리요. (A seminar is many people coming together to talk.)” 내가 태국에 가기 전, 주변의 가족과 친구에게 플래허티 세미나에 간다고 했을 때 “세미나에 가서 모르는 사람들이랑 영화를 본다고? 보고 나서 같이 얘기도 한다고? 그런데 세미나가 뭐야?” 같은 질문을 들었던 장면들과 겹쳐 굉장히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통판›의 무대인 태국 북동부의 이싼은 지금까지도 태국 내에서 경제적으로 상당히 열악하며 미얀마나 라오스 이민자가 거주민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태국 안에서도 복잡한 차별을 경험해 온 지역이다. 또한, 1976년 탐마삿 대학살 이후 ‹통판›을 연출한 이싼 필름 그룹(Isan Film Group)의 많은 이들이 체포되거나 외국에 망명해야 했다는 점, 냉전 체제하의 태국 정부가 ‹통판›에서 공산주의적 분위기가 느껴진다며 상영을 금지한 적이 있다는 점에서 더 가슴에 사무치는 영화이기도 했다.

상영 뒤에는 이싼 필름 그룹의 일원이자 영화의 각본과 편집으로 참여한 파이종 라이사군이 영화를 완성한 과정을 설명했는데, 탐마삿 대학살을 거치며 편집 전의 ‹통판› 필름을 전부 들고 유럽에 건너가 난민이 되었으며, 원래는 런던 BBC를 방문해 필름을 팔려고 했으나 외국어로 제작된 영화는 구매하지 않는다는 BBC의 설명에 (“BBC는 돈이 없어요. 런던에는 쓰레기가 날아다니고!”) 스웨덴으로 건너가 방송국 관계자들을 설득하고, 그중 한 직원의 집 지하실에서 숙식하며 방송국 편집실에서 영화를 완성했다는 우여곡절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태국인 참여자들로부터 ‹통판›과 라이사군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와 존경을 느낄 수 있는 상영이었다.

플래허티 세미나가 태국에서 개최됨에 있어 가장 슬픈 건, 한 번은 태국에서 개최했으니 이제 아마 두 번 다시는 태국에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다음 해 플래허티 세미나는 과연 어디로 갈까? 한국에도 올까? 영미권 학계와 깊게 이어진 이 세미나가 그렇지 않은 나라를 ‘투어링’한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이들 또한 최초의 인류학자들이 그랬듯이 ‘원시인’을 기록하고, 그들에게 ‘외세 문물’을 전파한, 문화적 식민지배자의 타이틀을 획득하게 될까? 세미나가 진행되는 동안의 흥분과 기쁨을 서서히 벗어나 자기 자신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며, 이 세미나의 진짜 교육학적 목표는 무엇인지 조금 더 냉정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플래허티 세미나의 경험은 정말 특별하고 도움이 되었으며, 어느 나라 출신이든, 어떤 교육을 받은 사람이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더 열려 있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세미나 마지막 날, 나의 순진한 낙관주의를 산산이 부수는 사건으로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마지막 상영이 끝나고 큐레이터인 메이가 참여자들로부터 자유로운 후기를 말하게 하자 몇몇 사람들이 손을 들고 자신의 감상을 이야기했는데, 그 모든 후기가 완벽하게 정제된 학계의 영어로 발화되고 있었다. 메이는 “마지막으로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후기를 듣고 끝내겠다.”고 요청했고,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손을 든 이는 중국어로 짧은 인사를 하고는 다시 영어로 자신의 출신과 감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단 한 번이라도, 태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이해 못할 감상을 듣고, 나 또한 그 감상을 통역이 소거된 수수께끼 안에서 경청하고 싶었지만, 내 예상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 마지막 인상이 플래허티 세미나를 관통하는 지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통판 Tongpan› 상영 기록, photo by Vinai Dithajohn, courtesy of The Flaherty.

세미나가 끝나고 우리가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지금, 우리의 과제는 이 세미나의 경험을 자신의 거점에서 이어나가는 것이겠다. 내가 태국으로 출발하기 며칠 전에는 리튬 배터리를 만드는 화성 아리셀 공장에 불이 나 참사가 일어났다. 주한미군 부대가 위치한 지역의 피해는 용산에서부터 평택과 동두천을 아울러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 아직도 한국은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지 않았으며, 많은 수의 활동가들이 성 노동자를 동료로 인정하지 않고, 외국인노동자와 장애인의 기본권이 지켜질 일은 요원해 보인다. 내가 사는 서울만 해도 코뮌을 염원하는 마음이 가장 시급한 곳이 아닐까? 하지만 이 작은 서울에서도 수많은 분열이 매일 일어나는데 어떻게 단 6일간의 세미나를 통해 국경을 넘어선 코뮌을 찾는단 말인가? 우리가 이미 천 개의 조각으로 분열되었는데 어떻게 ‘하나 되기’를 상상할 수 있을까?

작년 한국의 영화제에서 같이 영화를 틀어 만났던 동료 작가 타나킷 킷사나유뇽, 일명 포를 다시 세미나에서 만났다. 세미나에서는 상영하지 않았지만, 포는 ‹물에는 고기가 살고 논에는 벼가 자라네 There are Fish in the Water and Rice in the Fields›(2022)라는 제목의 영화를 연출한 적이 있다. 이 제목은 람캄행 왕권이 일궈낸 태평성대, 혹은 유토피아적 나라를 그리는 태국의 속담이다. 그러나 영화는 2020년 태국 민주화 시위를 겪으면서 ‘고향’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가지는 태국인들의 목소리로 채워진다. 실제로 태국의 직장인 초봉은 한화로 월 60만 원 내외이지만 계급 간의 빈부격차가 상당해 태국인들이 느끼는 좌절감은 상당하다. 하지만 세미나 기간 만난 태국의 창작자들은, 혼란스러운 태국의 정치적 상황, 영화 검열 제도, 예술 지원의 압도적인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작품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태국의 창작자들은 ‘잘 먹고 잘사는 나라’를 넘어선, 자유로운 나라를 염원하고 표현해 나간다. 한국이 정말로 태국보다 더 잘 살고 자유로울까? 우리가 염원하는 자유로운 땅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6일간의 플래허티 세미나에 대한 후기를 쓰면서 지금 깨달았지만 나는 지금 참여자 전원을 ‘우리’로 부르고 있다. 아룬나논차이의 영화 제목처럼, 태국영상자료원 상영관이라는 큰 방에는 웃긴 이름을 가진 우리로 가득 차 있었고 이제는 그 이름들이 정사(正史)가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천 개의 조각으로 흩어져 돌아갔지만, 자신이 거점을 둔 곳에서 세미나의 경험을 다시 불러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 또한 언젠가 다시 만날 때까지 서울에서 코뮌의 기억을 유지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작업할 것이라고, 그 모두와 약속하기로 한다.

세미나 상영 기록, photo by Vinai Dithajohn, courtesy of The Flaherty.




제69회 플래허티 필름 세미나 프로그램 목록플래허티 세미나 홈페이지(편집자주)

🗓️6월 27일 목요일
🎥프로그램 1
• Tamone Prai (Savage Jungle) | Thamrong Rujanaphand, Thailand, 43 min, 1959

🗓️6월 28일 금요일
🎥프로그램 2
• No history in a room filled with people with funny names 5 | Korakrit Arunanondchai and Alex Gvojic (with Tosh Basco), Thailand, 31 min, 2018
• あなたの声は私の喉を通った (Your Voice Came Out Through My Throat) | Chikako Yamashiro, Japan, 7 min, 2009
• The Cloud of Unknowing | Ho Tzu Nyen, Singapore, 28 min, 2011
🎥프로그램 3
• Tellurian Drama | Riar Rizaldi, Indonesia, 26 min, 2020
• al-Yad al-Kadra (Foragers) | Jumana Manna, Palestine, 64 min, 2022
🎥프로그램 4
• Death is certain but not final [Performance] | Saeed Taji Farouky, Palestine, 52 min, 2023

🗓️6월 29일 토요일
🎥프로그램 5
• having-seen-snake | Sriwhana Spong, USA, 14 min, 2016
• Village and Elsewhere Artemisia Gentileschi’s Judith Beheading Holofernes, Jeff Koons’s Untitled and Thai Villagers | Araya Rasdjarmrearnsook, Thailand, 20 min, 2011
• もう一つの教育 伊那小学校春組の記録 (Lessons from a Calf) | Kore-eda Hirokazu, Japan, 47 min, 1991
🎥프로그램 6
• Monisme | Riar Rizaldi, Indonesia, 115 min, 2023
🎥프로그램 7
• Songs for dying | Korakrit Arunanondchai, Thailand/USA, 30 min, 2021
• A Magical Substance Flows into Me | Jumana Manna, Palestine/Germany/UK, 66 min, 2015

🗓️6월 30일 일요일
🎥프로그램 8
• A Thousand Fires | Saeed Taji Farouky, France/Switzerland/Netherlands/Palestine, 91 min, 2021
🎥프로그램 9
• Blessed Blessed Oblivion | Jumana Manna, Palestine, 21 min, 2011
• I Like Okinawa Sweet | Chikako Yamashiro, Japan, 7 min, 2004
• ทองปาน (Tongpan) | Isan Film Collective (Paijong Laisakul, Surachai Jantimatorn, Euthana Mukdasanit, Rassamee Paoluengthong), Thailand, 60 min, 1977
🎥프로그램 10
• Camp de Thiaroye | Ousmane Sembène and Thierno Faty Sow, Senegal/Algeria/Tunisia, 154 min, 1988

🗓️7월 1일 월요일
🎥프로그램 11
• OKINAWA 墓庭クラブ (OKINAWA Graveyard Club) | Chikako Yamashiro, Japan, 6 min, 2004
• The Class | Araya Rasdjarmrearnsook, Thailand, 17 min, 2005
• Hotel Aporia | Ho Tzu Nyen, Singapore/Japan, 84 min, 2019
🎥프로그램 12
• 土の人 (Mud Man) | Chikako Yamashiro, Japan, 23 min, 2017
• al-Manam (The Dream) | Mohammad Malas, Syria/Palestine, 45 min, 1987

🗓️7월 2일 화요일
🎥프로그램 13
• And the creeper keeps on reaching for the flame tree | Sriwhana Spong, UK, 5 min, 2022
• Painting with history in a room filled with people with funny names 3 | Korakrit Arunanondchai, Thailand, USA, 25 min, 2015
• The 49th Hexagram | Ho Tzu Nyen, Singapore/South Korea, 30 min, 2020
🎥프로그램 14
• a hook but no fish | Sriwhana Spong, UK, 25 min, 2017
• Kasiterit | Riar Rizaldi, Indonesia, 18 min, 2019
• チンビン・ウェスタン 家族の表象 (Chinbin Western: Representation of the Family) | Chikako Yamashiro, Japan, 32 min,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