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철승 교수의 흥미로운 논문 「세대, 계급, 위계: 386 세대의 집권과 불평등의 확대」(2019)는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의 책임을 86세대에게 묻는다. 그는 왜 오늘날 한국사회의 불평등을 세대론으로 설명하고자 하는지, 386세대는 어떻게 서서히 ‘집권’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이 다른 세대에 비해 갖는 특수성이 무엇이었으며 그들의 책임은 무엇인지 여러 자료와 도표를 해석하면서 차례 차례 밝힌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386세대는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 대학에 다니며 학생운동,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세대’이며, 해당 조어가 만들어졌던 1990년대에 30대였던 이들이다. 요즘에는 86세대라고도 한다. 이철승은 해당 논문에서 이들을 “짧게는 5~8년(80년대 초중반 학번), 길게는 7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대학을 다닌(혹은 노동조합 및 학생∙시민운동에 참여한) 10년에서 15년 정도에 걸쳐 응집된 정치적∙문화적 경험의 네트워크”로 정의한다. 그는 논문의 마무리를 다음과 같은 불호령 아닌 불호령으로 마무리 한다:
“산업화 세대의 다음 세대를 위한 배려는 한 가지였다. 바로 빠른 경제성장을 통한 일자리의 끊임없는 창출이었다. 386세대는 산업화 세대가 제약한 자유와 민주를 구하기 위해 그들을 치받았지만 부모 세대가 제공한 ‘풍성한 일자리’와 ‘일자리를 통한 복지’ 모델의 수혜를 받은 세대이다. 물론, 이 세대는 민주화를 이뤄냈을 뿐 아니라 한국경제를 세계화 시대에 적응시켰다. 그렇다면 그 수혜가 다음 세대로—어떤 형태로든—이전되어야 한다.”
2.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로 이어지는 한국영화비평/담론계를 이끌었던 이들 역시 넓게 보면 86세대로 묶일 수 있다. 따지자면 ‘전(前)기 86세대’인 것이다. 한국영화비평/담론계의 86세대는 또한 시네필 세대라고도 불린다. 청(소)년기에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을 들락거리며 시네필적 경험을 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한편 90년대 초반 PC통신을 통해 영화동호회사이트에서 활동한 이들은 한국 시네필 2세대로 구분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들은 다시 ‘민족/민중영화론의 운동진영’과 ‘대항영화론의 비평진영’으로 나뉜다. 전자가 서울대 영화 서클인 ‘얄라셩’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서울영화집단과 그 후신인 서울영상집단, 민족영화연구소의 맥락을 대표한다면, 후자는 80년대 이전부터 문화원의 영향을 받았으며 1984년 단 이틀에 걸쳐 열린 ‘작은 영화제’ 이후 결성된 “열린영화” 모임과 이어진 “영화언어”의 흐름을 대표한다. ‘운동진영’이 당시 한창이던 민주화 운동에 발맞춰 영화 ‘운동’에 대해 사고한 반면, 후자는 ‘한국영화’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지향하는 동시에 인상비평 등과 구분되는 비평을 위해 여러 영화이론들을 소개하고 이용했다. 이들이 공유하고 있던 것은 反헐리우드-反충무로에 대한 생각 혹은 의지였다. 86세대가 주도한 이와같은 흐름은 헐리우드의 아류라고 (그들이) 판단했던 충무로 중심의 주류 영화를 ‘대형영화, 큰 영화’로 두고 그 반대항으로서 자신들의 영화를 ‘소형영화, 작은 영화’로 규정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헐리우드나 충무로 영화에 저항하고 대안적인 성격을 띠는 영화들을 제작함과 동시에 그에 조응하는 새로운 영화적 담론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김정환(2008)이 지적하듯, 86세대의 비평적 방법론이 70년대의 그것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작가주의나 (신)형식주의적인 분석 패러다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설정한 대립축은 기존의 비평 담론이나 체계가 아니라 충무로로 대표되는 상업영화의 생산구조와 그 체계였다.
80년대에서 90년대를 거쳐 86세대가 주도했던 비평 담론계의 흐름에서 특이한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제작과 비평이 유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영화를 만드는 것과 영화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크게 분리되는 작업이 아니었고, 또한 비평을 하는 이들과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한 모임 안에서 활동하고 교류함으로써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 영화계가 해결하고 있지 못하는 제작과 비평의 유리를, 86세대를 본보기 삼아 해결할 수 있을까?)
3.
90년대 초중반을 거치면서 사회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 변화가 한국사회를 휩쓴다. 이 시기 영화계의 86세대는 80년대의 활동에 더해 본인들의 ‘세대적 운(luck)’을 타고 자신의 커리어를 한 단계 도약시킬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다. 먼저 문화연구의 부흥이 있다. 한국 학계에서 80년대에 등장한 비판커뮤니케이션학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상업적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성을 비판”[5]하고 “대중문화의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다양한 매체들을 동원하여 대항 이데올로기 생산”에 주력하였다. 그러다 90년대 초반 동구권 및 소련의 붕괴 이후 비판커뮤니케이션연구는 수정주의적으로 선회하게 되는데, 이에 따라 “상업적 대중문화 텍스트와 실천들 속에서 지배이데올로기성에 대한 비판의 근거를 찾고 의미와 가치를 재구성” 하는 작업을 전개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화연구라 불리는 것들이 한국에서 꽃피울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대중매체로서의 영화는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서뿐만 아니라 대중적 담론의 영역에서도 본격적으로 부상한다.
이와 맞물려 80년대 후반의 3저 호황과 그로 인해 증가한 중산층, 그리고 그들의 문화에 대한 관심 증대에 따른 중앙일간지들의 전략 변화가 있다. 증면의 과정에서 일간지들은 문화지면을 늘리는 동시에 다양화 및 세분화했고, 특히 당시 저널리즘 장의 후발주자였던 “한겨레신문”, “국민일보”, “경향신문” 등은 문화 연구자들을 외부 기고자로서 대거 기용하면서 새로운 문화 비평의 장을 만든다.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 영화비평계의 이정하, 이효인, 정성일 등이 일간지에 ‘평론가’라는 직함을 달고 기고를 했다. 중앙일간지의 대중문화 담론 흡수는 대중문화 담론의 장을 확장시켰고 이어서 문화담론 관련 신생 잡지들 또한 급증했다. 당시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에는 90년대 초반 동구권 및 소련의 붕괴 또한 한 몫을 했는데,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에 의해 마르크스주의적 ‘변혁담론’이 퇴조하고 대신 대중문화 내부에서 일종의 전복성을 찾는 문화에 대한 담론이 부상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학술지 시장은 사회과학 잡지들의 급격한 퇴조와 문화관련 신생 잡지들의 급증, 기존의 문학예술 잡지의 입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신진 지식인들의 등장을 포함하여 급격한 재구조화 양상을 나타냈다.” “상상”, “리뷰”, “오늘예감” 등의 신생 문화관련 잡지들이 창간되었으며, 영화비평계로 돌아와 보면 비록 학술지는 아니지만 95년 창간된 “키노”, “씨네21”, “프리미어” 등도 이와 같은 흐름에 부분적으로 힘입어 등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90년대 초중반 문화담론의 부상과 더불어, 국가와 시장에 의해 영화계에 대거 자본이 투입되기 시작하고 영화 기획, 영화제, 학교에 관련 인사들이 필요하게 되면서 이들 86세대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인정 투쟁의 장으로 진입하게 된다. 영화제의 기획자, 영화관련 학과의 교수, 학계의 연구자 등등으로서 각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4.
한국의 영화 문화에 86세대가 기여한 바는 무엇인가? 민주화 운동과 맞물린 86세대의 싸움 덕분에 영화계는 국가로부터 자율성을 얻게 되었다. 내외적으로 쇄신을 종용받던 충무로에, 그리고 또한 동시에 충무로 바깥에 새로운 영화적 흐름을 일으킨 것도 86세대였다. 더불어 90년대 초반 ‹쥬라기 공원›에 관한 국정보고서를 보고 자극을 받은 정부의 지원과 거대 자본의 유입, 세계화 조류의 도움(인 동시에 간섭)을 받으며 한국의 영화 문화를 동시대적 흐름에 영점 조정 시킨 것도 이들이었다. 그러는 사이 86세대는 더이상 ‘대안’이 아니라 ‘주류’의 자리에 서게 되었고, 새로운 과제를 떠안았다. 그 과제 수행에 대해, 자신 역시 86세대에 속하는 이효인은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평한다. “그 결과 그들[해당 논문에서 ‘한국 독립영화 2세대’]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개별적인 활동에 매몰됨으로써 애써 추구했고 그나마 구축하였던 정신적 비평 공동체 유지라는 책임을 방기하고 말았다.”
5.
비평이 ‘호황’을 맞았던 때는 없다고들 하지만, 그래서 비평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게 구태의연한 관습과 같은 거라고들 하지만, 과연 한국의 영화비평/담론계의 위기를 감지하는 것이 그리고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이상하고 억지스런 일일까? 읽을만한 글은 별로 없고, 대다수는 운동성을 잃은 정자(精子)같다. 아직까지 우리 젊은 비평가들에게 허락된 자리는, ‘선생님들’이 어렵사리 마련해준 지면의 한 구석이거나, ‘인디’의 자리이거나, 혹은 몇 안되는 ‘등단’의 자리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86세대를 벤치마킹할 수 있을까. 막연하게나마 ‘공동의 목표’나 ‘커다란 적’과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연유로 ‘세대적 공통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며, 그저 ‘세대적 불운’을 함께 겪고 있는 우리가.
영화평론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했던 이영일 선생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가며 90년대 중반까지 영화전문지 “영화예술”을 간행했다. 거기서 그는 “좋은 관객-좋은 영화-좋은 비평”의 삼각관계를 놓고 영화 비평과 이론에 관해, 더 나아가 영화 문화 전반에 관해 고민하였다. ‘좋은 비평이 없어서 좋은 영화가 없고, 좋은 관객이 없어서 좋은 영화가 없고, 좋은 영화가 없어서 좋은 비평과 좋은 관객이 없다’는 식의 의미없는 탓하기야 지양해야 할 것이겠지만, 만약 우리가 오늘날 새로운 비평을 쓰고/만들고 싶다면, 이 삼각관계를 염두에 두고 어디가 어떻게 삐그덕거리고 있는가에 대한 자신만의 진단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올해로 한국 나이 29세를 맞이하였고 나의 청년기가 끝나감에 애석함과 동시에 조급함을 느낀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더 늦기 전에 나의 청년 동료들을 모으는 것. 지금 나는 우정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 동업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일단은 우리의 불운으로부터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