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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연선

[비평의 비평] ‘씨네21식 비평’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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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연선

[비평의 비평] ‘씨네21식 비평’ 비판

비평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소문처럼, 그러나 그때마다 새로운 이야기처럼 떠돌았다. 자료들을 찾아보니 2001년부터 2019년까지 비평의 위기에 대해 말들이 오고 갔다. 이에 대해선 당연히 비평가들이 주로 떠들었는데, 비평의 위기의 원인으로 가장 많이 꼽힌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1) 소신있는 비평의 부재.
(2) 비평가들 간의 치열한 의견 교환의 부재.
(3) 비평 질의 저하.

‘소신있는 비평의 부재’의 이유로 지목되는 것은 영화비평지의 성격 변화에 따른 상업성과 독립영화계에서의 ‘온정주의’다. 한편 ‘비평가들 간의 치열한 의견 교환의 부재’는 정말 많은 비평가들이 지목한 부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밀하게 상대의 비평을 읽고 메타비평을 하려는 시도는 큰 흐름으로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비평 질의 저하’는 ‘독자의 시대’에서 ‘네티즌의 시대’, 그리고 ‘SNS 유저’의 시대로 들어서면서 누구나 비평을 쓸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더욱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그러나 비평 질의 저하를, 단순히 비평계로 유입되는 글의 양이 많아져서 생기는 일로 치부할 순 없다. 보다 공식적인 온/오프라인 지면 상의 글들에도 질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 대표적인 지면이 씨네21이다. 본 발표에서는 ‘비평 질의 저하’와 관련해서 더 이야기해 보겠다.

이 발표를 위해 2019년 1월부터 10월까지 간행된 씨네21의 비평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김소희 평론가와 김병규 평론가의 몇몇 글들을 제외하고는 무엇보다도 재미가 없었다. 십 개월 간 대략 80여편의 비평이 실렸다. ‹기생충› 특집이나 ‹사바하›, ‹조커› 찬반 비평 등의 기획을 포함하면, 매주 적어도 두 편의 비평이 해당 매체에 오른 것이다. 그럼 필자들엔 누가 있을까? 씨네21의 비평가라고 하면 생각나는 사람엔 누가 있는가? 80여편을 쭉 늘어놓고 보았을 때, 김소희 평론가와 박지훈 평론가가 각각 10편의 글을 썼고, 그 뒤로 7편의 글을 쓴 송형국 평론가와 김병규 평론가, 그리고 6편의 비평 뿐만 아니라 그 밖의 인터뷰 및 리뷰를 쓴 송경원 평론가 있다. 이들이 지난 10개월간 씨네21의 절반이 넘는 비평을 쓴 사람들이다. 이 중 김소희, 박지훈, 김병규 평론가는 씨네21의 편집장인 주성철과 김혜리, 송경원 기자가 심사를 한 “씨네21 영화평론상 공모”로 등단한 평론가들이다. 각각 2015년(20회), 2017년(22회), 2018년(23회)에 등단했다. 송형국과 송경원 평론가는 같은 공모로 각각 2013년과 2009년에 등단했지만 심사위원은 다르다.

씨네21의 비평 지면은 거의 대부분 “씨네21 영화평론상 공모”를 통해 필자를 수급받는다. 나쁘게 말하면 그들만의 리그가 있는 것이고, 좋게 말하면 최소한의 진입장벽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비평에 있어서의 등단제도에 대해 말하고 싶다. 사실 독자의 시대에서 네티즌의 시대, SNS 유저의 시대로 넘어옴에 따라, ‘등단’이라는 제도는 (특히나) 영화비평에서 무의미해졌다. 비평의 권위가 무너진 상황에서 공모를 통해 ‘등단’했다는 사실은 새로운 비평가에게 상징 자본을조금도 제공하지 못한다. 자, 우리 중에서 올해 씨네21을 통해 등단한 비평가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여기에는 심사위원들의 ‘권위’의 문제가 존재한다. 말하자면 해당 공모에서 심사윈원들이 심사하고 뽑은 비평의 ‘질’에 대한 보증이 확보되고 있는 상황인지 의심스럽다는 이야기다. 비평가의 등단이 영화계에서 사건이 되지 않는다. 결국, 씨네21이 만든 ‘등단’이라는 최소한의 진입장벽은 비평에 대한 그들의 ‘취향’을 뜻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권위없는 취향이 비평적 반향을 얻을 수 있는가? 씨네21이 새로운 필자를 수급받는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여기서 잠시 한국 미술비평계를 비교대조군으로 놓고 싶다. 비평의 위기가 영화계에만 닥친 것도 아닐터인데 국외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미술비평계는 그래도 영화계보다는 잘 굴러가는 듯 보인다. 물론 미술비평계의 등단제도 역시 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미술비평계의 경우, 비평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등단제도를 변용하여 평론상이라는 제도를 활용하고 있는 듯 보인다. 대표적으로 SeMA 하나 평론상이 있다. 이미 활동하고 있는 평자들 중 이러한 평론상을 수상한 이들은 더 본격적으로 비평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국가 주도의 공모제도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보통 영화계에선 창작자 혹은 제작자 위주로 주어지는 공모 수혜의 기회가 미술계에선 비평가에게도 주어진다. 한국예술문화위원회나 서울문화재단 등의 공모 관련 공지들을 살펴보면 비평지나 비평가 개인에게 주어지는 공모 수혜 기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영화진흥위원회에는 오직 영화 및 컨텐츠 제작과 배급 정도에만 그러한 기회가 주어진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 중 하나로, 미술씬 내부에서 어쨌든 비평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전시 서문이나 도록에 실릴 글을 필요로 하는 창작자뿐 아니라 (적지만 유의미하게 존재하는) 소비자 혹은 관객들도 비평을 필요로 한다. 어찌보면 폐쇄적인 계를 형성하는 미술비평이 힘겹게나마 굴러가는 이유다.

다시 “씨네21식 비평”으로 돌아와 보자. 요즘 영화비평은 어디서든 볼 수 있다. 블로그나 개인 홈페이지를 넘어서, 각종 영화기관에서 리뷰어들을 모집하고 그들로 하여금 쓰게 한 리뷰 혹은 비평들도 많다. 그런 글들에서 나는 모종의 냄새를 맡는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KMDB(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종종 올라오는 글들 중 많은 수도 이 냄새에서 자유롭지 않다. 나는 그게 씨네21식 비평의 냄새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글들의 가장 큰 특징은 ‘영화를 시놉화한다’는 것이다. 올해 9월, 미국의 영화 비평가인 조너선 로젠봄은 자신의 블로그에 1978년도 필름코멘트 7-8월 호에 실린 「‹욕망의 모호한 대상›: 논-내러티브에 대한 즉흥 세션」이란 제목의 대담을 전재(轉載)하였다. 그리고 해당 포스트 앞 부분에 2005년도에 덧붙인 서문을 추가했다. 서문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지금 이 작업을 복기하는 한 가지 이유는, 이 주제가 영화 전체와 관련하여, 특히 학문적인 용어보다는 장난기 있는 용어로(in playful terms) 다뤄진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영화를 시놉화한다(synopsize; 요약하다)’는 표현은 해당 대담에서 나온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telling a story)’이다. 이 대담의 참여자들은 영화를 시놉화하는 것이 “영화의 다양한 구조와 기능들이 이론적으로 이해되고, 코드화되고, 의미화되는 단일한 그리드가 되었다”고 주장하며, 마이클 스노우의 ‹파장›을 내러티브 모델과 관련지어 해석한 비평들에 불만을 제기한 영화 감독 피터 지달 사례를 언급한다. 그리고 “시놉시스는 덜 용기 있는 사람들을 위한 구명 장치일 뿐만 아니라, 영화를 읽도록 “상정된” 방식의 플라톤적 모델이자 읽히도록 “상정된” 영화들의 플라톤적 모델”이라고 덧붙인다. 나는 이들의 논의에 상당부분 동의하는데, 이 논의로부터 영화를 시놉화하는 비평의 두 가지 원인을 찾아낼 수 있다. 하나는 영화를 “읽게끔” 하는 비평이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런 식으로 “읽히게끔” 만들어진 영화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시놉화하는 비평의 문제’는 영화 비평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영화 창작/제작의 문제이기도 하다.

‘시놉화’의 반대편에는 또다른 습관인 ‘장면을 묘사하기’가 놓여있다. 이 ‘장면을 묘사하기’와 쌍으로 붙어 지내는 것이 ‘캐릭터에 대한 과도한 설명’이다. 물론 장면을 묘사하거나 캐릭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하는 데에는 비평가 나름의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유일하게 언급될 수 있는 이유는, 움직이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인용불가능성의 문제다. (물론 이 인용가능성의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오디오비주얼크리틱과 같은 비평의 방법 또한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통적인 비평이라 할 수 있는 문자 비평으로만 한정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다.) 「영화비평과 영상미학- 영화비평의 문제를 중심으로」(이윤영, 2007)에서 이윤영 교수는 영화학자 레이몽 벨루가 『영화의 분석(The Analysis of Film)』(1979)에서 영화작품이 연구대상이 되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꼽은 ‘텍스트의 물리적 소유’와 ‘인용가능성’의 문제에 대해 말한다. 오늘날 전자의 조건은 토렌트, 넷플릭스, 왓차, 유투브 등을 고려했을 때 놀라우리만치 비약적으로 해결되었으나 후자의 조건은 움직이는 이미지의 특성상 해결되지 않았다. 그는 벨루를 “인용”하면서, 문학 비평이나 미술 비평은 어느정도 비평의 대상이되는 텍스트의 인용이 가능한데, 음악이나 영화비평에선 그것이 불가능함을 설명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조건 때문에 “영화에 대한 글쓰기가 상당 부분 내용이나 주제 분석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되는데, 이것은 어쨌거나 영화의 본질적인 측면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진지한 비평적 태도라고 할 수는 없다”고 못 박는다. 비평은, 오디오비주얼크리틱과 같이 비평 대상으로 삼은 텍스트를 1:1 혹은 그에 거의 근접하게 인용할 수 없는 이상 텍스트를 지면 상에 붙들려는 노력을 그만둬야 한다. 심지어 오늘날엔 유투브에 넘치고 채이는 것이 영화의 장면들을 잘라 해설과 같은 내레이션을 덧붙인 리뷰 영상들이니, 글로 움직이는 이미지를 묘사하겠다는 집념을 가진 종류의 비평은 더욱 무력해질 뿐이다.

영화를 시놉화하는 것이든, 장면이나 인물을 묘사하는 것이든,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모두 서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씨네21의, 혹은 씨네21 출신의 비평가들은 서사에 고착된 영화 비평에 대한 일군의 비판을 의식이라도 하듯, ‘영화의 형식’에 대해 고민한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말하는 ‘형식’은 카메라 혹은 시선의 윤리, 인물 중심의 서사 구조, 주제분석 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즉, 그들은 영화를 ‘읽게끔’하는 비평을 쓰고, ‘읽히게끔’ 만든 영화들을 주로 다룬다. 물론 씨네21이 ‘대중영화정보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한 어쩔 수밖에 없는 한계라고 봐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씨네21식 영화비평의 냄새가 도처에서 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서사는 영화를 구성하는 여러 레이어들 중 하나일 뿐이다. 단지 (불)투명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레이어들 사이에는 위계조차 없다. 그 중 하나에 최종심급의 지위를 부여하고 편하게 앉아 영화를 ‘시놉화’하거나 장면을 묘사하고만 있을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