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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연선

데굴데굴 패스연습 ᕕ( ᐛ )ᕗᕕ( ᐕ )ᕗ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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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굴데굴 패스연습 ᕕ( ᐛ )ᕗᕕ( ᐕ )ᕗ (5)

비디오 탄산, 나는 가본적이 아쉽게도 없다.

‹바벨›에 대해서 아직 못한 말이 남은 것 같다. 때마침 친애하는 동료 K씨가 “‹바벨›이 반지하에서 상영(2015)되었다는 점은 아무래도 재밌는 것 같아요”라는 내용이 들어간 긴 메시지를 보내왔다. 반지하? 나는 반지하에 살고 있고, 여튼 그거랑은 상관없이 반지하라는 ‘신생공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 거기는 서울 동쪽 끝이라고도 할 수 있을 중랑구 상봉동에 있었는데 동료의 말에 따르면—그리고 내가 반지하의 공식 사이트를 확인한 결과—2012년에 처음 문을 열었다. 나는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상봉 바로 근처인 중랑역 쪽에 살았고, 반지하를 가볼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뭐랄까 자격이 안되는 것 같아서 가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자격? 그때 당시에는 어색하지 않게 전시 공간을 둘러볼 일종의 능력 갖추기를 그 자격이라 생각했던 것 같기도. 다 지난 일이다.

반지하의 공식 텀블러 계정에 가니 이런 문구가 페이지 상단에 박혀 있다.

본격 오픈베타공간 반지하 B½F 입니다.
서울 중랑구 상봉동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R.I.P_2012.6~2017.7


신생공간 시기와 김희천을 따로 떼어놓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세대론을 좋아한다. 거짓된/픽션적인 대당이라도 있어야 동력이 생긴다는 쪽이기 때문에. 신생공간 세대는 동력을 얻어 나갔나? 잘 모른다. 내가 관심있는 몇 명만 알 뿐. 조용히 작업을 그만 둔 사람도 많은 걸로 알고 있다. 80년대생이 주축이었던 신생공간의 시대는 온전히 제도로 포섭되면서 막을 내렸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아마, 이에 대해서도 많은 이들이 얘기했던 것 같다. 90년대생은? 페이스북에서 종종 90년대 생의 무능에 대한 한탄을 듣는다. 나도… 모르겠다…….

강정석이 운영했던 비디오 탄산 릴레이 이야기도 나왔다. 전설처럼 들리는. 당시에, 그러니깐 2010년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가던 때에 소규모 상영회가 많았다고 한다. 김희천도 ‹바벨›을 반지하에서 상영했을 때 GV를 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영상이 있어야 되니깐” 영상을 만들었다고. 김송요, 「할 수 있는 것 하기」, https://m.blog.naver.com/karts_/220684021581(클릭하여 보러가기)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있는 말이지만. 전시와 상영은 분명 다른 모습을 하고 있고 따라서 관객에게 다른 영향을 준다. 보다 은밀하고 친밀한 상영회의 공간. (물론 모든 상영회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것은 사라진걸까? 상영회는 여전히 있을 것이다. 아마도.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영화계의 실천들. 가령 시네소행성과 웹진 해파리의 상영회. 그리고 동국대 차차시네마테크의 상영회. 언급한 어떤 곳에도 가본 적 없다. 예전엔 미술계에서 훨씬 더 많은 작은 상영회들이 서울 곳곳에서 열렸던 것 같은데. 다들 어디로 간 걸까?

반지하에서 ‹바벨›을 봤다던 친구에게 페이스타임을 걸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담배를 뻑뻑 피우며… 친구는 성실히 기억을 더듬어주었는데 ‹바벨›에 대한 것보다도 반지하라는 공간에 대한 인상이 더 깊었던 것 같았다. 다세대 주택들이 즐비한, 따라서 “볼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지역의 한 주택 반지하에 위치한 곳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였고 그게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 같은 걸 만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느낌이었으며, 일부러 그렇게 꾸며놓은 건 아니었지만 뭐랄까 꽤나 아늑한 느낌의 공간이어서 ‹바벨›과 잘 어울렸다고, 그래서 ‹바벨›을 반지하에서 보는 내내 친구의 내밀한 얘기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너와 내가 촛불 하나를 켜놓고 머리끝까지 취하도록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상상해보자, 라고 부연하며. 얘기를 듣다보니 반지하에서 ‹바벨›을 보지 못한 게 더 아쉬워졌다.

오큘로 창간호의 강정석, 김희천 작가 대담 부분을 펼쳐보았다. 오큘로가 창간 행사 중 하나에서 베아트리스 깁슨의 ‹타이거스 마인드 The Tiger’s Mind›(2012)를 상영할 때 그리고 그 잡지의 창간호에서 꽤나 비중있게 김희천을 다루었을 때 이 잡지구나, 이걸 읽어나가면 되겠구나 싶었었다. 강정석과 김희천의 대담은 사실 처음엔 인터뷰였던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는 대담의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왠지 강정석 작가의 역할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그 대담에도 관객과의 대화 같은 걸 하고 싶어서 영상을 만들었다는 김희천의 대답이 나온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끝까지 보게 하기 위해 서사가 중요했다는 얘기도. 이런 걸 보면서 서사에 대한 나의 깊은 불신과는 다르게 나 역시 서사에 감겼단 사실을 깨닫는다. 아주 싫어한다는 건 그만큼 아주 신경쓴다는 것이고 서사가 아예 없다면…나는 조금 힘들어 한다. 어제 아피찻퐁을 보다가도 느꼈다. 탈주하고 싶어하는 엉덩이를 의자에 앉히기 위해 눈을 감는 선택을 해버렸다. “‘씨발, 이거는 진짜 힘들다(웃음), 이건 [보다가 중간에] 나가도 되지 않을까.’” 「현위치: 강정석 X 김희천 대담」, 『오큘로 창간호』, 2016년, 70쪽.

강정석과 김희천의 대담에는 렌더링, 3D 그래픽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어느 순간부터 미술 작가들이 혹은 그들의 작업을 다루는 글쓴이들이 ‘포토샵’에 대해 말하지 않기 시작했다. 렌더링과 3D 그래픽도 비슷한 처지. 대담은 7년 전의 것이고, 여기서는 여전히 렌더링과 3D 등등의 용어가 등장한다. 100년 전이 아니라 오히려 10년 전 영화를 보면 흘러간 세월을 여실히 느끼게 되는 것처럼 대담을 다시 읽으며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지금은 툴과 방법이 아니라 다른 쪽에 방점이 찍히고 있는 것 같다. 그게 어딘지는 아직 모르겠다. 납작하다는 말도,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쓰지 않는다. 종종 트위터에서나 멸칭처럼 쓰일 뿐……. 납작함을 멸칭으로 쓰던 이들은 이제 그 말을 안 쓴다. ‘힙스터란 말을 요즘 누가 쓰니?’ 다그치는 힙스터 친구처럼……. 그치만 나는 납작함에 대해 한창 말하던 10년 전쯤의 작업들보다 요즘의 작업들이야말로 너무나 매끈한 액정 스크린의 납작함에 가까이 들러붙어 있다고 생각한다. 영상이든, 회화든, 뭐든. 위험을 무릅쓰고 말해본다. 나의 가설은 이런 것이다. 방법이나 툴과 같은 작업의 물적 조건에 대한 관심을 명백히 드러냈던 시기의 작업들이 10년전까지 있었다면, 지금의 작업과 작가들에게 포토샵은 물론이고 3D 그래픽과 내가 모르는 많은 다른 기술과 툴들이 당연한 전제가 되어버려서 이렇게 된 건 아닐까. 물론 납작함이 꼭 스크린의 납작함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튼 그것들은 너무 매끈하게 납작하다. 상품처럼. 상품도 납작함도 문제될 건 없다. 그러나 이것은 최소한 내게는 문제가 된다.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업을 요즘 통 만나지 못했고, 그 이유가 매끈함을 소화하지 못하는 나의 내장기관 때문이라는 임시적 진단을 했기 때문이다. 동료 J씨는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가 그러한 매끈함에 미친 영향이 있을 거라고 했다. 동의한다. 아피찻퐁을 보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J씨 부부의 차 안에서 그런 대화들을 나누다, 매끈함을 소화하지 못한 채 뒤쳐질까 하는 무서움이 나를 엄습했다.

비디오 릴레이 탄산에 대해서는 더 조사해볼 것. 강정석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