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1: 임흥순이라는 이름 안에 또 들어갈 수 있는 다른 감독이 있을까 해서, (객석 웃음) 말씀해주실 수 있는 분이 있을지.]
역시 (웃음) 이런 질문을 해주실 줄 알고 준비를 했습니다. (객석 웃음) <철의 꿈>, <군대>의 박경근 감독이나 아니면 정윤석 감독도 여기에 해당이 된다고 저는 생각을 하거든요? 아니면 더 나아가서 KBS의 <모던코리아>, <88/18>과 <모던코리아> 같은 기획도 여기에, 이런 메타적 조망의 자리에서 역사를 내려다보는, 차이를 자기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그런 류의 작업에 속해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결국, 저는 원래는 이 사람들까지 같이 엮어서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일단 분량이나 시간 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서 빼긴 했었거든요. 근데 질문을 해주셔서 다행히 (웃음) 이름을 거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객석2: 저도 여쭤볼 게 있는데 이거는 사실, 청탁을 주신 마테리알 측께도 좀 궁금한 점인데, 왜 하필 임흥순이었는지, 그 당시 화두가 임흥순이어서 단순히 임흥순을 어떤 대표성을 가지는 이름으로 생각을 하신건지? 아니면 별도의 이유가 있으신 건지, 그거를 좀 알고 싶습니다.]
음, 제가 먼저 얘기 할까요? 아니면 마테리알 쪽에서 먼저 얘기해주실까요? [마테리알: 아랑님께서 답변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거는 지금의 저보다는 2019년의 제가 대답을 해야 될 문제인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저는 그때 당시의 다른, 정윤석 감독이나 박경근 감독 같은 분들에 대한, 아니면 나아가서 이후의 2020년에 있었던 이른바 ‘오토픽션’ 얘기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그런 것들에 대한 적의가 충분히 라기 보다, 아주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제 적의가 많이 향하고 가장 의심스럽게 봤던 것은 역시 임흥순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저는. 그리고 제가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사실 임흥순을 다루는 다른 평자들의 방식도 굉장히 불만족스러웠고요. 오히려 그래서 더 임흥순을 더 다뤄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임흥순을 일종의 대표자로서, 환유할 수 있는 중요한 이름으로써 들고 온 것은 결국 그런 이유들 때문인 것 같아요.
[객석3: 자잘 자잘하게 세 개를 한 번 여쭤보고 싶습니다. 일단 가장 처음 질문은 김동령과 박경태는 이 리스트에 포함될 수 있는지 없는지가 괜찮으시다면 좀 궁금합니다.]
(웃음) 저 최근에, 사실 저는 개봉했을 때만 해도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21)를 보지 않았고, 친구들로부터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를 어떻게 봤다, 라는 얘기만 들었었는데요. 그러다가 이번 발제를 준비하면서, 아 이제 피할 수 없겠다, (객석 웃음) 하면서 이 영화를 봤습니다. 저는 임흥순이 00년대 이후에 들어서 어떤 일종의…… 사적인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비디오 에세이라고 할 수도 없는, 어떠한 허구적인 것에 상대적으로 열려있는? 그러한 다큐멘터리가 00년대 들어 남한에서 확실히 늘어났다고 생각하고, 아마 많은 한국영화 연구자들이 (여기에) 동의를 할 텐데요. 그러한 흐름 안에 임흥순이 참여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이렇게 보자면 이 흐름 안에 그들(김동령, 박경태)이 속해있고, 그들 역시 임흥순과 동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일단 제 생각입니다.
[객석3: 두 번째 질문은. 임흥순을 여러 차례 환유적인 이름으로써 언급을 하셨는데, 은유가 아니라 환유라고 하신 이유가 있는지. 왜냐하면 저는 환유라고 하면 지금 제가 있는 자리가 민사소송 재판장인 것 같고, 은유라고 하면 형사소송 재판장에 있는 것 같은데. 그랬을 때 저는, 오히려, 라깡을 빌린다면, 환유는 무한히 일어나고, 은유는 딱 한번 일어나니까? 그래서 이 임흥순이라는 이름을 지금 올려놓으시는 위치가 정확히 어떤 위치인지 약간만 부연을 해주시면, 그러니까 조금 나이브하게 얘기하면 좀 관객으로서인지, 비평가로서인지?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제가 짧은 질문이라고 거짓말해서 죄송합니다.]
(객석 웃음) 아닙니다. (웃음) 음, 일단 제가 환유라고 표현했었던 것은 지금 제가 이 발제문에서, 목표 대상으로 삼고 있는 어떤 작가군? 그런 작가들, 혹은 작업들이 단순히 방금 전에 제가 말씀드렸었던, 나열했었던 이름들뿐만 아니라, 아까 얘기했듯이 1인칭을 쓰는 소설들, 아니면 이른바 사적 비디오에세이 같은 흐름에 참여하는 작품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그것들 역시 목표가 될 수 있다, 라고 생각을 했고 그렇다면 좀 은유적인 이름이라기보다는 그런 것들과 함께, 그런 것들을 대신해서 일단 불려나올 수 있는 이름으로써 임흥순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환유라는 표현이 훨씬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객석3: 마지막 질문은, 이런 주제를 항상 들을 때면 생각나는 것은, 일명 세르주 다네의 「〈카포〉의 트래블링」 글인데, 거기서 물론 다네가 여러 가지 갖가지 해답들을 얘기하지만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해답은 <우게츠 이야기>에, 그,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간단히 설명 드리면 <카포>의 트래블링이 유대인 학살 문제를 다루면서 <쇼아>의 문제를 다룰 때 어떻게, 너무나도, 말하자면 반성 없이 그냥 서사적인 카메라 움직임을 넣을 수가 있느냐. 어떻게 트래블링을 넣을 수 있느냐. 뭐 이런 거라고 저는 이해 하는데. 그런 아무 생각 없는, 말하자면 우수성만을 위한 몰입 없는 트래블링에 반대해서 세르주 다네가 그럼 윤리적인 행동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라고 했을 때, 예시로 제시하는 것이 아까 얘기한 <우게츠 이야기>의 트래블링인데, 거기에서 트래블링이 하나가 약간 멈칫합니다. 하지만 다시 트래블링. (웃음) 그러니까 이 부끄러움을 아는 이런 트래블링이 세르주 다네가 그래도 얘는 염치가 있네, 이런 식으로, 얘는 좀 윤리적이네 이렇게 판단을 하게 되는데, 오히려 발표하신 거에서는 좀 구조가 뒤집혀서 나타나고 있다, 라고 느껴지게 되는 것이, 세르주 다네가 요청한 것이 어떤 반성이라면, 그 반성을 끝까지 밀고나가지 못하는 임흥순이 문제적인 것인지. 그러니까 반성을 하고 있는 자신까지 반성하지 못한, 그런 점에서 임흥순이 문제적인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불가능한 반성을 잘못된 방식으로 시도하려고 했던 임흥순이 문제인 것인지. 그게 이제 제가 좀 더 여쭤보고 싶었던 부분입니다.]
일단, <카포>의 트래블링을 제 관점에서 조금 더 부여하자면, 결국에는 다네가 얘기 했던 것은, 그러한 아우슈비츠의 어떤 폭력적인 순간을 재현하는 것은 굉장히 어떤 종교적인 것, 이콘에 다가가는 순간 같은 것이다, 라는 어떤 종교적인 제스처를 취하는데요, 근데 이런 종교적인 것을 장식화하면 안된다, 라는 식으로 다네의 논리가 펼쳐지는 것이라고 일단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우게츠 이야기>에서 트래블링이라든지, 아니면 또 다네가 예를 드는 게, 르누아르의 <나나>의 트래블링이죠? 거기에서도 잠깐 주춤했다가 다시 또 들어갑니다. 굉장히 잔인하면서도 동시에 부끄러움을 안는, 그런 트래블링이라고 다네는 생각하는 것 같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제가 생각했던 것은, 그러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반성하는 자신까지 충분히 반성하지 못하는 임흥순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애초에 불가능한 반성이라고 한다면 결국에는 김훈처럼 나는 여자를 몰라, 나 남자야 나 여자 몰라, (객석 웃음) 이런 식으로 얘기가 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하거든요? (객석 웃음) 물론 그런 식으로, 난 여자를 몰라 이런 말이 반드시 김훈 식으로 발음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긴 하지만, 일단 제가 이 자리에서 염두에 둔 것은 이 반성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하는 임흥순 인거죠.
[객석4: 약간 적의를 품고 있는 질문을 하겠습니다. 중간에 살짝, 제 입장에서, 거슬렸던 부분인데. 그 세속적이라는 말, 자신이 세속적인 상황·조건 같은 것을 열어두는 거야 말로 참된 반성이라는 말이 들어갔는데요. [“자아를 세속적으로 관계들에 열어두는 거야말로 반성의 참된 조건인데 말이죠.-발표문, 편집자주] 그 앞의 반대항으로 생각을 했었는데요. 음, 근데 저는 그게 즉 임흥순의 관점이라는 생각도 들어서, 그러니까. 임흥순이 반성을 바라볼 때의 관점이, 세속과 반성은 반대 관계에 두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시기에 반성만큼 세속적인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는 입장에 있어서, 반성이 흔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거든요. 이 부분에 대해서 본인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아니라면 세속적이라는 말이 더 구체성에 다가가기 위한 것인지,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어요.]
제가 세속적, 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조르조 아감벤의 ‘세속화’라는 말에서 따온 거거든요. 아감벤이 이야기한 것을 정말 정말, 아주 거칠게 정리를 하자면, (사물이나 행동을) 관계에 열어두는 것? 성상 같은 것도 다른 장식으로 쓸 수 있게 해두고, 아니면은, 일종의 조르조 아감벤의 영화학 실천서 같은 느낌인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 의 경우에서도, 그저 하나의 이미지라는 개념을 말씀 하시죠. 그럼으로써 직접 사용에 열려 있는 이미지, 그 자체로도 무언가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다른 무엇들과 관계하고 연결될 수 있는 이미지, 그런 식으로 아감벤의 세속화를 영화적으로 적용하신다고 봤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세속적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질문 주신 것도 굉장히 유효하고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좀더 곱씹게 되네요 다시.
[객석5: 최근에 <미씽타는 여자들. 보셨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 영화가 좀 불편했거든요. 그건 제 개인적 취향인데. 최근에 독립영화 쪽에서 소위 유명 감독들, 봉준호나 박찬욱 감독들이, 영화를 뛰어주고 있잖아요? 근데 그게 대중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는 좋은 건데, 그게 맞는가? 라는 생각에 대해서, 평론을 하시는 분이라면, 이런 추천사가 관객이 볼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거든요. 그런 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이게 지금 오늘 나온 질문 중에서 제일 어렵고, 제일 답변하기 힘든 질문이네요. 음, 일단 저는 여기에 이중적인 생각이 있는데요. 일단 한방향으로는 그렇게라도 더 마케팅이 필요하다. 그렇게라도 관객이 더 드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한방향이 있고, 동시에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마케팅이 사실 좋은 영화를 보는 것을 방해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그 영화를 어떻게 봐야하는지를 안개 속에 넣어버린다거나, 그런 잘못을 범할 수 있다고, 그런 방향의 생각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 이 두 가지 생각 사이에서 두 가지 생각을 조절하거나 아니면은 조합하거나 그에 대한 구체적 답변을 못 내린 상태입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질문에 답변을 드리기보다는, 오히려 질문과 함께하는 제 고민을 드러내는 게 더 맞는 답변인 것 같네요.
[금동현-마테리알 편집진: 사실 임흥순을 저희가 내부에서 이야기할 때, 조금 궁금했던 건, 되게 임흥순이 세대론적 표지가 되는 것처럼 읽혔어요. 최소한 저희 편집부 사이에서는. 말씀하셨던 그 세대의 평자들과 감독들은 하나같이 좋아하지만, 나와 내 세대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근데 이게 참 교묘하고 세대론적인 이야기가 돼서 어렵고 안 좋은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한편 묻고 싶었던 게, 아랑님이 이런 쪽으로 천착해서 발표를 하시지는 않으셨지만, 세대론적 표지로서 임흥순이라는 게 작동한다면, 그렇게 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함연선-마테리알 편집진: 덧붙여서 질문드리고 싶은데요. 물론 2019년에 쓰신 트윗이지만 ‘이 다음’이라는 문구를 읽었을 때, 저도 세대론적으로 해석을 할 수 밖에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갖고 계쎴던 건지, 아니면 저희가 오독을 했던 건지,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해주셔도 좋겠습니다.]
함연선 님의 질문에서부터 답변을 드리자면, 실제로 세대론적인 함의를 품고 ‘이 다음이라는 정당성’이라는 문구를 쓴 것은 맞습니다. 말씀하셨던 것처럼, 제가 발제문에서 이야기했던 그 세대 평자들이 공통적으로 임흥순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불만과 피로감이 있었거든요. 정말 나를 포함한 나의 주변에는 아무도 임흥순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선생님들이라고 할만한 평자분들은, 이상할 정도로 임흥순에게서 자신에게서 필요한 것을 열심히 찾고 있었어요. 그게 굉장히 기묘하다고 생각했고, 이거를 돌파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 그리고 금동현씨 질문에 답을 하자면,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제가 아직은 찾아내지 못한 것 같아요. 왜 그런 세대적인 분리가 일어나는지? 이것은 좀더 제가 고민을 해봐야 될 지점인 것 같습니다. 전 그런 점에서 <논픽션 다이어리> 같은 작품을 상찬했던 분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전 이해할 수 없어요. <논픽션 다이어리>나 <철의 꿈> 같은, 그리고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를 다룬 어떤 글을 읽었을 때, 굉장히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 애인의 말을 빌리자면, 마치 자신의 미적 시도가 세계를 위한 거대한 시도인 것 마냥 구는? 비평에서도 그런 태도가 나타난다고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러한 작품들이 어떤, 제 윗세대 평론가들에게 이상하게 호소를 하고 있다, 아니면 좀 더 잘 받아들여진다는 생각은 듭니다.
[객석5: 저는 생각이 없었는데. 앞에 분이 반성이 세속화 되었다는 질문을 하셨는데. 구조적으로 그것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세대가 있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관객성 속에서 영화제라는 것, 한국영화에서 산업이 아닌 다른 영역이 나오기 힘든데, 그게 어떻게 보면 하나의 방향 제시가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옹호한 게 아니라, 근데 한 개인이 아니라 저널이라던가 평론쪽이라던가 학계라던가 그런 게 아닌가. 제가 볼 때는 좀 아쉬운 게, 좀 다각도로 접근해서 관객성의 구조적인 걸 보면, 좀 선명하게 보일 수 있는 여지가 있겠죠.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그런 걸 더 보면 풍부해질 것 같아요.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제가 좀 아쉬웠던 게, <위로공단>에 대해서도. 조금 고리타분한 이야기지만 <본명선언>은 보셨죠? <본명선언>에서 상당히 문제가 있었잖아요. 제가 여기서 그걸 대변하는 건 아닌데, 다음 세대를 위해서, 세대 교체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서 좀더 심층적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3자적 관점에서 이야기할 사람들이 관심이 없는 건지, 관심이 보이면 한쪽에 찍힌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그런 담론이 없어요. 그게 좀 슬프기도 하네요.]
[객석6: 아까 차이를 잠재우는 공동체와 차이를 함께하는, 차이를 발생하는 공동체라는 대비를 주셨는데요. 세대론적 관점에서 임흥순을 이야기했다고 하셨는데요. 사실 세대론적 관점을 지나서, 젊은 독립영화 감독들도 크게 다르지 않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들거든요. 그래서 젊은 감독들 중에 혹시 차이와 함께하는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지, 예를 들어주실 분이 있는지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이것 역시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네요. 저는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순전히 공동체를 상상하는데 있어서는, 아직은 한국에서 그런 감독이 없지 않나? 라고 생각을 합니다. 뛰어난 감독님은 분명 있고, 젊은 독립영화 감독들 중에서도 좋은 작품을 내는 감독님이 분명히 있습니다만. 이렇게 프레임을 좁혀서,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배울 수 있을, 그런 감독님은 아직은 없는 것 같다? 혹은 적어도 제가 못 찾았다, 고 생각을 합니다.
[객석7: 오늘 발표를 조금 들어보면서 <김군>(강상우, 2018)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는데요. 반대항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요. 아랑님께서, <김군>의 영화제 버전과 개봉 버전에 대한 글에서, 개봉 버전을 보고 나서, 마지막 장면에서 공동체에 대한 부분, 세 분이 함께 극장에 모이는 장면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을 하신 걸로 기억을 하는데요. <김군>에 대한 이야기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거기서 발견한 긍정에 대해서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제가 그때 당시, <김군>을 한 번은 영화제 버전으로 보고, 다른 한 번은 개봉 버전으로 봤을 때, 이 두 판본의 차이에서 제가 특히 주목했던 것은, 말씀하셨던 극장에서 세 명이 모이는 장면보다는, 아예 마지막 장면 있잖아요?이하 내용은 발표자의 브런치 「<김군>, 순수하지 않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편집자 주 영화제 버전에서는 이 사람이 ‘김군’이다, 라는 암시와 함께 옛 전남도청의 문이 갑자기 닫히는 걸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개봉 버전은 이 부분을 완전히 없앴어요. 이 사람이 ‘김군’이다, 라는 것을 개봉 버전은 완전히 잘라 버리고, 그 대신 개봉 버전 <김군>이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음 장면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게 좋겠네요. 한밤중에 옛 전남도청이 찍히고 그게 불길하게 재현이 됩니다. 제 기억으로는 손전등도 안에 비추고[발표자 주: 당시 현장에서 사실 관계를 틀리게 설명해 덧붙인다. 이 씬에서 손전등은 나오지 않는다.] 80년 5월 당시의 광주를 환기를 시키는데요. 그와 동시에 <김군>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주옥’이라는 분이, 세월호 시위에서 주먹밥을 나누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주옥씨가 옥상에 올라가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또 있어요. 근데 이 영화를 돌아보면 1980년 당시 광주에서 이 주옥이라는 분이, 항쟁을 나가는 남자들한테 주먹밥을 싸줬다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제가 발제문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김군>의 마지막 시퀀스 역시 일종의 반복을 보여주고 있는 거죠. 전남도청의 으스스한 분위기를 통해서 그러한 권력의 논리가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환기하는 동시에, 그것에 저항하려는 사람들의 몸짓도 충분히 돌아올 거라는 일종의 낙관적인 결론으로 <김군>은 끝이 납니다. 저는 이러한 점에서 개봉 버전이 <김군>이 적어도 결말에서는 좀더 좋았다고 생각을 하고, 그 점에서 제가 아까는 떠올리지 못했었지만, 강상우 감독의 경우에는 공동체를 다루는 사람은 아니지만,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는 감독이라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지금 답변을 하면서.
[객석8: 앞에 반성이랑 박살 이 다음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발제 맨 마지막에 언급하신 우리 손에 들린 무기, 에 대해서 무엇을 염두에 두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일단 좁게는 마지막에 이야기했던, 타자, 공동체, 불화, 파편성, 가시화 같은 창작과 비평 모두에서 쓰이는 수사를 이른 거고요. 좀더 넓게 나가면, 비디오 에세이 사적 비디오 에세이나 1인칭 같은 것에도 해당이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들도 일종의 우리 손에 들린 무기 중 하나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근데 질문에서 살짝만 빗겨나가면,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긴 하지만, 저는 이것들이 무기인 동시에 통치성의 도구이기도 하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이 둘이 각자 있는 게 아니라, 무기면서도 통치성의 도구인 거죠. 1인칭을 소설 담론에서 이야기할 때, 1인칭을 통해서 우리는, 강동호의 말을 빌리자면, 이른바 루카치류 리얼리즘에 따른 그런 3인칭을 반성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한편으로는 어떤 반복이지 않느냐? 그러니까 루카치의 총체성의 리얼리즘을 조금 형태를 바꾼 게 아니냐?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거든요. 강동호 평론가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거든요. 사실 이 이야기가 강동호 평론가의 정확한 워딩인지는 제가 기억이 안 나는데.[발표자 주: 강동호, 「비평의 시간 – 김봉곤 사건 ‘이후’의 비평」, 『문학과사회』 2020년 가을호.] 어쨌든, 제가 하려는 말을 축약을 하자면, 제가 이야기 했던 타자, 공동체, 1인칭, 비디오 에세이 영화 같은 것들은 우리에게 어떤 우리 손에 들린 무기면서도 동시에 통치성이기도 하다는 거죠. 그리고 그 점에서 통치성이라는 관점에서 사실 임흥순을 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까 임흥순을 비롯한 임흥순이라는 환유적인 이름에 얽혀있는 어떤, 그런 공동의 방법론? 혹은 태도? 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이 오히려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더 닮아 있고, 더 붙어있는 것은 아닐까? 통치성의 차원에서? 라고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