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의 인적 계보로 확인할 수 있는 인물로는 성인연극 ‹교수와 여제자›로 유명한 강철웅이 있다. 강철웅에 대해서는 ‹마이 트루스토리› 6화 ‘나는 매일 여자를 벗긴다―강철웅’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해당 에피소드에는 ‹느미›(1979), ‹수녀›(1979)의 조감독을 맡은 에로영화 감독 송명근도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육체의 약속›(1975)을 시작으로 7편의 영화에 주역을 맡은 김정철은 1990년대 ‘에로영화’ 다수를 연출한 감독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강철웅, 송명근, 김정철 등을 김기영의 은폐된 계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2021년 01월, 나는 「협잡꾼 당신」의 서두에 기대를 품고 작은 여담을 남겨뒀다. ‘직계를 형성하지 않은 감독’이라는 김기영 연구사의 상식과 별개로 존재하는 에로 연극/영화계에서 활동한 ‘김기영의 은폐된 계보’에 대한 내용이었다. 마치 스루패스처럼, 나는 그 여담이 조사된 바 없는 한국영화사의 빈 공간open space을 열어젖히기를 기대했다. 알다시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관/지면을 과대평가한 걸까? 아님 나를 과대평가한 걸까? 여하간 그해 늦여름, 나는 마테리알 편집진을 만나 ‘김기영의 은폐된 계보’를 함께 조사하자고 제안했다. 이번에는 ‘은폐된 계보’가 아니라, ‘김기영의 (후레)자식들’이라는 표제로. 스루패스를 보내도 받는 팀원이 없다면 내가 뛰어야 한다.
돌아보면 「협잡꾼 당신」의 여담은 애초 스루패스로 기능하기 어려운 주제였다. 허문영은 기형도의 심야극장에서의 죽음에 대한 글을 추적하며 당시 극장에서 상영되었던 영화가 ‹뽕2›라는 사실이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다고, ‹뽕2›(이두용, 1988)가 “젊은 시인의 고독한 죽음이라는, 얼마간 신화적 분위기마저 풍기는 장면에 어울리지 않는 민망한 소품”처럼 비쳤기 때문일 거라 추측했다.
김기영의 직계―에로영화 감독들이 좀처럼 조사되지 않은 이유도, 이와 유사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적史的 검토에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 실은 잔디가 고르지 못한 곳으로 공을 보내버린 것이다. 하지만 ‹뽕2›가 이두용의 근사한 소품이듯, ‘에로작품’이라는 라벨링은 물러날 근거가 되지 못한다. “김기영의 (후레)자식들”이라는 표제는 이러한 맥락에서 설정되었다. 그들은 불순한 존재로 괄호 쳐졌지만, 검토를 통해 언제든 접두사―후레―를 지고 혹은 버리고 등장할 수 있다.이쯤에서, 혹자는 이러한 조사를 ‘호사가적 취미’라고 공박할지 모른다. 그러나 김기영→ 봉준호, 박찬욱이라는 한국의 매끈한 영화사에 관심이 없다면―나는 KMDb의 김기영 영화 크레디트의 하이퍼링크 처리된 이름을 무작정 눌러보다가 (후레)자식들을 발견했다. KMDb의 하이퍼링크를 무작정 눌러보는 것은 성긴 지도로 한국영화사를 관광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혹은 매끈한 영화사에 구멍을 내고 싶다면, (후레)자식들은 유효하다. 가령 과격하게 그를 ‘에로영화 감독들의 스승’이라고만 전제할 때, 한국영화사에서 김기영을 특권화한 그의 섹슈얼리티 혹은 도착적이고 과장된 형식/양식은 어떻게 비치는가? 김기영→봉준호, 박찬욱이 작동하는 사실이라면, 김기영→김정철, 강철웅, 송명근은 존재했던 사실이다.
고백하자면 「협잡꾼 당신」, 「어느 부전자의 초상」
이라는 글과 그 제목으로 알렸듯, 나는 의도적으로 김기영을 속되게 읽고 있다. 그를 비非역사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꿍쳐두고는 곧잘 실재를 파악할 수 있었던 특권적 위치로 격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실 김기영 그는 실재보다, 경합하는 사회적 요소(전근대와 근대, 여성과 남성)와 미학적 요소(일본 신파극과 사실주의 연극)가 소용돌이치는 진창을 이용하는, 협잡꾼 혹은 부전자로 존재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물론, 나는 그 저속성을 예찬한다. 그러므로….우리는 강철웅을 만났다. 「협잡꾼 당신」을 쓴 이후 티캐스트가 ‹마이 트루 스토리› 서비스를 멈춰,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영상자료는―유튜브 검색으로 확인할 수 있다―EBS에서 방영한 ‹대한민국 화해 프로젝트 용서―10개월 350만원, 갑과 을의 전쟁› 밖에 남지 않았다. 참고로 갑이 강철웅이다. 아무튼 강철웅은 김기영의 ‹수녀水女›(1979) 연출부로 입문하여 ‹느미›(1979), ‹화녀’ 82›(1982), ‹바보사냥›(1984), ‹육식동물›(1984), ‹죽어도 좋은 경험›(1990)까지 김기영 영화 현장에 있었다. 김기영 영화 현장을 떠난 강철웅은 1993년 한국 최초의 성인연극 「마지막 시도」를 무대에 올렸다. 강철웅은 성인연극을 시작한 계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 적 있다. “김 감독의 영화 중엔 성불구 등 성을 소재로 하면서 컬트 요소를 결합한 작품이 많다. 난 거기서 컬트 요소만 뺐다.”
성인연극으로 성공한 강철웅은 1994년에는 김기영이 연출하고 각본을 쓴 연극 「사랑 속에 숨고 싶다」를 기획하기도 했다. 김기영이 조감독을 두지 않았다는 통념과 달리, 강철웅은 오랜 기간 김기영의 조감독으로 활동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이쯤이면 강철웅 인터뷰의 필요성이 충분히 설명된 것 같다. 인터뷰는 대학로의 밥집과 카페에서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