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25 한국미술 비평지원’ 사업의 후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마테리알은 한국의 무빙 이미지 큐레이션에 관한 글을 청탁했고, 나는 그 글을 성실한 무빙 이미지 관객은 아닌 ‘미술평론가’의 입장에서, 조금은 영화 바깥에 위치한 채로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여기서 영화 바깥이라고 말하는 것은 영화에 대한 이해를, 시네필리아적 감정 구조를 결여한 채로 무빙 이미지에 접근하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시네필리아를 곧 네크로필리아에 비유한다든가, 그런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겠다는 말은 아니지만,Erika Balsom, Exhibiting Cinema in Contemporary Art, Amsterdam University Press, 2013, 27p. 다만 어쩌다 보니 나에겐 그런 것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며… 그렇게 생긴 편향을 공유하려는 마음이 있다.
그 전에 무빙 이미지의 말뜻을 맞춰볼 필요가 있다. 쉽지 않은 일이다. 무빙 이미지를 영화와 미술이라는, 서로 다른 형식 또는 규범이 확장하고 교차한 상황이라고 가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확장, 그리고 교차라는 어휘로는 포괄할 수 없는 변수가 있어 보인다. 미술관은 영화가 영화관을 떠나 머무를 수 있는 장소 중 하나였지만, 미술관에는 이미 비디오 아트와 구조영화, 미디어 아트 등의 전통이 존재했고, 이는 적대와 복잡성을 파생시켰다. 무빙 이미지는 영화관과 미술관이 각기 갖는 고유한 건축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특정성이 뒤섞이는 상황과 관계되었고,Erika Balsom, Exhibiting Cinema in Contemporary Art, Amsterdam University Press, 2013, 30p. 스마트폰 이후 미디어가 제작되고 유통되는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나타난 제도적이고 감각적인 변형의 사례를 아울렀으며, 나아가 영화사와 영화이론이 미술사와 미술이론과 뒤엉키는 담론적 효과 등을 포함했다. 무빙 이미지가 정의하기 어려운 모호한 용어로 남아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게 느껴진다.
에리카 발솜(Erika Balsom)은 동시대 미술을 포함한 문화적 장 전반으로 영화가 분산되었을 때, 그러한 분산의 과정이 불균질하고 단절적이었기에, 양립할 수 없는 전제들과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이 공존하는 결과가 나타났다고 말했다.Erika Balsom, Exhibiting Cinema in Contemporary Art, Amsterdam University Press, 2013, 63p. 어쩌면 무빙 이미지는 범주의 확장 혹은 교차와 같은 결과적이고 명사적인 상태가 아니라, 영화와 미술과 그들과 관련한 외부의 힘들이 단절적으로 맞붙고 있는 역동적이고 생성 중인 상태이며, 제3의 범주로 안정화되기 어려운 운동하는 힘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나는 이 글에서 무빙 이미지의 여러 이름을 좇아보고자 한다. 무빙 이미지가 범주가 아니라 힘이라면, 그 힘은 ‘무빙 이미지’라는 이름이 주어지기 전부터 형태와 이름을 달리하며 영화와 미술 사이 어딘가, 그 특정한 국면에서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영사 이미지(projected image)Tamara Trodd, “Introduction: Theorising the projected image,” Screen/Space: The Projected Image in Contemporary Art, ed. Tamara Trodd,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11, 1p., 아티스트 필름(artists’ film), 아티스트 시네마(artists’ cinema)Maeve Connolly, The Place of Artists’ Cinema: Space, Site, and Screen, Intellect Ltd., 2009, 9–10p. 등, 무빙 이미지는 매체의 내적 특성뿐만 아니라 전시와 큐레이팅의 문제까지 포괄하면서김지훈, 「누가 다름을 필요로 하고 어떻게 다름이 구성되는가?」, 『월간미술』(461), 2023, 75쪽. 유동적으로 다른 이름을 취해왔다. 따라서 이 글은 무빙 이미지의 한국어 이름을 찾아나가며, 그것으로 ‘한국의 무빙 이미지 큐레이션’을 부분적으로나마 재구성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