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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유사(pseudo) 극영화의 형식이었던 뮤직비디오처럼—〈시실리 2km〉를 감독한 신정원이 연출한 「슬픈 혼잣말」과 「소주 한 잔」의 뮤직비디오는 한국 뮤직비디오의 영원한 클래식일 터이다…… 특히 「슬픈 혼잣말」의 뮤직비디오는 남한의 〈라라랜드〉다. 아니 「슬픈 혼잣말」이 2002년에 나왔으니, 〈라라랜드〉가 미국의 ‘슬픈 혼잣말’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다. 무슨 소린가 하면, 꼭 한 번 보기를 권한다.—다양한 분야의 종합에서 스타가 만들어진다. 스타는 매체를 가로지르며 서로 다른 실천이 종합된 상호텍스트적 구조물이다. 그러므로 스타論이 으레 그렇듯, 임창정論의 범위도 그의 활동 분야 전반을 가로지른다. 그리고 우리는 배우로 임창정을 알기 전에 일찍이 그의 노래를 먼저 듣거나 심지어 부르기까지 한다. 한국남성에게 김광석의 노래가 종종 통과 의례의 기능을 한다면, 임창정의 노래가 들리는 노래방은 자꾸만 돌아오는 원환이다—“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대니……”는 가능하지만, 임창정에게 저런 대사는 가당치않을 것이다. 그는 원치 않아도 자꾸만 돌아온다.
알랭(Alain)은 예술의 목적을 정념의 정화에서 그리고 예술의 과정과 그 근거는 신체에서 찾았다. 가령, 음성에 한해 말하자면 외침이나 울음은 예술이 될 수 없다. 예술은 외침과 울음 같은 소음을 박자, 가락, 화성 등의 형식으로 정복하는 과정에 있다. 임창정의 노래는 어떠한가? 창법을 환히 아는 사람이라면 벨팅을 사용했다고 반문하겠지만 ‘생목’으로 인지되고 평가 받곤 하는 임창정의 노래는 막대한 정념을 제압하고자 하는 차력에 가깝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거대한 정념에 패배하길 바라는 것 같다. 그리하여 누군가 그 노래로부터 위안을 얻을 때, 누군가에겐 그 정념의 크기 자체가 구질구질하고 징그럽다고 느낀다.
「그때 또 다시」(임창정, 1997)의 가사가 좋은 예시다. 이 노래의 가사는 음악에 의한 정념의 패배를 예시하는 것 같다. 이별한 화자는 그간 사랑할 수 있었던 시간에 감사하며 참아보고 잊어보겠다고 다짐하지만 노래의 결론은 “허나 그래도 안 되면 기다릴게 그때 또 다시”다. 정념을 통제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지만 그 정화를 예단할 수 없음을 넌지시 비춘다. 더구나 저 노랫말은 반복됨으로, 정화가 아니라 오히려 지속을 표한다. 통제의 시도가 그르쳐졌기 때문에 지속될 정념은 더 엉망진창일 터이다. 더구나 「그때 또 다시」의 정념은 오직 ‘나’를 향해있다. ‘내 슬픔’이 터져 나오고,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이 이게 아니며,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연인과의 삶을, ‘난 사랑했잖아’라는 이유로 다시 꿈꾸지만, ‘나를 완전히 태울 수 있었던 축복을 내게 줬’다는 기억이 있으니 괜찮다고 말한다. 저 수많은 ‘나’의 반복 뒤에 이제야 ‘널 위해서라면’ 잊어보겠다고 다짐하지만 ‘~면’의 음을 끝맺지 않고 ‘허나 그래도 안 되면’으로 연결할 때, 그 다짐은 바로 부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기적인 정념.
그 또한 ‘나’로 가득한 「소주 한 잔」—‘여보세요, 나야, 거기 잘 지내니? / 여보세요, 왜 말 안 하니? / 울고 있니, 내가 오랜만이라서 / 사랑하는 사람이라서’라는 가사는 얼마나 자기애로 가득한가. 그는 수화기 너머의 말 하지 않는 전 연인이 울고 있다고, 심지어 그를 사랑해서 울고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의 뮤직비디오에서 이 정념은 이제 뚜렷한 서사와 영상까지 얻는다. (@축축-y2x의 감상이 눈에 띤다. “창정이형 낭만양아치 연기 아무도 범접할수 없다. 정말 수백 번을 봤지만 어떤 멜로영화보다도 여운이 남습니다. 진심으로예술작품입니다. 이건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록되야합니다.”)
뮤직비디오 「소주 한 잔」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건달인 ‘창수 형(그렇다. 이 뮤직비디오에서도 임창정의 배역은 형으로 불린다)’이 한 여대생을 사랑하게 된다. 창수는 여대생과 짜장면도 먹고 밤거리도 걷고 전화통화도 하지만 여대생의 부모는 창수를 탐탁치 않아한다. 어느 하루 여대생이 삐삐를 잃어버린 날, 창수는 꽃다발을 들고 여대생의 학교와 발레 연습실을 찾아가지만 그를 만나지 못해 집 앞에서 기다린다. 마침 그 날 여대생은 친구인 남대생과 함께 집에 왔고, 창수는 갑자기 그를 폭행하곤 홀연히 사라진다. 여대생이 창수의 행방을 한 번 묻지만 찾을 수 없고, 그 사이 창수는 길거리 싸움을 하다가 급습한 적에게 쇠파이프로 머리를 맞는다. 그리고 그는 바보가 된다.
그리고 하나의 반전이 마지막에 삽입되어 있다. 실은 창수는 발레 연습실에 갔을 때 여대생이 홀로 연습하고 있는 모습을 엿보았다. 이로 인해 창수가 남대생을 때린 이유가 사뭇 달라진다. 창수는 그날 자신이 여대생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임을 절감했으며 이를 여대생에게도 알리기 위해 과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한 블로거는 이 반전으로 인해 흔한 비극적 사랑 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 되었다고 평했지만, 나는 이 반전으로 인해 창수가 좀 더 징그러워진다고 생각한다. 반전을 모르는 상황에서도 창수는 여대생-남대생의 관계를 오해하는 막무가내로 비치지만, 반전을 아는 상황에서 창수는 오해가 아니라 모든 것을 홀로 생각하고 결정내리는 사람이 된다. 시종일관 도탑게 대해줬던 여대생의 의견을 물어볼 생각은 없다. 창수는 한 마디도 물어보지 않고 관계를 홀로 생각하고 정리하고 폭력적으로 끝낸다. 여대생은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다. 여대생이 홀로 있는 시간은 극히 드물며, 그 시간도 모두 모두 창수의 비조를 더 하는 기능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그때 또 다시」처럼, 다시 한 번 ‘혼자’만의 이별이자 슬픔이다.
‘창정이형’의 동생들이 이러한 메타적 위치에 서는 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악으로 인해 꾸지람 받는데, 심지어 꾸짖는 사람이 실은 죄악을 저지른 경우인 상황에 놓여있는 느낌 속에서, 그의 노랫말을 듣고 영상을 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조금만 거리를 두면, 이기적이고 과한 관계의 셈법이다. 임창정의 헌신: 상대와의 관계를 점검하거나 속도를 맞추지 않았기에 그의 헌신은 상대방에게 언제나 바라지 않은 크기와 방식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바라지 않은 헌신이 좌절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헌신 자체에 도취하여 그 정념을 어찌할 줄 몰라 하곤 한다. 문제가 곤란해지는 것은 그가 바라지 않은 헌신을 일종의 교환 관계로 셈하고 상대방에게 밀린 명세서를 들이밀기 시작할 때겠지만…… 어쨌거나 임창정의 노래는 그 끝이 확실한 음으로 항상 닫힌다. 그러므로 패배를 향해 경주하는 노래도 순간적으로—끝이라는 형식으로—승리할 터이고, 그 불완전한 승리의 반복을 통해 정념도 점차 감쇠되어 갈지도 모른다. 임창정이 임창정을 징그럽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