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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연

‘건축’ ‘영상’ ‘전시’에 관한 어떤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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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연

‘건축’ ‘영상’ ‘전시’에 관한 어떤 오해

*본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25 한국미술 비평지원’ 사업의 후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시네마는 거대한 BDSM 장치”‘서울은 이상한 도시’ 인스타그램 계정(@weird_seoul)의 2024년 11월 22일자 포스팅 참고.이며, 영상 전시는 고문이다. 나 역시 영상 설치만으로 채워진 전시는 회피하고 싶어 하는 관람자로서, 이 글을 쓰기 위해 리서치하던 중 발견한 무작위 포스팅 속 문구를 빌어 영상 전시의 고통을 토로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마테리알은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2024년 11월 22일부터 2025년 6월 1일까지 열린 전시 《건축의 장면(Frames of Architecture)》 비평을 내게 제안했고, 나는 이 제안으로 연이 닿은 이 전시에 관해 쓰며, 영상 전시 관람의 고통이 쾌(快)로 전환될 수 있음을 스스로 설득해보려 한다.

 

영상 설치로만 이뤄진 전시에서의 관람은 임의적인 진입과 이탈, 러닝타임의 점프 등의 파편적인 시청이 전제된다. 스크린을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선택’, 혹은 이 정도 영상의 러닝타임은 견뎌보겠다는 ‘의지’, 이 선택과 의지로 관람자는 움직이는 화면(moving image)과 스크린 사이를 보행한다. 보행은 단순히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이동으로만 이해되기보다는, 스크린 사이에서 배회하고, 지연되고, 길을 잃고, 우회하는 우연한 미끄러짐을 포함한다. 그로 인해 특히 영상 전시의 관람 경험은 관람자 개인마다 큰 편차를 갖게 된다. 가령 누군가는 한 전시의 모든 영상 러닝타임을 합치면 장장 3–4시간이 훌쩍 넘는 전시임을 미리 계산하고선 선뜻 전시를 떠나버리는 회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반대로 전시의 모든 러닝타임을 빠짐없이 겪어보겠다는 편집증적이고 마니아적인 관람 방식도 존재한다.유운성은 설치된 영상을 통독하려는 습관은 전체에 대한 이해 없이는 어떤 부분도 온전히 이해되지 못할 것이라는 전체론(holism)적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고, 건축적 시간성을 가진 영상 설치 작업들은 이 전체론적 가정을 배반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설명한다. 유운성, ‘시간의 건축적 경험’, 『유령과 파수꾼들』(미디어버스, 2018), p. 56. 스크린 앞에 관람자의 몸을 눕히거나, 앉히거나, 세우게 만드는 전시 환경은 관람자의 자율적 선택과 의지와 충돌하며 관람자를 유도하는 동시에 작품과 오래 접촉하려는 시도를 쉽게 좌절시키곤 한다. 이렇게 관람자의 이동과 보행에 따라 주관적으로 편집된다는 점에서, 전시란 한 편의 영상인 동시에 걸으며 감상하는 하나의 건축물로 비유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건축(적인 것)이란 대체 무엇인가? 《건축의 장면》은 건축을,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로서 넓게 설정하면서 건축이 속하는 다양한 층위를 한데 묶으며 출발한다. 전시는 총 8인의 작가/건축가가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창을 보여줌으로써 관람자 우리도 우리 삶, 도시, 거주 풍경으로부터 새로운 인지와 건축적 경험을 마주하길 제안한다. 그러나 나는 이 기대가 못마땅한데, 내가 이해하는 건축은 언제나 새로움을 가져다주는 만능 도구가 아니라, 무언가를 생성해 세상에 남기려는 욕망이며, 도시를 살아가는 몸이 감당해야 하는 이해관계의 총합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건축을 지나치게 이상화한 이 전시를 보완하기 위해, 박선민, 박준범, 이윤석, 세 명의 한국 작가/건축가의 영상 작업으로 좁혀 ‘건축’ ‘영상’ ‘전시’의 관람에 관해 말할 것이다. 즉, 세 작가가 건축(적인 것)을 어떻게 재현하거나 재현하지 않음으로써 건축을 사유하는지, 또 어떻게 그 사유가 영상이 되고 전시가 되어 “건축적 관람”의 영역으로 들어설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죽음을 앞둔 건축과 시한부 거주의 현장으로

 

일반적인 건축 전시가 모형과 도면 앞에 세워 관람자를 설계자의 시선에 동기화시키는 반면, 《건축의 장면》은 다수의 영상이 겹치며 영상을 매개로 소환된 건축의 여러 단면에 접촉하는 관람을 이끈다. 여기서 건축 전시의 핵심인 ‘실제 건축물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옆으로 밀려나고, 관람은 선별된 장면들에 우선 노출되는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 건축가이자 비디오그래퍼인 이윤석의 〈39일간의 철거기록: 청파동 굴뚝건물〉(2021)에서는 그가 선별한 장면들로부터 건축가로서의 습관과 시선을 그대로 흡수하게 된다. 출퇴근길에 매일 지나던 굴뚝 달린 건물이 철거되는 과정을 기록한 이 영상은, 매일 조금씩 촬영한 철거 현장 영상과 철거 상태를 재현한 3D 모델링 그래픽을 한 화면에 병치한다. 해체라는 죽음을 선고받은 건축의 마지막 순간을 따라가며, 사라지는 건축을 역으로 더듬고 재구성하는 이 영상은 프레임을 누적해 의미를 생산하는 기록 장치로서 비디오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한편, 이윤석은 주거가 제공하는 경험을 카메라로 반사한다. 이윤석은 건축가 김정민과 유튜브 채널 ‘서울은 이상한 도시’를 운영하며 서울에서의 거주 삶을 기록한다. 전시에 소개된 〈녹번동 바르셀로나의 매일을 기념하는 집〉(2021)과 〈범일에서 종로까지, 홍제동 사는 어떤 게이 둘(아니, 셋?)〉(2022)은 ‘월세 아니면 전세’ 시리즈의 일부로, 2030 청년들이 자신이 사는 집과 동네를 소개하고, 주거 조건에 얽힌 사적인 일화를 들려주는 인터뷰 형식의 영상이다. 거주와 건물에 얽힌 집주인의 간섭, 편견과 사적인 로망 같은 것들은 건축물이 ‘집’이 되게 하는 제도와 주거 문화에 내재한 미묘한 권력 관계를 노출한다. 특히 한국의 특징적인 주택 임대 제도인 ‘전세’와 중도금 방식의 ‘선분양’ 제도는 주거와 삶의 시한과 형태를 구조적으로 결정하며, 삶의 리듬을 제도적으로 통제한다. 이처럼 비가시적인 제도가 물리적인 건축물만큼이나 우리 삶과 주거 경험에 깊이 연루되어있다. 이윤석의 영상은 그러한 단면을 포착하며, 전시장에서 감지되는 ‘건축’의 범위를 확장하고, 전시장 바깥 어느 시간 속 건축의 현장으로 데려다주는 하나의 탈것이 되어준다.

(위) 〈39일간의 철거기록: 청파동 굴뚝건물〉(이윤석, 2021) 스틸컷,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아래) 〈범일에서 종로까지, 홍제동에 사는 어떤 게이 둘(아니, 셋?)〉(이윤석, 2022) 설치 전경,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스크립트로 짜인 도시의 감시자

 

건축에 얽힌 사적인 기억과 경험을 보여준 이윤석과 달리 박준범의 비디오는 도시를 “이미 존재하는 시스템으로서의 레디메이드”현시원, ‘미술 작품 속 도시 – 리모트 컨트롤로서의 도시 “환승 없이 바로 간다”’(2022년 3월 11일 발행)로 바라본다. 특정한 삶으로 침투하지 않는 그의 카메라는 관람자에게 카메라의 시선을 그대로 위임하면서, 화면 바깥 우리 역시 관찰자가 되도록 한다. 박준범의 〈마름모 또는 평행사변형〉(2018–2023)은 3년간 고정된 부감 시점으로 신축 건물 공사 현장을 기록한 3채널 비디오로, 건설되면서 점차 건물 모양이 평행사변형으로 보이는 장면을 타임랩스처럼 보여준다. 얼핏 정지해 보이는 화면에는 노동자와 크레인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공사를 수행하고, 관람자는 회화를 들여다보듯 화면에 집중하게 된다.

 

2000년 초부터 “비디오 형식주의”김현진, ‘기록의 왜곡 가능성, 그로 발견되는 박준범 비디오의 특이성’, 2005.로 불릴 만큼 일관된 시점과 구성으로 작업해온 박준범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재난과 붕괴의 기억을 환기하기도 한다. 건물 붕괴는 단지 구조물의 파괴가 아닌, 한 사회가 무너지는 체험의 각인이기에 건축적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구조적 현실을 모사하거나 풍자할 수 있다. 청년들이 폐자재로 대피소를 구축하고 해체하는 일련의 과정을 빨리 감기한 〈대피소 리허설〉(2015), 그리고 재개발을 앞둔 지역 골목의 여러 사진들을 중첩하는 〈비슷한 골목〉(2024)은 거주 환경이나 도시의 구성요소들이 얼마나 임의적이고 일사불란하게 구조화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카메라 앵글로 인해 깊이가 삭제되면서 극적으로 평면화된 도시 풍경을 배경으로 박준범의 라이트 모티프(leitmotiv)개별 작품 혹은 작(곡)가의 작업 전반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특정한 주제나 이미지적 장치를 뜻한다.인 손이 개입하면서, 도시는 결국 레디메이드화된 생산품들이 조립되고 배열되는 임의적 스크립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러한 영상의 방식은 동시대 몰입형 무빙 이미지, 숏(shot)을 병치해 서사를 구성하는 종류의 무빙 이미지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관람 경험을 제공한다. 박준범의 프레이밍은 영상보다는 회화에 가깝고, 그래서 시간성과 운동감 자체로 압도해 붙잡기보다는, 시선을 화면 전체에 고르게 분산시키는 전략을 취한다. 이는 건축적인 현장감은 차단하지만, 관람자로 하여금 롱테이크 영상을 견디며 도시의 구조와 시스템을 분석하게 만든다. 이렇게 박준범의 작업은 설계자와 관람자로 이분되어 ‘설계자에 빙의하던’ 전통적인 건축 모형 전시의 방식을 벗어나, 관람자에게 감시자이자 해석자라는 제3의 위치를 제안한다.

(좌)〈대피소 리허설〉(박준범, 2015) 설치 전경,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우)〈비슷한 골목〉(박준범, 2024) 설치 전경,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버섯 파빌리온과 말하기의 몽타주

 

박준범의 영상이 제공하는 건축적인 관람 유형은 화면을 구성하는 리듬과 구조, 심지어 타임라인 어디서든 입장하고 퇴장할 수 있는 박선민의 영상 언어와도 맞닿는다. 다만 박선민의 작업은 관람자의 인지적 몽타주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훨씬 은유적인 방식으로 관람을 이끈다. 박선민의 〈버섯의 건축〉(2019)은 제주 곶자왈 숲의 버섯을 촬영한 비디오에 국내외 건축가 13명의 음성 내레이션이 겹쳐지는 작업이다. 이 영상에서 버섯은 단순한 피사체가 아니라, 분주히 작동하는 하나의 생태계이자 건축 행위의 은유로 작동한다. 카메라는 땅에 밀착된 채 느리게 움직이며 버섯을 초근접으로 훑고, 건축가들의 생각이 자막과 음성으로 흐른다. 이들은 크게 건축이라는 주제로 말하지만, 그 내용은 하나로 간추려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어떤 풍경을 상상해보라 말하고, 누군가는 한국 자본주의 구조 내 지속적인 건축이 불가능한 이유를 토로한다.

 

이미지와 음성이 논리적으로 결합되지 않아, 은유를 내세우는 힘이 섬세하지만 어려워 나는 이 영상을 연이어 두 번 감상해야 했다. 관람자는 숏, 이미지와 음성 사이의 비약을 자신의 직관으로 보충해야 하는데, 이는 작업으로부터의 이탈이자 동시에 생각의 틈을 발견할 계기가 되는 양면적인 갈림길이 된다. 이러한 관람은 형식 요소 간 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벌려둔 간격에서 비롯된다. 이에 관해 문혜진 비평가는 영화 이론가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의 몽타주 개념인 ‘간격(interval)’을 언급하며 박선민의 “이미지와 텍스트, 사물 간의 자유로운 교차를 구동하는 동력은 [중략] 시적 빈틈”문혜진, ‘점에서 선을 그어 다시 점으로’, 『Out of (Con)Text(아웃 오브 (콘)텍스트)』(더플로어플랜, 2021), p. 129.이라고 설명한다. 바로 이 간격이야말로, 건축을 영상이라는 매체로 감각하고 사유하는 목적으로 스크린을 배열한 이 전시의 핵심을 관통한다.

〈버섯의 건축〉(박선민, 2019) 설치 전경,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서로를 반사하는 스크린, 훈련장, 사건과 약속

 

“하나하나의 숏은 자기 외 다른 모든 숏들을 임시적으로, 그러나 어긋난 방식으로 대표한다. 영화의 각 숏은 이같은 적극적 반사의 역할을 떠맡고 있다. [중략] 각 ‘뷰’에는 다른 모든 뷰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들을 총체화하지 않는다.”Jean Narboni, “Préface”, in Dziga Vertov, Articles, journaux, projets(UGE, 1972), p.11. (이정하, 「지가 베르토프의 몽타주 개념」, 『美學(미학)』 제82권 제3호, 2016, p. 282에서 재인용.)

 

전통적으로 숏은 전체 이야기 구조에 들어맞는 하나의 퍼즐 조각처럼 다뤄졌다. 그러나 개별 숏 간 감각적 관계를 놓친 고전적인 편집 모델에서와 달리 갱신된 개념의 숏은, 하나의 숏이 전체를 들여다보는 ‘창’인 동시에 또 다른 하나의 숏을 개별로 비추는 ‘거울’임을 알려준다. 이와 같은 숏의 속성은 건축적 사유 방식과도, 작품을 병렬적으로 구성해 새로운 단위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전시의 본질과도 긴밀히 통한다. 건축적 사유란 건축물의 구조적 원리와 보이지 않는 내부 질서를 파악하는 구조주의에 기반한다.강혁, 「철학의 구축과 건축적 사유: 은유로서 건축과 철학적 건축술」, 『건축역사연구』 제31권 제1호, 2022, p. 82. 그러나 실제 도시에 사는 대다수의 몸은 건축을 훨씬 직접적이고 감각적 차원에서 경험한다. 건축은 “즉각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가졌고,유운성, ‘시간의 건축적 경험’, 『유령과 파수꾼들』(미디어버스, 2018), p. 53. 그를 실현하는 건축술은 설계의 능력만이 아니라 감각의 역량이기도 하다. 단지 일부와의 접촉만으로도 전체의 형상과 보이지 않는 질서를 직감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건축이며 동시에 영상에서의 숏이 수행하는 역할이다. 건축과 영상은 이렇게 서로 닮아있다. 이 닮음은 세상을 이해하는 구조는 본래 서로 겹쳐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되새기며 스크린을 마주할 때, 관람자 각각이 가진 강박과 고집은 비로소 감상과 관람의 재료가 되어 쾌가 되고, 유효한 고문이 된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거대한 BDSM 장치”인 영상은 고통이자 쾌를 습득하는 ‘훈련장’이 되고, 건축은 설계자의 전지전능함을 열린 감상의 구조로 뒤집는 역전의 ‘사건’이 되며, 전시는 이 훈련과 역전을 이어가겠다는 ‘약속’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세 작가의 손, 굴뚝, 버섯은 이 모든 경험이 정확히 맞물리는 1/24초의 어느 가능한 순간을 증언하고 있는 것 아닐까? 우리는 이미 이 모든 가능성이 응축된 프레임을 지나쳐온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