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7
ESSAY
제너비브 유에

우연한 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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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7
ESSAY
제너비브 유에

우연한 외부

*https://worldrecordsjournal.org/the-accidental-outside

이 글은 온라인 저널 “월드 레코즈(World Records)” 6호에 처음 수록되었으며, 원저자인 제너비브 유에의 동의를 얻어 번역, 게재하였습니다. (번역: 박채연)




어떤 영화들에게 있어 영화제는 그 자체로 끝과 같다. 실험 영화제, 그리고 지난 15년간의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제들이 특히 그랬다. 이런 영화제가 제공할 수 있는 상업적 행로는 좁기만 해, 영화제에서의 상영이 라이센스 계약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은 별로 없다. 개중 큰 작품들은 이후 미술관이나 마이크로 시네마의 기획 프로그램에 포함될 수 있겠지만, 대부분 영화들은 여러 영화제를 순회하는 그 짧은 해를 넘기고 난 후에는 상영될 기회가 거의 없다. 몇몇 영화감독들은 간혹 기존 작품의 명성에 힘입어 후원자와 연결되거나, 비평가가 페스티벌 리포트에 신작을 언급해줄 수도 있다. 이상적으로라면 감독들은 이런 반응을 자원 삼아 이력서를 보강한 후 여러 지원금을 신청할 테다. 대학이라는 제도에 속한 감독이라면 종신재직이나 승진을 위한 밑받침으로도 쓰겠다. 이들은 새로 영화를 찍어 다음 해의 영화제에 출품할 테고, 이런 과정은 반복될 것이다.

좁은 분야임에도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제는 최근 눈에 띄게 활성화되었다. 다큐멘터리 영화제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의 영화제가 2000년대 초부터 큰 폭으로 성장했다.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특수한 영역 역시 이 기간에 크게 성장했는데, 기존 영화제가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제로 전환된 경우가 많았으며, 어느 정도 정착된 영화제들은 관련 특별 섹션을 만들기도 했다.기존 영화제들 중,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제로 전환했거나 실험 다큐멘터리 특별 섹션을 만든 영화제는 다음과 같다. 로카르노 영화제, 오버하우젠 국제 단편영화제, 베를린 국제 영화제(1951년 설립, 포럼 익스팬디드 부분은 2006년 출범), 플래허티 세미나, 앤아버 영화제, 로테르담 국제 영화제,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영화제, 마르세유 영화제, 프랑스 시네마 뒤 릴((Cinéma du Réel), 어니언시티 실험영화제, 뉴욕 영화제의 ‘아방가르드의 시선’. 1990년대 첫 열풍과 그를 뒤이은 2000년대 초의 열풍, 그리고 2010년대와 이후까지를 통틀어 수십 개의 영화제가 새로 생겼다.각 연대별로 설립된 영화제는 다음과 같다. 1990년대 : 캐나다 핫독스 국제다큐영화제(1993년), 셰필드 다큐영화제(1994년), 몬트리올 국제 다큐영화제(1998년) 등. 2000년대: 독스킹덤(Doc’s Kingdom, 2000년), 코르티잔 영화제(Courtisane Festival, 2002년), 리스본 다큐영화제(Doclisboa, 2002년), 푼토 데 비스타(Punto de Vista, 나바라 국제 다큐영화제, 2005년), 앰뷸란테 영화제(Ambulante), 플레이독(Play-Doc, 2005년) 등. 2000년대 이후: 오픈시티 다큐영화제(Open City Documentary Festival, 2011년), 미메시스 다큐영화제(Mimesis Documentary Festival, 2020년), 프리즈마틱 그라운드 영화제(Prismatic Ground, 2021년) 등. 뉴욕 현대미술관의 ‘닥 포트나이트(Doc Fortnight)’(2001년 설립)와 필름 앳 링컨센터의 ‘아트 오브 더 리얼(Art of the Real)’(2013년 설립) 등 비경쟁 영화제 또한 이 기간에 여럿 출범했다.

‘실험 다큐멘터리’는 실은 문제적인 용어이며, 이 글에서는 잠정적으로만 이렇게 쓰려 한다. 이 용어에 실로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중에는 20세기 아방가르드 영화에서 이어져 온 비판도 있었는데, ‘실험적’을 진지하지 못하고 아마추어적이라고, ‘다큐멘터리’를 형식적인 혁신을 꾀하기에는 지나치게 관습적인 틀이라며 두 용어 모두를 거부한 입장이었다. 그 결과 여러 대안이 제기되었는데, 논픽션(nonfiction), 현실에 관한 예술(art of the real), 아티스트 필름(artist film), 아방-독(avant-doc) 내지 포스트-다큐(post doc) 등이 그것이다. 이런 대안들이 문제를 해소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각각에게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었다. 물론 ‘아방가르드’나 ‘실험적’이라는 용어의 부적절한 사용을 한탄하는 것이 아방가르드 학자에게는 오랜 전통이기는 하다. 또한 관습을 거스르는 이러한 급진적인 영화를 제작하는 데 참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를 특정한 분류, 더욱이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분류에 끼워맞추는 것이 당황스러울 수 있다.

이런 용어 논쟁을 계속하기보다, 이 글에서는 실험 다큐멘터리라는 현상 내부의 긴장을 살피고자 한다. 즉, 실험 다큐멘터리 급진주의와 영화의 제도적 물질적 조건인 영화제, 이 둘 사이의 긴장 말이다. 그 속에서 실험 다큐멘터리는 아방가르드 영화계 내에서 지속되어 온 여러 논쟁을 이어받게 된다. 이를테면 ‘아방가르드’라는 이름 자체에 내재한 미학적 정치적 급진주의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에 관한 논쟁, 그리고 제도적 산업적 지원이 아방가르드의 자율성을 어느 정도로 타협하게 하는지에 관한 논쟁 말이다.

국제 영화제라는 공간 내부로 한정되긴 하지만, 실험 다큐멘터리를 실천의 한 가지 중요한 방법으로 여겨 본다면 이런 논점들을 다소 다르게 살펴볼 수 있다. 영화제라는 특유의 제약적 구조는 그런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선정되며 관람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학자들과 비평가들은 아방가르드 영화를 – 영화사 전반에 대해서도 그래왔지만 – 텍스트 분석(texual analysis)을 통해 접근하곤 했다. 나 또한 텍스트 우선 방법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이 글에서는 제도와 예술작품의 관계를 다소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틀, 바로 영화 제작 및 관람에 있어서의 자급적인 문화와 환경에 주안점을 두겠다. 한 영화가 사회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그 영화의 (아네트 마이클슨이 말하는) ‘급진주의적 열망’을 형성하는가? 특히 그 영화가 유사한 다른 영화들 사이에 존재할 때 말이다. 이 물음에 답하려면 실험 다큐멘터리를 단순히 의미화된 텍스트로 보지 말고, 복잡한 문화적 물질적 대상으로 접근해야 한다. 하드 드라이브나 필름 릴, 미디어 파일의 형태로 도시를 옮겨다니며 다양한 성격의 스크린에 영사되고, 결국 일시적인 대화나 비평 지면에서 논의되는 대상으로서 말이다. 이렇게 제한된 유통 영역은, 영화 제작의 물질적 조건과 급진주의 사이의 간과되기 쉬운 관계를 가시화한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나는 영화가 급진주의적 열망을 지닌다고 믿는다. 마이클슨이 그랬듯 나도 그 가능성에 관해서는 여러 대안을 열어놓고 있지만 말이다. 애비 선이 최근 주장했듯, “전복적인 영화를 프로그래밍하고 선보이는 목적이 문화 권력 시스템의 해체라면, 이를 실현할 한 가지 방법으로는 다음이 있다. 이런 제도와 무의식적으로 공모한 우리 자신을 일깨우고 비상업적 제작 및 유통 실천을 통해 이를 탈출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다.”Abby Sun, “Giving Time: Amos Vogel and the Legacy of Cinema 16,” Film Comment Letter, November 15, 2021. ‘무의식적 공모’를 벗어날 가능성에 관해서는 내가 선보다 비관적이기는 하나, 그 어떤 급진적인 작업이든 자기 인식이 기본이라는 견해에는 동의한다. 영화가 그 정치성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제작의 맥락을 포함해 더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테다.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제를 빠져나갈 상업적 행로는 몇 없는 데 반해 영화제 내부를 도는 선로는 충분하다. 영화제에 가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관련자들이다. 이를테면 영화감독이나 영화제 프로그래머, 그리고 비평가들 말이다. 다른 영화제들은 일반 관객을 참여시키기 위해 어떻게든 노력을 기울이겠지만,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제는 영화제 자체의 구성원들로 보통 채워진다. 또한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이런 공간 밖에서는 대체로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는 칸 영화제나 선댄스 영화제 등에서의 최초 상영 이후 여기저기에서 상영되는 여타 흥행작이나 다큐멘터리 영화들과는 확연한 대조를 이룬다. 반면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제는 상당히 배타적이며 자생적이다. 미술관 큐레이터들과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이 신작을 발굴하는 곳 또한 다른 영화제들이며, 그들은 각자의 영화제들로 다시 이 생태계를 풍요롭게 만든다.

나도 그랬듯,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관계에서 출발한다. 특히 주기적으로 영화제를 순회하는 대학 강사들로부터 말이다.실험 다큐멘터리의 제작, 유통, 그리고 문화적 지위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데 학계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방가르드 영화감독과 아카데미의 관계의 연장선으로서, 대학교는 영화감독이 ‘직업’을 이어나가는 곳이다. 즉, 감독들의 창작활동과 연구를 지원하고, 강의나 상영 등 일자리에 대한 보수를 주며, DVD를 도서관에 비치하는 데나 영화를 스트리밍하는 데 대한 사용료를 지불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장학금과 교육이라는 형태로 학계는 실험 다큐멘터리를 비평적이고 사회에 개입하며 정치적인 미디어 형식으로 격상시켜 문화적 정통성을 부여하여, 결국 그 존재 이유를 강화시킨다. 교수의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든지, 선배의 격려로 자신의 작품을 출품하면서 학생들은 영화제에 갈 테다. 뜻이 맞는 영화 애호가들이 모인 크고 활발한 커뮤니티를 발견하는 경험은 젊은 사람들에게 특히 신날 수 있다. 내가 비평에 발을 들이게 된 것도 이와 비슷했다. 대학에서 아방가르드 영화를 공부하고 미술관과 실험영화 배급사에서 인턴을 하며 영화제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런 공부와 경험은 내가 영화제에 접근하는 태도를 형성했다. 영화제에 처음 참석했던 2001년, 여러 영화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으면서도 어떤 영화를 봐야 할지 막막하기도 했다. 별다른 업계 인맥도 실질적 인맥도 없던 나는 카탈로그를 훑으며 그나마 낯익은 것, 즉 실험영화들을 찾아냈다.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서는 켄 제이콥스의 영화 작업들, ‘아방가르드의 시선(Views From the Avant-Garde)’에서는 로버트 비버스 프로그램, 그리고 이미지 페스티벌(Images Festival)에서 장-마리 테노(Jean-Marie Téno)의 초대 기획 상영을 말이다. 이 감독들을 강의에서만 배운 나로서는, 울타리 밖의 ‘현실 세계’에서도 이들이 중요하다는 점이 놀랍고도 기뻤다. 강의 중에 배운 작품들의 실제 감독을 마주치고, 영화 상영 후 질의응답을 마치고 용기를 내어 대화를 청할 수도 있었는데, 나에게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이런 아방가르드 영화의 공간들 속에서 나는 실험에 더 적극적인, 새로운 형식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마주치기 시작했다. 이런 영화들 대부분은 아방가르드 영화들이 그러하듯 표면 효과와 프레이밍에 신경 쓴 생략 구조를 택하고, 의도적으로 시제를 조작하며 (특히나 ‘느림’을 표현하는 데 쓰인다) 소규모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그런 동시에 이 영화들은 어떤 상황이나 쟁점, 역사적 사건의 특수성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방가르드 영화가 현실적 사안들을 도외시한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당시 보기 시작한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오쿠이 엔위저의 말을 빌리자면) ‘사회적 삶에 참여하는 예술’Okwui Enwezor, “Documentary/Vérité: Bio-Politics, Human Rights, and the Figure of ‘Truth’ in Contemporary Art,” in The Greenroom: Reconsidering the Documentary and Contemporary Art #1, ed. Maria Lind and Hito Steyerl (Berlin: Sternberg Press, 2008), 64.을 우선시했다는 뜻이다. 사안을 아무리 간접적이거나 모호하게 다루더라도 말이다. 북대서양의 상업 어선을 액션카메라로 촬영해 낯설게 보게 하는 장면이 포함된, 루시엔 카스탱-테일러(Lucien Castaing-Taylor)와 베레나 파라벨(Verena Paravel)의 〈리바이어던〉(2012)처럼 하버드대 감각민족지 연구소(SEL)에서 제작된 영화들, 마티 디옵(Mati Diop)의 〈천 개의 태양〉(2013)과 벤 리버스(Ben Rivers)와 벤 러셀이 함께 만든 〈어둠을 밀어내는 주문〉(2013) 같은 복합 다큐픽션, 그리고 마지막으로 니콜라스 페레다(Nicolás Pereda)의 〈궁전(El Palacio)〉(2013), 케빈 제롬 에버슨의 〈파크 레인즈〉(2015), 잭 카렐(Zack Khalil)과 아담 카렐(Adam Khalil)의 〈INAATE/SE〉(2016)처럼 역사와 공간을 에세이적으로 내지 관찰적으로 파고드는 영화들이 그 사례다.

또, 이들보다 앞선 사례들 중 주목할 만한 작품은, 유럽 방송과 예술공간들에서 1990년대 중반 활발하게 유통된 제임스 베닝의 구조주의적 풍경 영화(손대지 않은 다큐멘터리 장면 같아 보이지만 상당한 수준의 가공이 들어가 있다)와, 일기 형식, 사회적 사안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그리고 에세이적 반추를 혼합해 널리 호평받은 아녜스 바르다의 유명한 작품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2000)가 있다. 그리고 2010년대 에세이 영화에 대한 관심을 볼 수 있는 사례로는 2007년 오스트리아 영화박물관에서 선보인 장피에르 고랭의 기획 프로그램과 2011년 발행된 티모시 코리건의 책 등이 있다.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 그중에서도 특히 실제적이고 주로 긴급한 상황을 다루는 영화들이 지닌 다큐멘터리성은 과거 아방가르드 영화를 둘러싼 주요 논쟁 하나를 다시 끌어낸다. 아네트 마이클슨은 1966년, 영화가 내재한 혁명 가능성은 그 형식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이 통합될 때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다며 1920~30년대 소련 영화, 고다르를 위시한 누벨바그 감독들의 작품들, 그리고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를 예로 들었다. 다만 이 급진주의적 열망의 순간들은 불완전했으며, 당국에 편입되거나 상업영화에 흡수되는 등 흩어져 오래가지 못했다.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경우, 공동배급 구조 덕에 (정치적이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경제적 자율성을 지켜냈지만, 마이클슨은 이에 대해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스탠 브래키지와 요나스 메카스의 작품에 관해서 그는 “급진성을 보장하는 형식적 무결성은 궁극적으로 소멸되어야 하며, 소멸되고 있다”라고 경고한 바 있다.Annette Michelson, “Film and the Radical Aspiration,” in Film Culture Reader, ed. P. Adams Sitney (New York: Cooper Square Press, 2000), 416. 마이클슨의 공식 속에서 형식은 허공에 존재할 수 없다. 즉, 영화는 언제나 일련의 사회정치적 조건으로의 진입이다. 그러므로 급진성은 그 형식이 고정되거나 보장되기보다는, 영화의 열망 속에 내재한다. ‘미래 감각’, 즉 영화가 기다리는 동시에 가능케 하는 혁명을 향한 몸짓 속에 말이다.위 문헌, 421. 이에 따라, 급진주의적 열망은 고정되지 않는 것을 목표하지만, 역설적으로 오직 그 자리에서만 유의미하다. 영화 자체가 미래의 가능성을 바꾸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마이클슨이 글을 쓴 이후로 많은 것이 변했다. 혁명의 지평이 바뀌어, 지금은 더 개별적이고 구체적이게, 그리고 활동가의 노력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예술계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다. 투쟁은 분명히 계속되고 있지만, 선언문을 앞세워 반자본주의 공격을 이끄는 영화문화 집단, 즉 공통된 영화 전선이라는 감각은 더이상 없다.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가 형식적-정치적 급진성이라는 역할을 물려받기는 해도, 대부분은 로렌스 아부 함단, 히토 슈타이얼, 하룬 파로키의 경우처럼 정치성을 노골적이고 날카롭게 표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류의 명시적으로 정치적인 작업들 대부분은 북미 바깥, 미술계의 맥락에서 만들어진다.) 많은 경우, 영화의 현실에 대한 관여는 대개 서정성, 확장된 관찰, 그리고 감각적 몰입과 함께 일어난다. 살로메 야시의 〈뿌리 없는 정원〉(2021)이 좋은 사례이다. 수령이 수백 년 된 나무들을 뿌리째 뽑아 억만장자인 전 국무총리의 섬에 옮겨 심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길고 초자연적인 미장센 속에 비판을 담았다. 이것이 영화의 정치성을 흐리는지 아니면 선명하게 만드는지는 불분명하하다. 이 영화는 정치를 다른 음역에서 조율하여 이런 통제된 형식의 정치적 비평을 옹호하는가? 아니면 비언어적 정보로 정치성을 압도하는가? 어떤 가능성이든 성립할 수 있다. SEL 영화들 또한 음성 언어보다 감각의 세부를 더 중요시하는데, 이를 현상학적 강조라고 볼 수도, 표현을 회피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특성을 주류 다큐멘터리가 도덕적 정치적 긴급성에 비중을 둔 데 대한 반응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아니면, 푸자 랭건이 “직접 매개(immediations)”라고 이름붙인 바와 같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신자유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그리고 간섭주의자적인) 의제를 다루는 도구로 볼 수도 있다.Pooja Rangan, Immediations: The Humanitarian Impulse in Documentary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17). 더욱 모호하고 관찰적인 논픽션 영화들은 그러한 대의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아, 이 분류로 포섭되는 것에 더 저항적일 수 있다. 여기서 다큐멘터리 영화가 지닌 정치성의 가치를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니며, 어떤 방식이 옳은지 제안하려는 것도 아니다. 요지는, 실험 다큐멘터리가 마이클슨 시대에 영화가 지녔던 명백한 정치성에 뿌리를 두고 있기는 하나, 훨씬 불분명한 무언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제 실험 다큐멘터리와 정치 운동의 연관성은 뒷전에 놓인 셈이다.

실험 다큐멘터리는 일반적으로 외부의 정치 문제를 겨냥하며, 내부, 즉 실험 다큐멘터리를 뒷받침하고 유지하는 제도를 향하는 일은 드물다. 20세기 초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자신들이 생겨난 부르주아 제도를 공격한 것과 달리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 중에서 영화제나 미술관 쇼케이스, 스트리밍 플랫폼, 시사회, 영화학교, 보조금 지원사업, 아티스트 레지던시 등 영화가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데 관련한 그 어떤 것을 비평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너무 실험적이거나 너무 다큐멘터리적이어서 이런 공간들에 참여하지 않는 감독들에게서 오히려 이런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뉴아메리칸 시네마를 헐리우드가 구상했다고 그리는 오웬 랜드(Owen Land)의 풍자 작품 〈언디자이러블(Undesirables)〉(1999)이나, 샤르자 비엔날레의 참여 조건을 결정하는 금기시된 주제들을 파고드는 영화감독이 출연하는 카베 자헤디의 〈셰이크와 나〉(2012), 그리고 힘들기로 악명 높은 프랑스 영화학교 라페미스(La Fémis) 입학 과정을 살펴보는 클레르 시몽의 〈프랑스 영화학교 입시 전쟁〉(2016) 등이 있다.) 어쩌면 주류 영화 및 다큐멘터리에 대한 반대노선을 실험 다큐멘터리가 이미 취하고 있기 때문에,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아방가르드 영화 제도를 향해 그에 상응하는 보호주의적인 태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무리 금세 무너질 듯 하고 자발적인 노동으로 굴러가더라도 영화제는 제도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영화제는 거기서 상영되는 영화들과는 다소 다른 요구에도 응해야 한다는 점 또한 그렇다. 선의 말을 기억하자. 제도는 지속을 목표하며, 제도가 추구하는 안정성은 종종 상반되는 ‘신랄한’ 작업을 정기적으로 상영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즉, 전복적인 작업은 제도가 지속을 추구하는 데 꽤나 든든하게 조력한다.

현재 제작되고 있는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 중 거의 대부분은 영화제 체계에 의해 부양되고 있다.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제는 전시 장소이자 홍보의 원동력으로기능하는데, 제작 지원금과 상금 등을 통해 물적 지원을 직접적으로 제공하기도 한다. 지난 세대의 아방가르드 영화감독들이었다면 이러한 제도와의 얽힘을 거부할 가능성이 높지만, 동시대 감독들은 그 속에서 성장할 방법을 찾은 것이다. 영화제는 그 자체로 형식의 표명이며, 특정 종류의 예술 작품을 포함하고 가능하게 하는 확장된 사회적 영역이다. 영화제를 형식의 결정요인으로 여긴다면 마이클슨의 말을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생긴다. 형식적 무결성이 급진성을 보장하지 않는 것처럼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즉, 형식적으로 불완전하더라도 급진성은 발현 가능하다.

이런 종류의 영화제 인프라는 크게 세 가지 요인에 의해 뒷받침되어 왔다. 첫째로 다큐멘터리 형식에 대한 미술계 내의 관심이 높아졌고, 둘째 실험적인 작업에 대한 정부 지원기금이 축소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영화 제작과 영화제에 대한 유럽 내 공공 기금이 확대되었다. 먼저, 동시대 미술에서의 이른바 다큐멘터리적 전환으로 인해 공급이 증가했다. (아니면 유럽 기금이 유입된 결과로 볼 수도 있겠다.) 주로 무빙이미지 기반의 디지털 비디오와 설치 작업이 대부분이었으며, 작가들은 젊은 편이었다. 앞선 세대의 예술가들 중 대부분은 영화 연출자로 시작했는데(아이작 줄리언(Isaac Julien), 조안 조나스, 히토 슈타이얼, 하룬 파로키 등), 다른 작가들은 다큐멘터리적 감성을 초기부터 지니고 있었다. 마크 내쉬와 오쿠이 엔위저의 《도큐멘타 11》(2002)은 무빙이미지에서의 다큐멘터리 미학이 가장 우세한 예술 실천 형태가 된 분기점이다. 《도큐멘타 11》 이후 예술가들은 갤러리와 미술관 밖에서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오톨리스 그룹(Otolith Group)이 그랬듯, 많은 이들이 갤러리용 버전에서 극장을 위한 스크린 버전으로 작업을 전환했고 (아니면 모건 피셔처럼 오히려 반대로 전향했다), 가렛 브래들리, 대니 레스택과 샤일라 레스택(Dani and Sheilah ReStack), 로르 프루보(Laure Prouvost), 벤 리버스, 아나 바즈, 스카이 호핀카(Sky Hopinka), 루크 파울러, 레슬리 쏜턴 등(현재 활동 중인 실험영화 감독 거의 모두를 나열할 수 있겠다), 그리고 더 앞선 세대인 제임스 베닝, 요나스 메카스, 필 솔로몬 등은 갤러리와 극장 공간 모두에서 선보일 수 있는 작업을 만들었다.

둘째로, 특히 미국에서 실험작업에 대한 주정부 및 연방정부의 지원이 줄어들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문화 전쟁”의 결과로 미국 국립예술기금(NEA)이 크게 감소했었으며, 주정부 차원의 지원 또한 상당히 축소되었다. 1981년부터 1991년까지 뉴욕주 예술위원회(NYSCA)의 영화 및 비디오 프로그램 디렉터를 지낸 B. 루비 리치에 의하면, 당시 뉴욕주 주지사였던 마리오 쿠오모에 의해 관련 예산이 삭감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력 또한 감축되었다. 그런 와중에 영화감독들 사이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1970년대에는 오로지 실험영화를 위한 지원금이 더 많이 투입되었다면,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립 작가, 여성주의 작가, 그리고 흑인 작가뿐만 아니라 비디오 및 퍼블릭 액세스 TV 등을 활용한 실험을 시도하는 다양한 그룹의 지원 수요 또한 커졌다. 리치의 설명에 따르면, “기금은 뉴욕주 영화계의 다양한 영역을 아울러야 했으며, 이를 실험작가들은 ‘배신’으로 보았다”.B. Ruby Rich, 필자에게 2021년 11월 23일 전송한 이메일.

구겐하임 펠로십, 허브앨퍼트 어워드, LEF 재단의 무빙이미지 펀드 등을 보면 알 수 있듯, 현재까지 남아있는 주요 기금은 민간재단의 것이다. 그조차도 규모가 줄어들었는데, 제롬 재단(구 에이본 재단, 1964년 설립)이 실험영화를 정기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1978년과 1979년, 보조금은 1만 달러 수준이었으며 아방가르드 영화제작자와 작가들을 선호했다. 1978년 마조리 켈러(Marjorie Keller)와 로버트 가드너는 각각 1만 달러, 리지 보든은 1만 5천 달러, 그리고 1979년 켄 코브랜드는 1만 450달러, 존 크넥트(John Knecht) 1만 1천 달러, 마사 해슬랜저(Martha Haslanger)는 9천 달러, 베트 고든은 1만 달러를 지원받았다. 하지만 2019년 제롬 재단이 수여한 12회의 지원금을 보면, 1회를 제외하고 모두 3만 달러(1979년의 물가 수준으로 대략 8천 달러 정도) 수준이었다. 1980년대 NYSCA 기금과 비슷하게, 이런 지원금의 대상은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실험 및 내러티브 장르, 그리고 … 이런 형식들의 조합”을 포함한 다양한 장르들을 포괄했다.“New York City Film, Video and Digital Production Grant,” Jerome Foundation, 2022년 2월 15일 접속. 어떤 작품이 실험영화인지 아니면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인지에 대한 기준이 모호한 가운데, 2019년도 지원금 수상자 중 소개글에 ‘실험’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프로젝트는 오직 하나(모니카 사비론(Mónica Savirón)의 〈덧줄(the Ledger Line)〉)뿐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셋째, 유럽 내 정부 지원기금이 확대되어 영화제 공간과 관련 작품 제작이 활성화됐다. 이는 유럽연합(EU)의 형성과 경제적 문화적 통합과 공동성의 감각을 육성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에 일부 말미암았다. 영화제는 지역의 패권을 주장하는 것을 넘어 국가 사업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주로 유럽에서 유럽 영화제와 유럽 예술가들에게 벌어진 이 현상이, 과거 미국이 실험작업에 탄탄한 기반을 마련해주던 맥락과 상당 부분 겹쳐지며 얽혀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유럽과 미국 맥락의 주요한 예외로는 칠레의 발바디아 국제 영화제(1993년 설립)와 한국 전주 국제 영화제(2000년 설립)의 ‘영화보다 낯선’ 섹션, 에콰도르 국제 다큐영화제(EDOC, 2002년 설립), 인도 실험영화제(Experimenta India, 2003년 설립), 그리고 멕시코 앰뷸란테 영화제(2005년 설립)가 있다.

셋째, 유럽 내 정부 지원기금이 확대되어 영화제 공간과 관련 작품 제작이 활성화됐다. 이는 유럽연합(EU)의 형성과 경제적 문화적 통합과 공동성의 감각을 육성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에 일부 말미암았다. 영화제는 지역의 패권을 주장하는 것을 넘어 국가 사업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주로 유럽에서 유럽 영화제와 유럽 예술가들에게 벌어진 이 현상이, 과거 미국이 실험작업에 탄탄한 기반을 마련해주던 맥락과 상당 부분 겹쳐지며 얽혀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유럽과 미국 맥락의 주요한 예외로는 칠레의 발바디아 국제 영화제(1993년 설립)와 한국 전주 국제 영화제(2000년 설립)의 ‘영화보다 낯선’ 섹션, 에콰도르 국제 다큐영화제(EDOC, 2002년 설립), 인도 실험영화제(Experimenta India, 2003년 설립), 그리고 멕시코 앰뷸란테 영화제(2005년 설립)가 있다.

영화제 공간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추적하기 위해 개별 영화감독들의 작업 궤적을 살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여기서 관련 작품들의 형식 및 이해관계를 제도적 공간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미학적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어떻게 서로 반응하는지를 보고자 한다. 일례로 실험적이고 관찰적이며 에세이적인 실천의 교차점에 놓여 있는 데보라 스트라트맨의 작품들을 보자. 그의 영화들은 1990년 상영되기 시작한 직후 여러 영화제에 자주 등장했는데, 처음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로 분류된 작품은 〈여기 있지 않기 위하여(In Order Not to Be Here)〉(2002)이다. 이 작품은 2002년과 2003년 두 해에 걸쳐 70여 곳에서 상영되었는데, 그중에는 앤아버 영화제, 미디어시티 영화제(1994년 설립), 뉴욕 언더그라운드 영화제(1994~2008년), 플레저돔 영화제(Pleasure Dome, 1989년 설립) 그리고 가장자리에서의 대화 영화제(Conversations at the Edge) 등 실험영화가 주를 이루는 영화제는 물론, 선댄스 영화제, 비종 뒤 릴(Visions du Réel, 1969년 설립), 그리고 PDX 영화제(2001~2009년)도 포함한다.Kelly Vance, “Critic’s Choice: Deborah Stratman’s In Order Not To Be Here,” East Bay Express, May 7–13, 2002. 이 작품이 수상한 것은 대체로 최우수 실험영화 부문이었는데, 10년 후 스트라트맨의 작품들은 다큐멘터리 섹션에 더 많이 등장하게 된다. 미국 생활의 세속화된 의례를 살피는 〈오버 더 랜드(O’er the Land)〉(2009)는 선댄스 영화제, 풀프레임 다큐영화제(1998년 설립), PDX 영화제, 코르티잔 영화제, 트루/폴스 영화제(True/False Film Festival, 2004년 설립), 그리고 코펜하겐 국제 다큐영화제(CPH:DOX, 2003년 설립)에 초청되었으며, 앤아버 영화제의 켄 번즈 최우수상과 바르셀로나 독립영화제(L’Alternativa, 1993년 설립)의 최우수 다큐멘터리 영화상을 수상했다. 〈일리노이 우화〉(2016) 또한 실험 부문과 다큐멘터리 부문 모두에서 수상했다.

스트라트맨이 직접 내비쳤듯, 그는 분명히 실험영화의 관심사를 넘어 확장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지역색이 묻은 실천으로 엮여있든 영화 언어로 새겨져 있든, 역사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관심은 전통적 아방가르드 영화의 내향성(inwardness)과 구별되는 그만의 관점을 형성했다. 2018년 인터뷰에서 그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사이의, 톰 거닝이 이름붙인 ‘소수영화’ 감독들과 자신의 접근을 구분하며 “그들의 작품은 개인적인 정치성을 지녔다. 하지만 나는 전부터 우연한 외부를 더 원했다. 현실과 가까운 무언가, 작품이 환기(換氣)될 수 있는 어떤 사회정치성 말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 없는’ 역사에 점점 더 천착하고 있다는 점은 〈일리노이 우화〉에서 잘 드러난다. 일리노이주 토착민의 강제 추방, 프랑스계 이카리아 공동체의 유토피아 실험, 그리고 프레드 햄프턴 암살사건을 포함한 열한 개의 이야기들 속에서 스트라트맨은 일리노이주의 역사서술 지형을 가로지른다. 묘지와 봉분, 거실, 숲을 돌아다니는 내내 스트라트맨은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 즉 신이든, 슬픔이나 자각이든, 과거의 짐이든, 다른 차원의 힘”을 보고 들으며 측정한다.Deborah Stratman in Jason Fox, “‘Where Are Those Lines?’: Discussions About and Around Experimental Ethnography with Sky Hopinka, Naeem Mohaiemen and Deborah Stratman,” in A Companion to Experimental Film, ed. Federico Windhausen (New York: Wiley-Blackwell, 2022). 이와 비슷하게 이 작품 속에서는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제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 즉 영화가 제작되고 유통되는 사회적 환경이 가하는 미묘한 압력 또한 발견할 수 있다. 스트라트맨의 방법론은 이 흔적들을 포착할 수 있는 간접적인 방법들을 암시한다. 언어 및 기타 재현 전략의 직접성을 넘어서는 방법들 말이다.

말은 무언가를 밝히는 만큼 무언가를 모호하게 할 수도 있다. 영화가 사회 현실에 아무리 깊게 개입하더라도, 실험영화에 대한 논문이나 비평문은 영화의 텍스트적 특성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 자신을 (‘지혜의 눈’을 가진) 다큐멘터리 작가라 칭하는 스탠 브래키지를 보자. 아방가르드 내에서의 높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브래키지는 수작업으로 이루어진 영화와 시적인 암시 등 형식적 실천의 측면에서 논해지는 경우가 많다. (다큐멘터리라는 단어는 피츠버그 3부작과 관련할 때만 등장한다. 마치 제도적 환경에서 카메라로 촬영했다는 점 하나 때문에 다큐멘터리로 분류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미학적 관심과 정치적 관심을 명쾌하게 구분하고자 하는 분류에의 욕망은 결국 텍스트 분석을 과대평가하는 동시에 영화 생산 조건을 과소평가하게 하며, 이 둘을 별개의 영역으로 다루게 한다.

이런 경향은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 영화가 포개지는 과거의 순간을 찾아내려는 다양한 시도 속에서 나타난다. 스콧 맥도널드는 『아방-독: 다큐멘터리와 아방가르드 영화의 교차점(Avant-Doc: Intersections of Documentary and Avant-Garde Cinema)』(2014)에서 외관상 논픽션 중에서 서정성을 지닌 작품을 택해 다룬다. 1920년대 도시교향곡 영화, 로버트 플래허티, 스탠 브래키지, 피터 쿠벨카의 영화, 파운드푸티지 작품, 그리고 형식적 융합의 사례들을 포함하여 말이다. 이런 분류를 맥도널드가 교정하려는 듯 보이지만, 그는 지나치게 형식을 중요시한 나머지 그가 문제삼은 분류를 오히려 구체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분류들이 어떤 정치적 역사적 상황에서 어떻게 그리고 왜 등장했는지에 대한 진지한 연관이 부재하자, 다큐멘터리와 아방가르드 영화는 둘 다 일련의 기표로 축소되어 버렸다. 그 결과 아방가르드 영화 전체가 다큐멘터리의 부분집합으로 보이는, 또는 역으로 다큐멘터리가 아방가르드의 부분집합으로 보이는, 순환적인 분류가 되어 버렸다.

아방가르드 영화를 위한 전시공간이 주로 실험 다큐멘터리 아니면 무빙이미지 예술로 쏠리는 상황에 대한 징후로 맥도널드의 서술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다큐멘터리와 아방가르드의 교차점에 관하여 데이비드 E. 제임스는 역사적인 근거가 뒷받침하는 정반대 해석을 내놓은 바 있다. 그의 정리에 따르면 아방가르드 영화, 그리고 정치적이며 전투적인 형식의 다큐멘터리는 1950~1960년대 언더그라운드 영화계로부터 출현했다. 사회적 정치적 현실의 변화는 “예술 제작을 반문화적 반란의 중심의식이자 자기 검증이 되도록 허용한 미학과 실존 사이의 균형”을 뒤엎는다. 바로 여기서 여러 뉴스 릴 및 관련 프로젝트에 대항하는 영화들이 등장했다. 사울 레빈(Saul Levine)의 〈신좌파 노트(New Left Note)〉(1968~1982)처럼 말이다. 뉴메리칸 시네마 운동의 주역 중 한 명인 요나스 메카스는 영화 제작의 이러한 두 영역을 직접 연결하며, “아방가르드 영화와 아방가르드 뉴스영화는 동일하다”고 선언한 바 있다. 제임스의 관점에 의하면 초창기 아방가르드는 정치적 격론을 수반했다. 작은 커뮤니티 내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 큰 요인이었다. 그에서 벗어나 순수히 형식에 관한 문제가 된 것은 그 이후였다. David E. James, Allegories of Cinema: American Film in the Sixties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9), 164; 요나스 메카스가 위 문헌, 167에서 재인용. 2010년대 중반 벌어졌던 필름 앳 링컨센터의 구조 개편을 예로 들면, 실험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아트 오브 더 리얼’이 2013년 출범했으며, 미국 실험영화 대부분이 최종 목표로 삼았던 ‘아방가르드의 시선’은 2014년 갤러리 친화적 상영 프로그램으로 대체되었다가 2020년 ‘커런츠(Currents)’로 탈바꿈했다. 실험영화라는 넓은 지붕 아래 놓일 수 있는 작품들의 상영 기회 자체가 전체적으로 늘어난 반면, 전통적인 아방가르드와 관련한 추상 작품, 수작업 중심의 영화, 애니메이션, 서정적 작품 등이 설 자리는 좁아졌다. 맥도널드의 크로스오버 접근 방식 등은 이런 새로운 영화제 공간에게, 그들이 선보이는 혁신적이고 장르를 뛰어넘는 작품들을 설명할 언어를 제공했다. 이들 작품들은 비용이 많이 든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대부분이 지원금이나 여러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조쉬 길포드(Josh Guilford)가 꼬집듯, “이런 전시 맥락에서 이렇게 사회적 정치적인 내용을 다루는 작품들을 우선시하는 것은, 기술적 미학적 기교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문화를 활성화하는 수많은 모순 중 하나일 뿐이다.”Josh Guilford, 필자에게 2021년 11월 16일 전송한 이메일.

맥도널드는 장르와 방법론, 국가 영화, 그리고 감독 등을 따라 편성된 교육과정에서 정전이 생성되고 심화되는 아카데미의 역할을 정확히 파악한다. ‘아방가르드-다큐멘터리’의 줄기를 따라 정전을 개정하다 보면 결국 이 종잡을 수 없는 프레이밍을 강화할 뿐이다. 받아들일 만하다고, 훌륭하다고, 또 잊을 만하다고 간주되는 작품들의 유형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영화제의 글, 그리고 영화제에 관한 글의 역할 또한 동등하게 중요하다. 전통적인 영화제에 관한 비평은 트렌드와 인재, 그리고 새로운 흐름을 파악하는, ‘영화제 최우수상’에 관한 짧은 리뷰에 몰리는 경향이 있다. 페스티벌 리포트 첫머리나 끝머리에 영화제에서의 경험이 어땠는지 몇 줄 기술하기는 하겠지만 그보다 더 나아가 민속지적 묘사에 깊이 파고드는 것은 대체적으로 피하곤 한다.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의 비평은 이러한 경향들은 물론, 문제들까지 이어받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주류 비평가, 그러니까 주요 신문사들에 고용된 비평가들 중 이런 영화제를 주기적으로 다루는 이들은 내가 알기로 없다. 이런 영화제에 다니며 글을 쓰는 비평가들은 보통 개인적인 관심으로 움직인다. 에이미 토빈이나 마놀라 다지스가 ‘프로젝션(Projections)’에 관해 『뉴욕타임스』에 기고하려 자청한 경우처럼 말이다. 여기서, 오늘날 대부분의 영화 비평가는 프리랜서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 매체를 위해 전속 고용된 것이 아니라 하나 이상의 지면에서 건수로 작업한다는 말이다. 더욱이, 프리랜서 영화 비평가는 거의 모두 생활 임금을 맞추기 위해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한다. 프레스 카드를 받는다 하더라도 영화제를 다니기에는 경제적으로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영화감독들도 물론 영화제로부터 (정식) 참가자 자격을 받아야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영화제에 오가는 경비를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프로그래머나 업계 관계자들은 여행 경비를 후원받을 테다. 이와 달리 비평가들은 신청이나 초청을 통해 영화제에 참가한다. 초청 받는 경우 숙박비 등의 형태로 소정의 우대가 딸려오는데, 비평가에게는 이런 특전에 대한 대가로 영화제를 좋게 평가해줄 것이라는 무언의 전제가 깔려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겉으로는 이러한 의무에 얽매이지 않는 (이를테면 자신의 매체의 명성에 보호받는) 비평가라 할지라도 얼마간 제약을 느낄 수 있다. 비평가가 영화제 운영에 관여하는 다양한 방식 때문에 사안이 더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내 경우, 표면상으로는 지면에 실릴 글을 위해 참석해 있는 와중에 영화제의 패널로 발언하거나 Q&A를 진행하거나, 아니면 상영을 소개해줄 수 있냐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개인의 상당한 투자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실험 다큐멘터리를 다루는 비평가가 드문 것은 당연하다. 비평의 주제를 직접 선택하는 비평가들은 대체적으로 개별 영화들을 따로 떼내어 논하는데, 주로 영화제 상영작들 사이에서 주제적 연관성을 추적한다. 어떤 영화에 관해서든 폄하하는 비평을 쓴다면 이에 대한 보상은 아주 적을 테다. 내 경우에도, 내가 쓴 글이 그 영화가 받을 유일한 비평이 될 수 있으며, 프로그램 노트나 카탈로그 텍스트, 지원금 신청서 등에 쓰일 것이라 늘 의식하고 있다. 영화제 커뮤니티에서도 나름의 사회적 압력이 있다. 영화에 대해 글을 써 문제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안 써버리고 말기가 더 쉽다. 이런 결과 실험 다큐멘터리에 관한 비평은 찬사만 가득한 선택의 편향으로 이어진다. 프로그래머들은 자신들이 가진 영향력을 인지하고 있다. 실험 다큐멘터리의 결핍과 취약함, 연약함을 모두가 공통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제의 가치 체계 또한 이에 따라 형성되었다. 이는 대중으로 하여금 영화제를 편향적으로 이해하도록 만들며, 이를 다시 내부 커뮤니티에게 잘못 전달하여, 결국 이 왜곡을 재생산하게 된다. 더욱 다각적인 비평이 필요하는 점은 명백하다. 비판적인 글은 물론, 평가라는 프레임을 취하지 않는 글들 말이다. 다만, 출판 지면들이 각자의 수익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은 인지해야 한다. 좋든 나쁘든,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 및 영화제를 지원하는 것으로부터 수혜를 받지 않는다는 점 말이다.

이런 압박은 한 가지 이상한 결과로 이어졌는데, 바로 비평가들이 영화계에 다른 방식으로 기여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이는 역사적 선례가 있었던 현상으로,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레이첼 레익스(Rachael Rakes), 데니스 림(Dennis Lim), 애드 할터(Ed Halter), 장피에르 렘(Jean-Pierre Rehm), 페데리코 윈드하우젠(Federico Windhausen), 마크 페란슨 등을 포함해 프로그래머로 업을 전향한 비평가들이 있었다. 1960년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의 비평가들이 영화감독이 되었다면, 2000년대 실험 다큐멘터리 공간은 비평가였던 프로그래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는 영화제와 시네마테크 등 전시공간에서 프로그래머의 역할이 전반적으로 확대된 것과 동시에 일어났다. 또, 이 시대 실비아 쉬델바우어, 벤 러셀, 벤 리버스 등 많은 영화감독들이 프로그래머로서도 활발히 활동했다는 점 또한 눈여겨 볼 만하다. 비평가들이 지닌 감수성은, 이들 비평가 겸 프로그래머와 감독 겸 프로그래머가 기획한 프로그램 주제들이 보이는 강력한 응집력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레익스와 림이 기획한 ‘아트 오브 더 리얼’에는 그 에세이적, 지적, 정치적 성격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2016년 오버하우젠 국제단편영화제 내 윈드하우젠의 ‘푸에블로 프로그램(Pueblo program)’에서는 라틴아메리카의 공동성이 가진 역사적 동시대적 가능성을 반영하는 영화들을 모았다. 이런 류의 프로그래밍은 이질성과 다양성을 강조하는 주류 영화제 프로그래밍과 대비되며, 이렇게 좁은 영역에 집중한다는 면에서 큐레이터의 작품 선정 방식에 차라리 더 가깝다. 하여 비평가의 프로그래머로의 전향, 내지 비평적 맥락에서의 프로그래밍은 제도적 지속성을 가진 형식적인 카테고리로서의 실험적 다큐멘터리의 일관성에 큰 동기를 부여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형식이라 칭하는 것, 즉 예술작품의 미학적 특성은 실험 다큐멘터리의 특수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이제는 형식이라는 개념을 텍스트 너머, 즉 작품이 만들어지고 수용되는 사회적 세계로 확대해야 한다. 실험 다큐멘터리의 선구자들에 관해 맥도널드가 꼬집은 점은 중요하다. 즉, 현재의 윤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영화 형식, 그리고 그를 뒷받침한 제도적 지원의 사례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네마 16, 그리고 아방가르드를 육성한 이전 기관들은 동시대 풍경을 지배하고 있는 영화제 공간들과 어떻게 다른가? 이런 중요한 사안을 다루기 위해서는, 제도적 분석 대신에 형식에 관한 논의가 성행했던 역사서술적 기록을 추가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지만, 이런 성찰이 실험 무빙이미지 작업의 역사 내 미학 정치성, 그리고 제도적 형성의 관계에 관한 더욱 포괄적인 이해를 촉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화제 인프라는 실험 다큐멘터리를 규정하는 데 있어 미학적 지표만큼이나 중요하다. 실험 다큐멘터리가 제작되고, 프로그램으로 기획되고, 관람되며, 글로 쓰이는 곳, 즉 영화제라는 생태계 밖에서는 실험 다큐멘터리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아방가르드 및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에 관한 대부분의 비평에서는 바로 이 외부가 배제되어 있다. 비평가와 학자 모두, 이제는 대화 속에 텍스트와 맥락을 들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아니면, 스트라트맨이 그의 작품과 말을 통해 일깨워 주듯, “우연한 외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일러두기: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제의 수많은 벡터들을 검토하는 데 도움을 준 월터 알구에타-라미레스(Walter Argueta-Ramirez), 에리카 발섬(Erika Balsom), 콜린 베켓(Colin Beckett), 크리스 케이글(Chris Cagle), 제이슨 폭스(Jason Fox), 레오 골드스미스(Leo Goldsmith), 조쉬 길포드(Josh Guilford), 파초 벨레스(Pacho Velez),그리고 치휘 양(Chi-hui Yang)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