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pport›는 콜라이더콜라이더(Collider)는 충돌 감지를 위한 컴포넌트로, 게임 제작에 사용되는 기능의 일종이다. 콜라이더가 적용되거나 체크된 물체는 게임 내에서 일종의 물질성을 가진 것으로 취급되고 다른 오브젝트와의 물리 충돌이 발생할 경우 통과할 수 없는 면으로 작동한다.가 체크되어 통과할 수 없는 평면을 다룬다. 미술 관객이라면 이제는 익숙할 어조의 내레이션이 그 성질을 설명하며, 몇 개의 조성된 시공간 이미지를 보여 준다. 특히 게임은 이미지로 조성된 시공간의 특성을 탐색하기에 적절하다는 점에서 조주현의 명백한 관심 매체다. 게임 내 조성된 시공간은 플레이어-캐릭터의 세계지만 플레이어와 캐릭터는 세계의 바깥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것을 생각하기도 전에 ‘GAME OVER’라는 문구가 새로운 시작을 알리기 때문이다.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평행(Parallel)›(2012-2014) 연작은 이러한 구조를 먼저 포착한 세련된 선례다. 장애물에 부딪혀 끝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슈퍼마리오나 일정 지점에 이르면 캐릭터가 운용하는 이동기기가 무화되고 캐릭터와 플레이어 사이 싱크가 소실되어 사망하는 GTA 플레이 장면은 즉시 그를 연상시킨다. ‹흑공›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물의 이미지—그 안에 다른 것들이 부유하고 있으면서 자기도 화면의 허공에 부유하고 있는 물 이미지—도 이 연상에 협조한다.
‹평행› 연작은 컴퓨터 그래픽 툴로 조성된 시공간이 지닌 한계를 시연함으로써 그것이 지니는 특질이나 그 세계의 불완전함을 고찰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제목이 시사하듯, 조성된 시공간의 불완전함은 우리가 실재를 인식하는 프로토콜이 그 시공간에도 평행하게 투사된 결과다. 우리의 실재에 비교할 때에만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한계 시연이 추출하는 것은 디지털 이미지와 조성된 시공간의 한계나 특질이 아니라 역으로 우리가 실재를 인식할 때 필요한 프로토콜이다. (조주현의 작업에서는 깡충거미 네페르티티가 가상과 실재를 평행하게 놓는 역할을 한다.) 리서치 내용이 담겨 있는 홈페이지에서, 우리 은하의 끝을 다루는 기사를 생각해 보면 이러한 경계의 무화는 더욱 분명하다. 기사는 우리 은하의 끝이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를 토대로’ 도출된 것이라고 밝힌다. 즉, 디지털 툴로 조성된 시공간은 실재의 증명을 위한 예비 실재이며, 우리는 종종, 아니, 갈수록 더 자주 가상을 경유하여 실재를 인식한다. 그리고 이 가상은 보이지 않는 실재의 프로토콜을 근거로 구축된다.
재미있는 것은 프로토콜을 충실히 준수하면서도, 오히려 충실히 준수하기 때문에 프로토콜을 깨트리는 사건과 사물이 실재한다는 것이다. 흑공이 가리키는 바도 이것이다. 초자연적인 것, 실재의 바깥이자 외부인 것, 그러나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것, 판단을 유보하게 하고 이성을 무능하게 만드는 것, 미스터리하고 불가사의한 것. 이러한 흑공은 그 자체로 미로다. 논리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문제는 없지만 출구가 없기 때문에 영원히 그 안을 부유해야 하는 미로. 조주현은 그처럼 프로토콜이 적용되더라도 소거되지 않는, 오히려 더 엄격하게 적용될수록 새롭게 발생하는 미로에 집중한다. 롤러코스터 타이쿤의 미로 어트랙션 ‘악마의 입’은 그 분기점을 명확히 하는 모티프로, 조주현이 연옥이 아니라 지옥을 선택한 단초가 되어 준다.
미로 어트랙션 악마의 입에는 두 개의 미로가 겹쳐져 있다. 하나는 입장객 NPC들이 이용하는 게임 내의 어트랙션으로서의 미로고, 다른 하나는 게임의 바깥에 존재하는 플레이어가 게임이 제시한 시스템을 역이용 혹은 오용하여 구축하는 미로다. 문제가 되는 쪽은 물론 후자로, 여기서 NPC들은 불능 상태면서 불능 상태가 아니다. 이는 앞선 예시인 슈퍼마리오나 GTA와는 결이 다른 경우로, 지하 세계로 내려간 입장객 NPC들은 분명히 다른 놀이기구를 탈 수 없는 흑공에 빠졌지만 그렇다고 게임이 종료되는 것도 아니다. 죽은 상태면서 죽지 않은 상태로 머물러야 하는 공간인 지하 세계에 대한 흥미는 영화감독 조던 필(Jordan Peele)의 ‹겟 아웃(Get Out)›(2017), ‹어스(Us)›(2019)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조주현의 지하 세계 사람들은 두 영화에서처럼 탈출이나 혁명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프로토콜을 준수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지하 세계 자체가 아니라 미로 어트랙션 악마의 입이라는 장치 자체다. 그것은 촘촘하게 짜인 실재가 느슨해진 부분을 가리킨다.
사실 악마의 입은 이미 우리의 도처에 있다. 대부분의 경우 이 미로들은 정반대의 양극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동한 결과이기 때문에 실재의 오작동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한국어에서, ‘연패 중이다’나 ‘학원을 끊다’ 같은 문장은 문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나 각각 승리와 패배, 시작과 종료라는 정반대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므로 더 단단한 문맥을 요구한다. ‹흑공›은 하나의 프로젝터로 영사되는 투 채널 영상으로 두 개의 화면이면서 하나이기도 하다.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거울 또한 가장 간단한 구조의 미로다. 류한길의 『프린스 오브 다크니스』(2018)는 이 미로들에 대해 이미 잘 정리한 바 있는데,류한길, 『프린스 오브 다크니스ㅡ허구의 생산과 증폭의 가능성에 대하여』, 미디어버스, 2018, 35-36. 특히 그는 동일한 주파수를 가지면서 위상이 반전된 두 진동이 강력한 긴장의 상태를 형성하면서도 겉으로는 침묵의 상태인 현상에 대해 말한다. 예로 제시되는 존 카펜터(John Carpenter)의 영화 ‹프린스 오브 다크니스(Prince Of Darkness)›(1987)의 반물질 실린더 또한 총동원된 각 분야의 전문가를 무능하게 만들며 끊임없이 운동하는, 그 자체로 미로인 것이다.류한길, 같은 책, 25-26. 이들은 우리 실재의 규칙을 지키면서 오히려 지킴으로써 오작동을 일으키고 균열을 낸다.
앞서 언급한 한 마리의 거미가 물리적 스크린의 안쪽 면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가는 장면은 그 양가적 상태 때문에 이러한 미로와 오작동, 그로부터 발생하는 진동과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지금까지 이 글은 흑공의 개념적인 부분에 무게를 두었는데, 이 거미 덕분에 물리적 스크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게 된다. 여기서 거미가 횡단하는 물리적 스크린은 밖의 실재와 안의 가상 사이에 서서 둘을 매개하는 면이다.
류한길은 또한 공포 영화에서 ‘안전지대 표지판’에 관해 말하는데, 이는 우리의 논의에 유의미한 참조점이다. 공포 영화는 영화 전반부의 밝은 분위기 중 불길의 징후를 꾸준히 발신함으로써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감을 관객에게 심는데, 이 신호는 “일종의 안전지대 표지판”으로 작동하면서 “그것이 결코 영화를 보는 실제 관객을 해하지 못한다는 믿음”이 된다.류한길, 같은 책, 11-12. 그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물리적 스크린 또한 이미지가 함부로 실재에 넘쳐 나오는 것을 막는 울타리로 콜라이더가 체크되어 통과가 허락되지 않는 평면이자 경계다. 조주현의 영상 작업에서 콜라이더가 체크된 평면은 딛는 것이 가능한 땅으로 영원한 추락을 막는다는 점에서 안심을 주는 것으로 고려될 여지가 있지만 그와 동시에 고도의 통제 상황을 지시한다. 따라서 콜라이더가 체크된 평면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들을지 결정하는 프로토콜이나 프레임의 문제로 이어진다.
가벼운 예시를 들자면 조주현은 배경으로 사용되는 이미지 위에 뒤늦게 다른 이미지를 올려놓음으로써 화면 내에 심도와 레이어를 삽입하려 자주 시도하는데, 이는 이미지와 관객의 눈이 미리 형성한 원근법을 자꾸만 방해하며 둘 사이에 상용화된 프로토콜을 재편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더 중요한 것은 스크린 내에서 공간의 문제다. ‹흑공›에서 스크린의 오른쪽으로 계속해 굴러가는 돌은 하얀 조각상을 만나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움직임을 멈춘다. 여기서 돌이 굴러가는 공간은 네 개의 숏으로 편집되어 보여지고 돌의 스케일도 화면마다 다르다. 그러나 이 돌이 방금의 그 돌이라는 것은 의심의 대상조차 되지 않으며, 관객은 스크린 안의 공간을 접붙이면서 스스로 ‘말이 안 되는 공간’을 생성한다. 이때 돌이 굴러가는 공간은 과학으로 입증될 수 없는 공간이더라도 상관없다. 스크린 안에는 항상 실재를 존재하게 하는 프로토콜에서 벗어나는 시공간이 존재하기 마련이 부분에서는 홍상수 영화에서 공간의 불가능한 접힘을 생각하고 있다. 유운성, 「천일야화, 혹은 픽션 없는 세계에 저항하기」, 『OKULO 004, 카운터-픽션, 내게 (다시) 거짓말을 해봐』, 미디어버스, 2017, 12-13.이고 그런 시공간은 관객의 시선을 통해 하나의 세계로 (재)구축된다. 여기서, 우리가 실재를 인식하게 하는 프로토콜은 논리적 정합성에 따라 사용되지만 결과적으로 구축된 것은 길이 아니라 미로다. 두 작업이 은밀히 드러내는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스크린은 과연 콜라이더가 체크된 평면인가? 공포 영화를 본 관객이 영화 속 귀신의 귀신과 함께 귀가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다. 우리의 시선은 물리적 스크린 너머를 향하기 마련이고, 이미지는 이 글에서 논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완전해 보이더라도 언제나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남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흑공은 우주 저 먼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검고도 밝은 그것은 콜라이더가 체크된 평면 너머에서, 픽션의 영역에서 실재가 느슨해지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