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5
Critic
시리즈의 감각: 예능 < f(다음 화 이어보기) < 영화
다함께 박차차
마테리알 편집인



글을 쓰다 보면 글이 글을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문제는 당초 구상했던 전체 주제보다 훨씬 거창한 문장으로 화두를 장식하는 데서 비롯되곤 한다. 예컨대 집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에 가려고 하면서 황당하게도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는 것과 같다. 더 심각하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비행기에 덜컥 탑승해버리고 만 다음. 사태는 정말로 수습하기 어려운 지경이 된다. 집 앞 편의점이라는 결말 혹은 결론에 이르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연결고리가 될 뒷문단을 쓰고, 또 덧댐에 따라 글쓰기의 여정은 마치 80일간의 세계일주 스케일이 되고야 마니까 말이다. 결국 글쓴이는 자신이 쓴 글에 압도당하다 못해 지쳐버리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유혹에 사로잡히고 만다. (느낌 있는 타자음 위로 떠오르는 한 문장) ‘다음 화에 계속(To be continued) ...’ 하지만 대체로 이런 마무리는 (마테리알 편집진으로서 경험한 바에 미뤄본다면 편집회의에서) 아주 단호하게 소위 ‘짤’ 당한다. 아무리 척하려고 해도 미리 계획된 게 아닌 ‘다음 화에 계속’은 도피성 변명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완벽히 감추지 못하는 까닭이다. 희한한 일이다. 게다가 이렇게 급조된 지연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다음 화에 대한 기대감을 썩 불러일으키지도 못한다. 시점상 선후행에 준거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지연이 매력적이게 될 때엔 독자들이 그 결정적인 최종장의 순간에 당도하기까지 ‘벽돌쌓기’에 빗댈 만한 충분한 ‘이끎’이 전제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OTT 플랫폼에서 ‘시리즈’라고 언명되어 서비스되는 콘텐츠들은 한 화(話, episode)가 끝나는 지점마다 ‘다음 화 이어보기’라는 팝업문구를 통해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 순간 당면한 어떠한 지연에서 즉각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다. (당초부터 OTT 오리지널로 기획 및 제작되어 한 시즌이 한시에 릴리즈되는 그 ‘시리즈’에 한정한다.) 이때 ‘돕는다’는 표현이 적절했다면, 해당 콘텐츠의 제작자는 그것이 OTT 플랫폼에 릴리즈되기 훨씬 이전부터 ‘다음 화 이어보기’의 기능에 대해 숙고해왔다고 봄직하다. ‘다음 화 이어보기’가 말 그대로 시청자들을 ‘도울 수 있길’ 기대하고, 또 (직업의식이 투철한 제작자였다면) 확신까지 했을 터. 쉽게 말해, 본인이 제작한 콘텐츠가 시청자들에게 다음 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할 만큼 재밌을 거라고 자부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한 화가 끝난 뒤 엔딩크레딧이 흐르는 동안의 지연은 분명 미리 의도되었다. 그리고 그 의도는, 세 가지의 설정값과 공명한 결과값이다. (1) 시청자가 의도된 지연에 당도하기 직전의 지점. (2) 이후 시청자가 지연의 검은 베일을 당면했을 때 그들에게 발생할 또는 발생해야 할 감각. (3) 마침내 시청자가 ‘다음 화 이어보기’라는 팝업문구를 손가락으로 눌러 검은 베일을 찢어냄으로써 그 틈으로 다시금 러닝타임이 쏟아져 나오도록 하고프게 만드는 원동력으로서 지연된 것들이 선취해야 할 환상. 제작자의 입장에 입각해 이 세 가지 설정값을 질문형으로 전유해보면 다음과 같이 변형될 수 있다. (2) 시청자들로 하여금 이전 화에서 무엇을 느끼게 할 것인가. (3) 다음 화에는 무엇을 기대하게 만들 것인가. 다시 (1)로 돌아와, (2)의 ‘느낌’을 (3)의 ‘기대’로 어떻게 전환할 것인가. 나아가, 그 전환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장치는 무엇인가. 의도라는 이끎은 바로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벽돌쌓기의 벽돌로 삼는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1시간짜리 10회분의 시리즈를 제작한다손 치면, 그건 단지 도합 10시간짜리 하나의 내러티브를 만드는 일과는 천지 차다. 이는 상영과 방영, 릴리즈 단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영화를 주로 방영하는 TV채널에서 영화 한 편을 방영할 때 사잇광고를 송출하기 위해 내러티브를 내러티브 차원의 맥락이나 의도와는 무관하게 뚝 끊어버리곤 하는 경우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수 있다. 물론 극단적인 예시긴 하지만, 2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타임의 초장편 영화 혹은 영상작업물이 극장이나 전시관이라는 플랫폼에서 인터미션(intermission)의 개념으로 취하는 분절과 지연 역시 사잇광고의 그것과 목적이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반면 시리즈와는 존재론적 차이가 있다. 오죽하면 아무리 끊어 본다고 해도 10시간짜리 영화 한 ‘편’은 버겁고 1시간짜리 시리즈물 10‘개’는 앉은 자리에서 가능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을까. 사실 앉은 자리보다는 누운 자리인 경우가 다반사겠지만, 앉든 눕든 서서든 비단 시청자의 (중의적 의미에서의) 관람 ‘자세’에서만 비롯된 아이러니는 아닐 것이다. 한 시리즈 내 개별 화들 사이의 분절과 지연은, 시리즈를 비로소 시리즈로 성립하게 만드는 조건이자 동시에 시청자들이 마지막 화까지 보게 하겠다는 시리즈로서의 목적에 종사하는 합목적적인 장치다. 단, ‘다음 화 이어보기’라는 팝업문구와 함께 가능한 빠르게 명멸해야만 하는.

단적으로 OCN의 사잇광고와 서울아트시네마, 국립현대미술관의 인터미션에는 위에서 정리한 (2)느낌, (3)기대, (1)전환장치에 대한 고민이 크게 개입되지 않는다. 한편 외려 흥미로울 법한 비교대상은 한때 ‘60초 뒤에 공개됩니다’라는 진행자 멘트와 함께 유행했던 오디션 및 서바이벌 등 예능 프로그램의 방법론이다. (1) 중대한 폭로를 예고하는 장치에 이어 마침내 결과가 밝혀질 (3)에 이르기까지, 시청자가 도중에 이탈하지 않고 당도할 수 있도록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그 사이에 송출되는 광고 위로 실제 60초가 카운트되는 자막을 띄우는 방법을 고안해내기도 했을 만큼 (2)에 대한 고민을 심화했다. 시시각각 변모하는 60초 카운트는, 지연에 구멍을 내는 ‘다음 화 이어보기’와는 반대로 지연의 베일에 그 경과를 마치 스톱모션처럼 채워 넣음으로써 역설적으로 비슷한 기능을 수행해왔다. 덕분에 MNET과 유튜브 채널의 사잇광고는 시청자들의 눈에 조금이나마 더 노출되었을 터. 따라서 이때의 분절과 지연은 시리즈의 그것과 존재론적으로도 비슷한 위상을 점한다. 그럼 이쯤에서 드는 의문 하나. MCU 영화의 쿠키 영상은? 영화라는 매체 특정상의 제작 여건으로 인해 단지 ‘다음 화 이어보기’를 띄울 수 없을 뿐,  60초 카운트와 매한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게 아닌가. 쿠키 영상 또한 시리즈로서의 목적에 종사하는 합목적적인 장치가 아닌가. 종국에 의문은 일련의 MCU 영화를 두고도 그렇게 일컬어지는, ‘시리즈’라는 용어가 OTT의 그것과 어떻게 같고 다른지, 그런 감각적 차이를 빚는지에 도달한다.

(1), (2), (3)이 시리즈의 형식 중에서도 한 화와 다음 화라는 기초적인 단위만 두고 볼 때 파악되는 분절과 지연을 대상으로 한다면, 두 화를 초과하는 다회분 시리즈 전체에선 몇 가지 벽돌이 추가된다. (3)에 부응하면서도 다음 화의 실제 중심 내러티브인 (5)로 자연스레 교차하도록 하는 교량으로서 (4). 즉 (4)는 (3)의 기대감을 임시적으로 갈무리한다. 왜 ‘임시적’으로인지 대답하기 전에 넘버링을 일단락짓자. 추가된 (4)와 (5)에 이어 (6)의 자리에 놓이는 건, (1)의 변주다. 그리하여 (1) ~ (6)의 한 주기가 완성되고, 이는 시리즈라는 형식의 가장 원형적인 리듬이자 패턴을 형성한다.


넘버링한 것들이 시리즈의 형식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기능과 효과에 대한 문장형 정리였다면, 그것이 발생하는 지점이나 대상으로 삼는 것들은 명사로 떼어낼 수 있다. 장소론적으로 말이다. (1)에 조응하는 대상으로서 (ⅰ)은 ‘엔딩’으로, (4)의 기능을 수행하는 장치로서 (ⅳ)는 ‘오프닝’으로. 한편 여기서의 ‘엔딩’과 ‘오프닝’은 OTT 시리즈 고유의 개념으로 사용되며, 이는 선례의 ‘10시간짜리 한 편’ 류 및 MCU 영화 시리즈, 그리고 그 시리즈 내 개별 영화 각각의 첫 장과 최종 장과는 다르게 의미화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MCU 영화의 쿠키 영상도 시리즈로서의 목적에 종사하는 합목적적인 장치가 맞다. 다만, 이때의 ‘시리즈’는 OTT 시리즈와 서로 다른 감각적 리듬과 패턴을 빚는다. 비록 속편을 예고할지라도 MCU 영화 각각은 시청자를 그 최종 장에서 얼마간 감각적 소강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 고전적인 용어를 빌려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것이 미덕인 반면, OTT시리즈에서는 반대로 시청자로 하여금 ‘엔딩’에서 감각적인 고조상태 혹은 예기치 못한 각성상태에 이르길 꾀한다. 그리고 이 감각이 곧 (2)의 그것으로 연장되는 것이다. 반복하건대 이를 이어받는 ‘오프닝’은 그러한 감각에 대한 명쾌한 결말이라기보다는 이어받음 그 자체를 위한 임시적인 갈무리의 장치다. 또한 (2)의 장소인 (ⅱ) 엔딩크레딧은, ‘60초 카운트’나 ‘쿠키영상’으로 혹은 (다음 글에서의 주요 비교대상이 될) ‘드라마’의 ‘다음 화 예고’로 채워 넣어져야 하는 게 아니라, ‘다음 화 이어보기’라는 팝업문구와 함께 가능한 빠르게 명멸해야 하는 것으로 미리 의도되었다.

(4)의 바로 그 ‘임시적’인 속성으로 말미암아, 시리즈의 형식에는 (2)에 이어 두 번째 분절과 지연이 존재한다. 이번에는 내러티브가 끝나고 난 다음의 검은 장막에서가 아니라 한 화의 파노라마 그 안에서 기능한다는 데에 방점이 있다. 요컨대 (3)의 기대감은 (ⅳ)에서 즉자적으로 모두 충족되지 않는다. ‘오프닝’은 그 충족되지 않음이 시청자를 시리즈에서 아예 이탈해버리지 않게 하는 수준에서 보통 해당 화의 제목과 연계되는 중심 내러티브 (5)로 무사히 안착하게 하는 교량 혹은 트랜지스터가 될 운명이 점지되어 있다. 의도된 바에,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는 지연과 그 ‘지속’의 반복. 그리하여 (5)에서는, 바로 그 두 번째 분절과 지연을 어떻게 지속할 것인지가 화두다. 한편 (4)의 ‘임시적’인 갈무리가 (3)의 기대감을 말 그대로 ‘일부’만 충족시킨다면, 반면 그렇게 시청자들이 다른 일부는 충족되지 못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시리즈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어떤 특정한 수준을 유지하는 기능을 수행해낸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져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시리즈의 형식은 (4)에서 모두 충족되지 못한 나머지를 대신해, 은연중에 시청자들의 눈 혹은 감각을 속일 다른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방기해왔던 것은 아닐까? (4)와 (5) 사이엔 도대체 어떤 모략이 벌어져왔던 걸까? 황당하고도 심각하게도, ‘시리즈의 감각’에 당도하는 길은 꽤나 대장정이 될지도 모르겠다.







노매드랜드에서 노-매드-랜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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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하시고 (...)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신정균 개인전 ⟪아크로뱃⟫의 영상에 관한 노트

쓸쓸한 불빛 아래 활자들: ⟪동시대-미술-비즈니스: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질서들⟫

Unboxing: 발생하는 유기체

우울, 냉소, 충격의 트라이앵글을 넘어서: 공개서한 이후의 메모
︎ 시리즈의 감각: 예능 < f(다음 화 이어보기) < 영화

대화를 멈춰선 안돼: 〈마인드헌터〉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스위트홈〉에 대한 노트는 아닌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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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긍휼 평강 사랑: 〈메트로폴리스〉, 〈프로메테우스〉 그리고 〈레이즈드 바이 울브스〉

이래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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