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
Critic
대화(dialog)
: 퍼포먼스를 위한 카메라-도큐멘테이션에 관한 고민들
Æ




서울의 한 카페에 모인 네 사람, 독립 큐레이터 Y, 영상작가 N, 비평가/에세이스트 H, 소설가 J가 나눈 대화를 옮겨둔다. 대화에 참여한 네 명은 공통의 프로젝트를 꾸리는 협업 관계일 수도, 또는 우정의 관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네 명의 동의하에 대화의 일부를 오픈소스 문서로써 공유한다.


Y :
N씨는 직접 촬영이랑 편집도 하시잖아요? 그래서 N씨 의견을 좀 듣고 싶은데. 퍼포먼스를 공연이 아닌 도큐멘트의 형식으로 보여준다고 할 때, 다소 도식적으로 분류해보자면 이런 양상으로 나뉠 수 있을 것 같아요. 첫째로는 카메라가 현장의 공연 실황임을 강조하기 위해 관객 시점을 제유하는 듯 관람석 어딘가의 (특정)값으로 설정되는 경우가 있고, 둘째로는 퍼포머의 신체가 움직이는 걸 따라 계산된 카메라 워킹으로 도큐멘트하는 경우가 있다고 나눠 이야기해볼게요. 후자와 같은 경우에는 대개 안무와 동선에 따라 카메라의 동선 또한 설계되고 편집의 과정에서도 안무에 따라 숏들도 선택되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잖아요. 아무튼 ‘지나간 퍼포먼스’를 “사후적으로” 보여주는 대개의 양태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은데요. (…)
        전시장에 갔을 때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기록해둔 걸 보게 될 때도 있고 요즈음에는 미술관에서 유튜브로도 많이 공개하니깐 유튜브에 업로드된 동영상으로 퍼포먼스를 보게 될 때도 많은데요. 일종의 도큐멘테이션으로서 카메라가 활용되고 영상이 편집되어 공개되는 걸 보면 그것들이 종종 퍼포먼스 자체에 대한 접근성을 열어주기보다는 영상으로서 훌륭한 결과물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서…. 그런 영상 기록물을 접할 때, 저는 이런 질문들을 던지게 되는 것 같아요. 카메라를 든 인물과 안무를 몸으로 보여주는 퍼포머는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을 지시하고자 하는 건지, 또는 카메라와 안무가의 신체는 각각 움직임의 무엇을 어떻게 지시하고자 야심을 품었는가 하는 것들이요.

N :
저도 제 작업이나 다른 분들의 작업을 어떻게 담아낼지 고민하는 부분들이 있긴 하죠. 작가님들이 요청하시는 방향에 따라 충실하게 해보고자 할 때도 많고…. 뭐 ‘관객이 안무의 이런 부분을 봐주셨으면 좋겠다’ 싶어서 특정하게 담아내는 경우도 있고요, ‘전체적인 구성을 한눈에 보여줄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조금 떨어져서 풀숏으로 찍기도 하고요. 보여주고 싶은 부분들이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고려하게 되는 점은 분명 있는 것 같네요. 그리고 방점을 ‘필름’에 두느냐 ‘도큐멘테이션’에 두느냐에 따라서도 상이하죠.

H : 
기실 엄밀히 말해서 ‘도큐멘테이션’이라고 부를 때, 단지 기록의 맥락만이 있는 게 아니란 점을 간과해선 안 될 텐데요.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도큐멘트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전설의 부장뱅크”라는 말이 있더군요? KBS가 파업 중일 때 음악 방송 프로그램인 〈뮤직뱅크〉 무대 촬영을 부장급 직원들이 했던 시기의 영상을 가리키는 인터넷 용어인데요, 짬밥(?)이 있는 부장급 카메라 감독이 촬영해 안정적이고도 가수의 무대를 잘 보여준다는 맥락에서 회자되는 것 같아요. 이 시기에 찍은 샤이니 태민의 〈무브(Move)〉가 부장뱅크 중에서도 ‘역대급’이라고 손꼽히더라고요. 태민과 양측의 백업댄서들을 모두 담아내는 무대 전체 숏과 안무에 따른 클로즈업, 태민의 얼굴이 향하는 방향에 따라 변화되는 숏들 같은 걸 보면…. 흔히들 잘 찍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짐작이 되죠. 카메라와 화면이 안정감 있고, 댄스를 하는 태민과 댄서들 이외의 것들을 굳이 보여주지 않으니까요. ‘부장뱅크’ 같은 경우를 뭐라 불러야 할까요? 최적화?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여하튼 〈뮤직뱅크〉의 사례를 안무 혹은 신체를 담아내는 영상이라는 넓은 범주로 놓고 봤을 때 이런 식의 카메라 워크에 대한 반응들은 마치 안무를 촬영하고 보여주는 방식에 우선되는 혹은 지향되어야 마땅한 방향(혹은 가치)이 있다고 은연중에 합의된 듯 느껴집니다. N씨도 충실하게 담아내 본다고 말하셨지만 그 충실함이 카메라맨의 어떤 시각적 선별과 작가의 요구에 따라 조직되니 더더욱 부장뱅크를 둘러싼 환경들과 연관되는 것 같네요. 그렇다면 그 방향은 무엇이고 어떤 기준으로부터 기인하는 걸까요? 제 생각에는, 카메라와 안무가의 신체가 움직임을 지시하고자 하는 방식들도 지나가 버릴 움직임을 어떻게 보존해낼지와도 연관되는 것 같아요.

Y :
‘보존’이라는 용어가 적절한지는 모르겠는데요. 보존이라는 말은, 물리적인 대상을 유지 또는 지속시키는 것으로 시간의 범주와 관계되니깐….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에게 보존이라는 문제를 결부시켜 생각해보자면 하나의 퍼포먼스에게 어떤 시간을 배치해야 되는지가 도큐멘테이션에 주요한 포인트로 다가오네요.

H :
그런데 오해를 피하고자 재차 분명히 말하자면, 제가 사용한 ‘보존’이라는 단어를 퍼포먼스의 영속성의 문제 또는 전달의 문제로 이해하시지 않았으면 하네요! 저는 이 대화가 미시적인 맥락에서 퍼포먼스와 그에 대한 카메라-도큐멘테이션의 위상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길 희망하는데요. 퍼포먼스에서의 움직임과 도큐멘테이션으로 남은 움직임의 일부분들끼리 공통의 움직임에 대해 어떻게 같고 다른지 또는 무엇을 공유하는지 이런 문제들이 고려되지 않으면 이 대화 이후에도 도큐멘테이션의 양태들에 대한 어떤 확장을 이루긴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해요.

J :
개인적으로 이 문제가 되게 이미지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세 분께서 하시는 말씀들 들으면서 제가 지난달에 보았던 다큐멘터리의 한 대목이 떠올랐어요. 거기서 구석기 문화 연구가 도미니크 파비에가 동굴 안의 손자국에 대해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이 손도장을 보시면 중요한 사실이 발견되죠. 새끼손가락이 살짝 구부러져 있어요. 이 사실이 특별한 이유는 3만 2천 년 전에 우리보다 먼저 동굴에 왔던 선사시대 사람에게 물리적 실체를 부여하기 때문이죠. 동굴 더 깊숙한 곳에 그 사람의 흔적이 있어요. 굽은 새끼손가락으로 그라는 게 확인되죠. 계속 손도장을 찍고 다녔거든요. 우린 그 자취만 따라가면 돼요.” 제가 갑자기 선사시대 이야기를 꺼내서 좀 고루하게 만든 것 같은데…. (웃음) 흥미로운 점은, 손도장이라는 형상(figure)이 물리적인 실체를 부여해준다는 것인데요. 이 손도장은 우리가 익히 접해온 움직임을 분절화하여 지시적으로 가시화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고.

N :
‘움직임을 분절화한다’면, 에드워드 머이브릿지나 에티엔 쥘 마레의 사진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걸까요?

J :
음…. 머이브릿지의 사진도 포함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퍼포먼스 공연을 동일한 듀레이션동안 모두 담아내려는 어떤 유형의 영상들을 떠올리며 말씀드린 거였어요. 오늘날 그런 영상들을 많이 접할 수 있는데, 움직임을 연속하는 것처럼 연결된 프레임으로, 영상이라는 매체로 보여주지만 결국 안무의 일부만을 일괄적으로, 또 한편 선별적으로 담아낸다는 점에서 안무의 시작과 끝이 분명하게 재단되어 있으니까요. 쥘 마레의 사진과 오늘날의 무수한 영상들은 전혀 동일하지도, 유사하지도 않지만요. (…) 영상이란 매체가 머이브릿지나 쥘 마레의 사진처럼 프레임별로 끊어진 것들을 이어붙인 것이어서 (움직임에 대한 제시방식에 한해서) 어떤 면에서는 서로 닮았기도 한데, 퍼포먼스의 현장을 전달하기 위해서 영상이 그 현장 전부를 옮겨오고 싶어 할 때 움직임에 대한 접근이 오히려 차단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달까요? 이런 경우가 요즘 많이 활용하는 방식이고, 어떤 사건을 연극적으로 증명하는 형태의 도큐멘테이션 이미지와는 시간에 대한 접근 방식들이 다른 케이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N :
그런 맥락에서 분절적이라고 표현하시는군요. 조금 흥미로운데요, 아까 ‘이미지적으로 중요해 보인다’고 하셨는데 더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J :
네. 우선 손도장이라는 형상이 물리적 실체를 부여한다는 것은, 벽면에 손을 찍고 돌아다녔을 인물에 대해 실체를 부여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손자국들을 따라 가보면 그의 몸이 어떻게 움직였을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죠. 결국 손도장이라는 형상은 움직임에게 물리적 실체를 부여해주는 것(혹은 움직임의 물리적 실체에 다다를 수 있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일단은, 카메라로 도큐멘테이션을 한다면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연속적이건 파편적이건 간에) 이미지일 텐데요. 조금 더 축소해서 이야기해보자면 이미지-형상(figure)의 문제가 사후적으로 도큐멘테이션의 결과물을 거쳐 움직임에 다다르고자 할 때 중요하게 느껴져요. 손도장이라는 형상 자체가 인물의 신체에 대한 물리적 접근의 통로가 되면서도 형상들의 궤적과 공간 내의 위치 등과 함께 그 신체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접근 가능케 해주니까요. 이를 통해 드리고 싶은 질문은 도큐멘테이션으로서의 이미지가 가지는 존재론적인 맥락이 움직임에 대한 사후적 접근에 중요하다는 것이고, 지금의 우리가 카메라로 도큐멘테이션을 시도하고자 할 때 어떤 것들을 고려해야 하는지 궁금하네요.

Y :
J씨의 말처럼 이미지에 주목해 생각해보니 문득 카메라의 운동성이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 영상에 복잡성을 가중하는 요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도큐멘테이션이 카메라 영상으로 이루어질 때, 특히 카메라가 1. 퍼포먼스를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면서도 2. 이미지를 만들어내고(―촬영 방식에 따라 남는 이미지는 상이하잖아요?), 여기서 형상의 문제가 마찬가지로 등장하고 3. 총체적으로 머릿속에서 이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되어 어떤 운동으로 종합되는 과정이, 도큐멘테이션에서부터 퍼포먼스로 접근할 때 이루어지고 있는 작용이 아닌가…. 그런데 간혹 도큐멘테이션 영상들이 잘 만들어진 영상으로만 느껴지고 퍼포먼스에 대한 어떠한 경험으로 확장되지 않는 경우들을 맞닥뜨릴 때가 있는데요. 가령 공연을 전제로 도큐먼트한 영상을 보여주면서 정작 전제된 퍼포먼스에 대한 무엇도 경험하지 못한 채 단지 ‘공연을 (또는 무언가를) 했다’는 결과물로만 독해되는 상황들이요.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걸까요? 카메라의 아웃풋과는 무관하게 현장의 시간과 기록의 시간을 등치시켜서 그런 걸까요?

N :
아니요, 저는 도큐멘테이션의 어떤 좌절이 시간의 등치에서 기인한다기보다는 ‘시간의 재건을 가로막는 무언가 때문이 아닐까?’라는 가설을 제안하고 싶네요.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해보자면, 촬영을 맡게 되면 도큐멘테이션을 수행하는 역할로서 이런저런 고민을 갖게 되는데요. 촬영을 하고 있는 제가 느끼는 시간과 편집 과정 및 편집 이후의 이미지의 시간이 너무나도 다른 때가 많아요. 카메라를 들고 있는 동안 저는 그 현장의 일부이면서도 어중간한 위치에서 도큐멘테이션이라는 과업을 수행하는 반면, 타임라인 위의 클립들은 그것들끼리 저로 하여금 요구하는 조직의 방식들이 있기도 합니다. 이런 건 작업의 과정에 있다고 차치하더라도 편집된 결과물만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저의 수행이 소거된 형태일 수도 있을 거예요. 아마 촬영의 결과물이 가진 위상과 시차가 관객과 제게 다를 테니까요. 그러한 위상과 시차의 차이에는 당연히 움직임도 포함되어있겠죠. 아까 H씨가 ‘부장뱅크’를 말씀하시면서 안무를 보여주는 방식과 그에 대한 가치판단에 어떤 합의가 존재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셨는데 저로서는 동의하긴 어렵지만, 도큐멘테이션으로부터 시간의 재건이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기류에 놓일 때에는 이런 맥락도 있단 걸 알아주심 어떨까 싶네요. 앗, 잠시만요. 전화가 와서.

H :
우리,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작할까요?

콜렉티브로 활동하고 있기도 한 N씨가 촬영 스케줄을 잡느라 나간 사이, 카페의 마스코트인 삼색이(고영, 5세)가 돌아다닌다. 이런저런 대화가 오간다. 요즘 무엇이 재밌더라. B씨가 무엇을 하고 있다더라. 커피가 맛있다. 그런 정도의 말들. 통화를 마치고 담배 한 대를 태운 N씨가 돌아오고 다시 잡담이 시작된다. 네 명의 대화가 마무리되기 35분 전부터 다시 발췌해 옮긴다.

N :
또 다른 가설로 “복사/붙여넣기”를 제안해보고 싶은데요. 카메라로 퍼포먼스를 이미지로 가져올 때 움직임은 복사/붙여넣기의 방식으로 옮겨지는 것인지 혹은 카메라라는 장치는 복사/붙여넣기를 가능하게 해주는지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J :
복사/붙여넣기라는 말이 재밌네요. 만약 카메라가 영상이나 사진의 형태로 움직임을 복사/붙여넣기 하고자 하는 거라면 그 결과물이 정말 움직임에 접근하게 해주는가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글쓰기의 복사/붙여넣기도 생각나요. 래리 테슬러가 개발한 복사(ctrl+C)/붙여넣기(ctrl+V)는 현대인으로 하여금 글을 쓸 때 편집과 작성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게 해주었죠. 그 덕분에 우리는 보다 쉽게 글의 앞뒤를 옮겨 다니며 작성할 수 있고요. 이건 글을 쓰는 경험에서도 큰 영향을 주었지만 모두가 그런 방식으로 글을 쓰는 데 익숙해지고 주되게 사용하는 상황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세상에 나온 것들은 그 이전과 같지는 않다고 생각되어요. 마치 니체가 과거에 타자기를 쓴 지 25일째 글자와 단어의 연상이 점점 더 자동화된다고 이야기했듯이 말이에요. 복사/붙여넣기의 과정이 안무를 설계하는 과정에 들어와 있을 때 드라마트루거나 퍼포머에게 작용하는 바는 또 다를 것 같고요.

Y :
글쎄요…. 드라마트루거나 퍼포머에게 안무를 복사/붙여넣기 하는 식의 조직은 가능하다고 수긍하게 되지만, 창작의 주체, 코레오그래피의 주체에게 미치는 영향 말고, 그와는 무관하게 관람의 주체에게서 안무가의 코레오그래피의 복사/붙여넣기는 어떻게 가능해질 수 있는지 그 성패는 여전히 확신하기 어렵지 않나요? 복사/붙여넣기의 프로세스가 창작 주체와 관람 주체에게 동질적인 것이라는 가설이 전제되지 않는 이상에요. 제 생각에는 그건 동질적일 수 없는 것 같고요. 글쓰기의 디바이스, 타자기 또는 현대의 컴퓨터가 단어, 문장, 문단을 옮기고 이어 붙이는 방식이 카메라와 편집 기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지도 의문이네요.

H :
복사/붙여넣기 되는 움직임이라는 대상 말고, 복사/붙여넣기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가 중요한 것 같아요. 이 구조는 어쩌면 J씨가 이야기한 것처럼 도구 혹은 매체(medium)의 프로세스상 구조일 수도 있겠지만, 복사/붙여넣기 된 하나의 대상이 부여받는 지위, 자리 같은 것도 해당될 수 있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 대상이 복사/붙여넣기를 거치게 되는 요인들이 있을 텐데 그 요인들은 결과적으로 비가시적이지만 전체를 이루는 일부로 작용하고 있으니까요. 가령 컴퓨터에서 엔터키가 복사/붙여넣기 되어서 어디에 삽입되는지에 따라 문단이 달라지듯 말이에요. 도큐멘테이션 영상을 이루는 이미지들의 구조 또한 움직임들 간의 체계를 조직하는 주요 동인일 것 같아요.

N :
제 생각에는, 확실히 복사/붙여넣기의 메커니즘이 퍼포먼스와 도큐멘테이션의 메커니즘을 뒤흔드는 무언가인 건 맞는 것 같아요. 창작의 맥락에서도, 결과물의 맥락에서도요. 왜냐하면 복사/붙여넣기라 하면, 계속해서 하나(A)를 A 또는 A’로 바꾸어 생산해내는 것일 텐데 그러한 복제의 방식이 A→A’로 이어지는 방향뿐만 아니라 A, A’, A”, A’” …의 다중적인 관계망으로 뻗어나가니까요. 복사/붙여넣기로서의 도큐멘테이션이 결국 퍼포먼스와 마찬가지로 수행적인 면모를 지니게 되는 것도 이 점에서 기인하는 것 같아요. 피상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퍼포먼스와 도큐멘테이션이 유의미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요, 어떤 재건의 성공도, 실패도 A, A’, A”의 다성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움직임을 확장시켜보는 시도들이 있다는 걸 떠올려보면 어떨까요? (…) 오늘 저희 대화를 엄청 많이 한 것 같은데 집에 가면 뻗는 거 아닐까 모르겠네요. (웃음)

Y :
그러게요, 엄청 달려왔네요. (웃음) 해가 져서 밖이 어둑한데 이쯤에서 대화를 마칠까요? 우선 정리를 좀 해보고 3주 뒤에 다시 이야기해보는 게 어떨까요.

J & H :
네, 좋아요.

H :
그때 뵙는 걸로 하죠!

(…)

N :
어우, 너무 춥네요. 으으. 추운데 다들 조심히 들어가세요.

Y :
(꾸벅) 다음에 또 뵙죠. 이만 총총.

(…)

19: 48': 23'' 대화 끝.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템포러리에서 콘스탄트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가장한 (지역) 영화제의 문제

질식자의 편지에 부치는 소고

[구인공고] 언더커버 혹은 오버커버

아, 감은사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때로는 조심하는 것이 문제다

썼다 지운 질문과 소회

︎ 대화(dialog): 퍼포먼스를 위한 카메라-도큐멘테이션에 관한 고민들

보지 않고 보기: 정여름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아이돌 기표의 ‘트랜스’ 해부하기: 아이돌 서사와 타세계의 시선을 경유하며

'접촉'에서 '접속'으로(2): 〈문명특급〉의 경우

협잡꾼 당신: 「김기영 평전」을 위한 단편

해적을 위한 변명: 위디스크와 ‘리스트’

독백과 방백 사이: 브이로그(VLOG)의 나르시시즘

한국 영화 비평장에 대한 비평 초고: 계속 말해야 하는 것들






마테리알(ma-te-ri-al)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로 132-1 | 사업자등록번호 633-94-01282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2020-서울서대문-1730 | ‌발행인 다함께 박차차·정경담‌·함연선 | 편집인 다함께 박차차·정경담‌·함연선 | 문의 ‌carolblueagassi@gmail.com | C‌OPYRIGHT © 2019~. 마테리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