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서한과 회신들
ARCHIVE
Tunainforest

형제애 :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뒤로가기
공개서한과 회신들
ARCHIVE
Tunainforest

형제애 :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

등단 문은 진입 장벽인가?

문학 쪽에서는 소위 ‘문단 권력’이라 불리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이 논의의 요지는 문학이 등단 제도를 이용하여 기성 문인들의 입지를 공고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로 눈길을 돌려본다면 이 문제가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지는 약간의 의구심을 남긴다. 영화에도 기성 영화인들이 모종의 권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나, 그들이 지닌 힘이 무언가를 허가하고 주조하는 대장장이의 망치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주장에 대해서, 문단에서는 ‘등단’이라는 제도가 표면적으로 제시되어있고 영화에는 그런 게 없으므로 영화는 권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논의되는 구조적 폭력이 형식 안으로 진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구조가 폭력이라면 여기서 작용하는 힘의 역학은 세포의 표면으로만 작용함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버티지 못한 것들은 진작에 세포벽을 허용했을 테니 우리 곁에서 당장 찾아볼 수 없을 테다. 달리 생각하면 우리 곁에 관찰되는 것들은 진작에 자신을 이루는 힘을 어느정도는 채득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항상성(Homeostasis)으로, 지구라는 행성이 중심부의 핵을 통해 유지되듯이 영화계(Universe)에 살아가는 행성 개인에겐 자아를 유지하는 힘이 있다. 그러나 단지 자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영화계 전체에 어떤 힘을 작용시킬 수 없다는 점 또한 명백하다. 태양이 주도하는 질서에 어찌 지구가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잠시 눈길을 돌려 당신을 위한 보금자리 하나를 내어보도록 하겠다. 노 전 대통령은 2006년에 열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완전하게 대등한 외교는 할 수 없습니다. 미국은 초강대국입니다. (중략) 동네 힘센 사람이 돈 많은 사람이 ‘동네 길 이렇게 고칩시다, 둑 이렇게 고칩시다. 뭐 산에 나무 심읍시다.’ 하면은 어지간한 사람은 따라가는 거지요.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 그것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이 발언이 모종의 회의론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소년 만화에서의 파워업의 맥락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을 미리 지적해둔다. 전시작전통제권을 주제 삼은 이 연설에서 요지는 거대한 힘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이 아니다. 우산 아래에서 힘을 기르며 자신의 적을 상대할 만한 주체적인 힘을 기르라는 것이 요지이다. 질서를 따라야만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누구인지까지 잊을 필요는 없다. 이 연설을 통해 우리가 느껴야 할 감정은 ‘어른들’에 대한 굴욕이나 반발감이 아닌,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며 세상에 어울리는 한 명의 주체로서 거듭나는 것이다.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힘의 역학관계에 휘둘리지 않는 대결의식이듯이, 어떠한 흐름 속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단순한 무기력증의 원인으로만 지적되어서는 안 된다.



패배의 두 가지 선택지

1637년, 오랜 투쟁을 하던 인조는 강화도 함락을 계기로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다. 같은 해 2월 24일 인조는 청나라 황제 앞에 고개를 조아리게 되는데, 우리는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부른다. 경술국치 이전까지 조선 최대의 굴욕이었던 이 사건은 김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남한산성>(2017)의 배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언급하는 이유는 영화에 대해 소개하기 위함이 아니다. 패배가 확실시된 상황에서, 승리가 아닌 패배의 조건을 생각해보아야 하는 현실을 생각해보고, 그에 대해 논하기 위함이다.

정치적인 맥락을 피해 갈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꺼내고 싶은 이야기는, 필요악과 필요선에 관한 증례의 논쟁이다. 2011년 제주도의 강정마을에 해군기지와 관련한 시위가 한창이었을 때, 나는 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이상하게만 보였다. 그들이 출처 불명의 좌파 운동가여서가 아니라, 번복될 수 없는 사안에 도전하는 모습이 비합리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주변 국가의 정치적이고도 군사적인 확장 행보는 군사 기지의 필요성을 부각했으며, 그 무엇보다 생존을 위해서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선택이었다. 단순히 돈과 명예,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오는 굴욕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에 달라붙을 수 있는 훌륭한 반례가 있다면, 아마도 2016년의 촛불 시위가 아닐까 한다.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광주 민주화 운동을 예로 들 수 있겠지만, 나는 우리 시대에 더 가까운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 2016년에 나는 뉴스를 보며 일어날 수 없는 이상한 일들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그러나 촛불시위에 대해서는 막연한 회의감을 품고 있었다. 불신한다는 게 아니라 불수에 가깝다고 느꼈다는 뜻이다. 어제의 사실이 오늘의 아침에 바뀌어 있는 이 현실에서, 매체는 현실 조작의 힘이 있다고 느꼈다. 눈으로 보는 현실이 매체가 보여주는 현실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느끼자, 그것은 마치 엥겔스의 유구한 주장을 뒤집는 것처럼 다가왔다.

위의 두 가지 사례 모두에 해당하지 않는 일은 2016년에 주로 논의되었던 사드(THADD) 배치 논란이다. 이 이야기에서 위와 아래 중 어느 쪽에 서있든 간에 이것이 힘의 역학 관계를 따라간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때 확실하게 말해둘 수 있던 것은 양쪽 모두 나라를 생각하는 이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무엇이 나라를 위하는 길인지만을 열렬히 토론할 뿐이었다. 마치<남한산성>의 두 신하들처럼 말이다. 이 논쟁에서 중국의 외교부 부국장은 “소국이 대국에 대항해서 되겠느냐?”라고 말한 바 있으며, 한국의 처지는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개의 대국 사이에 끼어 갈팡질팡하는 모양새였다.

승리와 패배가 아니라 생존을 걱정하게 되는 일은 그 무엇보다 굴욕적이며, 동시에 본능적이다. 사람들이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보이는 반응은 대게 다음의 세 가지로 나뉘곤 한다. 화를 내거나, 우울해하거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한다. 그러나 내일 지구가 멸망하는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든 아무런 대가를 치를 수 없기에 그들의 행동에는 어떠한 판단도 개입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판단을 하더라도 현실 세계에 면밀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 현실 세계에 대가가 개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는 철저히 유물론적이며, 모두의 염원이 세상을 바꾸는 것과 같은 식의 ‘볼레로*’는 실행되지 못한다. (*주 : 호소다 마모루의 디지몬 어드벤처 극장판)

몰락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일은 일종의 사기에 가깝지만, 그 포장이라는 게 미학적인 작업이 될 수는 있다. 동시에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적인 무언가를 철저히 감싸고돌 수도 있는데, 현실 정치가 현실의 물질을 변화시키는 힘이라면 정치적인 작업이란 현실이 아닌 현실에 영향을 끼친다. 아직 현실이 되지 못한 것들, 이른바 ‘예비된 현실’이 현실의 공상으로서 떠올라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무언의 압박이기도 하다. 몰락을 맞닥뜨린 순간에 작은 현실은 예비된 현실에 대항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오늘날의 매체가 클라우드와 같은 인터넷 서비스를 기반으로 운용된다는 점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지닌 듯 보인다. 이를테면 테트리스 게임에서는 화면의 상단부에 있는 블록이 계속해서 내려오기에 언젠가는 게임의 끝을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음에 나올 블록이 무엇인지를 알지만, 그것들이 매번 주어진 현실과 조응할 수만은 없기에 이 게임은 끝날 수밖에 없다.



방어막 혹은 집단자위권

이 문제를 영화계 내의 어떤 권력 현상으로 옮겨본다면 다음의 흥미로운 결과값이 도출된다. 영화계에 어떤 논쟁이 벌어졌을 때, 혹은 무엇을 논쟁할 것인지의 문제에서 전투를 지휘할 권한을 다들 얻고 싶어한다고 말이다. 분명 피라미드 형태의 계급도로 구성된 국방체계에서 젊은 비평가들이 목소리를 내기란 힘든 일이다. 그래서 젊은 비평가가 계급도의 윗면을 탐하는 일은 자신이 권력을 얻어 직접 흐름을 바꾸어 보겠다는 ‘작은 혁명’으로 여겨지고는 했다. 혹은 그들의 권한이 부러워서 기존에 있던 사람들 (그중에서도 무능하게만 보이는)을 끌어내는 식으로 자리의 효율성을 꾀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둘 중 어느 쪽을 택하든 간에 이들의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혁명이라는 단어와 연결될 수밖에 없고, 공격자의 지위를 얻음으로써 오히려 폭력을 등에 업는 괴물이 탄생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그들이 자행하는 것 또한 폭력이 아니던가? 설사 이것이 폭력에 반하는 폭력으로서 정당방위로 인정된다 하더라도, 과실을 따짐에 있어 복잡한 논의 절차가 오가게 됨은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우리 시대가 정체된 구조가 아닌 유동하는 지대로 바뀌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세상은 그 무엇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으며, 이전 시대에 새로운 세계의 문으로 사용되었던 등단 제도는 바깥의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일종의 ‘게이트’가 되었다. 마치 공항에서 입국할 때 사용하는 검문 절차처럼 말이다. 공기 중에서 형체 없이 전파되는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우리 시대에 담론은 계속해서 판형을 바꾸면서 그 어디로도 손쉽게 침범한다. 영화는 회화의 영역에서 탐구됨과 동시에 매체 전반에 깊은 뿌리를 내리기도 하고, 젠더(Gender)와 아젠다(Agenda)는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우리가 기존에 알던 세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고 있다.

이 시대에서 당신은 타고난 하나의 입장만을 고수할 수 없다. 젠더라는 사회학적 성별 구분처럼 고전 시대의 필름 영화가 자기 자신을 디지털 영화로 규정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만약 타고난 것만이 개인의 진정한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고고학자가 아니라 유물론자일 것이다.* 이 고고학의 시대에 우리는 연못 위의 백조처럼 고고하게만 보일 수 없으며, 유동하는 지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발을 움직여야만 한다. 세상은 컴퓨터 모니터 위의 윈도우 창처럼 끊임없이 생성되거나 분할될 수 있으며, 우리가 어떤 이야기도 손쉽고 다양하게 꺼내놓을 수 있는 만큼이나 간편히(Simply) 종료되곤 한다. 심지어는 반려묘의 난입으로 인해 컴퓨터의 전원이 날아가는 것으로 당신의 작업이 망쳐질 수도 있다. (*주 : 당연하겠지만 미디어 고고학을 염두에 둔 말이다.)



행성방어: 위대하지만 숭고한 실패

누군가는 클라우드에 자신의 저작물을 백업해두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지적 저작물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머릿속에 있으며, 인간의 정신 자체가 네트워크가 되지 않는 한 저작물에 관한 문제는 입 밖으로 나와야만 비로소 공유된다. 쉽게 말해 이야기해야만 우리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런 담론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는 순간 우리는 공기 중에 떠다니는 형체 없는 것들, 부유하는 지대에 적극적으로 노출된다. 아무리 세밀한 목표를 설정한다 하더라도 그 담론은 전체 서사의 약한 일부만을 담당할 수 있을 뿐이다. 세계가 글로벌이라는 이름으로 연결된 만큼이나 영화 담론은 매체 전반에 어우러진 거대 서사로 확장되고야 말았다. 여기서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거대 서사 안으로 다이빙해야만 비로소 본격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는, 서사를 이기는 게 아니라 자신을 이겨내는 것이 곧 승리의 지름길이다.

그러니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상상한다. 매체의 우주를 떠돌던 영화는 어느 날 디지털이라는 지대에 전이되었다. 이 정착은 느리지만 확실한 궤도로 이루어졌으며, 두 세계가 서로 맞닿자 외계에서 온 온갖 이상한 생명체들이 이곳에 넘어오기 시작했다. 과거에 포토제니, 정신분석학, 현상학과 같은 악당이 차례대로 도전장을 내밀 뿐이었다면, 영화가 디지털과 연결된 시점에서는 우주 차원에서의 강자들이 이곳에 넘어온다: 그들은 자신이 이전에 보냈던 수하들, 포토제니-정신분석학-현상학이 차례대로 쓰러지자 본색을 드러내고는 이곳에 직접 재림한다. 영화가 디지털 시대라는 거부할 수 없는 질서를 만나자 이곳에는 (비단 디지털에 한정되지만은 않는) 온갖 담론들이 휘몰아쳤고, 오늘날의 영화는 디지털의 침공 속에서 자아를 유지하는 것만을 겨우 해내고 있을 뿐이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할 확률이 희박하다는 점을 잘 안다. 이런 상황 속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우선의 선택이란 두 세계를 잇는 문을 철저하게 방어하는 것이다. 몰려오는 적 모두를 철저히 막아내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고, 그것들을 제하고 남은, 당장 할 수 있는 일들도 아주 많은 병사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문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문을 방어하는 집중공격(Salvo)이 필요하다. 예컨대 우리 시대를 설명하는 단어인 초연결(Hyper-connected)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강한 전파력만큼이나 여기저기에 산재해있으며,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은 아주 거대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위협이다. 이 마스크는 당신의 입을 막기 위함이 아니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하고, 디지털 이후의 삶에서 디지털을 상상해보지 못할 일은 없을 테다. 이른바, 영화가 없는 자리에서도 영화는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