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다. “하나의 생명을 구하는 자는,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이 말이 모종의 영웅심리의 뉘앙스를 담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으나, 쉰들러가 작성한 이 리스트에 우리는 할 말이 있다. 구할 사람이 너무 많기에 자신이 관장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만을 기록할 수 있다는 것, 이때 쉰들러의 필기는 자신이 평소에 알던 것(공장을 운영하는 법과 나치 인사들과의 사교)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장면 하나를 살펴보자. 까맣고도 어두운 밤중에 쉰들러는 조용히 펜을 꺼내 들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한다. 이 장면은 윤동주의 시처럼 어두운 밤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시대적 배경을 설정해두고 있음이 분명하나,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도 ‘영화의 시대(Era of image)’에 대한 물음을 던지기도 한다. 밤하늘의 은하수에 별 대신 이미지의 항성이 조밀히 들어찬 이 시대에, 구해야 할 영화가 너무 많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자신에게 익숙한, 혹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부터 손대지 않을까? 리스트란 그런 것이다. 누군가를 허가하든 불허하든 간에 목록은 짜여야만 한다. 설사 그것이 엉성하고 조악한 하급 직물이라 하더라도…….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만 하는 질문은 다음의 두 가지다. 첫 번째, 극장에서 영화는 어두운 밤중에 빛나는 단 하나의 현실이다. 이 생존의 기쁨은 어떤 내용이든 간에 생존자의 논리로 귀결시킨다는 점에서 비겁하기 짝이 없다. 그 비겁함의 이름이 바로 생리학(physiology)이며, 정신분석의 관리자로 등장한 이 개념을 통해 우리는 영화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과연, 밤중에 빛나던 새벽의 별들이 인터넷을 통해 흔해 빠진 광선이 되었을 때도 우리는 동반자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인터넷은 상호소통적이면서도 상호차단적인 매체로서, 밤과 낮의 구분 없이 무언가를 나누거나 혹은 교류할 수도 있는 공간이다.* 이곳은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눌 수도 있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실시간으로 표현되지 않는 현실의 잔향으로서 이미지가 남기고 간 지표(Index)임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 점에서 인터넷과 영화는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가 남기고 간 구시대의 흔적을 공유하는데, 그것을 표현하는 어구가 바로 부재(Absence)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태까지의 논의를 다음처럼 요약할 수 있다. “영화가 없는 자리에서 영화를 생각해본다는 것. 이것은 완전 영화인가 순수 영화인가?” (*주 : 예컨대 이곳은 에디슨 이후를 직시한다. 에디슨이 영화의 발명에 일조했음을 고려한다면 인터넷 시대는 영화의 이후라고도 볼 수 있다. 생리학의 바깥이 현상학과 포스트모던이라는 점에서 영화는 그 둘을 더 닮아 있을 것이다.)
바쟁이 언급하는 영화의 두 가지 흔적은 크게 완전 영화와 순수 영화라는 말로 분류될 수 있다. 전자는 「완전 영화의 신화」에서, 후자는 「자전거 도둑」에서 언급했고, 그러나 이 둘은 완전과 순수라는 용어의 유사성(Resemblance)에 귀인하지만은 않는다. 완전 영화가 현실의 영화화와 영화의 현실화 사이에서 ‘영화의 이후’라는 변증법적 결론이라면, 순수 영화는 영화라는 개념이 두 개의 세계에 겹치기 바로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멈춰 선다. 그래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순수 영화보다 완전 영화를 예측해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기술의 발전은 늘 ‘지금-여기’에서 최신을 갱신하지만 완전 영화는 영화의 이후라는 주제를 통해 ‘영화가 없는 자리’로 우리를 데려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영화가 없는 자리를 생각해보았으니 두 번째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 물음이란 바로 구원에 관한 이야기다.
쉰들러가 리스트를 작성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유대인 노동자를 구원한 것은, 아마도 영화의 ‘리스트’를 작성하는 몇몇 사람들의 태도에 빗대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앞서 말해두었던 것들이 이 은유를 온전히 정당화하기에 부족함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나는 영화가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또한 비평가로서의 면모를 지닌 쉰들러가 시대 권력에 편승하며 고고한 척을 다하면서도, 자기방어와 헌신의 논리로 ‘영화의 정전(Canon)’으로서의 리스트를 작성하노라고 비판될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헌데 그렇다면, 구원의 대상이 사라져버린 시대에는 어떻게 해야 자기 구원을 찾을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영화가 없는 시대에 영화를 논하게 되었노라고 말한다면 영화는 어찌 되었든 간에 소수나마 생존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방치된 사람이 너무 많은 게 아니라 내가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너무 적음에 슬퍼해야 마땅하다. 쉰들러가 그러하지 않았는가.
2.
레프 마노비치는 『소프트웨어가 명령한다』를 통해 기술의 발전이 GUI의 확장을 불러왔으며, 이와 동시에 인간의 감각이 미디어 안으로 편입된다는 점이 영화를 비롯한 여타 매체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한다. 여기서 그가 밝히는 입장은 기본적으로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총괄지배’한다는 것으로, 이는 본질적으로 영화란 기술(Description)에 의해 기술(Technique)되어야 한다는 완전 영화의 개념과 유사하다. 우리가 앞서 말했던 바를 상기하며 기술은 결코 영화의 이후를 생각하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엘세서와 같은 이론가를 경유해 미디어 고고학의 길에 들어선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마노비치가 말하듯이 소프트웨어는 매체 간의 간극에 달라붙어 양측의 격차를 줄여주는 일종의 서멀구리스 같은 역할을 한다. 기본적으로 진공 세계여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상태의 영화들은, 소프트웨어에 탑승함으로써 서로에게 닿을 수 있고 차갑거나 뜨거움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소프트웨어가 서로에게 매질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영화의 바깥을 둘러싼 무형의 공간에 적용되려면 아주 많은 산을 넘어야 한다. 하지만 만약 영화가 어떠한 육체적 어울림에 의해 견인되는 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것들, 영화 배급망이나 방영 플랫폼에 따라 서로 뭉쳐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면, 그 영화는 이제야 비로소 ‘영화가 없는 자리에서 영화를 생각해보는 것’이 될 수 있다.
영화의 범주를 무턱대고 늘려버리는 짓은 하지 않겠지만, 영화가 유통되는 범주가 무한히 늘어날 수 있다는 점만큼은 사실이다.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 건 오랜 숙고를 필요로 하지만, 영화를 어디서 볼 수 있는지 만큼은 가장 손쉽게 답할 수 있는 게 오늘날이다. 이와 유사하게 마노비치의 “소프트웨어가 명령한다”라는 자신만만한 선언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소프트웨어를 구축하는 것에 사용되는 데이터 알고리즘이 인풋과 동일한 아웃풋을 만들어내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예컨대, 영화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데 소모된 영화의 목록은 그만큼의 알고리즘 값으로 우리 곁에 돌아온다. 어쩌면 우리는 이를 두고서 실재의 귀환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늘어나는 데이터의 홍수 안에서 우리가 그것들을 무의식적으로 흘려보냄을 떠올려 본다면 그렇다.
그렇다면 지금의 영화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인상 깊은 몇몇 장면은 쇼트, 시퀀스라는 형태로 각인되지만 나머지 모든 것은 기억의 저편 너머로 사라진다. 보다 구체적으로 지적하자면 그것들은 영화의 제목이 지닌 함축적 언어 아래로 편입된다. 여기서 영화의 제목이란 영화 자체를 표현하는 언어가 아니라 그 언어(Connotation)들을 불러오는 알레고리이며, 그와 동시에 자동적으로 정렬되는 오토마티즘적인 성격도 지닌다. 이들은 필름의 유구한 전통에 따라 뒤에서 앞으로만 재생되나, 자리를 옮겨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올 때는 우리 뇌의 ‘소프트웨어가 명령하는’ 바에 따라 정렬되는 것이다. (이에 따르자면 우리는 ‘유령이 떠돌고 있다’라는 문장을 다음처럼 고쳐야 한다. “유령은 돌아온다.”는 말로.)
만약 메츠의 업적 하나를 꼽으라면 영화 장치를 경유해 관객이라는 이름의 장치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이때 그는 라깡의 실재계 개념을 경유해 우리가 실은 라깡이라는 이름의 소프트웨어로 작동하는 깡통 로봇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지금에 와서는) 시시해 빠진 라깡주의자의 원리적 응용처럼 보이지만 하드웨어로서의 관객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메츠의 그 유명한 명제, 관객은 영사기가 되어 영화를 투사하는 위치에 선다. 이 명제를 반박하는 손 쉬운 반박은 아마도 디지털일 테다. 그의 말을 따르자면 디지털 시네마에서 사라져버린 영사기의 존재는 관객의 부유하는 육체를 암시한다. 영화가 어디에서나 손쉽게 영사될 수 있다는 점은 영화가 세상을 떠돈다는 ‘유령’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 딱 좋다. 말하자면 영화는 예비된 존재로서 굳이 완전해질 필요가 없는 처음부터 순수한 형태의 관념인 셈이다. 허나 그렇다면 이때 그 영화를 현세로 불러내는 방법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영화를 무의식적으로 잊게 되는 만큼 무의식적으로 불러내는 방법이 필요하다. 이는 암호화를 해제하는 방법이 암호화의 역산인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인간의 실재가 아니라 세계의 실재 안에서 영화를 떠올려 보게 되는 셈이다.
3.
마노비치를 경유한 우리에게 영화란 자기 추천이 만들어낸 알고리즘 소프트웨어에 의해 돌아오는 것이 되었다. 우리에게 영화를 추천해주는 서비스란, 없는 영화를 만들어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좋아할 만한 영화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근본이 없지는 않다. 영화가 거울의 역할을 함으로써 그것을 통해 세계를 깨우치게 된다는 아버지의 법도(Name of the father)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나는 이 글의 가장 처음 단락으로 돌아가 쉰들러가 작성한 모종의 리스트를 떠올려볼 예정이다. 이 리스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일종의 명부인데, 그때마다 작성되는 이름의 목록이 불규칙하다는 점에서 규칙성이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이 규칙성이 없다는 것이 어디까지나 관찰자인 우리에게만 적용되는 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며 바로 다음에 마주할 장면을 미리 예측할 수 없다. 단지 어쩌다가 예측이 맞았을 때 “나는 원래 그렇게 생각했었어”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예비된 현실을 ‘현실화(Realize)’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운명’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듯이, 운명 같은 무언가란 어떻게든 그렇게 될 것이었다는 모종의 알고리즘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 우주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어쨌거나 정해져 있었으며, 그럼에도 그중에 하나가 실현되는 건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 나 자신의 온전한 의지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우리가 작성하는 리스트의 문제가 어쩌면 이와 비슷하다고 느낀다면, 아마도 그것은 착각이 아니다. 누가 어떤 리스트를 작성하는지까지는 논의가 복잡해지므로 여기서 다 적지는 않겠지만, 흔히 떠올리곤 하는 영화 평론가를 떠올려보도록 하자. 영화 평론가라면 으레 그렇듯이 자신이 좋아하는 혹은 지지하는 영화를 목록으로 만들어 발표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강제성이 있는 ‘~해야 한다’의 형식으로 작성했지만 어쨌거나 그들이 리스트를 작성할 의무가 없는 게 사실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는 그들이 리스트를 작성했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노라고 생각하면서 리스트 안의 어떤 공통점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독자에게 있어 이 작업은, 평론가 개인의 취향과 사고를 찾아가는 작업인 동시에 이 영화들이 어떤 이유로 이곳에 모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는 셈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면 이 리스트에 명확한 출처가 있다는 점일 것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나와 세계를 이어주는 소프트웨어에는 제작자의 흔적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소프트웨어를 구성하는 알고리즘은 어디까지나 내가 프로그램을 구동하기 위해 필요한 GUI를 표면에 드러내 주어야 한다. GUI가 면밀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소비자용이 아니라 개발자용일 것이며, 이 개발자들이 프로그램에 악성 코드를 심을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데이터를 코딩하는 노예에 불과하다.
나는 약간은 소극적인 태도로 평론가를 코딩하는 노예로 정의해보려 한다. 그러나 이 정의는 ‘코딩 노예’라는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굴레에 갇힌 니체의 그것을 따른다. 나는 평론가들이 리스트를 작성하는 행위가 모종의 정전을 만들어 신세계의 교주가 되려 하는 것이 아닌, 영화에 사로잡힌 그(것)들을 위해 필사적으로 헌신하려 드는 모종의 봉사 행위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중년의 사업가인 쉰들러처럼 젊어서는 필사적으로 지식/재산을 탐구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세계로부터 주어진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려고 노력한다. 그 사명이라는 것은 지금 이곳의 자신이 늘 마지막 벼랑에 매달려있다는 점이며, 영화와 세상이 계속해서 도착하는 ‘지금-여기’에서 낭떠러지 이후의 완전함을 추구하는 사상이다. 사람들은 영화가 멸망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최후를 언제 맞닥트리게 될지는 알 수 없고, 다만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만 열렬히 생각해볼 뿐이다. 그렇다면 그 일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중년의 쉰들러는 자신이 구해야 할 영화의 목록을 작성한다. 사악한 영화의 시대 안에 사로잡혀 지적으로 학대당하는 영화 대중들을 빼내야 할 의무가 그에게는 있다. 알고리즘의 홍수 안에서 우리가 그들을 마주할 때, 그것이 비록 자신의 대죄로 인해 이루어진 회개적 성격의 만남이라 하여도 소프트웨어는 코딩되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