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다시 서울로. 나는 피곤을 호소하고 싶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계획대로 YPC에서 김솔이 개인전을 봤다.
(…)
문을 열고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멋있다고 말했다.
관객으로서 전시장을 여닫는 사이에 생략된 건 무엇인지. 일단 그 전에 나는 이 전시가 힙스터의 산물이지 않을까 그러면 정말 좋겠네. 중얼거리면서 기대감에 부풀었다. 나에게 힙스터라는 존재는… 지구와 다른 행성 사이만큼의 비/물리적인 거리를 전제하고 있으며… 그들은 정말 멋있다. 이를테면 패션은 그들의 몫이다. 온더락 위스키도. 어쩌면 디제잉 파티도. 물론 이 모든 건 선입견에 불과하다. 코로나 팬데믹 동안 파티 문화는 자연스럽게 절멸했다. 파티를 위한 결정적인 현장에 마스크를 쓴 채 잠입하거나 줌이나 페이스 타임으로 저화질 음악을 유포하는 건 왠지 모르게 애처로운 일이다. 일렉트로닉 쇼크가 필요하다. 재고로 남은 마스크 더미에 전기를 지피자.
내가 무슨 파티를 원체험으로 삼는 PTSD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누가 파티에 가서 온더락 위스키를 마시는데? 서부 전선 이상 없음도 아니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심지어 나는 위스키도 못 마신다. 싸구려든 아니든 속이 메스껍다.
지난 9월 10일에 발매된 안마루의 ‹Plastic Star›를 애플 뮤직으로 주행했다. 갈수록 마음이 웅장해졌다. 이건 전자적으로 구현된 대서사시가 아닌가? 대서사시의 주인공은 스스로를 플라스틱 모조품으로 무장한 ‘스타’다. 그는 플라스틱처럼 도취된다. 데이빗 보위가 행하신 신적 존재의 영험함 같은 건 21세기 시점에서 분리수거하고 우리 그냥 미래가 매립된 근방에서 춤추자. 아무도 B급으로 콜라주된 좀비가 아니다. 여기에 가짜 피와 시럽이 흐르는 지면은 없다. 다만 지면 자체가 부유하면서 비트 단위로 쪼개지다 성운으로 어렴풋이 밀집한다. 표류 / 반추 / 해방 / 해방!
문득 유진 새커의 ‹이 행성의 먼지 속에서›가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책의 제목이. 행성 규모의 우주적 공포와 마주할 때 인간의 실존은 먼지처럼 위태롭고 사소하다. 우리는 먼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플라스틱 스타와 함께라면… 먼지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공명하기 시작한다.
(…)
서울행 비행기에 놓고 내린 나의 힙스터 페르소나는 이제 구천을 떠도는 중이다. 누구는 나에게 제발 힙스터를 대상화하지 말라고 조언해줬다. 힙스터는 없어. 힙스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YPC의 바닥이 검정으로 도색돼 있다. 여기는 구천이 아니라 고딕적으로 연출된 쇼룸이다. 바이브레이터처럼 진동하는 관짝을 둘러보다 ‹마이셀리아 코어›를 발견했다. 언젠가 다른 전시에서 ‘그것’은 자신의 액체성 피막으로 지면을 타고 오르는 형태였다. 이른바 기립 조각. 그와 별개로 뭔가 처참하게 죽은 요정의 시체 같다고 중얼거렸다. 나는 왜 이렇게 혼자서 중얼거리는지? 왜냐하면 당신은 그러기 위해 태어난 사람… 문제는 이제 기립 조각이 여기에 고딕스러운 풍미를 더하기 위한 장식적 오브제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요정의 시체로 만든 수제 패티 같은 느낌으로. 레버카 손, 폴 앤 스티브, 마이셀리아 코어, 그 외에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계속 묘연해지는 누군가는 마침내 사라졌다. 누군가의 정체가 영원한 비밀로 남는다. 이 행성의 먼지 속에서 말이다.
또 다른 관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유령이 끝내 발음할 수 없는 육성으로 가공됐다. 즉 목소리의 주인은 죽은 게 아니라 도처에 산매장된 채 고조를 넘나들면서 뭐라고 호소한다. 여섯 여성 인물이 있다. 그들은 하나이자 여섯 개로 도축된 여성의 신체 투성이로서 여기를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여기에 자기 혐오와 서로에 대한 원망으로 넘실대는 저주가 내린다. 그 와중에 너랑 섹스할 수 있다면. 이를테면 쇼룸 한편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다잉 메시지로 열거된다.
좆 같은 년
사랑해
그래도 이 시발년아
그래도 사랑해
그러니까 이 전시는 섹스와 공모한 실제 범죄 현장을 팝업의 기치 아래 날조하는 중이다.
마이셀리아 코어를 기억해. 그 이름은 너에게 빙의해서 너의 몸으로 나를 애무하고 겁박할 테니까. 자신의 신체가 강탈되길 바라는 목소리의 피/착취자. 여성들.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의 정언 명령에 따라 생략 내지는 거세된 성적인 원념은 갈수록 리비도 차원에서 역류한다. 내가 여기로 들어왔을 때 모든 사건은 유려하게 마감됐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 없다면 목소리는 갈수록 처절하게 구애하기 시작할 것이다. 쇼룸은 왜 하필 고딕적인가?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고딕 소설의 미감을 패션으로 의태하고 있다. 서로를 성적으로 도착하는 와중에 남겨진 허물이 진열돼 있다.
“밀레니얼 세대를 위한 비석이 여기 있다.”
이시우드의 ‹퀸 베이비›에서 발췌한 문장이다. 일민에서 전시 보고 난 뒤 1층 로비에서 구매했다. 책을 사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일련의 (회화) 작업들이 표현주의와 무슨 주의를 넘나들면서 미술사적 풍미를 가미하는 모습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물론 그와 관련된 도상은 일종의 징후로 출몰한다. 뭐가 어떻게 징후적인가? 서양 미술사를 전용한 레시피가 있다. 레시피는 레시피에 불과하다. 그리고 회화로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레시피의 절차를 적당히 버무리다 말다 어느 순간 스마트폰으로 기록 촬영되는 수제 디저트다. 물론 아무도 쩝쩝거리지 않는다. 최소한의 격식을 차리는 게 중요하다. 참고로 작업에 해시태그를 다는 건 조금 격식이 떨어져 보일 수 있다.
But I like to watch. You too?
Sure.
나의 관심사는 대략 이러하다. 이시우드는 회화로 자신의 일상을 스냅한다. 그 결과 모든 건 이미지인 동시에 정물이다. 혹은 관객으로 하여금 양자 사이에서 해상도를 조절하게 만든다. 나는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1인칭과 동기화된 카메라-시점을 연상했다. 카메라는 심지어 그걸 스마트하게 휴대할 수 있다면 우리가 일상 차원에서 마주하는 정물 복합체를 자연스럽게 픽셀 차원에서 재/구성한다. 정물은 정물 자체가 아니다. 한병철이 말했듯 우리는 “탈사물화한 세계”에 상주하면서 좋아요로 대변되는 “디지털 아멘”을 남발하는 중이다. 문제는 내가 좋아요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이시우드의 출생 연도를 기억하자. 다름아닌 1993년. 전시장을 둘러보기 직전까지 그가 하이디 부허 같은 네오 아방가르드 작가와 동년배인 줄 알았다. 아방가르드는 죽었다. 아멘.
‹퀸 베이비›는 작가가 개인 블로그에 연재한 일기를 현재 시점에서 역순으로 나열한다. 이제 추문으로 남은 내밀한 사건들이 다시 (나에게로) 추문처럼 유포된다. 시계는 ~주의와 무관하게 찌그러졌다. 더불어 일상으로 흐르는 시간은 썸네일이라는 이 시대의 새로운 도상 차원에서 계속 재편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를 둘러싼 모든 인간 관계가 추문 내지는 과잉 정보로 그친다는 한병철 식 결론은 그 자체로 밀레니얼에 관한 추문이다. 인간은 그냥 여러모로 말종이다. 시발년과 시발놈들은 세대 초월적으로 널려있고 나도 진정한 시발놈이고 우리 모두가 상스럽다. 이대로 괜찮은가? 괜찮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다시 한 번 우리에겐 일렉트로닉 쇼크가 필요하다.
2023년 기준 힙스터라는 역할role을 소화할 수 있는 유일한 세대는 밀레니얼이다. 공유 자산으로 삼을 만한 문화적 코드가 없는 상태가 코드화된 상태를 해명하려는 최후에 가까운 세대 차원의 픽션을 양산한다는 점에서. 레디메이드 욕망 기제에 스스로 도취되기 위한 반/서사의 징후들.
징후는 언제나 나에게 징후로서 호소한다. 이를테면 다잉 메시지는 계속 이어진다.
나 니스타일을 훔쳤어
이제 내꺼야
존나 좋아.
그냥 이게 전부일 수도 있다. 나는 너를 포함한 모두의 카피캣이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결렬됐지만 각자의 존재 이유를 오로지 서로에게서 모색한다. 서로의 허물들로 실존적인 공허를 레이어드한다. 다시 레이어를 풀어헤친다. 노출 강박은 공허까지 헐벗기 위한 제스처다. 그럼으로써 죽음을 충족시킨다. 아무도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다. 추문에 의해 굴절된 내가 도처에서 현전하는 중이다. 그로 인해 전능함을 느낀다. 관 속에 안치된 것은 목소리를 자동 재생하는 스피커다.
목소리에 매혹된 사람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 동요한다. 사슬로 묶인 화병이 바닥에 떨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