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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담

[비평의 비평] 듀나와 이동진과 기타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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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담

[비평의 비평] 듀나와 이동진과 기타등등

비평담론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거나 해결하고자 들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벽은 타겟 독자 설정에 있어서의 난점이다. 표본집단을 광활하게 잡아서 더 많은 대중을 끌어들일 방책을 모색할 것인지, 아니면 어차피 한 줌인 비평담론장의 한계를 인정하고 소구집단에 처음부터 타이트하게 집중할 것인지에 대한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비평과 리뷰가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묶여 쓰이기 시작하면서 문제는 더욱 더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

오늘 가장 먼저 다룰 기성 비평가는 바로 이동진과 듀나다. (이들을 메타비평의 대상으로 선정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느낄 분도 있으리라 본다.) 앞서 말한 타겟 설정의 문제가 개입하면 좀 혼란스러워질 여지는 있겠지만 어쨌거나 이들은 영화평론이라고 하면 일반 대중에게 가장 먼저 소환되는 이름들이고, 한국 영화평론의 어떤 표준을 형성하고 있는 작가들이기도 하다. 유사 팬덤을 구축하고 있을만큼 지지층이 탄탄하기도 하고 말이다. 이번 발표에서는 주로 온라인에서의 활동을 다루려 한다.



듀나
듀나는 인터넷에서 듀나의 영화낙서판을 운영하면서 영화글을 쓰고, 각종 매체에도 영화에 대한 글들을 기고한다. SF소설 작가이자 헤비 트위터리안이기도 하고, 모두가 알다시피 25년이 넘는 시간동안 정체를 드러낸 적 없는 신비주의 인물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듀나는 엄청난 생산력을 가진 평자다. 그럼에도 한 번도 자신을 평론가나 비평가로 정체화한 적이 없다. 가벼운 스타일을 고수하기 위한 방어기제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모름지기 비평가라면…” 류의 공격에서 자유로운 상태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인지 듀나는 비평담론이라는 영역의 내부로 들어오는 길을 피해다니면서, 그 근방을 맴도는 논객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듀나는 하나의 토픽을 잡고 글을 여기에 관통하려 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예삿말로, 그리고 러프하게 스케치하듯 쓰는 타입을 고수한다. 이렇게 다양한 주제를 동시에 기술하는 것은 넘버링을 통해 이루어진다. 아주 짧은 한두 개의 문단 여러개를 하나의 게시물에 묶는 것인데, 듀나가 트위터에서 강점을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또한 그는 의외로 역사와 계보를 중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고전영화를 개봉 당시에서 현대까지의 역사적 맥락, 그리고 거기에 접붙여져 있는 기술 발전의 맥락에 소급하여 의미를 제고해보게끔 하거나, 장르의 역사, 그리고 연극사에 대한 배경지식을 상당히 자주 활용하는 식이다.

한편 듀나가 이렇게나 많은 지지층을 거느리게 된 것은 단연 그의 사캐스틱한 유머감각 덕분일 것이다. 듀나는 글을 어렵게 쓰지 않는다. 오히려 개념어를 무리할 정도로 자제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개념어를 사용해야만 하는 심급의 지점에 부닥치면, 그 논의를 끝내버린다. 서둘러 끝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애초에 이렇게 깊게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듯이 말이다. 또한 질문과 답변을 스스로 주고받는 형식으로, 마치 강의 큐시트처럼 진행되는 글이 많다. 이 대화적 스타일을 얘기하려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듀나의 초창기를 함께했던 ‘파프리카’다.

듀나는 형식비평에 대해,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싶을 정도의 의식적 거부반응을 보인다. 대신 영화의 재미, 밀도, 캐릭터, 배우의 연기, 산업의 반영양태 등에 집중한다. 그가 형식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개별 영화의 혹은 감독의 스타일보다는 장르적인 컨텍스트에서 형식을 다루려 할 때다. 특히 SF 장르 스타일이 축적되어온 역사적 맥락에서 그 위치를 짚는 식이다. 이럴 때는 다른 동시대의 SF 작품과 비교 분석에 돌입하거나, 같은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대조하여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 사운드를 언급하기는 하는데, 앵글이나 쇼트, 편집 상의 특성 등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다루지 않는다. 그가 아주 가끔 형식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흥미롭게도 그것을 ‘기타등등’ 카테고리에 집어넣고 가치판단을 하지 않으려 한다. 비평에는 형식을 포함시키지 않고, 트리비아의 일부, 영화 담론의 다른 영역으로 위치시키고자 하는 의식적인 조작 혹은 그의 확고한 가치관으로 보여진다.

많이 돌아왔지만 다시 ‘파프리카’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듀나의 초기 평 중에서 ‘파프리카’가 듀나에게 “형식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라고 묻는 대목이 있다. 듀나는 대답한다. “우리가 그것까지 말할 필요가 있나?” 이는 파프리카가 동업자였든 본인의 다른 자아였든 가상인물이었든 간에 분명히 듀나 낙서판에서 형식 논의가 부재하고 있음을 듀나가 인지하고 있다는 확실한 방증이다. 동료일 경우에는 형식을 주요하게 다루려는 사람과 결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고, 단순히 캐릭터일 경우에도 형식 비평의 배제에 대해 이미 스스로 선언한 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동진
이동진은 지면에 쓰는 글과 블로그에서 자신의 타깃 소비자 내지는 팬들에게 소구하는 글을 달리 쓴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아니다. 글의 구조와 레이아웃의 수준에서부터 달리 쓰고있기 때문이다. 블로그에서 그의 글들은 한 문장을 적어도 두 번, 심하면 서너 번까지 행갈이한 상태로 시조처럼 게시된다. 가독성을 높이려는 것일까? 토막난 어절들은 액정의 가로 인치에도 훨씬 못미친다. (기기 설정값이 보통 혹은 그 이하라는 가정 하에 말이다.) 블로그 게시물 가운데 소위 말하는 ‘줄글’은 찾아보기 힘들다. 리뷰는 대부분 소개나 설명의 형식을 띤다. 구조화된 글보다는 몇 가지 쟁점을 제시하는 데 그친다.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의 콘텐츠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나의 한줄평 모음› 시리즈가 차지한다. 그 다음으로는 ‹나의 베스트›나 ‹나의 무슨 무슨 리스트› 같은 것들이 뒤를 잇는다. 이동진의 독자들이 가장 원하는 콘텐츠가 그것이기도 하니 수요와 공급이 맞아 떨어진다. 자신과 주파수가 맞다고 여기는 평론가의 취향을 신뢰하고 가이드라인 삼는 독자들을 위한 콘텐츠로서는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뒤에서 말하겠지만, 이것이 비평 담론에는 그다지 좋은 영향을 주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씨네21›과 포털 영화평이 대중영화 관객들의 거의 유일한 레퍼런스이던 시기를 거치면서, 5개 만점의 별점 제도와 한줄평은 영화를 선택하거나 평가할 때 사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형식으로 자리잡았다. 유명 평론가가 5점을 준 혹은 1점을 준 영화들이 리스트업되고 온라인으로 구전되기 시작했다. 영화들은 이 과정 속에서 단독적으로 고려되어야 마땅한 여러 심급의 논의들을 합병 당하고, 정량화되고 납작하게 수치화된 상태로 독자들에게 날라졌다. 단 한 문장으로 하나의 영화를 평해내야 하는 시스템 내에서 평가가 수사로 점철되거나 단편적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음은 물론이다. 이 가운데 ‘씨네토크’ 이벤트가 인문학 열풍을 등에 업고 스포츠화되면서 특정 평론가, 특히 이동진 등이 단평 리뷰 시스템 내에서 구사했던 스타일이 벤치마킹할 만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왓챠와 같은 메타크리틱 어플이 크게 성공하면서 수사 중심의 단평은 어느 순간 비평 전체를 대표하게 되었다. 왓챠를 이용하는 대부분의 유저들은 집계를 통한 개인화 서비스보다는 오히려 집계를 위한 ‘별점 매기기 행위’ 그 자체를 오락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이동진과 ‹씨네21›로부터 수용된 ‘영화 평론가의 일’을 사용자 스스로, 그것도 아주 단순한 드래그 앤 드롭(혹은 스와이프 앤 드롭) 한 번으로 모사할 수 있다는 점이 상당한 지적 만족감을 제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가 한줄평을 주요 콘텐츠 삼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영화비평을 ‘짜치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가 쓰는 한줄평 그 자체에도 있다.

“이미 영화사에서 확고부동한 평가가 내려진 고전들에 대해 제가 평가를 또 매긴다는 것은 그다지 흥미로운 일이 아닐 테니까요. 그래서 1980년 이전 영화들은 별점을 매긴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이건 이동진이 직접 한 말이다. 요컨대 그에게는 아름다운 영화의 정전들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사에서 확고부동한 평가가 내려졌다는 말 속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오래된 평론가들과 연구자들 가운데 힘이 셌던 이들을 ‘받들겠다’는 왜소한 비평적 태도를 드러낼 뿐이다. 문제는 더 있다. 그가 ‘영화적 완성도’에 집중한다는 이유를 윤리나 정치적 판단에 대한 가치관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대한 당위로서 내세운다는 사실이다. 그가 주장하는 영화적 완성도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정치적 해석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영화의 주제나 소재를 얼마나 잘 표현했는지만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하는데, 그 ‘잘 표현했다’가 무엇인지 그의 글을 유심히 읽어도 알기 힘들다. 명확한 평가지표가 없고 언제든지 변동될 수 있는 기준처럼 보인다. 이 때문인지 이동진은 유독 “이건 좋고, 이건 별로” 식의 외교적인 평을 즐겨 한다. 몸과 마음이 평화롭다면 노랫말처럼 즐길 수 있을법한 예쁘고 고즈넉한 수사들을 곁들여서 말이다. 차라리 논리적으로는 설득이 요원한 자신의 주관적 취향에 의해 내리는 평가라고 말하는 편이 솔직할 것이다.



나가며
솔직히 말해보면, 듀나나 이동진만큼의 반향을 이끌어내는 영향력 있는 인기 평자는 젊은 층에는 없다. ‘없는 것 같다’가 아니라 확실히 없다. 듀나와 이동진 정도의 소수 평론가들이 했던 것은 이제 왓챠와 유투브로 이관됐다. 두 집단 사이의 차이는 해당 평을 마음에 들어하는 독자층이 그들의 다음 행로를 어디로 설정하느냐에 있다. 듀나와 이동진의 글의 품질이나 식견이 좋든 나쁘든 간에, 그들을 좋아하던 사람들 가운데 절반은, 어쨌든 재밌게 읽었던 비평이 다루고 있는 바로 그 영화로 향한다. 혹은 최소한 영화에 대한 담론으로 향한다. 그러나 유투브 비평과 왓챠 비평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더욱 더 강렬하고 과감한 다이제스트를 원하고 있다. 더 짧게, 하지만 더 ‘상징적인’ 것들에 대한, ‘ㅎㅈㅇㅇ’이 가능한 영화 지식과 정보를 ‘수집하려고’ 든다. 담론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자체의 정보와 거기에 숨겨진 어떤 코드들을 수집하는 것이 목적이다. 짧은 호흡과 빠른 컷 전환, 지루하지 않은 내레이션, 잦은 업로드가 요구되는 유투브 미디어의 특성상 개중 상당수의 채널들은 중심 줄거리를 축으로 삼아 영화를 순식간에 요약해 주거나, 영화 속 상징이 숨겨놓은(혹은 숨겨놓았다고 믿는) 의미들을 채굴하여 보여주는 스타일을 고수한다. 요컨대 유투브 영화해설이 각광받는 이유는 영화에 다이제스트가 먹힌다는 생각, 좀 비약하면 서사가 전부라는 믿음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영화 요약’ 유투브 댓글창에는 시간을 절약하게 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코멘트가 상위에 랭크된다. 영화에 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낭비라는 통념 사이에서, 그럼에도 굳이 영화 유투브가 인기를 얻는 까닭은 새로운 서사와 얘깃거리에 대한 대중의 갈망이 전부일까? 그러나 숨은 그림 찾기처럼 펼쳐지는 해독 콘텐츠들은 미쟝센 비평의 일환이 아니던가? 이런 식으로 손쉽게 얻어진 수집품들은 예쁘고 ‘감성적’인 수사를 덕지덕지 발라서 또다른 한줄평으로 수렴하게 된다. 다시말해 수집가들은 점점 더 담론장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목해야 할 젊은 평자를 언급할 때 그들을 고려하지 않았다. 지속 가능한 지면과 담론장을 구축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특권적 독자층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독자의 급을 나누는 시도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지만, 불가피한 선택임을 말하고 싶다. 우리는 영화 텍스트에 집중하고, 영화에 대한 글을 통해서 다른 영화로 독자들을 보내줄 수 있는 젊은 평자들이 듀나와 이동진만큼 인기를 끌고 유명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작금에 구축된 영화비평의 표준형을 무너뜨려야 한다. 영화와 비평담론장에 대한 이야기를 말할 때 유독 ‘우정’이나 ‘사랑’ 같은 관념적이고 로맨틱한 단어로 마무리짓곤 하는 것이야말로 기성 영화평론가들의 패착이다. 그것은 우리의 당위를 오히려 흐리게 만든다. 우리는 좀 더 또렷하고 손에 잡히는 단어로 말해야 한다. 지속 가능성, 매체 간 경계의 붕괴, 독자층의 확장 같은 이야기들로부터 좀 더 나아가야 한다. 이를테면, “우정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업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상징 수집가들과의 파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