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밤 네 친구들은 어디에 있어?”
-LCD Soundssystem, ‹All My Friends›(2007)
여기는 제주도. 모 레지던시에 입주해 있는 작가님과 2시간 남짓 미팅을 하면서 종교적 구원과 성상화 그와 관련될 법한 서사에 대한 이야기를 더듬더듬 더듬거리느라 지쳐 곧장 숙소로 돌아와 고기 국수 시켜먹고 잠들었다. 여전히 입맛이 없었지만 뭐라도 먹어야지. 사실 숙소 건너편 시장을 배회하다 아무 데나 들어가서 특산품 아닌 음식을 먹으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으나… 너무 지쳤다. 그래도 고기 국수(특산품)를 먹었으니 뭐라도 먹고 또 한 것이다. 지척이 바다인데 과연 바다를 갈 기력이 남아있을지. 그러니까 나는 왜 이렇게 쉽게 지치는 건가요. 아멘?
중년의 슬픔을 토로하기엔 아직 젊은 구석이 있다. 92년생… 비평가 누구 씨의 일일… 내가 나의 출생연도를 밝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비록 늙었지만 님들의 짐작과 달리 엄청나게 늙지는 않다는 사실을 주지하기 위해서? 그렇다. 이 모든 건 말도 안 되는 개수작에 불과하다.
미팅 전에 근처 카페에서 마크 피셔의 ‹K-펑크› 1권을 조금 읽었다. 우선 사이먼 레이놀즈의 가슴 절절한 서문. 그는 최소한 ‹레트로 마니아›에서 거의 전지적 문화 비평가처럼 보였는데 하여튼 인간이란 주변 누구의 죽음과 연루됐을 때 한없이 겸허해질 수 밖에 없다. 마크 피셔는 죽었다. 자살했다. 2017년에. 나라는 인간은 2017년에 뭘 하고 있었지? 하여튼 그 당시엔 마크 피셔를 몰랐다. 사실 지금도 잘 모른다. 다만 ‹K-펑크›를 뒤적거리며 마크 피셔가 영국 블로그 하위 문화의 대부까지는 아니더라도 하여튼 공모자 역할에 충실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자본주의… 대안은 없는가… 설사 대안이 없더라도 계속 쓰는 게 중요하다. 왠지 1권은 금방 완독할 수 있을 것 같다. 리시올 출판사시여 남은 2권, 3권, 4권도 화이팅.
사실 나에게 마크 피셔는 영국 블로그 하위 문화의 공모자이기 이전에 디깅러의 표상으로 각인돼 있다. 문제는 그가 생전에 만성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사실이다. 디깅러도 우울할 수 있구나. 펑크를 포함한 (자본주의 연대기와 얽히고 설킨) 온갖 장르적 파생물을 잡식하고 심지어 그게 본인 일상과 거의 불가분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정병의 기미는 스멀스멀 올라오는구나. 물론 여전히 그의 저작인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개인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지점들 투성이다. 예컨데 우울증은 후기 자본주의에 예속된 집단 주체의 무의식이다! 물론 그런 문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마크 피셔 혹은 그의 삶 전반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후기 자본주의보다 포스트 포드주의다. 그 둘이 뭐가 다르냐고 물어보신다면… 마크 피셔의 경우 제주도에 체류 중인 비평가 누구 씨와 다르게 포디즘을 말 그대로 잃어버렸다. 포스트~의 상황은 한 개인을 초과하는 우울증적 상흔이다.
그렇다면 나는 비평가 누구 씨는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잃어 버렸나? 젊음과 체력? 나의 일상 전반을 돌이켜 보건데 노화는 정말이지 가속화될 수 밖에 없다. 가난한 택시 애호가. 그로 인해 도무지 걷지를 않음. 심지어 여기서 바다가 지척인데도… 사실 아무래도 좋다. 최근에 겪은 애도와 상실은 안타깝게도 포스트-젊음의 문제를 기원으로 삼지 않는다. 다만 이제서야 또 다시 동료라는 개념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우리 이게 맞는 거야? 계속 같이 쓰는 거 정말 중요한 거야?
누가 추천해준 다큐멘터리 영화 목록은 역시나 아직 주행하지 않았다. 지금이 아닌 언젠가… 아니면 말고. 그래도 다음 주에 보러 갈 전시 몇 개를 아이폰으로 메모 아니 캡처해뒀다. 나는 갈수록 발전하고 있다. 갈수록 노화해도 발전할 수 있다! 전시 몇 개는 다음과 같다.
1) 김솔이 개인전, YPC SPACE / 2023년 9월 5일 개관
2) 아워위크 / 역시나 9월 5일 개관
3) ‹싸이퍼: 서사와 공진화› / 이미 개관함.
1)의 경우. 일단 김솔이의 작업도 궁금하지만 그의 혼성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작가 정체성이 더 궁금하다. 전시 홍보 문구에 따르자면 그가 자처하는 역할은 “조각가, DJ, 모델, 퍼포머, 밈 콜렉터”를 망라한다. 물론 나는 밈 콜렉터가 되고 싶진 않지만 조각가, DJ, 모델, 퍼포머에게만큼은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다. 이제 나라는 개인 주체의 무의식을 일필 휘지로 그려볼 차례다. 그러니까 저 다중 역할role로 말할 것 같으면 나의 관점에서 뭔가 힙스럽다. 동시대에서 힙이란 무엇인가? 와 같은 질문은 별다른 효용이 없다. 다들 (특히나 X세대 여러분은) 유사 힙스터를 비웃지만 분명 유사 힙스터의 범주로부터 유사 아닌 진짜를 증류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엄습한다. 그 결과 마치 조각을 군중 삼아 디제잉에 몰두하는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장면이 연상되지만 바로 그 장면이야말로 진짜 힙의 정수 아닌가? 나의 무의식은 그렇게 호소한다.
결과적으로 나는 어떤 식으로 교차 검증하든 절대 힙스터가 아닌 것이다. 이건 어떤 비아냥도 섞지 않은 그냥 팩트다. 멀티 플레이어. 디깅러. 무엇보다 “패션과 미술의 경계를 헤집는” 작가의 비경계성 콜라보 방식. 이제 거기서 무빙 이미지의 새로운 원점을 찾아야만 한다. 영화에서 말고. 심지어 내가 지금까지 글에서 셀 수 없이 언급한 김희천도 디깅러가 아닌가? 아닌가…?
2)의 경우. 사실 아워위크ourweek는 처음 들어본다. 이건 무빙 이미지와 상관없는 얘기일 수도 있다. 하여튼 캡처 이미지를 복기하자면 총 4일간 서울 도처에 암약해 있던 콜렉티브 및 아트 플랫폼들이 아워위크에서 헤쳐 모인다. 물론 프리즈 서울을 발단 삼은 미술 주간에서 그런 경우는 비일비재할 수도 있지만 이건 조금 덜 시장 친화적이지 않을까? 참여 리스트에는 YPC SPACE도 포함돼 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1)과 2) 사이의 동형성 내지는 어떤 인과 관계를 찾으려고 나름 분투 중이다. 일단 나의 이목을 끈 것은 행사가 열리는 일주일 간 전시, 퍼포먼스, 다이닝 그리고 파티가 자체적으로 진행된다는 내용이었다. 여러분. 파티가 있는 것이다. 거기서도 누군가가 디제잉을 할까? 이번에는 정말이지 무슨 기관 같은 데서 열리는 전시 오프닝에서 명목상 음악을 트는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존나 조지는 것이다. 프리즈 같은 건 엿이나 먹어라!
이제 무빙 이미지가 비경계성 콜라보 방식을 원점으로 삼는다면 아워위크는 그걸 상연하기 위한 무대가 될 수 있으리라. 반드시 무빙 이미지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겐 무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바이다. 이때의 무대란 우리 말고 나에게 있어선 네트워킹의 공간이다. 진정 내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다. 힙의 정수가 막 역류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건 그냥 힙스터 아닌 채로 노화의 가속도에 휩쓸리는 중인 누구 씨의 무의식을 반영하는 초상에 불과하고.
노트북이 뭔가 버벅거리는 것 같은데 부디 이게 나 혼자만의 착각이기를 바란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정말 대안은 없는가… 마크 피셔가 주장한 적 없는 집단적 우울증 상태는 우울증이라는 개인의 병리를 섣불리 자본주의를 비롯한 체제의 문제로 봉합시킨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체제는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문득 오늘의 작가 미팅에서 나눴던 얘기가 떠오른다. 그는 자꾸만 바이럴 형식으로 자신에게 노출되는 재난 상황에 대해 토로했다. 코로나. 원전 사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기타 등등. 그것들은 분명 재난이기는 한데 얼마나 실제적인가? 정확한 수치로 계산할 수는 없지만 어찌됐든 바이럴 재난은 우리에게 임박한 재난마저 갈수록 둔감하게 만든다. 그리고 노트북이 버벅거리다 갑자기 이 글이 날아간다면 나는 바다 지척에 있는 모 숙소에 고립된 채 재난스러운 번아웃이 올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는 어떤 특정할 수 없는 후기에 이르러 개인을 개인화시키기 위한 시스템을 마침내 완벽하게 세팅했다. 그러나 나의 개인 노트북에 한정했을 때 그것의 기계적 오작동은 자본주의의 음모가 아니다. 물론 나 또한 때로는 프리즈에게 대뜸 엿을 갈기는 심정으로 음모론을 조장하고 싶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을 다름아닌 체제에 예속된 비/존재로서 기념하고 싶지는 않다. 나의 문제는 언제나 나에게로 회귀한다.
얼마 전에 프리즈 서울을 위시한 아트 페어의 시장 친화적 관성에 반응하기 위해 기획된 모 전시 오프닝에 다녀왔다. 그런데 그 전시 또한 유사 아트 페어나 다름 없었다는 다소 서글픈 소식과 별개로 도대체 여기가 어딘지에 대한 위치 감각을 점차 상실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는 북촌 아니 서촌 부근이었나? 어쩌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들락거리는 출입문 근처에 혼자 앉아서 캔맥주를 홀짝거리고 있는지? 이거야말로 제도 비판을 계승한 음모의 소산이 아닐까?
이제 3)의 경우. 역시나 중요한 것은 “서사의 공진화”다. 달리 말하자면 이제 서사는 어떤 개별 작업이 의도한 스토리텔링 효과가 아니라 그런 작업들이 서로 공유하거나 대치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담화로 번성하는 중이다. 무빙 이미지는 망했다. 한때 내가 그렇게 단언한 이유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영상 매체가 서사라는 형식을 어딘가로부터 거의 의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뭔가 단언할 수 없는 직감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딘가는 어디인가? 좌중에서 침묵이 흐르다… 결국 영화의 막이 오른다. 영화적 문법을 통해 조작 변인한 그러므로 언제나 영화일 수 밖에 없는 시네마틱한 서사가 말 그대로 흐른다. 다른 한편 어느새 무빙 이미지라고 불리는 (영상) 작업들은 그냥 영화로부터 계승 내지는 차용한 서사를 뭔가 자유자재로 조작 변인하는 척하지만 그건 사실 무빙 이미지 자체가 공유 자산으로 삼을 만한 문법이 부재하기 때문에 벌어진 소극 한바탕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비경계성 콜라보는 괜한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김솔이는 대체로 조각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고 전부로 소급되지 않는 장르들이 경합하면서 작가의 페르소나를 형성하는 게 아닐지 지금으로선 그렇게 추측한다. 또 다시 나의 직감을 발휘하자면 무빙 이미지는 자신이 페르소나로만 존재하기를 절실하게 바란다. 그에겐 한바탕의 스케일이든 아니든 자신이 벌인 소극을 수습하기 위한 역량이 없고 바로 그 지점에서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과장한다. 나의 직감이 단언하는 바 그는 너무 무책임하다. 그런데 애초에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그가 묘연하다. 혹은 자꾸만 과장하다 보니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무빙 이미지는 망했다.
그래도 떠나요 / 둘이서 / 모든 걸 훌훌 버리고. 나는 제주도에서 이 글을 쓰고 싶었다. 아직 보지도 않은 전시에 관해 주절거리면서. 문제는 지금 이 숙소에 둘은 없고 바다의 잔상조차 아른거리지 않으며 아무도 아무 것도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나에게로 회귀하는 나의 문제가 있다. 포스트-젊음의 상태에 처한 비평가 누구 씨가 혼자서 증류하는 진짜 힙은… 생각해보니 그건 그냥 비행기 좌석에 놓고 내려도 상관없을 것 같다. 그 자리에 남은 처연한 몰골의 힙스터 페르소나는 나중에 어디 파티에서 또 마주치겠지. 안녕하세요. 너 오늘 따라 교차적인 맥락에서 존나 멋져 보이네. 그보다 중요한 건 데이비드 조슬릿의 표현을 스무스하게 고쳐 쓰자면 포스트가 아니라 이후after의 문제다. 그러니까 동료 이후에 재편되는 주변 관계들을 숙고하게 된다.
동료를 모색하기 위해 반드시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하여튼 그게 기저에 깔려있는 어떤 모임이 있다고 가정하자. 아니면 그냥 생각해보자. 우리는 제1원칙에 따라 공사를 엄격하게 구분하면서 영화든 미술이든 뭔가 공통 분모를 찾고 오로지 그것만을 논의해야한다. 문제는 그게 가능한가? 우리가 무슨 집단 주체인가? 누군가의 말대로 오늘 우리는 과장하지 맙시다. 이를테면 우리에게 부과된 주체적인 역량에 대해서. 우리가 여기서 주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내린 우연의 선택들 또한 마찬가지로. 이제 여기에 남은 것은 어쩌다 둘 이상이 모였을 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가늠한 결속과… 어쩌면 그것뿐이다. 포스트~가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에 대한 변용이라면 이후는 반드시 그것이 아닌 무언가를 예감한다. 즉 논의의 외부에서 지속할 수도 있을 무언가.
어느새 오늘이고 빨리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너무 쉽게 지친다. 그러나 내일은 숙소 건너편 시장을 배회하다 맛있는 냄새를 맡고 그 근원지로 들어갈 것이다. 야심찬 계획의 실천. 잘 먹고 푹 자고 뭔가를 까먹다 보면 아직 하고 싶은 말들이 남아있다. 보기로 한 전시도. 사람들도.
“이 그리움은 외로움이다.”
사이먼 레이놀즈는 그런 문장으로 서문을 마무리한다. 이제 애도와 상실은 끝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