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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시우

데굴데굴 패스연습 ᕕ( ᐛ )ᕗᕕ( ᐕ )ᕗ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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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시우

데굴데굴 패스연습 ᕕ( ᐛ )ᕗᕕ( ᐕ )ᕗ (9)

최근의 관심사는 다큐멘터리다. 그렇게 단언하면 만사가 해결될 것 같지만… 정작 다큐멘터리 영화는 단 한 편도 챙겨보지 않았다. 물론 누군가가 추천해준 영화들의 목록을 아이폰에 정성스럽게 메모해두긴 했다. 언젠가 볼 것이다. 언젠가의 내가 네이버 시리즈온에 접속해서 포인트를 소액 결제한 뒤 그것들을 모조리 주행하기 위한 채비를 갖출 것이다. 문제는 왜 네이버에서만 보려고 하는가. 너무 게으르지 않은가. 영상 작업에 대해 쓰기로 했으면 디깅까지는 아니더라도 다큐멘터리 영화든 뭐든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당장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여성영화제나 DMZ 영화제의 현장으로 (물론 아직 DMZ는 개관하지 않았다.) 잠입 취재 하러 떠나야 되지 않나?

잠입이라니. 뭔가 냉전 시대의 거창한 스파이가 된 것 같지만 실상은 이러하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중에서 나의 현재 위상에 가장 적합한 것은 테일러 즉 땜장이다. 땜장이는 뭔가를 계속 메꾼다. 이를테면 어떤 용기에 구멍이 났을 때 그래서 용기가 제구실을 못할 때 스파이 말고 땜장이가 등장한다. 나의 경우 네이버 시리즈온의 부족한 포인트를 메꾼다. 영화에 큰 애착은 없지만 영화제 어딘가의 공석을 관객 1인으로 메꾼다. 처음에는 어떤 용기=무빙 이미지라고 생각했다. 무빙 이미지는 제구실을 못한다. 그건 동시대 영상 작업들을 억지로 포괄하기 위한 너무 커다랗고 그래서 허술한 범주에 불과하다. 구멍이 났다. 구멍으로부터 온갖 화려한 수사들이 줄줄 샌다. 이를테면 영화에 대한 우정, 사랑, 나는 영사기의 빛에 매료됐으며… 어쩌고 저쩌고.

지금 시점에서 용기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구멍이다. 내가 땜장이로서 구멍을 메꾸면 또 다른 구멍이 생긴다. 빛 마니아는 자신의 영화적 원체험을 성스런 빛으로 전시하기 위한 노출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 시네필은 영화를 패티시화한다. 우정? 사랑? 그런 것들은 영화에 대한 이상 성욕을 억제하기 위해 개념적으로 고안된 재현 장치다. 그런 식으로 구멍들을 메꾸다 보면 구멍이 정말 구멍인지 바로 그 구멍은 반드시 구멍이어야만 하는지 결국 나는 구멍론이라 할 수 있을 압도적인 구멍 속에 매몰된 채 테일러 아닌 다른 분들에게 구조 요청을 보낸다. 혹은 테일러 중의 테일러가 나타나 나의 존재를 구멍을 메꿔주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제 가야만 한다. ‹OMG›에 등장하는 악플러처럼.

“가자.”

얼마 전에 무슨 세미나에서 무슨 글을 발제했다. 버틀러 식의 유토피아리즘을 나름대로 반박하기 위해 쓴 글이었으나 사실 그건 상관무일 수도. 그 당시의 나는 그냥 유토피아가 싫었다. 채무 관계로 인한 가난에 실시간으로 허덕이고 있었고 그래서 우울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우울한데 우리 다 함께 현상학적인 차원(!)에서 연루돼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코로나 이후의 ‘가능한 미래’를 모색할 수 있다는 전망은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나와 개개인의 미래는 파산했다. 심지어 그런 파산 상태조차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실감의 부재. 그것은 현상학의 오작동을 의미한다. 현상학? 메를로 퐁티? 도대체 버틀러는 어디에? 정작 파산한 것은 발제의 순간이었다.

이제서야 주변에 착석해 있던 사람들의 수심 어린 얼굴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나의 가난과 그로 인한 절망이 기어코 사실인지 캐묻던 상황도 마찬가지다. 사실 중요한 건 팩트 체크가 아니었음을. 즉 세미나를 위해 대관한 그 자리마저 서로 공유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그 자리를 포괄하는 세계, 행성, 우주 속에 나는 왜 있는지? 갈수록 미시적으로 보이는 ‘나’라는 개인이 우주, 행성, 세계, 그리고 그 자리를 혼자서 수포로 돌릴 수 있는지? 모든 관계는 나보다 훨씬 복잡하다.

랑시에르는 ‹프롤레타리아의 밤›의 한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난은 나태가 노동과 맺는 관계가 아니라 고역을 선택하기의 불가능함으로 정의된다.”

아직 노동이라는 개념조차 성립되지 않은 19세기 공장 노동자들은 노동의 외부에서 미망에 빠질 자격도 그럴 겨를도 없다. 이때의 미망이란 잉여로 소급되는 시간을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한때 누군가의 꿈은 화가이고 시인이었지만 매일 반복되는 격무라고 말하기에도 애석한 최하급 노동 환경 속에선 모든 꿈들이 철저하게 망각된다. 노동 이후 피곤에 절은 몸을 구기는 침대, 그 유일한 밤이 지속하는 동안 임박하는 것은 꿈이 아니라 당장 내일의 기상 알람 뿐이다. 랑시에르가 그들에 대한 정황을 추론하는 이유는 너무 뒤늦게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꿈을 둘러싼 비/노동자들 사이의 관계성이 갈수록 부조리해지는 과정에 편승할 뿐이다.

나는 그런 편승이 다큐멘터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즉 현재로 지연된 혹은 지연되고 있는 시간과 함께 머물기 위한 태도 같은 것. 더불어 그런 시간에 처한 나의 부조리함을 어떤 식으로든 인정하는 것. 이를테면 그날 세미나에서 우리는 각자 체감하고 있는 절망을 캐물으며 토로하느라 그것이 앞으로도 계속 상충될 수 밖에 없음을 기약하지 못했다. 다른 누군가의 절망에 감응할 수 있는 진정성? 최소한 나에게 그것은 타자성에 대한 감각과 무관하다. 설사 감응하더라도 감응의 순간은 손쉽게 휘발된다. 이 모든 건 스크린에 스마트폰 액정 위에 릴스처럼 영사될 뿐이다.

19세기는 막연하고 세미나의 현장은 그보다 조금 가깝다. 그리고 오늘은 점차 멀어진다.

그리고 또 다시 오늘로 돌아왔을 때 지금 내가 있는 여기가 항상 막연하다. 여기에서 치러야 되는 일상은 왜 하필 여기를 발단으로 삼는지 무엇보다 그렇게 지속되는 일상을 따라잡기 위해 분주하거나 사실 그보다 자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나를 캐묻게 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나. 그럴수록 자꾸만 가난해진다. 혹은 이미 가난하기에 자꾸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건가?

다시 랑시에르의 문장으로.

그들의 가난은 노동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럼에도 공장 언저리에 나지막히 고여있는 햇빛으로 낮을 가늠하면서 망치질을 하거나 무언가를 깁는다. 그러나 생시몽주의의 언술과 달리 그들은 낮에 노출된 채 꿈이 아닌 항구적인 명연 현상에 시달리는 타자가 아니다. 그들은 차라리 낮 동안 꿈을 꾼다. 어떤 시적 구원도 바라지 않은 채 다만 여기서 질식하고 있음을 실감하면서 질식이 지연되는 순간들 이를테면 점심 시간, 푸닥거리에 가까운 잠깐의 휴식, 그 찰나에 스스로 경도된다. 노동의 외부는 오로지 노동 안에서 자가 증식한다. 그 과정에서 부르주아를 둘러싼 추문을 비롯해 온갖 부조리한 욕망이 얽히고 설킨다. 시인과 화가 무엇보다 오로지 혁명의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은 그런 욕망에 내던져진 삶을 납득하는 데 실패한다. 심지어 자신을 경제적으로 훼손하면서까지 그들과의 연대에 몰두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관계 구도에선 아무도 결백하지 않다.

내가 유일하게 신뢰하는 것은 연대가 아니라 언제나 연대에 미달하는 상대적인 경험이다. 다시 영화로 비약하자면 나에게 영화는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니다. 어떤 영화가 얼마나 실험적인지의 여부와 무관하게 사실 그런 여부는 이미 (비평 차원의) 가치 판단에 종속돼 있다고 가치 판단하면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의 막이 오르는 장면을 아무렇지 않게 본다. 이는 단순히 관객 1인의 자기 부정에 그치지 않는다. 실감의 부재. 그치. 거기서부터 시작해야지. 나는 누군가에게 뜬금없이 토로했다. 나와 현실 사이엔 뭔가 불투명한 유리가 있는 것 같다고. 그러므로 현실에 온전히 접촉할 수 없다고. 메를로 퐁티 왈. 내가 만진 것은 이미 다른 사람이 만진 것이다. 나의 경우. 내가 만지지 않거나 못한 대상과 어떤 식으로 관계 맺을 것인가? 애초에 그걸 관계라고 할 수 있을지?

유리를 허물자는 주장은 정치적으로 옳지만 그와 별개로 유리는 내가 일상을 수행하기 위한 인터페이스다. 그 사실을 기각한다면 나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유리 너머의 대상은 언제나 불가해하다. 그것과 매개되기 위해선 접촉이 결여된 감각에 의존해야 한다. 즉 유리 너머에 무언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되도록 가능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렇게 시간은 때로 무한하게 지연된다.

어제와 오늘 아침에 박솔뫼의 ‹인터내셔널의 밤›을 다시 읽었다. 인상 깊은 문장 하나.

“어째서 자신을 지우고 누군가에게 의탁하고 싶은지, 그럼에도 거기서 또 눈에 띄고 싶은지, 자신을 몰아세움으로써 얻게 되는 가치에 몰두하게 되는지, 괴롭다는 인식은 어째서 늦게 찾아 오는지.”

이 문장만을 인용하면 뭔가 자기 계발서의 어조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모든 종류의 인용은 그런 느낌을 무릅써야만 하는 운명에 처해있다. 그로 인한 책임감으로 말미암아 조금 더 부연하자. 혹은 생각해보자. 화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은 무엇인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 화자의 역할은 누구와 누구 사이를 오가는 와중에 갈수록 무력해진다. 아무도 자기 이름을 섣불리 누설하지 않으므로 그런 익명성의 관계 속에서 ‘나’는 다른 사람에게 감응하기를 유보한다. 그저 어딘가로 배회하다 마주치고 뭔가 대화를 나누다 헤어진다. 결국 대화는 얘기는 서로에게 허구가 된다. 나조차도 믿지 않는 허구. 그건 현실에 대한 소격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허구를 공유하면서 일부러 장황해진다. 서로 모순된 말들을 말할 수 있는 잉여의 순간을 위해서.

더 이상 미망에 빠져들지 않는다. 인터내셔널은 우리 모두를 결코 평등하게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사실 누군가 재촉하지 않더라도 나는 결국 어디로든 간다. 참고로 아이폰에 메모한 다큐멘터리 영화의 목록을 우선 순위로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임철민, ‹야광› / 어디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음.
2) 김동원, ‹2차 송환› / 네이버 온시리즈
3) 에롤 모리스의 다큐멘터리 / 불법 다운로드 혹은 영자원

기타 등등. 언젠가 주행하는 동안 분명 무언가는 누락된다. 이제 그것에 대해 얘기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