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의 술자리에서 간혹 언급된 실험 영화 감독들의 이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으나 아는 이름들이 없었고 혹시 무슨 무슨 영화 알아요? 봤어요? 나는 최대한 겸손한 말투로 아니요를 되풀이했다. 물론 아무도 그런 나를 깔보지 않았으며… 애초에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지 괜히 비참해지는 동시에 오히려 내가 그들을 깔보는 게 아닌가, 영화는 그것이 실험적이건 말건 그냥 취미일 뿐이라고 님들도 마블 영화를 최소한 한 편 정도는 보지 않았는지 극장에서? 도대체 극장이란 뭘까. 빛과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광학 장치에 열광하는 사람들. 그들은 극장에 착석하지 않은 채 필름 영사기, 프로젝터 뒤편을 서성거리며 스크린에 몰입하고 있는 군중의 기미를 살피고 갑자기 시선을 돌려 그들과 눈을 마주치는 소수의 관객에게 묘한 우정을 느끼고 그렇게 시네필 아닌 ‘빛 마니아’들의 동료 의식이 조성되고 그래서 극장은 스크린을 외면하기 위한 공간인가?
나는 취했다. 어느새 비는 그쳤고 나보다 먼저 출발 지점에 도착한 카카오 택시를 향해 비틀거리며 질주. 다행히도 택시 기사는 전화로 나를 독촉하지도 않고 침착하게 나를 기다려줬다.
2023년 7월 19일.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통장 잔고 확인했는데 세금이 환급됐다. 역시 이대로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경탄하면서 세상에 아니 국세청에게 감사를 표했다. 며칠 뒤에 개막할 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Exis에 택시 타고 갈 수 있다는 사실, 그러니까 집에서 영상자료원까지 공황에 시달리며 절지 않은 채 갈 수 있고 나는 모빌리티의 여유를 만끽할 것이다. 지갑에는 언제나 구겨진 약 봉지들이 들어있다. 처방전에는 필요시 먹으라고 적혀있지만 나의 필요는 제약이 없고 그래서 거의 무한하다. 엑시스도 영상자료원도 처음이다. 영화를 그 중에서도 실험적이라고 공인된 작업들을 보기 위해 극장에 가는 일이 내 남은 인생에서 가능할 줄은 꿈에도 현실에도 그 사이에서 대체로 넋이 나가있는 나조차도 몰랐다. 국내 경쟁으로 묶인 작업들 중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권희수의 ‹에스레베르›(2023)였고 사실 다른 작업들은 아무래도 좋다. 그런데 왜 하필 그 작업인지 165회 닻올림 연주회에서 권희수가 연출한 ‘빛 퍼포먼스’를 봤기 때문에?
모든 게 우습게 느껴지거나 모두를 깔보고 싶은 순간은 냉소주의의 발단인가? 아직도 Exis를 어떻게 발음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엑시스 아니면 엑시즈. 나는 줄곧 엑시스라고 발음했고 앞으로도 그냥 그렇게 하자. 때로는 한국 사람으로 태어난 게 원망스럽다. 최후의 좌석을 겨우 예매하고 극장에 들어서자 생각보다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길래? 이를테면 영화과에 다녔던 스무살 무렵의 나를 기리기 위한 회고전 같은 걸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곧이어 사위가 어두워지고 스크린 위로 엑시스 로고 뜨고 트레일러 나온 뒤에 마침내 국내 경쟁작의 서막이 올랐는데 그제서야 내가 상영 순서를 숙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건 에스레베르 아님, 이것도 아님, 이것도 아닐 것이고 약간의 피로감을 느낄 때 즈음 이거라고 확신했다. 주변 풍경을 응시하는 카메라의 시점이 있다. 그것은 회전하면서 점차 가속도가 붙는데 아까부터 뒷자리에서 영어로 수근거리던 백남들이 또 뭐라고 수근거리기 시작했고 좀 닥치라고 셧더퍽업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나는 소심한 사람이므로 그저 인내할 뿐이고 영상에 집중. 집중. 카메라는 한 자리에 정주한 채 스스로 돈다. 아무도 찍고 있지 않으므로 주변 풍경의 이미지는 오로지 카메라가 실제로 경험했거나 그 경험을 회고하는 장면이다. 카메라가 주체라는 사실이 빙글거린다.
나의 감상은 다음과 같다. 이 작업은 호러인데 이때의 호러는 장르적 문법을 통해 구현되는 게 아니라 카메라라는 주체가 겪는 실존적인 위기에서 비롯한다. 자신에게 (작가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의해) 부과된 회전이 가속할수록 마그네틱 테이프처럼 늘어지는 주변 풍경으로 인해 그것을 응시하고 있다는 감각이 희박해진다. 신체의 소멸. 신체와 매개된 자아의 소멸. 결국 카메라는 자신에게 어떤 지표적 인과관계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유령이 되기를 자처한다. 이하 생략.
언젠가 이 작업에 시놉시스가 필요하다면 줄거리 요약에 가까운 나의 감상을 갖다 붙여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백남들은 여전히 수근거리고 있었고 만약 나에게 권총 아니 카메라가 있다면 그것으로 그들의 머리통을 갈기고 싶었다. 그렇다. 카메라는 무엇보다 하드웨어다. 광학 장치로서의 하드웨어일 수도 의도치 않게 주어진 둔기로 기능할 수도 있지만 ‹에스레베르›에 말 그대로 등장하는 카메라의 경우 그것이 구비한 하드웨어로서의 속성은 카메라가 그저 기계적 몸에 의해 속박된 그럼으로써 작동하는 ‘메커니즘’에 불과하다고 자가 폭로한다. 권희수는 GV에서 이 작업을 통해 “깨어있는 채로 꿈을 꾸는 느낌”을 구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누가 깨어있고 누가 꿈을 꾸는지 나로서는 명료하게 다가왔다. 카메라가 회전을 무릅쓴 채 작동하는 동안 나에게 엄습했던 주체성의 메커니즘은 카메라를 누구로 호명하지만 어차피 그 과정은 모두 착시다.
그날 유일하게 알아들은 이름은 아피찻퐁이다. 나는 한때 아피찻퐁의 열렬한 팬은 아니었고 그냥 2010년대 즈음 실험 영화계의 라이징 스타 정도로 가늠했는데 그것만으로 시네필적인 의무감은 충분히 고무됐기에 ‹엉클 분미›(2010)가 국내 개봉했을 때 극장에서 봤다. 그리고 보다가 잠들었다. 나와 동행했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중간에 무슨 빅풋 같은 크리처가 나왔던 것 같은데 봤어? 그거 영화 포스터에 나오지 않아? 모두 혼란스러웠지만 그 당시에 티켓 값은 지금처럼 상승세를 타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냥 술이나 마시러 갔다. 심지어 술자리에서 아피찻퐁이 어떻고 저렇고 떠들었던 것 같은데 나의 기억과는 달리 스무살 무렵의 나는 영화과에 다니는 시네필이라는 이중고에 처했을 수도. 분명 어디서 읽었는데 출처 모를 어떤 인터뷰에서 아피찻퐁은 관객들이 나의 영화를 보면서 자도 상관없다, 어차피 영화는 가수면 상태에서 꾸는 꿈이다, 뭐 그런 말을 했는데 그 대목을 읽은 순간부터 아피찻퐁이 싫어졌다. 딱히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하여튼.
영화가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다. 음악도 문학도 마찬가지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 1권을 읽던 참이니 그 중 한 대목을 인용하자면,
“우리는 시를 논했다. 아무도 내 시를 읽은 적 없음에도 모두 나를 내장 사실주의의 일원으로 대접했다. 자연 발생적이고 대단한 동료 의식이었다.”
어쩌면 내장 사실주의야말로 근본적인 문제다. 우리의 주인공 가르시아 마데로가 앞으로 어떤 시인으로 성장할 것인지 지금으로선 작가도 나도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고 다만 내장 사실주의가 시가 아닌 시를 논하는 대화 자체에 도취된 모임이라면 그것은 사실상 2023년 서울에 잔존해 있으나 기회가 닿는 데로 극장 안팎에서 우정의 징표를 과시하는 시네필들을 의도치 않게 어쩌면 필연적으로 예언하고 있다. 즉 시네필은 이미 시공간을 초월한 채 상대성 이론에 따라 모든 예술의 국면들에 출몰해서 자신들만의 언어로 수근거리다 상호 간 우정을 확인한 뒤 블랙홀 속으로 홀연히 사라진다. 엑시스 국내 경쟁작 GV에서도 시네필은 순간 무대를 찢었고 (일단 영화 잘 봤습니다. 예컨데…) 정체 모를 백남들의 정체도 시네필에 가까우며 무슨 무슨 영화를 본 그들도 보지 않은 나도 모두 시네필이다. 체념과 한숨. 그러다 총성 울리고 범인은 다름아닌 카메라다.
그런 의미에서 에티엔느-쥘 마레가 활동 사진을 심화하기 위해 1882년에 개발한 크로노포그래피와 기관단총의 시각적 유사성도 필연이다. 그는 여러 종류의 동물을 사격 자세로 찍었고 우리의 경우 우정과 동료 의식을 빙자한 채 서로를 실제로 사격하고 있다는 지극히 사소한 차이를 감안한다면 말이다. 여기서 과연 누가 카메라와 영화와 빛의 이름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반면 권희수의 ‹에스레베르›가 상영되는 동안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던 카메라는 시네필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벗어나 혼자 빙글거리면서 조리개로 누구도 사격하지 않기로 작심한 것 같다. 다만 스스로 소멸하면서 Imangine all the people / Livin’ life in peace를 스크린 너머 극장의 도처에 유포했다. 물론 존 레논의 목소리가 아니라 카메라와 함께 가속하는 모터 소리가 들렸을 뿐이지만.
GV가 끝나고 영상자료원 앞에서 흡연하는 도중 갑자기 재난 사이렌이 울렸다. 설마 극장에서 무슨 일이? 그러나 별다른 사건은 없었고 (전국 각지에 출처 불명의 우편물이 배송되고 있으니 국민 여러분 주의하세요.) 나는 ‹에스레베르›의 뜻을 받들어 택시를 잡아타 집으로 향했다.
“내장 사실주의 전부가 사랑의 편지이고, 달빛 아래 있는 멍청한 새의 광기 어린 잘난 척이고, 뭔가 천박하고 하찮은 일이었을 뿐이다.”
가르시아 마데로가 아닌 누군가의 말인데 나는 아직 그의 정체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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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빛 마니아’들은 어쩌다 빛에 매혹되었나? 그들이 시네필보다 소수라는 사실, 물론 그걸 증명할 만한 객관적인 통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탈진실 시대에서 팩트 체크가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기억하자.) 하여튼 그렇다고 더불어 믿으며 극장 안팎에서 빛을 호소하기 위해 분주하게 합을 맞추는 동작이 있고 마침내 빛의 서막이 오른다. 나는 갑자기 시선을 돌려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들이 아닌 어둠을 복면처럼 뒤집어쓴 군중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소수 중의 소수에서 의도치 않게 배제된 느낌이 가혹하다. 스크린이 있다는 가정 하에 스크린 위로 투사된 이미지는 시종일관 빛으로 흐물거렸다. 마치 풍경landscape에 개입하는 모든 원근법 형식을 거부한 채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스크린조차 빛과 연루된 잔상일 뿐이라고 넌지시 주장하는 듯. 무슨 필름 영사기 같은 장치가 돌아가는 소리 들렸으나 나에겐 여전히 뒤편을 바라볼 용기가 없으므로 계속 스크린에 시선 고정하는데 갑자기 창문 커튼이 열렸다.
창문 너머로 어느새 날이 저문 풍경이 보였고 장치는 계속 돌아갔다. 그 이후 공연이 어떻게 끝났는지 지금으로선 기억이 흐물흐물 흐물거리고 다만 어둠 속 자경단들이 쏟아내는 박수 갈채만이 가득한데 그 중에 누가 복면을 허공에 던졌지?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모든 건 자연 발생적이다. 이건 냉소주의의 발단이 아니라… 그냥 팩트다. 권희수의 ‹현상자들›(2023)에 대한 주관적인 팩트. 최소한 나는 빛에 매혹되지 않았다. 빛과 연루되지도 않았다. 잔상이 아니다.
이건 단순히 작업에 대한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다. 다시 아피찻퐁의 격언에 따라 어차피 영화는 가수면 상태에서 꾸는 꿈이라면 이번 엑시스에서 아피찻퐁 섹션을 초고속으로 매진시킨 잠재적 관객들은 모두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 건가? 영화가 극장에서 미술관에서 초래하는 꿈은 꿈을 지속하기 위한 꿈인가 아니면 언젠가 꿈에서 깨어나기 위한 꿈인가? 문득 지나치게 매끄럽다고 느껴지는 영상 작업들, 이를테면 LCD 화면으로 마감 처리된 더 이상 빛을 호소하지 않거나 못하는 미디어 채널이 생각난다. 스마트폰 상시 휴대의 원칙을 준수하는 우리 대다수는 미디어 채널에 한없이 익숙할 뿐만 아니라 그것과 거의 신체적으로 동기화돼 있는데도 정작 관객으로서 지나친 매끄러움을 발견했을 때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낀다. 그런 경험은 나의 주관적인 팩트에 따르자면 내가 침대에서 기어 나와 여기까지 왔는데도 여전히 갈수록 매끄러워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부정이다. 즉 “깨어있는 채로 꿈을 꾸는 느낌”은 테크노 자본주의에 스스로 복무하기 위해 하루 24시간, 주 7일 내내 광적으로 소비하면서 잠을 포기한 관객에게 주는 일종의 인센티브다.
인센티브를 수용한 채 잠깐이나마 가수면 상태에 빠지기를 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극장은 혹은 극장에 의해 오염된 미술관은 꿈에 대한 원초적인 경험을 매수하기 위한 암시장이자 바로 그 자리에서 꿈의 효과가 얼마나 즉각적인지 가늠하는 중독자들이 득실거리는 소굴이다. 최대한 몽롱한 상태에서 의식 주변부를 배회하는 것. 물론 그 과정에서 스마트폰 촬영은 사절하고 우리에게 남은 여분의 시간 동안 꿈을 초래하는 영화는 실시간으로 체감해야 마땅하다. 지금 이 순간 영화가 사유화한 회색 지대는 ‘무빙 이미지’가 극장을 포함한 온갖 플랫폼으로 확산되면서 계속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공간 위상학적 틈새가 아니라 차라리 관객의 무/의식이 전도된 구간에서 엄습하는 스펙터클이다. 즉 미디어의 각성 기제를 허무는 (실험) 영화의 독자적인 스펙터클. 나를 포함한 시네필들은 차마 그것을 논하지 못한다. 시네필의 관점에서 그것은 언어를 초월했다.
동굴 속에서 속박된 사람들은 사실 그림자를 실체로 믿는 게 아니라 그림자의 필요 조건 이를테면 빛의 메커니즘에 사로잡힌 채 꿈으로 침잠할 뿐이다. 그렇다면 누가 빛을 연출하는가? 이제서야 그 누군가의 정체가 명료해진다. 계속 불을 지피면서 자신이 동굴을 장악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환영의 주인들. 그들은 갈수록 매캐해지는 환영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지킨 채 함께 질식하는 중이다. 우리 모두를 동굴로 내쫓은 외부를 망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꿈 속에서 죽는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 건 아닌데. 그러나 나는 취했고 그래서 모든 게 흐물거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