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만한 주변 사람들은 알겠지만 최근의 나는 여러모로 절망적이다. 그런데… 어쩌라고? 지금 이 글에서 다뤄야할 주제는 내가 아니라 무빙 이미지다. 무빙 이미지인데 무빙 이미지를 도저히 숙고할 겨를이 없는 사태에 처한 채로 나의 생애가 “편년체 사실”로 쪼그라들고 있다. 빚으로 빚을 갚고 그 빚을 또 다른 빚으로 갚고 그러다 보면 나를 포함한 신용 불량 채무자들은 세간의 오해와 달리 오히려 현재를 낙관하게 된다. 이를테면 미래의 내가 어떻게든 채무를 해결하겠지. 아니면 말고. 이는 금융 자본주의에 예속된 ‘주체’가 금융으로 수렴하거나 조만간 그렇게 될 가상 자본의 무게를 시시포스처럼 막중하게 견디지 아니하고 자신이 자신의 미래가 언젠가 언덕에서 굴러 떨어질 것이란 예감을 망각하기 위한 낙관이다. 달리 말해 그런 낙관은 신용 불량 채무자들이 필망에 가까운 운명론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주체화하기 위한 최선의 최후의 전략인 셈이다.
편년체 사실. 그렇다. 나는 무빙 이미지에 관해 쓰기 위해 뜬금없이 오큘로 1호를 뒤적거리다 강정석과 김희천의 작업을 연속체 가설로 묶은 글을 몇 년 만에 정독했고 그 글의 저자는 강덕구이며 강덕구는 최근에 『익사한 남자의 초상』(2023)을 발간했다. 내가 알기로 강덕구 씨와 나의 나이는 연속체를 넘어 거의 동질적인데 여태 그가 발간한 책은 두 권 내가 발간한 책은? 굳이 계산하자면 0.5권 정도 될 텐데 어쩌라고? 어쩔 수 없다. 참고로 오큘로 1호의 발간 년도는 2016년 우리는 그 당시에 만으로 24세였다. 물론 강덕구 씨는 나보다 생일이 한참 빠르지만… 하여튼 중요한 것은 24세의 내가 강덕구의 연속체 가설을 읽고 뭔가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던 나머지 어딘가에 해당 글을 반론하는 듯한 글을 기고했는데 여기에 굳이 링크할 필요는 없고 (부끄럼 많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나의 논지를 뒤늦게 유추하자면 다음과 같다. 강정석의 작업에서 세대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 그러므로 세대=디지털 저화질 이미지의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정말 그런가? 강정석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 친구를 오로지 스마트폰 내장형 카메라로 촬영하기를 반복했고 그 결과물 대다수가 2016년 기준으로 유튜브에 공개됐으며 결국 ‘친구’는 유튜브를 발단 삼은 온갖 링크들의 폐쇄 회로 떠돌면서 저화질로 유포된다. 친구란 모름지기 나와 같은 세대의 일원이고 세대는 디지털 저화질 이미지, 그런데 왜 하필 세대인지 바로 그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채 잉여로 남은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더라? 이 모든 건 어느 날 만취해서 노트북을 스스로 개박살내기 전에 썼던 글들을 백업해두지 않은 나의 원죄다. 그와 별개로 오큘로 1호에 실린 강덕구의 글에 여러 번 밑줄 친 흔적 발견하고 인생이 무상하다 나도 과거에 글이든 뭐든 정독한 적이 있었구나 추억으로 곱씹으며 바야흐로 2023년 어쩌면 “연속체 가설”을 납득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이를테면 “특정한 생물학적 연령대의 개인의 집합은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집단을 조직하는 데 실패했다. 이 담론 안에서 (…) 세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사회적 실패를 반추하는 것뿐이다.” 어느새 나는 미래의 내가 됐고 사회적 실패를 깨우쳤다.
나는 미래에 도달한 채 2016년 즈음의 강정석과 ‘친구’가 될 뻔 했지만 우리에겐 M과 Z 사이만큼의 거리가 있고 물론 나를 Z로 규정하기엔 너무 늙었으나 그와 별개로, 하여튼 시차를 두고 가까스로 마주한 우리가 서로를 이미지 차원에서 왜곡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일단 스마트폰 내장형 카메라는 더 이상 저화질이 아니다. 셀피 찍을 때마다 내 눈가에 선명하게 드리운 다크서클은 그냥 사소한 징후일 뿐 사진첩에 (드디어) 백업된 영상 포함한 이미지들을 열람해보면 4k에 근접하는 고화질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렇다고 저화질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아이폰 유저로서 아이폰을 너무 신뢰하고 있나? 다시 어둡고 축축한 밤이 드리우면 아이폰의 자동 보정 기능에 의해 주변 풍경 나의 얼굴은 다시 픽셀 차원에서 일그러질까? 그럼에도 7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스마트폰 특정적 이미지의 화질은 여러모로 발전했고 심지어 시네마틱하다.
세대는 우리가 의식하건 말건 디지털 고화질 이미지로 변모하고 있다. 한때 히토 슈타이얼이 논의했던 가난한 이미지와 그것에 잠재된 혁명의 가능성 같은 건 자신을 포함한 ‘친구’를 촬영한다는 전제 하에 보다 선명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가난에 의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즉 내가 팔로우하는 인스타 계정들에 국한했을 때 각자의 선명한 가난을 공개적으로 유포하는 계정 혹은 사람은 부재한다. 모두가 화목하고 나 또한 마찬가지다. 설사 ‘가난한 이미지’가 오역이라 한들 무슨 상관인지 노답이고 다만 이제 우리가 스크린 바깥에서 체감하는 가난은 저화질 이미지로 유비된 채 서로 난반사하며 가난 자체가 환영이 됐던 찰나의 순간과 무관하게 실제적인 외상으로 현전함으로써 촬영되지 않거나 그러기를 스스로 거절한다. 되도록이면 앞으로도 계속. 결과적으로 스크린 너머에는 가난한 이미지가 없고 우리는 가난으로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는다. 가난의 초상 혹은 자화상은 정말로 익사했거나 간혹 바이럴 기사에서만 수면 위로 떠오를 뿐이다.
한병철이 셀피를 사이버네틱스 나르시시즘으로 규정했을 때 나는 그것의 배후에 있는 얼굴이 궁금했다. 그러니까 셀피 찍고 있는 각자의 얼굴이. 우리가 업로드하는 셀피나 셀피존에서 촬영한 이미지들 중에서 추려낸 힙스런 이미지들은 고화질로 구현된 생존 신고에 가깝다. 물론 실제로 부유하고 화목한 사람들의 셀피도 있겠지만 그것들이 내가 포함될 세대에 전입할 리는 없고 애초에 셀피만으로 계급의 층위를 구분해 동세대에서 누구 누구를 소외시키는 식의 전략은 세대론의 패착 그 자체다. 세대=디지털 고화질 이미지의 등식에서 중요한 것은 오로지 셀피만이 서로에게 유포된다는 사실 무엇보다 고화질 안팎을 넘나들며 각자의 얼굴을 탈/은폐하는 과정에서 생존이라는 정언 명령에 수반되는 윤리적 책무가 갈수록 희박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생존 신고를 하되 반드시 생존할 필요가 없다. 혹은 생존 신고를 하기 위해 가까스로 생존한다.
“오 친구들이여 친구는 없구나.” 그런 탄식을 동세대에 적용하자면 나와 나의 친구들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친구가 없다. 우리가 간혹 친구의 성공적인 셀피에 주저하다 마음을 누르면서도 친구 자체와 감응할 수 없는 이유는 이제 셀피를 스크린 바깥에서 보기 때문이다. 강덕구의 표현을 고쳐 쓰자면 이 이미지 안에서 세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의) 사회적 실패를 반추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2016년 이전에도 이후에도 M과 Z 사이의 거리를 무릅쓴 채 기어코 세대론으로 묶였으며 세대론이 “가짜-소실점”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오히려 ‘가짜’이므로 그것에 손쉽게 매혹되는 동시에 매혹 당한 자신의 실제적인 위상 즉 스크린 바깥의 현실을 깨우치면서 친구의 죽음을 미리 애도하거나 염원한다. 그리고 자신 또한 어느 카페, 클럽, 파티장 심지어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셀피 찍으며 자신이 죽거나 죽어가기를 바라는 모두에게 생존 신고한다. 이는 가상과 현실이 거울 치료하는 동안 비추는 잔상이 아니라 마침내 거울을 직면함으로써 드러난 나의 얼굴들에 잠재된 죽음 충동이다. 세대가 지속하는 동안 정작 친구들은 계속 죽는다.
얼마 전에 돌곶이역 근처 카페에서 D에게 『리깅』(2017)을 빌렸다. 이왕 처음으로 돌아간 김에 김희천의 작업을 다시 수소문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연선 씨가 쓴 글에서 언급된 윤원화의 문장 일부 “그것을 영화로 만든 것은 작가가 아니라 관객”을 복기하고 싶었기 때문인데 D는 인스타에 올린 나의 호소 그러니까 이런저런 책들은 있는데 정작 『리깅』은 없다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우회적인 권유에 반응해줬던 것이다. 왜 하필 D냐고 물으신다면 D가 자신을 D로 표기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사실 D에 대한 감사로 서두를 떼고 싶었는데 그날 이후 여러모로 절망적이었던 일상 치르고 나니 (어쩌라고?) 지금 당장 절망을 토로하고 싶다는 마음에 굴복한 채 글이 결국 이렇게 됐다. 이제서야 심심찮은 감사를 전하며… 갑자기 윤원화의 문장 일부로 비약하자면 결국 그것의 논지는 김희천의 작업 특히나 바벨 3부작은 영화가 아닐 수도 있는 가능 세계에 속해있다는 것이다. 즉 작중의 ‘주인공’은 스크린 안팎에서 역류하면서 우리의 시점을 매번 혼란스럽게 하고 우리는 그 혼란에 대응해 반드시 객석이 아닌 위치를 점유하거나 최소한 상상할 필요가 있다.
윤원화가 바벨 3부작을 2017년 즈음에 뒤늦게 회수하면서 잉여로 남겨둔 “어디”는 불특정적이고 언제든지 객석을 박차고 일어나 스크린을 둘러싼 수건 돌리기에 참여할 수 있는 주체의 위상을 사실상 표지한다. 특히나 ‹랠리›(2015)는 스크린 너머의 파국 서사에 영화적으로 함몰되는 대신 스크린 돌아 나와 지금은 금기어가 된 커먼센터를 무작정 배회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현전하는 듯한 느낌적인 느낌으로 관객을 비/현실에서 주체화한다. 혹은 비/현실에 가담해야만 우리는 ‘주인공’과 스치듯 만날 수 있다. 스치듯 안녕, 안녕. 문득 주변을 둘러보면 사방에 뚫려있는 “가짜 창문”으로부터 차가운 바람이 엄습하고 관객은 우리는 텅 빈 폐허로 버려진 공간에 처한 채로 소스라친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가짜 창문”을 박차고 현실로 투신한다면? 자유 낙하를 무사히 끝마치고 완전히 죽지 않은 시체로서 바닥 위에 널브러져 나처럼 사회적 패착에 과잉 노출돼 있다면? 딱히 전망할 필요 없었던 또 다른 어디는 어쩌면 스크린 바깥이다. 지금 이 순간 스크린을 돌아 나온 “어디”에서 모두가 부유하고 있지만 그런 비/현실의 감각은 곧 완결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시간이 결렬되며 강덕구의 “연속체 가설”은 김희천에서 강정석 혹은 그 역의 방향을 따라 불가해한 파국 전후에 개인에게 도래할 절망을 예언하고 있다. 물론 절망은 세대라는 “가짜-소실점”을 통해 또 다시 불가해한 파국으로 전경화되고 우리는 각자의 스크린으로 그것을 보거나 듣고 있으며 그 사이에 친구들은 실제로 죽어 나가지만 나 또한 친구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혹은 망각하기 위해 오늘도 셀피를 찍는다. 만약 셀피가 정말로 생존 신고라면 이제서야 그 막연한 시그널을 발산하고 있는 ‘주체’가 다름아닌 나였음을 깨닫는다면 그 순간을 먼 미래 말고 지금 당장 선취할 수 있다면 우리는 파국의 전경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서로 연루될 수 있으리라 낙관하면서 이 글을 무작정 닫을 수는 없다. 모든 어플을 삭제할 수도 없다.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주체로서 (화질과 무관하게) 일그러지고 있는 나의 얼굴이고 나의 얼굴에선 모든 정황이 유실됐으나 사실 그것이야말로 정황 자체이고 사건이자 범인의 몽타주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죽음을 초래하고 있지 않다. 설사 내가 친구의 죽음을 친구가 나의 죽음을 염원한들 이 모든 제의는 죽음의 도달 불가능성에 의지하고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에 의해 매개된 채 바닥 위에서 헐떡이는 시체들이다. 시체에게 죽음으로 호소하는 일은 바로 그 시체를 호명하기 위한 강령술이나 다름없다는 또 다른 사실을 기억하자. 필망에 가까운 운명론을 무릅쓴 채 우리는 어떻게든 살거나 죽을 것이다. 언젠가 내가 죽는다면 스크린 바깥 돌아 나와 여기에서 모두의 죽음을 애도하기를. 그러나 나는 아직 살아있고 당신도 마찬가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