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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시우

데굴데굴 패스연습 ᕕ( ᐛ )ᕗᕕ( ᐕ )ᕗ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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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시우

데굴데굴 패스연습 ᕕ( ᐛ )ᕗᕕ( ᐕ )ᕗ (3)

혼란스러운 시기가 끝나면 그 순간은 비로소 엔딩인가? 이는 영화적인 발상이다. 내가 겪었던 혼란을 통속 서사로 각색하든 몽타주 차원에서 재/구성하든 그 결과물은 이미 영화이고 영화여야만 한다. 정성일이 말한 대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므로. 물론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 세상은 나의 자전적인 픽션이 아니다. 그러나 영화가 시네필을 중심으로 돈다는 사실만큼은 (키노KINO 세대의 당사자성을 고려했을 때) 분명하다. 세상이 영화로 도래하는 미래를 선망하며… 시네필의 자전적인 픽션은 언젠가 영화가 될 것이다. 도처에서 크레딧 오르기 시작한다.

2003년 7월 월간지 키노 폐간. 그 당시에 나는 11살이었고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권은미 옮김(이매진, 2008)

어제는 나와 연선 씨가 주관한 아직 비공개인 모임이 창단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에드워드 카는 동명의 저서에서 자문한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다. 모임의 멤버들 중 누구도 현재와 과거를 대변하지 않았지만 어찌됐든 우리는 마침내 대화하는 쾌거를 이뤘다. 누군가가 대화 와중에 물었다. 물론 이때의 누군가는 에드워드 카가 아니다.

“영화와 영화적인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침묵이 고조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내가 대답했다.

“영화는 영화고 영화적인 것은 나의 작업 기저에 깔려있다.”

무슨 소리? 결국 침묵은 고조됐고 내가 의도했던 선량한 제스처는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우리 모임은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던 적은 없지만, 우리가 ‘무빙 이미지’라는 우주의 너비만큼 종잡을 수 없는 모호한 범주 내지는 개념, 매체, 장르, 사실 미사여구에 가까운 무언가를 탐사하기로 합의한 이상 (물론 차후 합의를 거절할 수도) 어떻게든 각자의 답을 찾아서 서로 공유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다음 회차에서는 그럴 예정이다. 각자가 속해있는 상대적 시간에서 꼬여버린 영상에 관한 쟁점을 2주 후에 만나 발제하기로 기약했다. 문득 2주 후가 도래하기 전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순전히 내가 나의 발제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는 ‹인터스텔라›를 VOD로 봤다. 아무런 답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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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전뇌화될 조짐 보이는 근미래보다 가까운 현재. 나는 H와 복합 원룸 구조로 만들어진 협소한 작업실을 공유 임차했으나 정작 작업실 아닌 집에서 글을 쓴다.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므로 외출할 겨를 없음.) 아빠와 같이 살고 있는데 서로 간에 별다른 갈등은 벌어지지 않고. 지루한 일상이 이어지는 와중에 오로지 글쓰기가 낙이다. 그러나 무슨 글인지 도통 모르겠다. 그냥 지루한 일상을 메모하듯 기록할 뿐. 오늘 기분은 최악이다. 어쩌고 저쩌고… 흡사 틴에이저 필사가의 면모다. 문제는 내가 작업실과 그곳 부근의 복도를 감시할 수 있는 CCTV를 구비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지루한 일상 사이로 CCTV 송출 이미지에 대한 묘사가 간혹 끼어든다. 어느 날 공상하다 실수로 CCTV 송출 이미지를 각색했다. “복도에 H가 아닌 어떤 수상한 남자가 서성인다.” 잠시 후 실제로 복도에 수상한 남자가 서성이고 있다. 우연이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또 다른 수상한 남자를 추가 배정했더니 정말 그렇게 됐다. 잠시 후 H에게 전화 걸려와 불길한 목소리로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는 게 아닌지 작업실 부근이 뭔가 수상하다고 토로한다. 그 순간 확신하는 나의 모습. 내가 쓰는 글이 전뇌화되었다. 평소 가담 중이던 인터넷 커뮤니티에 그 사실을 토로했더니 미친놈 취급 받으나 단 한 사람만이 반응한다. 그의 아이디는 미스 외눈점박이.

꿈에서 깨자마자 이건 ‹레디 플레이어 원›을 능가하는 역작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심지어 스마트폰 확인하니 실제 H에게 걸려온 부재중 전화 2통 발견. 소름. 나야말로 포스트 스필버그다.

그러나 모든 꿈이 그렇듯 순간적으로 들뜬 기분 사라지면 한없이 부질없다. 실제 H에겐 다른 용무가 있었고 여기까지 쓰느라 회신하지 않았으나 언젠가 할 예정이고 내가 호적상 편부 가정인 사실과 별개로 나는 아빠와 같이 살지 않는다. 애초에 전뇌화라는 개념부터 미심쩍다. 설사 나의 뇌 속에 자동기술autofiction이 가능한 전자 칩을 심는다 한들 그 이유만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정성일의 표현을 상기하며) 세상은 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전뇌 글쓰기는 그냥 스마트폰 자동 녹취 기능을 보다 향상시킨 버전에 가깝다. 다만 구술되지 않은 일상마저 속속들이 말이 되는 텍스트로 번안할 뿐. 이렇게 쓰고 보니 생각보다 꽤 효율적인 UI로 기능할 것만 같다. 포스트 애플?

가장 큰 문제는 부질없음의 와중에도 미스 외눈점박이가 마음에 걸린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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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무기한 칩거를 기약했으나 오늘 작업실에 온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내가 꿈에서 깨자마자 떠올렸던 ‹레디 플레이어 원›을 실제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고 그렇다면 왜 하필 그 영화인지 의문이 들었으나 금세 해소됐다. 나는 2023년 7월 5일 기준 거의 다 읽은 김건형 평론집에 수록된 「포스트 한남 문학의 기점과 상상력의 젠더」에서 ‹레디 플레이어 원›의 서사를 짚는 대목에 잠깐 감응했던 것이다. 김건형 평론집을 작업실에 두고 왔다. 글을 계속 쓰기 위해선 바로 그 영화가 아니라 바로 그 대목을 복기할 필요가 있으므로 173번 버스를 타고 여기에 왔다. 에너지 드링크 마시며 테라스에서 담배 피운 뒤 책을 뒤적이던 중 역시나 인상깊은 구절 발견했다.

“남성 주체의 이성애 연애를 계승 받으면 세계가 구원된다.”김건형, 『우리는 사랑을 발명한다』(문학동네, 2023)

때는 2045년.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 세계 속 남루한 인간들은 VR 안경과 인조 수트를 입은 채로 가상과 현실 넘나들고 그 중 하나에 불과한 “노동계급 출신 남성 청년”인 주인공이 대기업에 잠식된 세계를 구원한다. 여기까지가 실제 영화를 보지 않은 내가 축약할 수 있는 바로 그 영화의 서사 전부이며 사실 서사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구원 서사에 다다르기 위한 모험과 여정 그리고 (이성애적) 사랑. 나는 갈수록 더 크게 확장되는 문제에 휩쓸린 채 조난당한다. 그러니까 정말이지 이보다 클 수 없는 문제는 바로 미스 외눈점박이가 시스젠더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아이디가 표명했던 미스는 정말 성별 호칭으로서의 미스Miss였다. 얼마 전의 꿈 속에서 나는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모험과 여정을 하던 와중에 그녀를 만난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다.

나의 정체성. 노동계급 출신 아니고 백인 아니고 아직 청년 남성인 것 같기는 한데 하여튼 이성애자 아님? 마지막 물음표를 직면할 수 없는 나의 정체성은 뭔가 심각하게 날조됐다.



#1. 작업실 테라스 / 늦은 오후

권시우는 수심 어린 표정으로 담배 피우고 있다. 주변은 고요하다.

권시우(V.O.): 왜 하필 미스 외눈점박이인지 나도 모른다. 그녀에겐 실제로 외눈에 점이 있다. 그녀가 웃는다. 그녀는 나와 함께 분투한다. 어느새 내가 쓴 글과 무관하게 자가 증식하는 수상한 남자들을 해치우기 위해 가상과 현실 넘나들며 해커가 되는데 사실 해킹은 아무래도 좋고 언제 서로 포옹하며 키스할 수 있을지가 유일한 관건이다. 지금 꿈에서 깨면 더 이상 포옹도 키스할 수도 없으리라 직감한다. 그래서 꿈을 해킹하기로 결정한 순간 벅차오르며 꿈에서 깼다.

어디선가 소방차 사이렌 소리 들려온다. F.O.



#2.

암전된 화면 위로 맑은 고딕체의 자막이 뜬다.

“이 영화는 멜로 드라마이나 영화는 영화고 영화적인 것은 나의 작업 기저에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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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늘. 꿈은 한없이 부질없지만 만약 그것을 라캉 식으로 정신분석한다면 나를 타자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라캉은 주인공이 (영화 속에서) 스스로 확신하는 자신의 모습 이를테면 작업실 테라스에서 수심 어린 표정으로 담배 피우고 있는 나를 언어적으로 서술하는 과정을 통해 또 다른 내가 재현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런 식으로 재현된 또 다른 나는 픽션인 동시에 픽션을 구성하는 언어로서 실재하며 바로 그 실재가 비추는 왜상이야말로 정신분석의 대상이자 주체다. 무슨 소리? 그러니까 #1.은 현실을 날조한 장면scene에 그치지 않고 장면 안팎에서 나는 주인공일 수도 주인공에 대한 타자일 수도 혹은 두 사람 모두인 채로 동시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때의 동시성을 구현하기 위해 내가 몸소 수행하는 재현의 절차는 순서와 무관하게 이미 개별화된 절차들 속에 나를 속박한다. 나, 나, 나… 지금 시점에서 라캉의 이론이 정체된 이유는 그런 나들을 매개함으로써 정신적 병리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들은 그것들이 끝내 단일 주체로 봉합되지 못할 것이란 자기 예언으로 말미암아 그냥 재현 이전의 혼란스런 나로 회귀한다. 나는 또 다시 주인공 메소드에 몰입한 채 현실에서 결렬된 사랑을 곱씹으며 담배 피우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깨어나고 씬이 전환된다. 암전된 화면 위로 맑은 고딕체의 자막이 뜬다. 사실 나의 작업 기저에 깔려있는 영화적인 것은 영화에 잠재된 허구의 뉘앙스에 가깝다. 뉘앙스는 언젠가 허구를 경유해 영화로 현전할 것이다.

고다르는 ‹사랑의 찬가›(2001)에서 과거를 컬러로 현재를 흑백으로 찍었다. 그 사실은 굳이 실제로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포털 사이트에 게재된 시놉시스에 따라 유추 가능하다. 영화 제목이 마음에 든다. 사랑의 찬가라니. 심지어 나는 시네필을 자처했던 스무살 즈음에 그 영화를 불법 다운로드 받아 실제로 본 것 같기도 하다.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기억 안 나지만. 내용 뿐만 아니라 흑백이니 컬러니 하는 각각의 역사적 시공에 노출된 채 바래진 이미지들이 사랑으로 화합하는 극적 순간이 무엇으로 어떻게 현전하는지도 오리무중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사랑의 찬가’와 누벨바그까지가 나의 영화적 경험을 망라하는 최초이자 최후라는 사실 그러므로 나에게 시네필 정신 같은 건 계승되지 않는다는 또 다른 사실이다. 고다르가 죽었을 때 그냥 죽었구나 했다.

키노 세대에게 암살당할 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고다르가 뭐길래?

“그들에겐 자신들만의 기억이 없지. 그래서 다른 이들의 과거를 사는 거야.”‹사랑의 찬가›에 나오는 대사 중 일부 발췌.

내가 알기로 고다르는 세상을 구원한 적이 없다. 그가 부유한 가정 출신의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가 노년에 접어들수록 영화로 세상을 근심했다는 대목 정도는 숙지하고 있다. 그게 진심이거나 말거나 설사 진심이라고 해도 나에게 그런 진심은 허구에 그친다. 왜냐하면 영화적인 것은 영화적인 것이다. 그와 별개로 영화는 나의 작업이 아니다. 나는 사람들이 영화에서 스타일이나 연출 방식을 구분하듯 글의 방식을 예컨대 읽기, 쓰기, 말하기 방식들을 구별하지 않는다. 다만 글쓰기는 내가 세상 아닌 일상을 지속하는 방식이다. 혹은 일상의 혼란을 일상으로 무릅쓰며 그로 인해 부서진 나들 그 두서 없는 파편들이 배회할 수 있는 여분이다. 바로 그 여분 속에서 나의 일상이 현전한다. 영화가 아닌 채로. 앞으로도 영화에 대한 의무는 없다.



추신) 이 글을 미스 외눈점박이에게 바친다.

추신2) 그녀는 평범한 영웅hero. 여기저기 흩어진 인물, 무수히 많은 보행자다.



2023.07.06

그래서 ‘무빙 이미지’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선생님, 그냥 객관식으로 문제를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