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을 하지 말지어다, 인용을 하면 이 글은 오염될 것이다. 주문을 외우면서.
주문의 효용성은 언제나 의심스럽고 바로 그 언제가 맞닥뜨릴 어디에서 주문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겠지만, 수포로 돌아가므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인용은 그런 식으로 시간을 되감는다. 인용은 내가 눈치를 보면서 루프를 가속하게 만드는 초자아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 사실 언제나 어디로 규정할 수 없는 도처에서 그랬다. 함께 영상에 관해 쓰기로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김희천의 ‹바벨›이었으며, 바야흐로 2015년 해당 작업을 감상하면서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는 사실에 감격했고 주변의 환호성 소리, 밀레니엄 새천년을 몸소 경험하진 않았지만 하여튼 그런 심정으로 지금 이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글을 썼다는 또 다른 사실은 나조차도 믿지 않는다.[편집자 주] 2015년 당시 권시우는 웹진 ‘집단오찬’에 ‹바벨›을 다룬 글을 업로드했다. (클릭하여 보러가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바벨›을 여기에 인용할 수 밖에 없다. 다시 처음으로, 처음부터.
나의 인용은 역량 부족이다. 책을 되도록 마구잡이로 읽으며 어느 문장에도 밑줄 치지 않는 게으른 자여, 당장 아카데미의 세계 밖으로 투신하라는 정언 명령 앞에서 문득 숙연해진 채 시작조차 거른 연구자로서의 삶을 포기했다. 애초에 아무도 시작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지만, 비평가라면 모름지기 석사 정도는 따야되지 않을까요, 허공에 외치다 말다 했던 나날들은 이제 영원히 우리만의 비밀로 부칩시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으니까요. 도대체 김희천이 뭐길래. 그 이름을 곱씹으면서 그와 나눴던 대화를 복기해보면 사실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고, 다만 우리는 ‹바벨› 이후의 전주에서 우연찮게 만나 이른 아침에 산책을 했을 뿐이다. 아마도 나와 마주치기 전에는 러닝을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왜냐하면 그가 VR로 구현한 ‹사랑과 영혼›(2021)의 주무대는 헬스장이고 거기서 누군가는 데드 리프트를 시도하다 실패를 거듭하는데, 그래서 그게 러닝이랑 무슨 상관인지, 하여튼 둘 다 운동이니까… 그러나 전주에서의 산책은 ‹사랑과 영혼› 이전이다.
이 모든 혼란을 무릅쓸 수 있을까? 일전의 미팅에서 연선 씨가 말했듯이 이제 ‹바벨›은 뭔가 내레이션만 남은 느낌이다. 김희천이 건축과 출신이고, 그래서 ‹바벨›의 서사를 건축적인 구조로 독해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에 그럭저럭 수긍했던 순간은 새로운 시대와 더불어 망각의 늪으로 침수됐다. “지금 당장 로그아웃하고 집에 가고 싶다.” 그건 ‹랠리›에서 나오는 대사지만, 어차피 그것도 내레이션의 일부이므로 그냥 ‹바벨›이라고 합시다. 어차피 ‹랠리›는 바벨 3부작의 결말이니까요. 참고로 그 당시에 내레이션은, 오로지 저의 기억에만 의존하자면 모두 스페인어로 구술됐던 것 같은데, 저는 스페인어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그 당시를 객관적으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지금 연선 씨를 까먹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다. 참고로 우리가 서로 당황하지 않은 채로 대화를 나눈 것은 일전의 미팅에서가 처음이다.
그러나 어차피 모든 기억은 주관적이다. 하퍼스 바자가 2017년에 김희천과 진행했던 인터뷰김희천 하퍼스 바자 인터뷰 (클릭하여 보러가기)를 뒤적거리다 “‹씨네 21› ‘젊은 소설가들의 영화 수다’라는 칼럼에서 소설가 정지돈과 이상우가 주목하는 ‘감독’으로 당신을 꼽았다.”라는 대목을 발견했다. 뒤이은 질문. “혹시 영화를 만들 생각도 있는지?” 뒤이은 답변. “전혀 없다.” 무슨 이유인지는 거의 생략되다시피 했지만, 그와 별개로 김희천과 내가 이른 아침 전주 어딘가의 노변을 산책했을 때 그는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의 ‘영화보다 낯선’ 섹션에서 ‹탱크›(2019)를 상영하기 위한 채비 중이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2017년의 인터뷰는 날조됐다면서 분개할 필요는 없다.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상 작업이 모두 영화는 아니다. 어느새 극장은 ‘잔짜 영화’의 관점에서 낯설게 보이는, 그렇다고 짐작되는 영상이 취할 수 있는 여러가지 포맷 중에 하나가 됐다. 물론 여러가지 포맷의 양 극단에는 여전히 극장과 전시장, 전시장과 극장이 놓여있다. 김희천의 작업이 스트리밍될 미래는 아직 우리에게 너무 멀기만 하다.
너무 먼 미래를 여기로 끌어 당기기 위해선 일단 김희천이 어디의 전속 작가고 그가 만든 작업들이 어디 어디에 소장돼 있는지를 파악한 뒤에 그런 식으로 분산돼 있는 자본을 토대로 넷플릭스 본사와 협상해야한다. 넷플릭스 포함 아무도 나서지 않겠지만, 어찌됐든 협상이 타결될 리가 없다는 사실만큼은 자명하다. 바야흐로 스트리밍의 시대, 사실 그 이전부터 영상의 포맷은 갈수록 자유로웠다. 그와 별개로 어떤 영상이 제도의 맥락에서 ‘진짜 작업’으로 승인되는 순간, 그것은 계약 조건에 수반되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 스스로를 감금한다. 또 하나의 참고를 덧붙이자면 2021년 기준으로 ‹탱크›를 소장하고 있는 어디는 백남준아트센터다. 그렇다면 ‹바벨›은 어디에?
‹바벨›이 주문처럼 외웠던 종말은 다름아닌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스마트폰 너머의 공허로 완전히 코를 처박지도 처박기를 그만두지도 못한 채 구천을 떠돌던 불가해해서 사뭇 멍청해 보이는 존재들은 이제 스마트폰의 전능한 인터페이스에 완전 통달하여 가상이고 현실이고 나발이고 모조리 손가락으로 해치우면서 새로운 시대가 오거나 말거나 어쩌면 그것마저 스크롤해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만약 지구에 운석이 떨어지고 있다면 그것 또한 스크롤링. 운석의 이미지가 밈적으로 흥미롭다면 아이폰으로 누끼를 따서 저장함. 아니, 사용자 경험이라니요?[편집자 주] 한동안 권시우는 사용자 경험을 암시하는 영상 작업들에 관한 글들을 썼고, 그 결과로 『유닛의 세계』(2019)를 발간했다. 우리는 차라리 세상 자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종말을 무릅쓰고 인터페이스가 됐다. 아무도 여기에서 영원히 로그아웃할 수 없으며, 애초에 로그아웃을 위한 의지가 없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돌아갈 집을 염원하지 않는다. 마침내 바벨을 클리어한 것이다. 모두가 신의 문을 열어젖혀 각자의 세상에서 신으로 군림하고 있는 가까운 미래를 김희천은 노여워할지, 그 대가는 무엇인지.
우리가 ‹바벨›을 어떤 방식으로든 온전히 기억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이후로 마침내 사용자로서 함께 종말했고 그 사실이 코로나 팬데믹을 발단 삼아 비/현실적으로 유포됐으며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상화된 세상을, 현실을 기어코 굽어살피기 때문이다. 스크롤링. 물론 김희천에게 ‹바벨›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인용한 작업만 해도 몇 개인지. 문제는 그의 작업들이 앞으로도 뭔가 큰 이변이 생기지 않는 이상 계속 여기로 인용될 처지에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용되는 작업은 언제나 텍스트로서 시대착오적일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감수해야만 한다.
기억을 무턱대고 헤집다 보니 나는 한 가지의 사실을 날조했다. 김희천과 전주 이전에 아트선재 근처였던가 하여튼 서울의 도심 어디에서 커피를 마셨던 적이 있다. 개막을 앞둔 개인전과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를 몇 시간 동안 신중하게 떠들었다. 생각보다 티키타카가 잘 된다고 혼자서 만족하며 왠지 모르게 뿌듯했는데, 그 순간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관객들로 분주한 일민의 전시장 어디를 차지하고 있는 ‹바벨› 앞에서 우두커니 앉아있는 내가 보이고 나지막한 음성의 스페인어가 들리고 아직 주변의 환호성은 없으나 나의 마음은 점차 동요하고 저것 좀 보세요, 굳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지 않더라도 이미 만석이고 1인용 소파였나 아니면 그냥 나무 벤치? 사실 관계와 무관하게 왠지 나른한 질감이 느껴지고 우리는 지금 종말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말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가 개막할 예정입니다. 연선 씨는 어디쯤에 계시는지 묻고 싶지만 우리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고 어느새 팬데믹에서 살아남아 ‹바벨›을 둘러싼 채 사담한다.
“Un mundo aplanado como una pantalla.” 반드시 한국어로 번역할 필요는 없으며, 그냥 되는 대로 발음해보면 좋을 듯.
생각보다 너무 많은 인용을 했다. 다시 한 번 우리만의 비밀을 숙고하며, 그런데 인용을 하지 아니하면 이 글과 앞으로 쓰게 될 글들은 영상 이론의 맥락에서 변증법적으로 실패하지 않나요, 제가 너무 억까를 하고 있는지, 아무도 대답이 없고 사실 누구에게 질문한 게 아니라 저만의 주문이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다가 이제는 ‹바벨›을 넘어서 그냥 어디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중.
그러나 데굴데굴은 더 이상 대모험하지 않으며, 다만 우리가 내레이션의 자취를 들이마시기는 했지만 내쉬는 데 실패하면서 뇌의 호흡기가 영상을, 혹은 영상에 대한 기억을 잘게 파편적으로 분지르다 못해 (미세) 먼지로 걸러내 전신으로 퍼뜨리는 과정에 미치지 못해 계속 후퇴한다. 우리가 아니라 오로지 나는 데굴데굴이 뭔가 애잔하게 느껴지지만 그것의 궤적만을 쫓다 보면 나 또한 후퇴하므로 이 글이 시작되기엔 아직 이르다. 이미 시작했으니 어딘가로 가겠지만 그 어디는 자율 주행에 의지하는 막연한 목적지가 아니라 언제나 여기이고 여기에서 쓰기로 하고 흡사 나노 단위로 쿨럭거리면서 몸을 가다듬고 우리는 카페 근처에서 담배를 피웠다는 사실, 여기서 담배 피우시면 안 돼요. 죄송합니다. 다시 영상에 순응하기 위해 매체와 장르 사이를 길항하기엔 몸이 무겁고 영상에도 나름의 기억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거기에 우리도 포함돼 있는지.
김희천과 만나지 않은지 오래됐다. 우리에겐 아무런 친분이 없지만, 조만간 커피 마셔요.
